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찰스턴항에서 출발한 배가 에스페다의 시드론 항구에 정박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열흘. 거기서부터 2황자가 유폐된 폰페라다의 궁까지는 마차를 타고 꼬박 닷새가 더 걸렸다.
“…주의하렴. 폰페라다 궁에 들어가는 즉시 너도 유폐자의 신분으로 전락한 것이나 다름없게 돼. 외부 출입은 물론이고, 편지를 보내는 것조차 감시받고 제한될 거란다. 그 안에서 마리아를 찾아. 그 애가 널 도울 거야.”
이벨린은 며칠 동안 외우도록 읽은 귀부인의 편지를 조각 내 작은 그릇에 담아 태웠다. 한동안 가열차게 달리던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가고 있었다. 곧 목적지에 도착할 모양이었다.
북쪽에 가까워질수록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점점 더 황량해졌다. 얼어붙은 토양과 누런 풀들, 간혹 보이는 상록수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땅. 그 인상은 폰페라다 궁을 마주했을 때 정점에 달했다.
족히 수 세기는 방치된 것처럼 보이는 회색빛 성, 그보다 더 흐린 하늘, 벽면을 타고 말라붙은 덩굴 식물들과 온통 껍질이 벗겨진 상록수 정원. 성의 가장자리는 드높은 흑색 철창으로 막혀 있고, 황제의 기사들이 삼중으로 엄중한 경계를 선다.
보호가 아닌 명백한 감시. 이런 걸 두고 감히 ‘살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벨린은 짐가방을 단단히 움켜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 창가에선가 희미하게 비치던 불빛마저 사라지자, 궁은 완전히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이벨린 베네딕트 양?]
철창의 너머에서 하녀복을 입은 여자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네?]
그녀가 얼떨결에 되묻자, 여자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여자가 빠른 브리타냐어로 다시금 물었다.
[맞죠? 오늘 오기로 한 사람. 아닌가요?]
[맞아요.]
여자가 문을 지키고 선 기사에게 무엇인가 말하는 게 보였다. 이윽고 굳건히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너머에서 여자가 손짓했다.
[따라와요. 시종장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폰페라다 궁은 수 세기 전만 해도 황제의 겨울 별궁이었으나,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내부는 삭막했다. 먼지 쌓인 복도, 색이 바랜 초상화들, 간혹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흰 천이 덮인 가구들.
조금만 손본다면 훨씬 괜찮은 환경이 될 테지만, 유폐된 황족에게 허락된 시종들만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방치된 공간들이 자아내는 으스스함은, 도무지 이곳이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이 아니라는 감상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마치, 지금 앉아 있는 이 거대한 방처럼.
이벨린은 시종장이 서류를 읽는 동안, 앉은 채로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과장 좀 보태자면 수도원의 뒤뜰만 한 큰 공간에, 있는 가구라고는 책상과 의자 몇 개가 전부였다. 황족이 머무는 궁이라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종교적인 공간에 가까워 보였다.
[이벨린 베네딕트.]
[네.]
그녀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가 제출한 서류들을 모조리 읽었는지, 바짝 올려 썼던 안경이 코끝에 느슨하게 걸쳐져 있었다. 그 너머로 날카롭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서류는 괜찮군. 신원도 결격 사유 없이 완벽해.]
서류상 ‘이벨린 베네딕트’는 흠 한 점 없는 브리타냐인이었다. 돌아가셨다곤 하지만 양친에 이어 조부모에 이르기까지 에스페다의 핏줄이 섞인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개인으로서는 사소한 출국 기록까지 없었다. 그녀가 다섯 살 이후로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만 지냈다는 사실은, 수녀들이 한목소리로 보증했다.
[추천서도 제법이고.]
차곡차곡 쌓인 서류 위로 시종장이 마지막까지 들고 있던 편지가 올려졌다. 에스페다에서 직물 사업을 크게 하는 상인의 추천서는 귀부인이 준비해 준 것이었다.
