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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뭐가 더 좋아? (13/19)

12. 뭐가 더 좋아?

에이든은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피곤해서 기절하다시피 잠든 상태에 툭툭 누가 건드려 깨우는 불쾌한 순간임에도, 품 안에 있는 존재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눈을 뜨기도 전에, 잠이 완전히 깨 정신이 들기도 전에 알아챘다. 지금 올리비아를 품고 있구나. 잠든 와중에도 얼마나 힘주어 안았는지 팔다리가 아플 정도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올리비아가 밤새 어디 가지 않고 제 품에서 고이 잠을 잤으니까.

이대로 심장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이 기쁨은 누구도 모르리라. 아마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할 감정일 거다. 품에 올리비아가 있다는 것만으로 에이든은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그 평온하고 행복한 달콤함을 계속 느끼고 싶은데, 계속 툭툭 발끝을 건드려 대는 것 때문에 도저히 짜증을 참기 힘들었다.

“왜?”

“일어나셨습니까?”

에이든은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걸 삼켰다. 깨우려고 사람의 발끝을 계속 건드려 댔으면서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도롱도롱 곯아떨어진 올리비아가 깰까 봐 큰 소리는 참아야 했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뺨에 쪽 입을 맞추고 품에 더욱 당겼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소리를 낮췄다.

“왜?”

에이든의 태도에서 말 걸지 말란 기색이 팍팍 흘러나왔다. 그를 깨우던 케일럽은 제대로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물론, 그걸 티 낼 수 없는 상황이라 참아야만 했다.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얼른 이 일 마무리하고 돌아가야지. 모시는 분에 대한 넘치는 충성심과 저놈이 주기로 한 보상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에이든을 돌보는 건 짜증 났다. 뭣 같은 사회생활. 케일럽은 욕설을 삼키며 본론을 말했다.

“……방금 왕세자가 떠났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제야 에이든이 몸을 일으켜 케일럽을 돌아봤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왕세자라는 인물이 이 새벽에 다급하게 떠날 정도면 그만큼 큰일이 일어났단 거였다. 즉, 계획대로 진행됐다는 소리였다.

“잘 다녀와.”

“지켜주는 사람이 없으니 한동안 조심하십시오.”

에이든은 신경 쓰지 말라고 손을 휘휘 저었다. 괜히 드잡이하기엔 오늘은 너무 행복한 새벽이니까. 잠든 올리비아의 머리카락을 쓱쓱 매만지다가 에이든은 시간이 아까워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이번에도 온몸으로 올리비아를 당겨 안았다. 심해에 사는 몬스터 크라켄이라도 된 것처럼, 팔다리에 빨판이라도 달린 것처럼 올리비아의 몸을 꽉 안고 나서야 행복함이 몰려왔다.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존재가 사라졌으니, 이것이야말로 세상 최고의 행복 아니겠는가. 그렇게 심장이 덜덜 떨리는 행복함에 퐁당 빠져 있을 때였다.

“우웅…….”

품 안에서 작은 소리 후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에이든은 냉큼 잠든 척을 했다.

올리비아가 일어나려는 듯 품에서 꿈틀거렸다. 일부러 힘을 풀어 주지 않았더니 끙끙 앓는 소리를 내서 묘한 기분이 되었다.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계속 끙끙댈 것 같아 결국 등을 작게 토닥이며 더 자자고 했다.

그제야 제 상태를 깨달았는지 도련님을 외치며 눈을 댕그랗게 뜬 귀여운 모습이란. 어제 무리해서 한동안 다신 세우지 못할 거라 여겨졌던 의지가 벌떡 일어설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큰 눈을 깜빡이며 이제 화 다 풀렸냐고 묻는 천진한 얼굴은 진짜 너무 사랑스러워 전부 씹어 삼켜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머리를 기대 오는 행동은 또 얼마나 자연스러워졌는지, 이제 올리비아는 에이든의 품에 안기는 게 익숙해졌다. 올리비아의 세상에 자신이 흠뻑 젖어 든 것이다.

