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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으로 활짝 열린 방문 너머로 하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옷을 담은 짐가방만 다섯 개가 복도에 차곡차곡 쌓였고, 장신구로 넘어가자면 가방 두 개가 더해졌다.
마차는 벌써부터 아래층에 대기 중이었다.
이벨린은 그 모든 소란이 저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멀리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앞에 놓인 전신 거울 속에는 화려한 사냥복 차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아가씨, 허리는 잘 맞으세요?”
메리의 살가운 물음에 이벨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맛단이 조금 긴 것 같긴 한데… 이대로도 괜찮아.”
“불편하시면 제가 사냥터에 도착하기 전에 손보아 둘게요.”
허리 아래로 떨어지는 치맛단의 주름을 잡던 메리가 대답했다. 이벨린은 거울을 통해 고개 숙인 메리의 유순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애가 카스트로의 첩자인 걸까? 아니면… 정말로 우연일까?’
메리가 첩자가 아니라면 어제 카스트로를 만났다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일 터였다. 그리고 이벨린은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여태껏 굳건히 믿어 왔다.
물론 메리가 첩자라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었다. 어제의 행보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메리가 첩자였다면 카스트로가 어제처럼 애매하게 멈췄을 리 없었으니까. 메리는 적어도 ‘이벨린’이 귀한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리고 카스트로의 성격상 이벨린이 평민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대로 제 마차까지 질질 끌려갔을 터다.
‘메리가 아니라고 해도, 정말 만에 하나 배신자가 근처에 있는 거라면.’
이벨린의 우아한 눈매에 서늘한 기색이 깃들었다. 내키지 않더라도 그녀는 이미 반역에 가담한 자였다.
지나친 온정은 그녀가 아끼는 모든 사람에게 칼날로 돌아오게 되는 법이었다.
‘엔리케에게 부탁해야 할까? 하녀들의 뒤를 한번 캐봐 달라고.’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에, 치맛단의 주름을 다 잡고 한 걸음 떨어진 메리가 곁에 놓여 있던 시계를 확인하곤 부산을 떨었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옷은 이만하면 됐어. 메리, 너도 준비해야지.”
“아직 손보지 못한 옷이 많은걸요. 안 그래도 급작스러운 일정인데, 어젯밤 귀가까지 늦으셔서….”
황태자의 급사가 다녀간 것은 간밤이었다. 사냥제를 앞두고 테네리페의 여름 별장에서 일주일이 휴가를 같이 보내지 않겠냐는 서신이었다.
급작스럽다 못해 저의가 의심될 지경으로 당혹스러웠지만, 거절하기엔 명분이 부족했다.
그녀뿐 아니라 수도에 머무는 모든 대귀족들이 같은 초청을 받았으므로.
덕분에 당초 열흘 뒤로 예정되었던 출발 일정이 하루아침에 앞당겨지게 된 것이다.
‘거기선 대체 또 무슨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지….’
카스트로를 또다시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두통이 지끈 일었다. 이벨린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뒤로 돌았다.
“전하께서는?”
“황자 전하께선 새벽에 먼저 출발하셨어요.”
“새벽에?”
“네. 일어나시자마자 사택으로 돌아가셨는데, 거기서 곧바로 출발하신 것으로 알아요. 이제 이 옷은 됐어요. 다음 옷을 손보면 되겠어요.”
고작해야 하루도 지나지 않은 기억이었다. 어둑한 마차 안에서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비센테는 곧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가 엘레나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이게 다 부질없는 꿈이라고 생각했는지.
그의 정신이 멀쩡해지면 다시 찾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아예 얼굴조차 보지 않으려고 들 줄은 몰랐다. 그는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꿈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리기로 한 걸까. 기억한다면, 그녀의 기만을 용서하지 않을 작정인 걸까? 아니면, 정말 그녀를 엘레나로 착각하고, 아주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을까….