[에스페다에는 언제 넘어왔지?]
[닷새 전에 시드론 항구에 도착했어요.]
[제국어를 아예 모르니, 찾아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벨린은 가방을 뒤적여 작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폰페라다 궁의 이름과 주소를 에스페다어로 적은 부분을 펼쳐 보였다.
[수녀님 중 한 분께서 에스페다어를 조금 하셔서 대신 써 주셨어요.]
[에스페다어를 할 줄 아는 수녀님이 계셨다고?]
[네. 조금….]
“일어서 봐.”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이벨린은 가까스로 멈춰 섰다. 제국어였다. 놀라서 뻣뻣하게 굳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물 흐르듯 이어지던 브리타냐어 때문에 방심할 뻔했다. 이벨린은 능숙하게 당황을 감췄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시종장의 입가에 설핏 웃음이 어렸다. 그 표정은 제법이라는 칭찬 같기도 했고, 이 맹랑한 것 좀 보라는 질책 같기도 했다.
[제국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나?]
[네. 조금도요.]
[수도원에서 교양으로 몇 마디는 가르칠 텐데.]
[라흐트어로 된 기도문을 몇 개 외우기는 했지만, 제국어는 모릅니다.]
이제 시종장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벨린은 무례해 보이지 않는 선에서 그를 마주 보았다. 시선을 피하면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똑바로 보면 하녀 주제에 건방지게 보일 것이었다.
소개장과 신원 확인서까지 들고 오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온전히 시종장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시종장이 거절하는 순간 즉시 브리타냐행 배에 올라야 한다는 소리였다. 짧은 관찰 후에 마침내 시종장이 미소 지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이벨린이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는 사이 시종장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은 종을 울렸다. 곧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하녀복을 입은 희미한 인상의 여자가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서관으로 보낼 아이다. 방을 안내해 주고, 일이 익숙해질 때까진 살펴 줘라.”
“알겠습니다.”
“그럼 둘 다 이만 나가 봐.”
이벨린은 당혹한 얼굴로 시종장과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그제야 시종장은 천연덕스럽게도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가 제국어를 모른다는 것을 그만 깜박 잊어버렸다는 듯.
[저 애를 따라가 봐. 네가 지낼 곳을 보여 줄 거다.]
[…감사합니다.]
이벨린은 무릎에 올려 두었던 가죽 가방을 꼭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장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제대로 해냈을까? 곳곳에 도사린 함정을 모조리 피해 냈다고 자신하기 어려웠다. 시종장의 매서운 눈은 여전히 그녀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여자가 재촉하듯 이벨린의 팔을 살짝 끌어당겼다. 이벨린은 시종장에게 꾸벅 인사하고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몇 개의 계단과 회랑을 가로질러 목문이 즐비하게 늘어진 복도에 도착했다.
“라켈, 라켈! 잠시만.”
모퉁이를 돌자마자 빨래 바구니를 든 하녀가 허둥지둥 그들을 쫓아왔다. 그들이 뒤로 돌아서자, 쫓아온 하녀는 흠칫 놀랐다가 붙임성 좋게 인사했다. 막상 새로운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용건은 홀랑 잊어버린 눈치였다.
“아! 네가 이번에 새로 온다던 하녀인가 보구나?”
라켈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소용없어. 제국어는 아예 모르는 것 같더라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면 의사소통은 어떻게 해?”
“글쎄. 시종장께서 뽑으셨으니, 그분께서 방법을 마련해 주시겠지. 마침 방을 안내해 주라고 하셔서 숙소로 가던 참이야.”
순식간에 못마땅해진 시선이 이벨린을 아래위로 훑었다.
“대체 시종장께선 어쩌자고…. 아 참, 라켈. 하녀장께서 널 찾고 계셔.”
“지금? 급히 찾으시니?”
“응. 지난주 출납 장부 문제인 것 같던데.”
