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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34화 (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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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스와 나는 말 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평범한 사람은 물론 성기사들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살로스의 결계는 강력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결계를 뚫고 이 집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고?

문을 두드린 것이 우연일 수가 없었다. 마물이 가득한 국경 지대 주변에 위치한 빈집에 어느 누가 문을 두드리겠는가.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밀색 머리칼의 성기사가 떠올랐다. 이전에도 결계 너머가 다 보인다는 듯이 뚫어져라 이곳을 쳐다보던 그 성기사.

?

?“……살로스.”

?“응, 수녀님.”

?“너 지금 마법 사용할 수 있어?”

?“사용할 수 있기는 한데.”

?“그럼 빨리 도망치게 마법 좀 써 봐, 빨리.”

??

살로스가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마 신체가 접촉한 상태여야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그 손을 잡았다.

?

?“일단 성기사들 없는 곳으로 이동할게.”

??

살로스는 눈을 살포시 감으며 소리를 내지 않고 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

하지만 나와 살로스는 여전히 이 낡은 집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살로스가 눈을 뜨더니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

?“어……. 왜 마법이 안 써지지?”

?“뭐……?”

??

그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할 말이 아니지 않나? 지금 꽤 심각한 상황 아니야?

?

쿵쿵!

?

이번에는 재촉하는 듯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아니, 그럼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

?“으음. 그러게.”

??

쿵쿵쿵!

이제 문 너머의 상대는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문을 부숴 버리려는 듯이 거세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

?“일단 저 옷장 속에 들어가. 빨리!”

??

나는 살로스를 낡은 옷장 속에 구겨 넣은 후 재빨리 문을 닫았다.

?

성기사라면 악마를 죽이는 것이 목적일 테니 살로스의 존재만 들키지 않으면 될 것이다. 나는 숨을 가다듬은 후 걸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성기사였다.

?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중앙 신전에서 파견 나온 테오필이라고 합니다.”

?“저한테는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

아.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테오필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기사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친절하게 웃고만 있었다.

?

하지만 저 미소마저도 섬뜩하게 느껴졌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이기적인 몽마보다 선한 성기사가 더 무섭게 느껴진다는 게.

?

?“마물이 바글바글한 국경 지대에는 무슨 일로 거주하고 계십니까? 위험하시니 함께 신전으로 가는 건 어떠신지요.”

?“개인 사정이에요. 친절은 정말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

보통 성기사들은 다 함께 행동한다. 그런데 어째서 테오필의 주변에는 그 동료 성기사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건지.

?

?“함께 가시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판단됩니다.”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감사하지만 사양하겠다고. 그리고 제 일은 제가 판단해요.”

??

그러자 테오필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손끝으로 턱을 쓸었다. 그리고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살로스가 숨어 있는 옷장을 가리켰다.

?

?“함께 가시는 편이 저것이 죽지 않는 길일 텐데요.”

?“네?”

??

테오필의 손가락은 정확히 옷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건 우연이라고 하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이게 우연일 수가 없잖아.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거기, 너. 나오는 게 좋을 텐데.”

??

발뺌도 통하지 않았다. 그는 확실히 이곳에 몽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온 것이었다.

?

?“아, 진짜.”

??

결국 삐거덕거리며 옷장이 열렸다. 그 안에서 살로스가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나왔다. 그의 머리카락과 옷에는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

?“수녀님이 말한 거 진짜였구나. 결계 너머를 보는 놈이 있다는 거.”

?“수녀라. 신을 모시는 몸이셨습니까?”

??

신을 모시기는 했었지. 때려치운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

?“수녀님. 쟤 마음에 안 드는데 죽일까? 죽여도 돼?”

?“죽이겠다니. 재밌는 말을 하는군. 내가 쳐 놓은 결계에 막혀 악마들의 추악한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주제에.”

??

살로스가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게 저 성기사 때문이었단 말이야? 그럼 저 성기사가 친 결계가 살로스가 친 결계보다 강력하다는 뜻인가.

?

내가 크게 놀란 데 비해 살로스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덤덤한 얼굴이었다.

?

?“제국에는 신전이 곳곳에 깔려 있는데 감히 주신 렌다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체화를 한 꼴이라니. 어리석구나.”

?“수녀님. 나한테 한 번만 입 맞춰 줘.”

??

그러고 보니 살로스가 가진 힘의 원천이 사람의 정기였던가. 나는 테오필을 힐끗거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빠르게 살로스에게로 뛰었다.

?

아니, 뛰려고 했다.

?

뛰던 중 테오필이 내 허리를 잡고 달랑 들어 올리는 바람에 나는 살로스에게 가지 못한 채 붙잡히고 말았다.

?“아니, 잠시만요. 이게 무슨.”

?“몽마가 인간을 졸졸 따라다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

테오필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홀로 중얼거렸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실제로 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운이라니.”

??

흰 장갑을 낀 테오필의 손이 내 뺨을 천천히 쥐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흰 장갑에는 마물의 피가 미세하게 묻어 있었다.