이 얼마나 황홀한 감각이란 말인가. 에이든은 몸과 마음 모두가 녹아 버릴 것만 같은 나른함에 빠졌다. 물론, 그 와중에 올리비아를 감싼 팔과 다리에서 힘을 빼지는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헉! 도련님!”

올리비아가 펄쩍 놀라며 소리를 쳤다. 방심하고 있던 에이든도 덩달아 놀랑 정도로 엄청난 목소리였다.

“뭐? 왜? 무슨 일이야?”

그제야 팔을 놓아주자 올리비아는 울먹이는 얼굴로 에이든을 올려다봤다.

“어, 어떡해요.”

톡 건들면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올리비아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했다. 눈물을 참는지 코끝이 빨갛게 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또 왜 이렇게 안타깝고 귀여운지, 에이든은 속이 절절 끓는 느낌에 올리비아의 뺨을 감쌌다.

“왜 그래? 응? 무슨 일이야?”

“크, 큰일 났어요! 저 사고 쳤어요.”

아니, 이 예쁜 애가 사고를 치면 뭐 어떤 사고를 친다고. 그리고 사고 따위 치면 어떻다고!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이렇게 덜덜 떠는 게 마뜩찮았다. 그래서 올리비아의 어깨를 감싸 품에 당기며 걱정하기 말라고 다독였다.

“괜찮아. 사고 얼마든지 쳐도 돼. 내가 있잖아.”

에이든이 등을 토닥여 주자 파리해지던 올리비아의 낯빛이 조금 돌아왔다. 아직도 눈치를 보는 올리비아의 눈가를 닦아 주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올리비아가 말하기 곤란한 것처럼 에이든의 눈치를 봤다. 괜찮다고 뭐든 말해 보라고 다정한 얼굴을 해 보였더니, 그제야 올리비아가 우물거렸다.

“어제 손님이 지시한 게 있었는데 그거 어겼어요. 멍청하게 그냥 잠들었어요. 어, 어떡해요?”

손님이 집사님에게 이르면 어떡하냐고 올리비아가 울먹거렸다. 에이든은 어제의 그 거지 같은 대화가 떠올라서 잠시 표정을 굳혔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걸 보고 올리비아가 더욱 놀라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침대에 머리를 박고 눈물을 줄줄 흘릴 것 같은 안쓰러운 모습에 에이든은 냉큼 표정을 바꿨다.

“괜찮아. 넌 잘못한 거 없어.”

“손님의 지시를 어긴 거잖아요. 그건 진짜 큰일이에요. 저 얼른 가 봐야겠어요. 가서 빌고 올게요.”

이미 떠나고 없는 놈이지만, 애먼 놈에게 가서 빈다는 올리비아의 행동에 다시 불쾌감이 들었다.

“안 가도 돼.”

“안 돼요. 손님 말을 듣지 않은 걸 알면 집사님이나 총관님에게 크게 혼나요.”

제법 냉정하게 말했는데 올리비아 또한 단호하게 에이든의 말에 반박했다. 이상한 데서 고집쟁이지. 그 집사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자신은 무섭지 않은 거고.

물론, 에이든은 이런 올리비아도 귀여워서 웃음이 픽 나왔다. 올리비아에게 자신이 서슴없는 존재가 됐다는 게 뿌듯했다. 그래도 올리비아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에이든은 재빠르게 상황을 알려 줬다.

“우선, 그 손님 오늘 새벽에 떠나고 없어.”

“진짜요?”

“응.”

“다행이다!”

에이든이 확답을 해 주고 나서야 올리비아의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엄청난 실수로 크게 혼날 뻔했던 걸 그냥 지나간다는 사실이 마냥 행복한지 찢어지려는 입을 숨기지 못했다.

‘단순해서 귀엽긴.’

에이든이 헤실거리느라 통통해진 올리비아의 뺨을 툭 건드렸다. 그게 그렇게 좋을까? 올리비아의 눈에서 별이 쏟아질 것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올리비아.”

“네?”

