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다른 것들과는 달라. 제법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것 같군.”
“…….”
“전반적으로 좀 질은 떨어지지만, 어딘지 모르게 내 엘레나를 닮은 것도 같고.”
내 엘레나. 그 말에서 느껴지는 집착적인 소유욕에 등 뒤로 끈적한 소름이 돋았다. 그게 그저 비센테에게서 빼앗은 것에 집착하는 그의 유별난 성미라는 것을 알면서도.
카스트로는 일평생 황후인 어미에게는 차디찬 외면을, 황제인 아비에게서는 의심과 폭언을 들으며 자란 사내였다. 그에게 비센테란 제 비참한 처지를 되새기게 하는 비교 대상이자 열등감의 근원이었고, 심지어 한때는 주군으로 섬겨야 할 대상이었다. 비센테를 마주할 때마다 그 속이, 내심 얼마나 뒤틀렸을지.
그런 비센테에게서 카스트로가 최초로 빼앗아 온 것이 ‘엘레나’였다. 정확히는 카스타야 후작이 빼앗아 그의 손에 장난감마냥 쥐여 준 것에 불과했고, 그건 고작해야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이후로도 비센테가 가졌던 좋은 것들은 줄줄이 카스트로의 것으로 고스란히 넘어갔으니까.
황태자의 지위, 머물던 황궁, 타던 말, 황가에 대대로 전해지던 보검, 하물며 아껴 부리던 시종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빼앗았지만 그중에서도 ‘엘레나’는 카스트로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 것 같긴 했다. 그녀가 말하면 말을 듣는 시늉이라도 하고, 답지 않게도 질투하는 꼴을 자주 자처하기도 했다. 물론, 그 가증스럽던 가면은 그녀가 유폐되는 것과 동시에 아주 벗어 버리긴 했지만.
한때는 카스트로가 저를 사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폭력을, 그런 관계를 사랑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제삼자의 과거를 회상하듯 여상히 생각을 갈무리했다. 떠오른 과거 때문에 그를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가 거북해졌다. 이벨린은 생긋 웃으며 제 머리카락의 끝을 지분거리고 있는 카스트로의 손을 슬쩍 밀어냈다.
“무엇 하나라도 전하의 마음에 드신다니 기뻐요.”
그는 이벨린의 거부에도 기어이 머리카락을 조금 더 지분거리더니,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파가 그의 체중대로 조금 꺼졌다. 카스트로의 눈매가 슬그머니 기울어졌다.
“네 진심이야 믿는다 치고. 비센테를 팔면서까지 얻고 싶은 게 뭐지?”
“전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면 믿으시겠어요?”
“시간이라.”
“오후에 차를 드실 때마다 저를 불러 주셨으면 좋겠어요. 되도록 자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예쁘다고 해 주셨잖아요. 그런 것은 자주 보아야 더 기껍죠.”
그녀의 뻔뻔한 대답에 카스트로가 입매를 뒤틀며 웃었다.
“그리고 너는 내 집무실에 드나드는 귀족들 중 한 명과 눈이 맞을 테고?”
이벨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거야말로 그녀가 바라 마지않는 일이라는 듯이.
“그때쯤이면 제가 전하의 애인이 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겠고요.”
“효율적이네. 제안은 깜찍하고.”
카스트로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이벨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성과도 그녀가 최초로 목표했던 것보다 훨씬 고무적이었다.
카스트로는 보통 오후의 차를 제 집무실에서 즐겼고, 하다못해 두어 번 정도만 초대된다고 해도 문지기들과 안면을 트게 될 터였다. 그러면 그가 없는 시간에도 그를 기다린다는 명분으로 집무실에 드나들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얻어 낼 수 있는 정보의 질은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중요한 서류를 보관하는 금고와 그 열쇠를 보관하는 장소가 바뀌지 않았다는 가정하에서겠지만.’
어쨌든 오늘 이후부터는 메리와 동행할 수 있을 테니, 카스트로가 그녀를 강제하려고 들어도 최소한 사람을 불러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겠고…. 결국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엉성한 추문으로 카스트로의 발목이나 잡으려던 최초의 계획보다는 훨씬 나은 성과였다.
