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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12화 (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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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스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의 몸이 갈라질수록 내 몸에서 이상한 투명한 막이 조각이 되어 떨어져 나왔다.

나는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조각을 집어 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투명한 막일 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또 살로스가 내게 무언가 이상한 수를 써 놓은 걸까. 하여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살로스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사라졌다.

“…….”

사라졌다. 정말로 사라졌어.

볼을 꼬집었다가 아파서 얼른 손을 떼어냈다. 꿈이 아니었다. 5년 동안 나를 괴롭히던 살로스가, 드디어 사라졌다. 그것도 고작 성수 몇 방울로!

나는 믿을 수가 없어서 살로스가 있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5년 동안의 괴롭힘이 겨우 성수 따위로 사라진 것이었다.

아, 드디어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았다. 집에 돌아와도 귀찮게 구는 몽마가 없고, 강제적인 성관계도 없다. 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5년간 몹쓸 몸정이라도 들었는지 잠시 허전함을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허전함보다는 해방감이 훨씬 더 컸다.

어둠 속의 달빛은 유난히 밝았다. 어두운 은빛 달이 잠시 살로스를 연상시켰으나 곧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나는 멍하니 달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5년 전에는 알베르트에게서 벗어났고, 오늘은 살로스에게서 벗어났다.

왜 살로스가 성수 따위에 무력하게 패배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미소 지으며 달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약 5년 만에 처음으로 말이다. 나는 미소를 얼굴에 걸고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아아, 이 평화로운 일상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

살로스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

“찾았습니다.”

코르넬이 저의 가주를 향해 무릎 꿇으며 말했다. 그가 무릎을 꿇기 위해 몸을 낮추자 붉은 머리카락이 그를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

낮임에도 불구하고 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어둠, 그리고 방 안을 가득 채운 독한 술 냄새. 코르넬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알베르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술에 취해 몸은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고 휘청거렸다. 알베르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5년. 자그마치 5년이었다. 작은 새가 새장을 벗어나 떠나간 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스텔라, 그녀는 마치 마약 같았다. 가까이할수록 기분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일 뿐. 잠시라도 곁에 없으면 숨이 막혔다.

처음에는 그저 예쁘장한 외모 때문에 다가갔는데, 그녀 때문에 제국의 공작이라는 자가 이리도 미쳐서 살고 있었다. 5년 동안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알베르트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옅은 주황빛의 액체가 잔 안에서 거칠게 흔들렸다.

코르넬은 알베르트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몇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알베르트는 스텔라를 찾기 위해 암흑가에 스텔라에 대한 정보를 풀었었다. 그녀를 찾는 자에게 어마어마한 보상을 약속하며.

처음에는 돈에 눈이 멀어 무작정 그녀를 봤다며 거짓을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제보가 들어올 때마다 알베르트는 활짝 웃으며 제보자를 찾아갔다. 정확히는 제보자가 찾았을 스텔라를 찾아간 것이었지만.

그리고 제보가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알베르트는 코르넬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코르넬. 사람 얼굴 하나 구분하지 못한 저 두 눈을 뽑고 거짓을 말한 저 혀를 베어 버려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으나 그때 알베르트의 얼굴에서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코르넬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제보자의 눈을 뽑고 혀를 베었다.

스텔라를 봤다고 말하는 사기꾼들이 사라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돈이 좋다고 한들, 목숨보다 귀하랴.

하지만 코르넬도 의문스럽기는 했다. 5년 동안 흔적조차 찾지 못했던 그녀였다. 이전에도 스텔라가 살던 마을을 몇 번이고 뒤졌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스텔라를 찾은 것은 바로 전날이었다. 그날, 코르넬은 같은 마을을 다섯 번 정도 뒤졌기에 굉장히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는 터덜터덜 마을을 걷던 중 한 여자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코르넬은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감. 수년 동안 기사로서 살며 쌓았던 감이 그에게 속삭였다. 이 여자는 어딘가 수상하다고.

하지만 여자는 스텔라가 아니었다. 알베르트를 모시며 종종 먼발치에서 스텔라의 얼굴을 봤었던 그였다. 적어도 그녀의 얼굴은 아니었다. 얼굴이 기억이 나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유는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여자가 스텔라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언제나 세상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었다. 이번에도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고 주인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실에 허탈에 빠져 있던 그는, 무언가 발견했다.