“전에 말했잖아. 내 명령만 들으라고.”

“……네.”

그새 또 까먹었나? 올리비아가 느리게 답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을 신경 써?”

“손님은 또 다르잖아요. 손님이 불쾌해하시면 더 크게 혼나요.”

시무룩해져서 눈치를 보는 올리비아의 행동에 에이든은 또 마음이 약해지려 했다. 하지만 똑같은 분노를 느끼지 않으려면 이번에야말로 올리비아에게 확실하게 입력시켜 놓아야 했다.

“올리비아.”

“네.”

“누가 너에게 명령하면 앞으로는 무조건 내 핑계를 대.”

올리비아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이해 못한 듯해서 에이든은 차분하게 다시 설명했다.

“누가 명령하면 무조건 내 이름 대면서 내가 허락해 줘야만 가능하다고 해. 알겠지?”

가능한 차분하게, 그렇지만 단호하게 말하자 올리비아가 또 눈만 깜빡였다. 못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건지 가만히 듣고 있던 올리비아가 작게 우물거렸다.

“백작님도요?”

“그래.”

에이든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제야 올리비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간 표정이라 정말 이해한 게 맞는지 의아하긴 했지만 살짝 달아오른 뺨이 귀여워서, 미소 짓고 있는 입술이 사랑스러워서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탐스러운 뺨에 입을 맞췄다. 그가 화가 난 게 아니란 걸 깨닫자마자 안도해 다시 배시시 웃는 올리비아가 어여뻐서 에이든도 웃고 말았다.

* * *

그 달콤했던 일이 고작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에이든은 서재에 늘어져서 심각하게 고뇌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올리비아의 태도가 달라지긴 엄청 달라진 것 같다.

오늘 아침의 반응은 평소와 많이 달랐다. 아까 스스로 품에 기대어 오지 않았던가, 머리도 살짝 비비적거리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짓는 미소도 잦아졌고, 가끔 뽀뽀도 먼저 해 주고.

그 모든 것이 어떤 것의 신호 같았다. 그동안 두려워 묻지 못했던 어떤 상황, ‘혹시 올리비아도 이젠 자신을 좋아하는 거 아닐까?’라는 희망 말이다.

헛된 기대를 하면 안 되는데. 망상을 했다간 큰일인데. 상대는 올리비아라서 조심해야 하는데!

에이든은 한번 시작한 망상을 멈출 수 없었다. 올리비아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상상만으로 너무 달콤해서 폭주해 버릴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거절의 말을 들으면 심장이 멎을까 봐 직접 묻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데 희망이 생기니 또 묻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물어보자와, 조금 더 참고 기다려 보자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몸이 들썩였다.

올리비아가 좋아한다고 해도 미칠 것 같고, 싫다고 하면 다른 의미로 미칠 것 같다. 긴장감에 내장이 다 떨려서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괜히 희망을 떠올려서 초조해진 에이든은 결심했다.

“씨발, 부딪쳐 보자!”

에이든은 패기 넘치게 일어섰다. 하지만 이내 올리비아를 찾아 나선 에이든은 다리가 후들거려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세상에 긴장감이 이렇게 무서운 느낌이구나.

조금 전 기운차게 일어났던 에이든은 올리비아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겨우겨우 어렵게 걸음을 옮겼다. 서재를 나와 걸어가면서도 머리가 팽팽 돌았다.

‘올리비아가 좋다고 하면 어떡하지? 행복해서 미쳐 버리는 거지!’

‘올리비아가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좌절감에 미쳐 버리는 거지!’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미쳐 버린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듣지 않고 기다리기엔 초조함이 너무 컸다. 이미 감정이 폭주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심장이 쿵쾅거려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오늘따라 올리비아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아까 빨래 다 된 거 갖고 올라갔어요.”

