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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벨린은 방문 앞을 굴러가는 트롤리 소리에 잠에서 깼다. 대체 몇 시지? 잠이 도통 오지 않아서 남은 새벽 내내 뒤척이다가, 동이 틀 즈음에 잠깐 눈을 감았었는데….
얼굴을 덮고 있던 시트 속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었던 이벨린은, 얼굴로 쏟아지는 햇빛에 잠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불길하게도 사위가 몹시 밝았다.
하인들을 깨우는 종소리는 울려도 한참 전에 울린 것 같았고, 기울어진 해를 보니 아침 식사 시간도 훌쩍 넘어선 것 같았다. 이벨린은 미끄러지듯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벗어 두었던 옷을 입는 손길이 조급했다.
‘이벨린’이 평생 수도원에서 지내며 근면하게 살아온 게 무색하게도, 그녀는 잠을 이기기가 가장 힘들었다. 그래 봬도 태생 하나는 귀하답시고, 카스타야 영애이던 시절에는 이 시간에 일어난 적이 드물었다. 아예 무도회장에서 밤을 새우고 동트는 것을 봤다면 모를까….
그녀는 다급한 손으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트롤리를 밀고 갔으니 당연하게도 목적지는 오찬실일 터였다. 식사를 차리려는 것일 테니까. 집사일까? 아니면 어젯밤의 그 시종? 일손이 필요했다면 대체 왜 깨우지 않았던 걸까…. 이벨린은 별별 상상 속에서 오찬실의 문을 박차듯 열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던 것은 집사도, 궁의도 아닌 단테였다.
“뭐야? 벌써 일어났어?”
이벨린은 습관처럼 앞치마 속 카드를 꺼내려다가 텅 빈 주머니에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꺼내 놓고, 다시 넣어 두는 걸 깜박 잊었던 것이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단테가 한껏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우리 대위님께 들었지.”
[뭐, 뭐를….]
“에스페다 언어를 할 줄 안다며. 정말이야?”
이벨린은 조금 망설이다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비센테의 부관이었다. 한배를 타기로 한 이상,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라면 차라리 지금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 터였다.
“당분간은 숨겨 주세요. 전하께 상황은 들으셨겠지만요.”
“와!”
그는 감탄 반, 충격 반이 섞인 얼굴로 탄성을 내뱉었다.
“심지어 잘하잖아….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지.”
이벨린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귀신이라도 본 듯 잘게 떨렸다. 분명 간밤에 일어난 일을 모조리 공유받았을 텐데도, 그녀가 에스페다의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것에 가장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난 진짜, 그것도 모르고….”
배신감인지, 충격인지 물잔을 붙잡은 채로 부들부들 떠는 모습은 퍽 가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 커다란 덩치를 가련해 보인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이벨린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됐어. 적당히 구색만 맞춰도 돼.”
“하지만 전하께 올릴 것인데요.”
“신경 쓸 것 없어. 너 없을 땐 나랑 루카스가 번갈아 가면서 하기도 했고….”
신경 쓸 것 없다고는 했지만, 식사 예법은 모조리 무시한 상차림에 못내 시선이 갔다. 이벨린은 손을 뻗어 포크와 나이프를 예법대로 정돈했다. 내가 하겠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실랑이가 가볍게 이어지던 찰나였다.
“아아악!”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아래층이었고, 분명하진 않지만 하녀들이 머무는 방 쪽에서 들려온 소리 같았다. 이벨린과 단테는 얼어붙은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들었어?”
“들었어요.”
이벨린은 가슴 앞에서 꼰 손으로 덜덜 떨리는 팔을 붙잡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이유 모를 불길함이 스멀스멀 차가운 손길을 뻗어 왔다. 그녀는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좀처럼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일까요?”
“글쎄…. 아래층이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잠시 바깥의 동태에 귀를 기울이던 단테가, 단호하게도 말을 덧붙였다.
