“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요.”
이벨린의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 속삭임이었다. 이벨린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던 아멜리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희망도 무엇도 없이 까맣게 죽은 눈이 떨리는 속눈썹에 살짝 가려졌다.
“전… 할 말이 없어요. 영애께 들을 말도 없는 것 같고요.”
겨우 밀려 나온 지친 목소리였다. 지금의 아멜리아는 얼어붙은 동토에서 겨우 버티는 새순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안쓰럽고, 애처롭고, 위태로웠다. 이벨린은 아멜리아의 다 닳아빠진 시녀복의 밑단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녀는 품에서 작은 보석이 든 벨벳 주머니를 꺼내 아멜리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애초부터 이럴 때를 염두에 두고 준비해 온 것이었다.
“그러면 이것만 받아 주세요.”
내내 체념한 듯하던 아멜리아의 눈매가 모멸감으로 확 치켜 올라갔다.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힘으로 이벨린을 떠밀듯 밀쳐 냈다. 파르르 떨리는 숨으로 겨우 뱉는 증오는 매서웠다.
“영애의 눈에는 제가 창녀처럼 보이시나요?”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제게 대체 뭘 원하시는 거죠?”
그 시절, 그들은 하나같이 세상에서 동떨어진 존재들이었다. 진작 올렸어야 할 결혼식이 차일피일 미뤄진 채 궁에 박제된 신세였던 엘레나와 가문에서 등 떠밀려 시녀를 자처한 아멜리아와 레베카…. 스물부터 스물넷. 그 4년은 답답한 황궁 생활 중 유일하게 좋은 시절이었다.
이벨린은 아멜리아에게 가깝게 다가섰다. 아멜리아가 흠칫 물러서면, 물러서는 만큼 거리를 좁혔다.
“비밀을 하나 알려드릴게요, 아멜리아.”
점성술과 카드점을 좋아하던 아멜리아, 꽃점을 치던 아멜리아, 고운 웃음을 짓던 아멜리아, 미신을 잘 믿던 아멜리아. 힐다에게 정말 유령을 볼 수 있느냐고 묻고, 네 근처에도 있다는 힐다의 농담에 혼자서 며칠간 잠도 못 자던 아멜리아.
생각하는 족족 하나같이 귀엽고 애틋한 기억들이었다.
“제가 사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봐요.”
진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고, 대놓고 도울 수도 없다면 적당한 날조가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 그녀는 아멜리아의 성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영혼이나, 유령, 뭐 그런 것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게 무슨….”
“영애의 등 뒤에도 보여요. 저와 비슷하게 생기신 분이네요. 인상이 조금 더 차가워 보이긴 하지만….”
“무슨 말, 도 안 되는….”
“발등에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으세요. 흰옷을 입고 계시고, 몸은 멍투성이에, 발목도 불편해 보이네요.”
무엇인지 모를 심상으로 새하얗게 질린 아멜리아가 이내 무너지듯 이벨린의 팔을 붙잡았다. 두려움인지, 애틋함인지, 혹은 원망인지, 슬픔인지. 이내 다 뒤섞여 알아볼 수조차 없는 얼굴이 되었다.
이벨린은 거의 무너지려는 아멜리아의 팔을 마주 안듯 붙잡았다.
“영애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제게 내내 그 말씀을 반복하셨어요.”
“정말, 정말로….”
“제 명예는 지켜 주시리라 믿어요. 어디 가서 이야기한다고 해도, 믿어줄 사람은 없을 테지만요.”
가엾게도 충격받은 채로 그대로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만약 아멜리아가 조금만 침착했다면 좀 더 냉정하게 사실 여부를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린 상태였다.
약혼자와는 강제로 헤어지고, 가문의 상황마저 좋지 않고, 카스트로와는 원치 않는 관계를 이어가고….
그 맹점을 알고도 파고든 것은 미안했지만, 이러지 않고서는 아멜리아의 단단한 방벽을 무너뜨릴 방법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상황이 잘못되어 확대되더라도 질 나쁜 농담으로 수습하고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아멜리아가 순진하게 믿는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좋고….
“그러니 만약 제가 정말로 도울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언제든. 제가 지금 머무는 시모라의 저택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시죠?”
이벨린이 반듯하게 몸을 다시 세우려는 순간, 아멜리아의 손이 절박하게 그녀의 팔을 도로 붙잡았다.
무어라 읊조리는 목소리가 먹먹하게 흘러나왔다. 이벨린이 조금 더 고개를 가깝게 기울였을 때였다. 그녀의 품속에서 아멜리아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없어요.”
“뭐라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
“그분이 죽었을 리가….”
“오래 기다리게 했군.”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벨린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우아하게 절을 했다. 짧은 오수를 즐긴 덕인지, 카스트로는 드물게도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면도를 했고, 앞머리는 말끔하게 포마드를 발라 넘긴 채였다. 강박적으로 가리기 바빴던 흉터는 그 존재조차 잊은 것처럼.
‘실상은 전혀 아니겠지만.’
그는 제 어미와 아비의 혐오를 먹고 자란 탓에 타인의 시선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했다. 그런 카스트로가 이렇듯 대놓고 흉터를 드러내는 목적은 둘 중 하나였다. 하나는 제 잔인한 성미를 드러내고 싶을 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상대로부터 감정적인 동요를 이끌어 내고 싶을 때.
“…….”
그는 귀신같이 저와 비슷한 불행을 지닌 사람을 알아보던 사람이었고, ‘엘레나’는 언제고 제 생이 벅차던 사람이었다.
아비가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접붙어 구차하게 연명해야 하는 목숨. 누굴 동정하거나 혐오할 처지조차 못 되었던 것이 그녀의 평생이었다. 함부로 동정하기엔 저부터가 불쌍했고, 누굴 혐오하기엔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그런 ‘엘레나’의 한결같음에 카스트로가 얼마나 대단한 위안을 얻었을지….
그 열등감으로 절절 끓던 속내를, 우습게도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
이벨린은 한 점의 동요도 없이 깨끗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카스트로의 이마 절반을 뒤덮는 흉터는 과거에도 시도 때도 없이 마주했던 광경이었고, 그나마도 가장 흉측하던 시절에 비하면 이제는 조금 엷어져 역겨움은 덜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담백하면 담백할수록, 카스트로의 집착도 심해질 테니까. 지금처럼.
“…….”
그의 부푼 흉곽이 떨리는 숨을 따라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놀란 듯 둥글어진 녹색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욕심이 치미는 게 보였다.
이윽고 기가 차다는 듯 입매를 비틀고는,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헤집었다. 그러더니 불쑥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전하?”
예상치 못했던 접근이라 하마터면 움츠러들 뻔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순간, 순식간에 끔찍한 기억들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서쪽 탑, 감금, 폭행, 학대…. 그 시절 카스트로가 그녀에게 내밀었던 ‘손’은 다 그런 식이었으니까.
폭력을 애정인 척, 가증스럽게도.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깜박이는 것에도 힘겨운 인내심이 필요했다. 이벨린은 카스트로의 서늘한 손이 제 어깨에 닿는 순간을 가까스로 참았다.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