“아가씨.”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하녀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계단을 서둘러 뛰어 올라온 듯 양 뺨이 붉었다. 하녀가 재빨리 무릎을 굽혔다 펴며 말했다.
“무슨 일이니?”
“손님께서 찾아오셨어요. 여름 별장까지 가는 길까지 동행을 여쭈시는데, 어떻게 답변드릴까요?”
이벨린은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친분이 있는 사이에 오스티나토까지 가는 길을 동행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지만, 문제는 이벨린에게 그 정도의 호의를 품고 있는 귀족이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비센테조차 먼저 떠나 버린 마당에, 대체 누가….
“손님? 누구라고 하셨니?”
생각에 잠긴 이벨린을 대신해 메리가 물었다. 하녀가 막 대답하려는 찰나에,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인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감히 앞길을 막을 생각조차 못 하는 것이 언뜻 보였다.
“부리시는 하인들이 하나같이 굼뜨기에 직접 왔어요.”
들어본 적 있는 청아한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바로 어제까지도 들었던.
부채를 탁 덮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문간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하녀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비탈리 영애.”
“혼자는 쓸쓸했는데. 동행할 거죠?”
앙큼하게 치켜 올라간 회색 눈매가 매혹적으로 접혔다.
그렇게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우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더구나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막무가내로 들이닥쳐서는….
이벨린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삼키며 부드럽게 웃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해야겠어요.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거든요.”
“그런가요? 하인들이 짐을 싣고 있던걸요.”
“촉박하게 잡힌 일정이잖아요. 여러 번 확인해야죠.”
“괜찮아요. 응접실에서 기다릴게요.”
마치 제집의 응접실이라도 되는 양, 그곳에 머무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이벨린의 완곡한 거절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태세였다.
“…….”
파르디타의 돌아 버린 정신이야 새삼스럽지 않았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완벽한 귀족 영애처럼 굴던 여자였다. 가문의 명예에 어긋나는 행동은 일절 삼가고, 구설수에 오를 만한 일은 하지 않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법에 맞춰 행동하던 여자.
그게 ‘엘레나’가 알던 파르디타였다. 그녀의 영혼도 한순간에 바뀐 게 아니라면, 지금도 그럴 테고.
그러니 오늘과 같은 행동은 낯설다 못해 지나쳤다. 이벨린은 있는 그대로의 경계심을 솔직하게 내보였다.
“…우리가 이럴 만한 사이던가요?”
“음, 글쎄요. 아직은 아니죠.”
“그런데 왜 제게 이렇게까지 하세요?”
펼쳐 놓은 옷들을 구경하고 있던 파르디타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 올 줄 몰랐다는 것처럼. 곧 파르디타가 흐드러지는 웃음을 물었다.
“정말 아직도 모르겠어요?”
“영애께서 예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건 잘 알겠어요.”
“우리 첫인상이 서로 좋지는 않았죠?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은 아닐 터였다. 실제로 대화는 제대로 이어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파르디타는 교묘하게 피하고 있었으니까.
이벨린이 대답 없이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파르디타가 부채를 펼쳐 입을 가렸다. 비밀을 숨긴 고양이처럼 새치름한 눈매가 매끄럽게 휘어졌다.
“조금 친해져 봐도 좋겠다 싶어서요. 내가 오해를 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진솔한 대화를 통해 서로를 좀 더 이해하면 좋지 않겠어요?”
“의도는 좋지만, 조금 당혹스럽네요.”
“모르죠. 우리의 이해관계가 어쩌면 잘 맞을지도.”
“…….”
“30분 줄 테니 빨리 내려와요. 내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으니까.”
그것으로 용건은 모두 전했다는 듯 파르디타는 재빨리 이벨린을 지나쳤다. 그녀가 곁을 지날 때 얕은 바람마저 일 정도로 빠른 걸음이었다. 이벨린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파르디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제멋대로인 여자였다. 벌써부터 남은 일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옅은 한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