결국, 아래층에 있던 하녀에게 올리비아의 행적을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엔 꼭 올리비아에게 속내를 물어보는 거다. 이번엔 피하지 않는 거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옷방으로 향했다. 에이든은 문고리를 잡고 크게 심호흡을 한 열 번 하고 옷방 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올리비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두리번거리던 중 한쪽에 웅크리고 있는 올리비아를 발견했다. 에이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뛰어갔다. 온갖 불길한 생각이 다 들었다.

“오, 올리비아?”

에이든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벌벌 떠는 손이 허공에만 맴돌았다. 그때였다.

“으응…….”

올리비아가 대답하듯 작은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나른함이 밴 귀여운 응석. 에이든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더 가까이 다가가 기색을 살폈더니 올리비아는 눈을 감고 평화롭게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낮잠이 퍽 달콤하다는 듯, 나른한 미소를 입가에 달고 있었다. 에이든의 기운이 쭉 빠졌다.

“사람 놀라게 하고.”

안도감에 허탈한 음성을 흘렸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옆에 주저앉아 뺨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올리비아가 간지럽다는 듯 뺨을 씰룩거려 에이든은 웃음을 삼켰다.

무슨 낮잠을 이렇게 깊이 자냐고 하고 싶지만 자신의 탓이다. 어제 혹시 올리비아가 중간에 깨서 왕세자 놈을 찾아가는 헛짓거리를 할까 봐 최대한 괴롭혔다. 그 어느 때보다 열을 올렸다. 결국, 올리비아가 이렇게 쪼그려 잠들게 만든 원인이 자신임을 알기에 에이든은 참아야 했다.

“그래, 더 자라.”

가만히 잠든 올리비아를 내려다보면서 에이든은 긴장감이 허무하게 풀렸다. 올리비아가 잠든 탓에 마음을 묻는 건 불가능했다. 이렇게 된 게 다행인 건지, 아니면 묻지 못해 아쉬운 건지 미묘했다. 한숨을 쉬며 올리비아의 얼굴을 관찰했다.

눈 뜨고 헤실거리는 올리비아도 예쁘지만, 이렇게 잠든 올리비아도 참 예쁘다. 얜 어릴 때부터 예쁘지 않은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게 신기했다. 또 참지 못하고 톡 뺨을 건드렸다. 매일 쓰다듬고 입을 맞추는 곳인데도, 만질 때마다 매번 감회가 새로웠다.

아직도 이렇게 올리비아와 함께하게 된 상황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얼른 관계를 더 발전시켜 전부를 얻고 싶었다. 과분한 행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더한 욕심이 났다.

에이든은 기본적으로 욕심이 없었다. 어차피 사는 인생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올리비아에 대해서만큼은 욕심을 버리기 힘들었다. 이 향기까지 전부 갖고 싶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무섭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얼른 올리비아가 자신을 좋아해 줬으면 좋을 텐데. 자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살짝 아쉽다. 두 눈을 뜨고 온전히 자신을 담아 주었으면 좋겠다. 올리비아의 시선 가득 자신만 들어갔으면 좋겠다.

“우웅…….”

에이든이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통통한 뺨을 몇 번 덧그렸더니 올리비아가 인상을 찡그리고 웅얼거렸다. 귀찮다는 듯 도리질 치는 얼굴을 따라 뺨을 간질거렸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끝까지 깨지 않았다.

그러자 조바심이 일었다.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평생 이렇게 자신을 외면할 것만 같아서 불안해졌다. 워낙 맹해서 올리비아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

그렇게 걱정하다 보니 불쑥 떠오른 생각이 있다. 올리비아에겐 독특한 잠 습관이 있었다. 바로 말을 걸면 대답을 하는 잠버릇.

이미 한번 겪지 않았던가, 비록 처참한 기억이지만 잠결일 때의 올리비아는 물음에 솔직하게 답했다. 즉, 지금 물으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올리비아의 속내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치졸한 행동이라고, 이미 한번 같은 짓을 저질렀으며 후회하지 않았냐고 말하고 싶지만. 나름 에이든은 간절했다. 다시금 올리비아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걸 떠올린 순간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기대감과 초조함에 정신이 바짝 말라 갔다. 입안도 바짝 말라 침을 삼킨 후 느리게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

“으응?”