이벨린은 슬쩍 몸을 일으켰다. 정확하게는, 일으키려고 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오늘은 이만….”
그녀가 엉덩이를 조금 떼기 무섭게 카스트로가 이벨린의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그녀의 손목이 꺾이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순간은 얼떨떨했다가 이윽고 익숙한 공포가 밀려들었다.
이벨린은 이 대화를 시작한 이래로 최초로 당황한 기색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냈다.
“무슨, 왜…?”
“영애의 말은 다 이해했어. 제안도 나쁘지 않았고.”
그가 사납게 웃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좆같지?”
그녀는 이런 힘으로 강제되고 난 뒤에 겪을 일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순식간에 정신이 과거로 처박혔다. 도리없이, 속절없이. 수십 번은 다잡았던 마음이 쉽게도 어긋났다. 턱이 덜덜 떨렸다.
“아, 파요, 무슨 말씀을 하시든, 이것 좀 놓고….”
“누가 잡아먹는다 했나? 응?”
“정말이에요. 갑자기 왜, 읏, 이러시는지….”
“아무래도 네가 날 가지고 노는 것만 같단 말이야. 이대로 보내선 수지가 맞지 않지.”
덜덜 떠는 이벨린의 목덜미에 그가 제 고개를 묻었다. 체온을 느끼듯 말랑한 살갗을 잇새로 점점이 짓이겼다. 벌레가 피부를 기어가는 것 같은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윽고 그가 길고 깊은 숨을 내뱉으며 탄식했다.
“아… 이벨린. ‘그것’과 달리 넌… 따듯하군.”
차디찬 동토에 있다가, 따듯한 실내에 들어선 사람처럼. 고작 이런 접촉만으로도 지나치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 위화감에 이벨린은 순간 저항도 잊었다. 게다가 ‘그것’이라고?
불현듯, 끔찍한 생각 하나가 치밀었다. 그녀는 제 몸이 뒤로 젖혀지는 순간에도 필사적으로 카스트로의 양 손목을 붙잡았다.
“사람은, 다, 따듯… 하잖아요.”
“그렇지. 내가 그래서 ‘그것’을 어쩌지도 못하고 있고.”
그가 가소롭다는 듯 바르작거리는 이벨린을 다시금 붙잡아 찍어 눌렀다. 몸이 돌려지고 소파에 고개부터 처박혔다.
“얼굴이 안 보이니까 더 엘레나 같네.”
끔찍하게도 순수한 감탄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벨린은 필사적으로 바르작거렸으나, 그대로 허리가 붙잡혔다.
“제발, 제발…. 전하, 제게 이러, 이러지, 마시고….”
어떻게든 말로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던 아까와 달리, 막상 힘이 닥치니 이보다 더 끔찍한 것이 없었다.
그녀는 울고, 떨면서 빌었다.
“제, 제 가치를, 지켜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마음이 바뀌었어. 네 화대로 에스페다를 지급하지 못할 이유가 새삼 없는 것 같아서.”
카스트로가 픽 웃으며 그녀의 목을 뒤에서부터 짓눌렀다. 무언가를 풀어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뻐해. 넌 이제 에스페다에서 가장 값비싼 창녀가 될 테니까.”
이러지 마시라고 애원을 해 봐도 소용없었다. 그는 완전히 돌아 버린 것 같았다. 루카스가 제때 도착하리라는 희망은 이제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뭐가 없을까, 뭐 하나라도, 이 미치광이를 막을 만한 무언가가….
덜덜 떨리는 정신에 불현듯 마차 안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비센테가 복잡한 표정으로 건넨 새끼손톱만 한 알약.
“신경안정제. 독하고, 약효는 빠르지.”
“이걸, 제게 왜….”
“쓸 일이 없어야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무슨 수를 써서든. 마치 이럴 미래를 예상이라도 한 것만 같았다. 이벨린은 체념한 듯 섬약한 목소리로 흐느꼈다.
