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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는 놀란 표정의 알베르트가 서 있었다.
?
“……스텔라?”
?
나는 멍하니 알베르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깨끗하고 생기 넘치던 얼굴은 사라지고, 어둡고 수척한 표정만이 그의 얼굴 위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당신은 여주랑 행복하게 변태 짓이나 하면서 살고 있는 거 아니었어? 왜 네가 여기에 있는데?
알베르트도 나와 같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
이럴 때가 아니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고만 있다가는 또 5년 전의 관계가 되풀이될 수도 있었다. 단호하게 이 관계를 잘라 내는 거다, 단호하게.
“돌아가세요.”
“…….”
그러나 당연하게도 알베르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5년 만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길래 나를 다시 찾아왔나. 나는 이제야 겨우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았는데.
문전박대라도 당해야 돌아가려나. 소설의 묘사에 따르면 알베르트는 꽤 자존심이 강했으니까. 그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면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문고리를 잡고 세게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때, 알베르트가 빠르게 틈 사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나무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그의 팔을 가격했다. 뒤에서 어느 기사가 다급하게 알베르트를 부르는 것이 들렸다.
잠시만. 기사라고?
문틈 사이로 붉은 머리의 기사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알베르트와 그 기사를 번갈아 봤다. 아아, 그렇구나.
코르넬 스테인. 붉은 머리칼을 가진 매서운 기사. 오직 알베르트에게만 충성하는 공작의 충실한 개. 이전에 부딪혔던 그 남자가 바로 코르넬, 그였던 것이다.
멍청하게도 나는 그가 코르넬일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시골에 기사가 올 리가 없는데, 참으로 멍청했다.
“지금까지 절 찾으셨어요?”
내 질문을 들은 알베르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5년 전과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원래 이렇게 차분한 사람이었나. 나를 보면 항상 능글맞은 미소부터 짓던 사람이었는데.
“공작님 약혼녀는요?”
약혼녀. 소설의 여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알베르트는 여주와 만나 약혼을 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없습니다. 스텔라, 내게 필요한 건 당신뿐이에요.”
“그게 무슨…….”
“같이 가자는 말 따위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가야 해요. 선택권은 주지 않겠습니다.”
항상 능글맞고 장난스럽던 알베르트의 눈빛은 이제 지독하게 차가웠다.
하. 나는 기가 차다는 듯 숨을 뱉었다. 5년 전과는 달라 보이기는 개뿔. 이전보다 조금 더 차분해졌을 뿐, 강압적인 것은 똑같았다.
“싫어요.”
이래 봬도 내가, 어? 몽마까지 퇴치한 사람이라고. 나는 패기 넘치게 거부의 대답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알베르트의 표정이 점차 굳었다. 아니, 굳었다기보다는 분노한 것처럼 딱딱해졌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이겠다.
“선택권은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사람도 아닌가요? 제 인권은요?”
아. 노예도 있는 세상에서 인권이라는 말은 조금 많이 생소하려나. 아니나 다를까, 알베르트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여튼 안 갑니다, 안 가요. 제가 공작님을 따라가서 무슨 득을 본다고.”
알베르트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심히 나를 쳐다봤다.
“거부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
그러더니 그는 문틈 사이에 손을 넣어 세게 당겼다. 무거운 나무문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그의 손길에 따라 순순히 열렸다.
“코르넬.”
“예, 가주님.”
“내가 나갈 때까지 밖에서 대기해라.”
?
코르넬이 딱딱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알베르트는 코르넬이 마차 옆에 서서 대기하는 것을 보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불길했다. 나는 5년 전 그의 행실을 떠올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물론 알베르트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는 바람에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됐지만.
“이 집에 얼마나 많은 남자를 들였습니까?”
남자는커녕 여자도 초대한 적이 없는 집이었다. 유일하게 함께 살던 생명체는 살로스뿐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알베르트의 저 매서운 얼굴을 마주하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게 잘게 몸을 떨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알베르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두렵습니까?”
“…….”
“오히려 저를 두려워하는 게 나을 것도 같습니다.”
알베르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왼쪽 뺨을 한 손에 쥐더니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두려우면, 적어도 나를 농락하고 도망치지는 않겠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 입은 알베르트에게 삼켜졌다. 그는 내 어깨를 세게 쥐고 거칠게 혀를 움직였다. 혀와 혀가 서로 농밀하게 얽혔다.
허억. 숨이 막혔다. 두려움에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제대로 호흡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와 입을 맞댄 상태로는 숨을 쉴 수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의 가슴팍을 아무리 두드려도 그는 내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집요하게 나를 옭아맸다. 벗어나지 못하도록.