잠결에 하는 올리비아의 대답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조그만 더 하면 된다. 이번 질문만 하면 된다. 에이든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물었다.

“에이든 도련님이 좋아?”

올리비아의 입술이 움직이길 바라보면서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어서, 어서 대답하라고! 간절하게 응시할 때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든 도련님 좋아…….”

작은 중얼거림은 설탕 가루를 뿌리는 것처럼 허공에 달큰하게 흩뿌려졌다. 너무 달콤해서 그래서, 에이든은 순간 올리비아의 말을 인식하지 못했다.

에이든 도련님 좋아……. 에이든 도련님 좋아? 에이든 도련님 좋아!

“씨!”

올리비아의 대답이 인식되는 순간 에이든은 너무 기뻐서 욕설이 터져 나올 뻔했다. 다급하게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지 않았다면 큰 소리로 욕했을 거다. 이미 내지른 소음에 놀란 듯 올리비아가 움찔했고 에이든은 숨을 참고 기다렸다.

올리비아의 뒤척임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에이든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방금 들은 소리가 믿기지 않았다. 너무 좋으면 사고가 굳는다는 걸, 에이든은 처음 경험했다.

아무 생각도 이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냥, 좋아서 심장이 터질 것같이 기뻐서.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들은 게 맞지? 올리비아가 좋다고 한 거 맞지?’

당장 깨워서 제대로 듣고 싶단 욕심과 참아야 한단 생각 사이에서 에이든은 방황했다. 다행히 참자는 이성이 이겨서 올리비아를 깨우진 않았다.

그래도 감격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의 인생에 이런 날이 오다니. 올리비아가 날 좋아하는 날이 오다니! 이러다 온몸이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에이든은 포효하며 기뻐하고 싶은 걸 억눌렀다.

올리비아의 행동들이 아무 의미가 없이 따랐던 게 아니라, 감정이 담겼단 걸 알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흘렀다. 지금 기분으로는 앞 구르기를 한 세 번쯤 하고, 옆 구르기는 다섯 번쯤 하고, 뒤 구르기는 한 열 번쯤 한 후 왈왈 짖으며 좋아 죽겠다고 외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세상이 아름답다. 환상적이다. 이 찬란한 세상에 내가 살아가고 있다니. 에이든은 아름다운 세상을 찬양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올리비아와 있으면 나날이 행복의 한계치가 갱신되었다. 에이든은 정말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소리를 죽이고 기쁨의 발광을 하고 나서야 조금 진정되었다. 저절로 히죽거리며 올라가는 입꼬리는 그냥 내버려 뒀다. 그는 신이 나서 올리비아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올리비아, 에이든 도련님 좋아?”

“으응……. 도련님 좋아.”

‘씨발, 좋아! 너무 좋아!’

올리비아에게서 똑같은 대답이 나왔다. 에이든은 기쁨에 떨며 소리 죽여 웃었다. 행복해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부들부들 떨며 기뻐하느라 숨이 막힐 정도였다. 올리비아가 좋단다. 내가 좋단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단다!

올리비아는 절대 저렇게 답한 적 없지만 기쁨에 미쳐 버린 에이든의 머릿속이 폭주했다. 어차피 생각이라 아무도 몰랐단 게 다행이었다. 그렇게 기쁨의 망상을 모락모락 쌓아 올리던 에이든은 어떤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올리비아가 제일 좋아하는 건 나인 걸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분명히 처음엔 올리비아가 좋다고만 해 줘도 좋을 것 같았는데, 막상 좋다는 말을 듣고 나니 최고로 좋단 말을 듣고 싶었다. 에이든은 무조건 올리비아의 첫 번째이고 싶었다.

욕심에 미쳐서 에이든은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하고 말았다.

“올리비아, 에이든 도련님이 좋아? 케이크가 좋아?”

그냥 넘어갔으면 행복함만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과욕을 부리면 망한다는 걸 알면서도 기쁨에 들떠 미쳐 버렸던 게 틀림없다. 에이든은 답을 기다렸고 올리비아는 사정없이 비수를 꽂았다.

