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51)

“발머 씨. 맡기신 원고를 가져왔어요.”

“아, 수고했어. 번역 대금은 바로 지급하지. 그런데….”

“말씀하세요.”

“이벨린, 널 찾는 분이 계셔.”

낡은 가죽 가방에서 주섬주섬 원고를 꺼내던 손이 멎었다. 이벨린은 그제야 허름한 인쇄소 안에 감돌고 있는 미묘한 위화감을 눈치챘다.

언제나 닫혀 있던 사장실의 문이 절반쯤 열려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웬 귀부인이 단정하게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

제본소의 사장인 발머 씨는 자기 보신에나 재능이 있는 남자였고, 돈이든 생명이든 제게 위협이 된다면 자식까지도 팔아넘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고아에다가 마땅한 뒷배조차 없는 번역가 따위야….

이벨린의 둥근 눈에 비난하는 기색이 드리우자, 발머 씨는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추며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본다고 해도 난들 어쩌겠느냐.”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이벨린이 미약하게 항변했다.

“제 정보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 것. 처음 거래할 때 제가 말씀드렸던 조건은 그것 하나뿐이었어요.”

“안다. 하지만 저렇게 높은 분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

“이벨린, 듣자 하니 네게도 아주 좋은 기회야. 한번 말이라도 나눠 봐.”

제멋대로 합리화까지 마친 발머 씨는 이벨린의 팔을 붙잡았다.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기사들이 입구를 단단히 봉쇄하는 것이 더 빨랐다.

직전까지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것에 이벨린은 일순 아연해졌다.

“대체 무슨 일인지부터….”

무작정 버티기엔 발머 씨의 악력이 거셌고, 사장실은 지나치게 가까웠다. 몇 마디 반항을 얹기도 전에 문의 절반이 마저 열렸다. 발머 씨는 이벨린을 귀부인의 앞에 세우며 의기양양하게 고했다.

“이 아이입니다.”

창문을 내다보던 귀부인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무도회에서나 쓸 법한 정교한 나비 가면이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았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는 심산이었다면 실패였다. 도리어 더 눈길을 끌 만한 종류였으니까.

“저, 그럼 저는 나가 있을 테니, 편히 이야기 나누시고….”

“앉으렴.”

발머 씨야 어떻게 해도 좋다는 듯, 귀부인의 하얀 손이 이벨린에게 맞은편 의자를 권했다. 이벨린은 애써 침착하게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을까요?”

“<고독>을 네가 번역했다던데. 맞을까?”

대뜸 튀어나온 용건은 그만큼이나 뜬금없었다. 이벨린은 당혹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

“응? 대답 좀 해 보렴.”

잠깐의 침묵조차 견디지 못하겠다는 양 귀부인이 성마르게 재촉했다. 그러니까, <고독>, 그 책을 번역했느냐고?

그야, 그렇기는 했다. 석 달쯤 전 발머 씨를 통해 정식으로 의뢰받은 원고였고, 거절하기엔 보수가 컸을 뿐이다. 그리고 그 번역본은 예상대로 고작 스무 권도 팔리지 않았다.

기실 내용을 생각하면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난해한 문장, 맥락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언어유희, 에스페다 제국 상류층에서나 통용될 정숙하고 고전적인 농담들…. 모르긴 몰라도 팔린 책도 모조리 베개 대용으로나 쓰이리라.

이벨린은 길어지던 상념을 끊어 내며 대답했다.

“네. 제가 번역하기는 했지만, 왜 그러시죠?”

“다른 누구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니라, 너 혼자서 모두?”

여자의 목소리에 미묘한 희열이 번졌다. 이벨린은 경계하듯 앉은 몸을 뒤로 물렀다.

“…그러니까, 사전을, 참고해서.”

“아하, 사전.”

“…….”

“그 어려운 것을 고작 그것만 가지고.”

귀부인의 목소리가 더욱 상냥해졌다. 이벨린은 공손히 양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지만 정말 그뿐입니다. 무척 어려운 책이라, 겨우 초안을 더듬더듬 번역하는 것에만 족히 3개월은….”

“발머 말로는 완역까지 고작 일주일이 걸렸다던데.”

…그 작자가 정말. 눈매를 왈칵 일그러트렸던 이벨린은 흥미로워하는 귀부인의 시선에 곧바로 표정을 수습했다.

“민망합니다. 겨우, 낱말이나 깨우친 미진한 실력이라….”

[사람을 하나 구하고 있어.]

구구절절 이어지던 변명을 툭 자른 것은 귀부인이었다. 그 발언을 기점으로 적당히 우호적이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날이 섰다.

그건 유독 선득하게 들리는 억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꼬박 2년 만에 듣는 고국의 언어 때문이었을까.

[유폐된 2황자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할 사람이 필요해. 2황자가 누굴 만나는지, 누구와 편지를 주고받는지, 하다못해 하녀들이 시시콜콜 나누는 수다에 이르기까지 내게 낱낱이 보고해 줄 수족이.]

[…….]

일순, 숨이 막혔다. 이벨린은 동요를 감추기 위해 치맛자락을 꽉 붙잡았지만,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서 생각만큼의 효과는 없었다.

[에스페다의 2황자 전하라면… 설마, 비센테 황자 전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기특하게도. 맞아.]

[그분께서… 왜 유폐를….]

이벨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망연해지자, 귀부인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제국 소식엔 관심을 두지 않는 모양이구나. 어쨌든 나는 제국인이 아닌 외국인을 찾고 있어. 에스페다어를 제국민만큼이나 능숙하게 하면서, 그걸 감출 머리까지 되는 자.]

[…….]

[넌 제법 예쁘장하고 머리도 좋아 보여. 나는 네가 마음에 드는구나.]

귀부인의 눈매가 몹시 흐뭇한 것을 보듯 부드럽게 휘어졌다.

[사흘 뒤 이 시간에 마이어 광장으로 오렴.]

그것으로 모든 용건이 끝났다는 양, 귀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벨린은 넋 나갔던 정신을 간신히 붙들었다.

[만약 제가 이 일을 거절한다면요.]

가면 속에 감춰진 여자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불쑥 다가온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벨린의 턱 아래를 살짝 받쳐 들었다. 사람이 아닌 물건의 값을 가늠하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아픈 동생이 있더구나. 베네딕트 양.]

이벨린의 양 뺨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 말은 보다 직접적인 협박이었다.

베네딕트. 인근 수도원의 이름을 붙인 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아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벨린은 드물게도 자매가 함께 수도원에 맡겨진 처지였다.

사람들은 아픈 동생이 이벨린의 약점일 것이라 쉽게도 셈했다. 눈앞의 여자가 그러하듯.

“곧 보자꾸나.”

이윽고 문이 닫혔다. 유리창 너머로 귀부인이 탄 마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이벨린은 제가 여태껏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맥박이 불쾌하리만치 빨리 뛰었다. 귀부인이 쏟아 내고 간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엉망으로 뒤엉켰다.

2황자, 비센테, 유폐, 감시….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이벨린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손등으로 눈을 덮자, 다시 깨어난 이래로 내내 외면하고 있었던 직전 생, ‘엘레나 데 카스타야’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첫 기억은 불쾌하리만치 강렬한 피 냄새, 오래된 철문으로는 가릴 수조차 없는 눅눅하고 습한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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