결국 나는 발버둥 치다가 세게 그의 혀를 깨물고 말았다. 혀를 통해 비릿한 피의 향이 느껴졌다.
마침내 알베르트가 천천히 내게서 입을 떼어냈다. 천사 같은 백발에, 황금안. 그리고 입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
고통이 상당할 터인데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깃들어 있지 않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그는 빙긋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숨을 조이던 그 섬뜩한 얼굴이, 갑자기 예쁘게, 아름답게 웃었다.
그는 나를 끌어안더니 그대로 나를 침대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푹신한 이불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으나 불쾌했다. 이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도 명확해서.
?
알베르트가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단정한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었다. 크라바트는 무참히 구겨진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기쁩니다. 이 집에서 처음으로 당신을 탐하는 게 나라서.”
혹시 공작님은 조울증에 걸리셨나요? 어떻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서운 얼굴로 나를 노려봤으면서 이제 와서 웃으면서 기쁘다고 말할 수가 있지?
나는 탈출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기사가 아니라 공작이다. 물론 힘만 보면 기사가 되고도 남았을 것 같지만.
그는 전문적인 기사 훈련을 받지 않았기에 내가 빠르게 달려 인파 속으로 도망친다면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마차를 지키고 있는 코르넬이었다.
코르넬은 ‘공작의 충실한 개’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 모니카 공작가의 전속 기사였다. 황제도 아니고, 오직 알베르트에게만 충성하는 기사.
집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금방 코르넬에게 잡히고 말 것이다. 어떡해야 하지, 도대체 어떡해야 하지.
?
내가 고민하는 사이 알베르트는 빠르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때, 맨 아래에 위치한 단추가 실에 걸려 풀리지 않는 것이 보였다.
알베르트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순간, 나는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코르넬이 서 있는 곳은 출입문이 있는 곳이었다. 뒤쪽의 큰 창문을 이용해서 빠져나간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좋아. 하는 거다. 나는 내 아래에 깔려 있던 이불을 힘껏 알베르트에게 집어 던진 후 창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엥……?”
?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 세게 창문을 당겨 봤지만 창문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아니, 잠시만. 이거 왜 이래.
“…….”
창문에 걸쇠가 걸려 있었다.
나는 멍하니 걸쇠를 바라보며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수녀님. 창문에 잠금장치가 없어. 설치해야 하지 않을까?]
[그냥 놔둬. 귀찮게 뭘 설치하고 자시고야.]
나는 당시에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느라 바빴기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살로스가 내게 무어라고 말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그럼 걸쇠라도 걸어 놓는다?]
[그러든가.]
이런 망할. 그때 살로스의 말을 흘려듣는 게 아니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애초에 그놈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아마 살로스가 여전히 내 앞에 있었으면 이미 얼굴에 주먹을 몇 번 날렸을 것이다. 젠장. 성수를 뿌리기 전에 몇 대 때릴 걸 그랬다.
“…….”
등 뒤에서 알베르트가 차분하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장난은 즐거우셨습니까?”
“어, 그러니까, 공작님.”
“말씀하세요.”
“미안합니다. 바닥에 머리라도 박을까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알베르트는 분명 웃고 있었다. 부디 그의 웃는 표정이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기를 빌었다.
알베르트는 다시 한번 생글 웃었다. 그의 예쁜 미소는 아무래도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미소에 대한 거짓 여부가 아니었다.
?
“아니요, 바닥에 머리를 박으실 필요는 없고. 제 걸 당신 아래에 박으면 될 것 같네요.”
히익. 나는 필터를 전혀 거치지 않고 나오는 수위 높은 말을 듣고 경악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내 구겨진 표정이 보이지 않는 건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가 내 바로 앞에 왔을 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올려다봤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예쁘게 웃는 얼굴이라도 그렇게 말없이 빤히 보고만 있으면 조금 무섭습니다만, 공작님.
“누우세요.”
나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라 침대 위에 누웠다. 어흐흑, 말 잘 들었으니까 제발 그가 이 행위를 빨리 끝내 주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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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가 순한 양처럼 굴자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내 위로 몸을 겹쳤다.
아, 저 능글맞은 표정 진짜 얄밉다. 진짜,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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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위에서 엎어져 나를 끌어안고 있던 알베르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내 어깨와 허리를 잡고 내 몸을 뒤집었다.
세상이 갑자기 뒤집힌 탓에 혼란스러웠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나는 알베르트의 무릎 위에 엎드린 상태였다. 마치 어머니에게 엉덩이를 맞는 아이처럼.
나는 당황하여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몸부림을 멈춘 것은 내 엉덩이를 세게 내리친 알베르트의 손길이었다.
“아윽!”
새된 비명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알베르트가 난데없이 나를 때렸다고?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