“너, 너무 아파요. 뭐든 하셔도 되니까… 이, 이것만 좀 놓아주세요.”
그녀가 헐떡이자 그가 성가시다는 듯 그녀의 왼손을 풀어 주었다. 이벨린은 흘러내린 앞섶을 추스르는 시늉을 하며 가슴골 사이에 숨겨 두었던 알약을 빼내, 포장지째 입에 물었다. 얇은 종잇조각이 입 속에서 흐물거리며 찢겨졌다.
“정말, 하실 거라면… 제 얼굴을 보고, 입부터 맞춰 주세요.”
“…….”
“제가, 처음이라 그래요, 제발, 카스트로….”
이벨린은 그가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초조하게 생각했다. 덜덜 떨면서도 고개를 가누려고 바르작대자, 놀랍게도 그녀의 목을 짓누르던 카스트로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사람들의 구둣발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가로막으며 안 된다고 비명을 내지르는 목소리도….
“안 됩니다! 여기는…!”
시종의 외마디 외침과 동시에 절반만 열려 있던 문이 활짝 젖혀졌다. 비센테였다. 그 뒤에는… 기자들인가? 전시장에서부터 이곳까지 서둘러 뛰어온 모양인지 머리카락부터 옷차림까지 온통 흐트러진 채였다.
파르랗게 타오르는 눈이 카스트로를 한 번, 그 밑에 짓눌려 있는 이벨린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칼에라도 찔린 것처럼 낯빛이 일순 창백해졌다.
“…….”
카스트로는 비센테와 그 뒤의 사람들을 향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고는, 순순히 이벨린을 짓누르던 몸을 일으켰다.
“기자들을 데려왔군.”
“너는 미친 짓을 했고.”
서늘히 짓씹어 뱉은 비센테는 서둘러 방을 가로질러 제 코트를 이벨린에게 벗어 주었다. 뜯어진 드레스 사이로 훤히 드러났던 어깨가 코트에 폭 감싸였다. 비센테는 그대로 이벨린을 붙잡아 일으켰다.
“걸을 수 있겠어?”
“정성이 제법 지극해.”
그 꼴이 저와는 상관없다는 듯 지켜보던 카스트로가 서늘히 이죽거렸다.
“비센테, 네가 정말로 이 계집에게 절절맸다면, 저렇게 기자들을 매달고 올 정신이나 있었을까 싶긴 하다만.”
그녀의 손목을 붙잡는 비센테의 손은 차가웠다. 이벨린이 휘청거리자, 비센테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일으켰다.
“가자.”
“일은 이렇게 된 거야. 그 계집이 먼저 유혹했어.”
“…카스트로. 네가 일방적으로 무도한 짓을 저지른 여자는 시모라의 보호 아래에 있는 황태후 폐하의 손님이다. 그걸 먼저 기억했어야지.”
“저 계집이 제발 먹어 달라고 빌었지. 네게서 제발 구해 달라고.”
서둘러 응접실을 벗어나는 그들의 등에 대고 카스트로가 웃음처럼 외쳤다.
“황태자와 황자를 동시에 가지고 놀다니, 아주 대단한 계집이야. 그렇지 않나?”
***
“전하, 저기….”
“나중에.”
그는 굳은 얼굴로 전시장을 벗어나는 것에만 집중했다.
대뜸 코트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레녹스 영애와 흐트러진 2황자의 모습에 전시장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모조리 그들에게 쏠렸다. 하지만 그는 그 시선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인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비센테에게는 이 장소를 벗어나는 것만이 중요해 보였다. 그들이 누구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조차 생각하지 않고….
전시장의 정문을 빠져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훅 끼쳤다.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있는 오른쪽 정원으로 꺾어 들었다. 불을 훤히 밝혀 둔 왼쪽 미로 정원이 아니라, 말과 마차들이 줄지어 대기 중인 뒷문으로. 전시장에서 멀어질수록 당연히 인적은 드물었다.
“전하.”