?

?“손 놔.”

?“살면서 몽마의 명령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

나는 뺨에 닿아 있는 테오필의 손을 뿌리친 뒤 고개를 돌려 살로스를 바라봤다. 살로스는 불쾌하다는 감정을 얼굴에 온통 드러내고 있었다.

?

그는 몽마이면서 너무 감정적이다.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어 그들을 현혹해야 할 몽마가 오히려 감정에 휘둘리다니.

?

살로스는 끝내 테오필과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테오필을 바라보니,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악당처럼 웃고 있었다.

?

?“오지 마.”

?“수녀님.”

?“오지 말라고. 내가 명령하는 건 전부 따른다며.”

?“자신이 오겠다는데 어째서 말리십니까.”

?“살로스가 가까이 오면 당신이 죽일 거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

하지만 테오필보다는 내가 살로스에게 더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민망하기는 하지만, 만약 살로스가 가까이 온 순간 내가 먼저 그에게 뛰어들어 정기를 준다면.

?

조금은 결과가 바뀔지도 모르겠다. 나는 티가 나지 않게 노력하며 테오필을 살폈다. 몸 전체를 타고 흐르는 긴장감 탓에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

이제 남은 거리는 고작 다섯 걸음이었다. 그리고 테오필의 손은 나와 닿아 있지 않은 상태다.

?

나는 망설이지 않고 뛰었다. 갑자기 달려드는 나를 보고는 살로스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그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팔을 크게 벌렸다.

?

다만 나와 살로스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

성기사들은 마물들을 죽일 때 일반 기사들만큼의 실력, 혹은 그 이상의 움직임을 보였었다. 성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성기사가 된 것이 아니라 기사로서의 실력 또한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테오필은 나와 살로스가 서로 닿기도 전에 내 앞으로 와 살로스의 머리칼을 그러쥐었다. 이전에 내가 살로스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을 때보다 훨씬 강한 악력이었다.

?

굉장히 아플 것이 분명한데도 살로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고통을 표현하지 않았다.

?

그리고 살로스의 얼굴은 거친 나무 벽에 처박혔다. 몽마인 살로스에게서도 인간과 같이 붉은 피가 튀었다.

나는 말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살로스가 테오필에게 붙잡힌 그 순간부터, 쭉.

?

?“살, 로스.”

??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그가 대답할 때까지 계속 살로스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는 결코 대답하지 않았다.

?

?“후.”

?

몇 번이나 살로스의 머리를 벽에 처박았을까. 테오필은 무거운 숨을 뱉으며 살로스의 피가 묻은 장갑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마치 장갑이 오염되기라도 했다는 듯이.

?

마법을 쓰지 못하는 몽마라니. 보통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살로스는 손가락을 몇 번 꿈틀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

잠시 후 살로스의 모습이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내가 성수를 뿌렸을 때와 비슷해 보였다.

?

그 현상은 곧 살로스의 힘이 약해진 상태임을 나타냈다. 살로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테오필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어쩌죠, 수녀님.”

?“…….”

?“수녀님의 친구는 가 버린 모양인데요.”

??

그리고 테오필은 자신이 주신 렌다의 현신이라도 된 것처럼 친절하고 자애롭게 웃었다. 흰 갑옷과 장갑에 튄 붉은색 피와 잘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

?“자, 아가씨. 이제 신전으로 가실 이유는 충분한 것 같네요.”

?“…….”

?“손, 잡으세요.”

?“저를 신전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요.”

??

테오필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곧 똑바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재미있어 보인다니.

?

?“저 몽마 놈이 그런 것처럼 저도 이런 기운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보거든요. 흥미로운 물건은 가지고 가는 버릇이 있어서요.”

?“전 물건이 아닌데요.”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

테오필은 붉은 피로 물든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당장 그 손을 마주 잡으라는 듯이.

?

하지만 나는 그 손을 잡기를 망설였다. 아니, 망설였다기보다는 잡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겠지.

?

?“제 손을 잡지 않으실 겁니까?”

??

이 순간만큼은 소설 속에서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민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했다. 왜 나는 알베르트처럼 권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지. 왜 나는 살로스처럼 특별한 능력이 없는 걸까.

?

지금 이 순간, 저 손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

오랜 시간 그의 손을 쳐다보기만 하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더니, 테오필이 먼저 내 손을 잡았다. 벌레가 손에 닿은 것처럼 거부감이 일었다.

?

?“이름이 무엇입니까?”

?

나는 입을 다물고 답하지 않았다.

?

?“뭐, 이름 정도는 상관없겠죠. 제가 새로 지어 드려도 되는 일이니.”

?“…….”

?“로즈. 눈동자가 장미처럼 붉으니 이 이름이 좋겠습니다.”

??

그리고 테오필은 나를 향해 자랑스럽지 않느냐고 묻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

눈동자 색이 장미를 닮아서 로즈라니. 최악의 작명 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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