“넌 여기서 기다려. 내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올 테니까.”
그는 이벨린을 흘긋 바라보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문은 바깥에서 잠그고 갈 거야. 네 안전 때문이니까 불안해 말고.”
“하지만 그러면 전하께서 들어오실 때 불편하실 텐데요.”
“대위님은 오늘은 오지 않으셔.”
“그게 무슨….”
“그러니까 식사 준비는 일단 놔두고, 배고파도 음식에 손대지 말고, 창문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 알겠지?”
“…….”
“네가 다치면 내가 우리 대위님께 혼나거든.”
묘한 박력에 밀리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씩 웃고는 방문을 닫았다. 이벨린은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초조하게 방을 오갔다. 대체 무슨 일일까? 궁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대개 태도가 얌전하고 조심스러운 법이었다. 없는 듯 존재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비명을 지를 만한 일이라면…. 상황을 모르니 상상은 계속해서 끔찍한 쪽으로 달려 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에 흠칫 놀라는 사이에, 노크도 없이 잠겼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사이로 쑥 들어온 것은 해쓱하게 얼굴이 질린 단테였다.
“무슨 일이었어요?”
이벨린의 재촉에도 그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끔찍한 것을 본 듯 하얗게 질린 얼굴을 몇 차례 마른 손으로 쓸어내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녀 하나가 죽었어. 시체 상태를 보아하니, 몇 시간은 된 것 같아.”
“하, 하녀요? 어쩌다가요?”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없고, 방문도 잠겨 있었어. 저항의 흔적도 없고.”
“…….”
“그러니 자살이겠지. 그렇게 끔찍한 자살은 처음 보긴 했지만….”
단테는 제가 말하면서도 못내 찝찝해하는 기색이었다. 하녀의 죽음. 그제야 이벨린은 제가 내내 불안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지난밤, 시종이 분명히 마리아를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말했었다. 지난밤 워낙 많은 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벨린은 얼어붙은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혹시 죽은 하녀 이름이… 마리아인가요?”
“…뭐야? 어떻게 알았어?”
정말이지, 잊을 게, 따로 있지…. 이벨린은 손톱이 손바닥을 아프게 누를 정도로 꽉 쥐었다. 목에 칼날이 들어와도 좋은 관계였다고는 말할 순 없겠지만, 제 고발에 누군가의 목숨이 끝났다는 게 끔찍했다.
기껏해야 그 발로 궁을 나서게 하거나, 더는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위치로 전락하겠거니 싶었는데.
‘정말?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위선적인 죄책감에 신물이 속에서 치받았다. 눈앞이 현기증으로 핑 돌았다. 이벨린은 울대를 부여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뭐야, 왜 그래? 어디 아파?”
“잠시, 잠시만….”
휘청거리는 이벨린의 팔을 단테가 곧장 붙잡아 부축했다.
“전하를, 뵈어야겠어요.”
“그건… 안 돼.”
“안 된다니….”
“당분간은 어려울 거야. 전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하셨거든.”
그 말에 이벨린은 어렴풋이 비센테가 이미 폰페라다 궁에 없다는 것을 짐작했다. 황자의 침실까지 들이닥치고도 마땅한 증거도 못 잡았던 경비대는 한동안 몸을 사릴 테고, 그가 무언가를 몰래 꾸민다면 움직이기에 이만한 적기도 없을 터였다.
“그럼 언제쯤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아무리 빨라도 닷새는 지나야 될걸. 왜 그래?”
“죽은 하녀, 자살이 아니에요.”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전하를 꼭 뵈어야 해요. 제발 말씀 좀 전해 주세요.”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니까….”
단테가 뒤통수를 긁으며 머쓱하게 말했다. 비센테를 만나는 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그와 만날 수는 있는 것인지조차 장담하기 어렵다는 투였다. 그러나 이벨린은 정확히 일주일 뒤에 비센테와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그의 집무실이나 응접실이 아닌, 그녀의 침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