이벨린은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그를 불렀다. 늘어선 수십 대의 마차중에서도 랜턴을 걸어 둔 것은 고작 몇 대에 불과했다. 어스름한 빛이 겨우 드는 위치에 이르러서야 그는 이벨린을 놓아주었다.
그림자가 정원의 풀밭 위로 길게 늘어졌다.
“설명해 봐.”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담담했다. 분노도, 증오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아 더욱 선득했다. 어둠이 그의 콧대를 가로질렀다. 얼굴의 절반이 그림자에 묻힌 탓일까? 그가 평소보다 낯설게만 느껴진 것은.
이벨린은 코트 자락을 여미며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무엇을요.”
“너와 내가 오늘 합의한 건, 전시장에서 카스트로와 붙어 있는 모습을 보이라는 거였지.”
“…….”
“카스트로가 네 손등에 입술만 가져다 대도 호들갑스럽게 포장해 댈 기자들이 전시장 안에 포진되어 있었어. 왜 갑자기 자리를 이탈했지?”
“황태자 전하께서 시종을 보내셨어요. 저도 그렇게 으슥한 곳까지 갈 줄 예상하지 못했고요.”
그가 픽 얕은 웃음을 물었다. 그녀의 말은 조금도 믿지 않는 기색으로.
“예상치 못했다고.”
이벨린은 고개를 번뜩 들어올렸다. 그녀 혼자서만 애써 피하고 있던 시선이 그제야 마주쳤다. 카스트로에게 짓눌려 있던 공포가 이제는 희미한 분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루카스가 없는 와중에도 예상보다 잘 해냈고, 혼자서도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 냈다. 비센테는 그녀를 추궁할 게 아니라 더 기뻐해야 옳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요?”
“그럴 필요 없어. 넌 그게 더 좋은 기회라고 여겼을 테니까. 그러니 그렇게 무방비하게 따라갔겠지.”
“…….”
“내가 널 잘못 파악했나?”
“이미 다 아시는 걸 왜 추궁하세요?”
“진작 도망쳤어야지.”
그가 표정 없이 덧붙였다.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짓까지 당할 줄 알고, 그렇게 겁도 없이.”
“루카스가, 당연히, 곧 기자들을 이끌고 들어올 줄 알았어요. 그러기로 되어 있었잖아요. 저는 그걸 믿고….”
“루카스가 널 놓쳤었어.”
그의 눈동자는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호수 같았다.
“이벨린. 루카스가 널 놓쳤었다고. 내가 반데라스와 쓸데없는 잡담이나 나누는 동안 너는 강간당할 뻔했고.”
“…알아요. 제가 잘못했다는 것쯤은.”
그녀는 전투적으로 짓씹어 뱉었다. 만약 비센테가 정말로 그녀의 신변을 걱정했다면 처음부터 제대로 된 호위를 붙였을 것이다. ‘레녹스’는 에스페다에선 별다른 명예가 없었고, 명예 없이는 기사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을 수조차 없었다.
황족이 움직이는 궁 내에 따로 고용한 용병을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문도, 명예도, 국가도, 그 어떤 힘조차도. 그녀를 카스트로로부터 지켜주지 못한다.
그런 사실을 비센테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계획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사들을 그녀의 주변에서 치우고, 카스트로에게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하도록…. 지금은 그 마음이 달라졌을지언정 최초의 쓰임은 분명 그랬으리라.
서운함이나 원망 따위의 주제넘은 감정이 들까 봐 알고도 모른 척하던 것을, 굳이 이렇게까지 아프게 찔러야 했을까? 그녀의 반항적인 눈빛에 그가 억양도 없이 말했다.
“나는 널 찾느라 라구나 성을 반쯤 뒤집어엎었어.”
“제 힘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었어요. 거의 성공할 뻔했고요.”
예전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빠져나간 전적이 있었다. ‘엘레나’로 지내던 시절에. 물론, 그때는 황태자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카스타야’라는 방패가 있기는 했지만….
“네 힘?”
그가 기막히다는 듯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내가 네게 힘을 주지 않았는데, 대체 네가 무슨 수로, 어떻게.”