“맙소사. 내가 뭘 실수했나 봐. 어쩌지? 당장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라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자, 빨래 바구니를 든 하녀가 너그럽게도 제안했다.
“바쁘면 가 봐. 그 애는 내가 맡을 테니까. 복도 끝에 새로 치운 그 방이지?”
“…그래도 괜찮겠어?”
“물론이야. 어서 가 봐.”
“고마워. 내일 아침 조회까지만 좀 부탁할게.”
라켈은 허둥지둥 열쇠를 하녀에게 건네곤 바쁘게 왔던 길로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에, 하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순식간에 가까이에 있는 창고로 이벨린을 밀어 넣었다.
[무슨….]
미처 말을 맺기도 전에 입이 틀어막았다. 그대로 문이 닫혔다. 당황해서 몸부림을 치자 하녀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쉿! 놀라지 말아요. 당신이 이벨린이죠?”
그녀가 제국어를 알아들으리라고 확신하는 태도였다. 그제야 이벨린은 하녀의 정체를 눈치챘다. 폰페라다 성에서 찾으라던 ‘마리아’가 바로 이 하녀인 모양이었다. 머뭇거리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하녀의 표정이 우호적으로 누그러들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이제 놓아줄 테니까 소리 지르지 말아요. 알겠어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는 순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벨린은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그 사람인가요?]
“난 제국어 말고는 한마디도 못 해요. 내 이름은 마리아예요. 당신, 부인이 보냈죠?”
저 입으로 직접 마리아라는 고백을 듣고 나자 경계는 무의미했다. 이벨린은 순순히 제국어로 대답했다.
“맞아요.”
“앞으로는 나를 통해서 부인과 연락하게 될 거예요. 일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곧장 나한테 이야기해요. 뭐라도 보고할 만한 걸 발견해도요.”
“알겠어요.”
순순한 대답에도 마리아는 영 못 미덥다는 시선을 보냈다.
“…체력이 좀 약해 보이는데. 전에도 하녀 일을 해 본 적 있어요?”
“아뇨. 하지만 수도원에서 지낼 때 허드렛일 정도는 도왔어요.”
“그거면 충분해요. 앞으로는 매주 토요일 저녁 7시에 이 창고에서 만나기로 해요.”
“달리 보고할 게 없어도 말인가요?”
마리아는 그 질문이 성가시다는 양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 더.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제국어만 사용해요. 그러니까 누군가 말을 걸면, 일단 알아듣지 못하는 척해요.”
“조언 고마워요.”
“이제 팔 좀 들어 봐요.”
“팔이요?”
얼떨결에 팔을 들자 어디선가 줄자가 나타났다. 마리아는 이벨린의 팔과 어깨, 가슴둘레와 허리를 차례로 쟀다. 수첩에 차곡차곡 숫자를 정리한 여자가 손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옷이 완성될 때까진 일주일은 걸릴 거예요. 그전까지는 내가 옛날에 입던 하녀복을 줄 테니까 그걸 입어요. 그리고 이거, 받아요.”
무심코 내민 손에 섬뜩한 무언가가 닿았다. 여자가 건넨 것은 칼이었다. 가죽으로 된 칼집 밖으로 날붙이의 끄트머리가 나와 있었고, 허벅지에 찰 수 있도록 가죽끈까지 섬세하게 달려 있었다. 이벨린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이건… 무슨 의미죠?”
“필요할지도 모르니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요. 꼭이요.”
“…….”
“하나 충고하자면, 혼란스러울 땐 돈에 충성해요. 덕분에 동생 약값도 댈 수 있게 됐잖아요. 당신이 좋은 언니란 것 잊지 말아요.”
처음 보는 여자가 줄줄이 제 사정을 꿰고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 불쾌한 일이었다. 게다가 좋은 언니라니. 코라는 인질인 자신의 처지를 모르기나 하면 족했다. 이벨린은 뒤틀린 속내를 애써 감추며 마주 웃었다.
“고마워요. 늘 명심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