달빛을 받으며 어두운 하늘 아래에 서 있던 한 여자. 낮에 그와 부딪혔던 여자였다.

여자는 달빛을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기쁜지 모르겠으나 정말로 환하게.

?

하지만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코르넬은 눈을 비비고 다시 여자를 쳐다봤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바로 그가 5년 동안 찾아 헤매던 스텔라였다. 코르넬은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5년 전 먼발치에서 봤던 스텔라의 얼굴만은 기억에 또렷하게 남았다.

여자는 스텔라가 분명했다. 어째서 낮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모르겠으나 당장 알베르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잠시 전령새를 보낼까 고민했으나 새보다는 직접 가는 것이 빠르리라고 판단했다. 코르넬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말에 올라 힘껏 채찍을 휘둘렀다.

?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최대한 빨리 달려 모니카 공작저에 도착했건만, 알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냉정하기만 했다.

?

그의 말은 마치 네가 본 것이 스텔라가 아니라면, 이전의 그 사기꾼들처럼 눈을 뽑아 버리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코르넬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자신 있게 답했다.

“분명 스텔라였습니다.”

“…….”

여전히 알베르트는 코르넬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가 보도록 하지.”

기대라고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말투였다.

?

스텔라를 찾았다는 제보를 처음 받았을 때, 알베르트는 값비싼 텔레포트를 이용해 그녀를 찾으러 갔다. 하지만 이제는 일말의 기대도 남지 않은 건지, 그는 평범한 마차를 이용했다.

수년간 알베르트에게 충성을 약속해 왔던 코르넬이었다. 그런 그까지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코르넬은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주인은 망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성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스텔라, 그녀가 필요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알베르트는 스텔라를 안을 때마다 이성을 잃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이성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스텔라가 필요하다니.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덜컹덜컹.

마차는 포장되지 않은 거친 길을 천천히 달렸다. 알베르트는 불편할 것이 분명한데도 아무런 말이 없었고, 코르넬은 말을 타고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스텔라는 모니카 공작저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스텔라가 사는 마을에 도착한 것은 하루가 지난 깊은 밤이었다.

코르넬은 스텔라가 사는 작은 오두막으로 알베르트를 안내했다. 알베르트는 코르넬이 나무문을 두드릴 때까지도 여전히 심드렁했다.

하지만 오두막에서 나온 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베르트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스텔라?”

셀 수 없이 그녀를 안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마치 하늘의 별이 그에게 다가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살로스가 없으니 확실히 인생이 즐거웠다. 나는 아무런 간섭 없이 늦은 밤까지 거리를 쏘다니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었다.

“한 잔 더!”

“아가씨, 제발 그만 좀 마셔! 가게 술의 절반을 아가씨가 마셨어!”

하지만 소설 속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마셔 보는 술이었다. 어렸을 때는 나이가 어려서 마시지 못했고, 수녀일 때는 성직자라는 이유로 마시지 못했고 최근까지는 살로스 때문에 마시지 못했었다.

아아, 술이 이렇게 아름다운 음료였나. 나는 몽롱한 기분을 즐기며 또다시 잔을 기울였다. 가게 술의 절반을 내가 마셨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내 옆에는 술잔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아가씨. 걱정돼서 그래. 술을 한 번에 이렇게 많이 마시면 몸이 망가진다니까?”

“아, 거. 하루쯤은 괜찮잖습니까!”

“이 아가씨가 정말!”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이마를 턱 짚었다. 나는 그녀를 마주 보며 큭큭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쫓아내기라도 하겠어?

그리고 이쯤에서 또 옛말을 떠올려 봐야겠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나는 정말로 쫓겨났다. 젠장.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술을 안 주냐고!

나는 잠시 술집 앞에 덩그러니 서 있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망했다.

으으. 시간에 맞춰서 못 일어나면 어떡하지. 나는 걱정을 가득 안고 침대에 누웠다.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한 탓에, 그리고 술기운 때문에 몸이 뜨거웠다.

의식이 흐려질랑 말랑.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늦은 시간에 대체 어떤 미친놈이 예의 없이 문을 두드린담. 나는 툴툴거리며 문을 향해 걸었다. 다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술기운은 전부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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