“…….”
“카스트로에게 뭘 제안했지?”
이벨린은 창백하게 질린 채로 입을 다물었다. 비센테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자, 이내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그의 집무실에 초대해 달라고 했어요.”
“그 대가로 널 팔았고?”
“절 판 게 아니에요. 제 미래의 가능성을 기꺼이 팔았죠.”
“…….”
“처음에 전하가 원하셨던 대로.”
“…….”
“일어나지도 않을 가능성을 팔았다고 전하께서 이렇게까지 제게 화를 내실 줄은 몰랐어요. 의외의 성과이니 칭찬해 주셔도 모자랄….”
그녀가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지극히 창백해 보이는 낯이 한 줄기의 달빛 아래에서 드러났다. 이벨린은 그제야 비센테의 표정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차라리 죽어 가는 사람 같았다.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만 질린 얼굴, 파르르 떨리는 입술.
“네가 전시장에서 사라지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
“처음엔 내가 착각했다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어. 네가 아닐 거라고, 감히, 너여서는 안 된다고. 희망이 치솟을 때마다 그것을 꺾고, 죽이고, 애써 아닐 거라고 부정하고, 짓밟고.”
처연하게 가라앉았던 눈매가 다음 순간 서늘하게 날이 섰다.
“그런데 네 그 빌어먹을 사고방식이, 우연이 아니라면?”
“…….”
“네가 사람이 아니라, 도구라도 되는 것처럼 계산하는 그 행동들이….”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조차 없다는 듯 비센테가 떨리는 눈을 들었다. 기막혀하는 시선이 죄 구겨지고, 뜯어진 드레스를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되짚어 얼굴까지 올라왔다. 끔찍한 악몽을 헤매는 것 같은 눈과 마주쳤다.
“…….”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나서야 그녀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쩌면 비센테는, 카스트로 아래에 짓눌려 있던 그녀를 본 그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숨이, 막혔다.
“너는… 대체 누구지?”
“…….”
“네가 하는 짓이, 점점 더, 빌어먹을….”
그가 잇새를 악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디에도 내려치지 못한 채, 새하얗게 질린 주먹을 이윽고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의 청보랏빛 눈동자에 어린 간절함은 하나뿐이었다. 제발, 너만은 아니어야 한다는 절박한 눈빛이 그대로 읽혔다.
“…….”
이벨린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대체 무슨 말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 그녀가 엘레나라는 것을 밝힌다면 그에겐 더없이 끔찍한 상처로 남을 터였다. 그는 버티지 못하고 끝내 무너질 것이다.
좀처럼 정리되지 않아 시끄러운 소리가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러니 제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할 만한 말이….
“아….”
이어지던 생각이 지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멈췄다. 이벨린은 그대로 허리를 꺾듯이 굽혔다. 그가 서둘러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부축하는 힘이 다소 강했다.
“갑자기 왜 그래?”
“머리가, 아…. 너무, 아파요….”
“뭐?”
“아까, 전하께서 주신… 그 약….”
새하얗게 질려서 더 조각 같아진 비센테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얼핏 비췄다.
“설마 그걸 삼켰어?”
“방금…, 너무 기가 막혀서… 어쩌죠? 목에 걸린 것 같아요.”
“토해.”
“손이, 안 닿아….”
비센테의 팔을 움켜쥐는 손은 창백해서 푸르스름한 핏줄마저 다 보일 지경이었다. 행동을 과장할 필요도 없었다. 연기가 아니었으니까. 지독한 현기증이 일면서 눈앞이 핑핑 돌았다.
입가에 그의 손가락이 닿는 게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자 긴 손가락이 점막의 안쪽을 절박하게 헤집었다.
“토해. 전부.”
“흐읏…. 욱….”
그가 무엇을 어떻게 건드린 순간, 이벨린은 비센테의 손을 뿌리치듯 밀어냈다. 제자리에 주저앉자마자 투명한 액체가 식도를 거슬러 주르륵 쏟아졌다. 몇 번의 헛구역질 끝에 반쯤 녹아들기 시작한 알약이 침과 뒤섞여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코끝이 알싸하다 못해 저릿했다. 이벨린은 몇 번 콜록거리다가 힘겹게 입가를 훔치며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반듯했다.
“으…. 이제, 좀… 낫네요.”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수치심보다는 다른 것이 절박했다.
이제 비센테는 죽어도 그녀가 엘레나라는 것을 몰라야 했다. 만약 언젠가 반드시 밝혀야만 한다고 해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어야만 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 여자가 아니에요. 전하께서 뭘 의심하시는지도 모르겠고 이제는 관심도 없어요.”
“…….”
“저는 처음 계약대로 행동하는 거예요. 제 동생을 지켜 주시는 대가로 저를 ‘이용’할 권리를 전하께 넘겨드렸죠.”
“…….”
“제가 그간 서로 합의한 범위를 넘어 다소 주제넘게 굴었다면 용서하세요. 저는 전하께서 부리는 체스 말에 불과하다는 걸, 그래서 제 의지가 없다는 걸 잊었어요. 아마도 전하께서도 그래서 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신 것 같지만….”
“…….”
“전하의 의심은 제게도 불쾌하고, 그분께도 예의가 아니에요.”
이벨린은 비센테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팽팽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아주 잠시만 방심해도 비센테는 그녀의 거짓을 단숨에 꿰뚫을 것만 같았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 제가 감히, 전하를 마음으로 아껴서….”
사실 어떤 것도 감히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가 다시금 일어서기를 바란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학적인 복수를 꿈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원하는 일을 하기를 바란다고, 이젠 정말 ‘엘레나’를 잊고 행복하기를 무엇보다 바란다고….
그래, 끝까지 저는 이기적인 계집애였다.
‘엘레나’로 인해 비센테가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돌려놓을 작정이었다. 설령, 그게 비센테가 원치 않는 일이라고 해도. 그를 기만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가 다시 미래를 생각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었다.
이벨린의 몸으로 얻게 된 두 번째 삶의 기회는 더는 죽어도 기회일 수가 없었다. 그를 이렇게나 망가뜨리고 나서 쥔 끔찍한 평화라는 것을 안 이상에는.
“…진심이라고.”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비센테의 얼굴이 설핏 일그러졌다. 익사 직전에 간신히 물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그건 차라리 안도에 더 가까웠다.
그러다 깜박 정신이 든 사람처럼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렇지….”
새까맣게 죽었던 눈동자에 엷은 빛이 서서히 번졌다. 죽은 사람처럼 파랗게 질렸던 낯도, 벌벌 떨리던 손도.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제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혹은 누가 서 있는지조차 잊은 듯했다.
“그 애가 날 용서할 리가 없다는 걸… 내가 감히 잊었어.”
한동안 멍하니 이벨린을 바라보던 그가 툭 내뱉었다. 담담하면서도 서글픈 목소리가 손톱처럼 심장을 긁었다.
“그러니 너는 죽어도 그 애일 리가 없는데….”
오갈 곳조차 없이 허공을 배회하던 손이 그제야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전까지는 감히 닿을 생각조차 못 했던 것처럼…. 칭찬하듯 어깨를 도닥이는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그녀의 양쪽 어깨를 움켜쥐고 무너지듯 고개를 숙였다.
“하….”
먹먹한 웃음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밭은 호흡으로 변하더니 끝에는 흐리게 뭉그러졌다. 술에라도 깜박 취한 사람처럼, 벼랑 끝에서 간신히 구출된 사람처럼.
웃는 듯 일그러진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비센테가 문득 입을 열었다.
“넌 아마 평생 모르겠지.”
“…….”
“정말, 너만은…. 너만은 그 애가 아니라서,”
“…….”
“내가 지금 얼마나 안도하는지….”
***
황후의 궁에서 전갈이 온 것은 이른 새벽이었으나, 카스트로가 황후궁에 발을 들인 것은 저녁에 훌쩍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황후궁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팽팽하게 날 선 분위기를 감지한 시종들이며 하녀들은 그를 발견하기 무섭게 고개를 숙이며 물러서기 급급했다.
이윽고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에 선 카스트로가 시종에게 고갯짓을 했다.
“고하라.”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이윽고 안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몇 걸음 앞으로 내딛기 무섭게 무언가가 얼굴로 날아들었다. 날벼락 같은 노성과 함께.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카스트로는 고개만 옆으로 까닥 움직여 날아든 물체를 피했다. 파테르나산 찻잔이 문간에 부딪히며 자잘한 파편이 얼굴로 튀었다. 개중 뾰족한 파편이 그의 뺨에 긴 상흔을 남겼다.
“…….”
우아하고 고풍스러워야 할 방 안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테이블도, 그 위를 아름답게 장식해야 할 화병도, 꽃도, 박박 찢어진 신문들의 잔해도…. 하나같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로 짓밟혔다. 그 방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것은 황후, 가브리엘라뿐이었다.
우아한 금발을 틀어 올린 여자는 이 순간에조차 고상해 보였다. 제 아들을 바라보는 녹색 눈이 왈칵 일그러졌다.
“대체 여태껏 무얼 하다가 이제야 기어 와!”
카스트로는 여유롭게 웃으며 핏방울이 맺힌 뺨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렸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에게 환영 인사가 과격하십니다.”
“환영…. 네가 지금 감히 뻔뻔하게 그딴 소리를 입에 올려?”
황후의 우아한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절반만 부서진 채 나뒹굴고 있던 화병을 쥐려고 허리를 굽혔다.
두려움에 벌벌 떨던 하녀들이 일시에 황후의 발치로 모여들며, 고운 손이 다치시니 제발 그러지 마시라 빌었다. 저마다 뺨에는 붉은 손자국을 하나씩 달고서도.
아주 촌극이 따로 없군.
카스트로가 냉소적으로 코웃음을 치자, 황후의 예민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허! 웃음이 나오느냐?”
“허면, 황후 폐하와 같이 주저앉아서 패악질이라도 할까요?”
“부디, 이 어미가 네게 부디 자중하시라 이른 것이 달포도 지나지 않았다. 제발, 이번만은 주변을 살피고 구설에 오를 만한 일은 하지 마시라, 네게 그리 빌었다.”
“그러셨지요.”
“그런데 그새를 못 참고 또 계집 문제를 일으켜?”
그녀의 분노에도 카스트로는 그저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보는 듯 빙글거렸다. 그 뻔뻔한 낯짝에 가브리엘라가 숨넘어갈 듯 이를 악물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고운 얼굴이 이내 파르르 떨렸다. 그나마의 이성으로 참아 보려던 노성이 기어이 터져 나왔다.
“폐하는 네가 고꾸라지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
“어디 건드릴 계집이 없어서 비센테의 비가 될 계집을 건드려!”
비센테의 비가 될 계집. 카스트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간밤에 비센테가 아니라 제가 목적이라던 또박또박한 음성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멀쩡하던 눈앞이 금세 붉어졌다.
“…그 계집이 그리 지껄입니까? 비센테의 비가 되겠노라고?”
가브리엘라는 기막히다는 듯 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차게 뱉었다.
“정말 몰랐다고?”
“몰랐습니다.”
“하면 이제라도 알게 되었구나. 세간의 모두가 그리 지껄인다. 그 계집이, 2황자의 황자비가 될 예정이라고!”
황후가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진 신문들은 한차례 구겨지긴 했으나 읽기엔 무리가 없었다. 카스트로는 제 발치에 펼쳐진 페이지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바젤, 벨몬테 프렌사, 엘 파베스…. 뒤에 귀족 후원자들을 하나씩 끼고 있는 굴지의 신문사들부터, 저잣거리의 동전 몇 닢짜리 가십지에 이르기까지, 큼직하게 인쇄된 글자들이 지저분한 추문을 토해 내고 있었다.
비운의 2황자, 황태자에게 약혼녀마저 짓밟힌, 황태자의 기이한 성벽, 강간, 강제적인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