“케이크가 좋아!”

‘뭐? 씨발!’

에이든은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계속 웅얼거리더니 이번엔 단호하게도 말해 열이 불쑥 올랐다. 이번에야 말로 깨워서 다시 묻고 싶었다. 막 이성과 싸우고 있을 때. 꿈속에서 케이크를 먹는 중인 것처럼 입맛까지 다시는 올리비아를 보고 말았다.

“케이크…….”

올리비아는 다시금 케이크를 중얼거리며 미련을 내보였다. 하늘을 유영하던 에이든의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기뻐서 펄떡거리던 에이든의 몸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씨발 케이크보다 못한 인생…….”

힘없이 중얼거리는 에이든의 눈가로 뜨끈한 눈물이 흘렀다.

* * *

“도련님 무슨 일 있으세요?”

오전에만 해도 즐겁다는 듯 웃던 에이든 도련님이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게 걱정이었다.

‘잠깐 낮잠을 자고 온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제게 등을 돌리고 힘없이 늘어진 모습이 이상했다. 혹시 낮잠 잔 거 들켰나? 올리비아는 도련님의 급변한 태도가 걱정돼 안절부절못했다.

“도련님?”

어디 아픈 거면 집사님께 말씀드려 의원을 불러야 하기 때문에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 에이든 도련님을 불렀다. 목소리에 반응해 힐끔 저를 돌아본 에이든 도련님이 다시 팩하고 베개에 고개를 기댔다.

올리비아는 놀라고 말았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반짝반짝 빛나던 분이 크게 상심한 듯 기운이 없었다. 꼭 시든 채소 같았다.

“도련님 어디 아프세요?”

“내버려 둬.”

에이든 도련님의 힘없는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놀라 발을 동동거렸다. 어쩌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자 에이든 도련님이 손을 들어 물러가란 듯 흔들었다.

“아픈 거 아니야. 나 지금 그냥 혼자 좀 있고 싶으니까. 네 할 일 해.”

“진짜 어디 아프신 거 아니죠?”

“응. 아픈 거 아니야.”

“네. 쉬고 계세요. 어디 아픈 거면 꼭 말씀해 주세요.”

올리비아는 눈치가 보였지만 에이든 도련님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어서 침실을 나갔다. 올리비아가 나가고 나서 에이든은 다시 축 늘어졌다.

케이크만도 못한 인생. 서러운 인생. 살아서 뭐 하니. 케이크보다 사랑도 못 받는데. 에이든이 축축 늘어져 끊임없이 자학을 했다. 씨발, 케이크를 세상에서 없애 버리든가 해야지. 아니지. 그럼 올리비아가 좌절하니까 그건 안 되지.

케이크 먹고 행복해하는 얼굴을 볼 수 없잖아. 그거 환장하게 예쁜데. 올리비아가 낮잠을 자는 동안에도 자학을 했지만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놈의 케이크 때문에 미치겠다.

“뭐 하십니까?”

등 뒤에서 불만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음성에 살짝 놀라긴 했지만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에이든은 다시 힘을 빼고 늘어졌다.

무슨 반응을 하기엔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다. 너무 커서 이 상처는 올리비아가 도련님이 최고예요를 연발하지 않는 이상 평생 회복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남은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잠이나 자고 있습니까?”

다시 들린 목소리엔 불만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 불만에 에이든은 분노했다.

“내가 마음이 아파서 좀 쉬겠다는데 잠이나 자고 있다고 비하하다니!”

에이든은 벌떡 일어나며 케일럽을 향해 베개를 던졌다. 그는 그 베개를 가뿐하게 받아 내며 놀람을 드러냈다.

“마음에 상처도 받는 사람이셨습니까?”

‘저 씨발놈이.’

케일럽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 더 화가 났다.

‘네가 내 상처를 알아? 케이크보다 못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걸 아냐고!’

에이든은 버럭 외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케일럽에게 내뱉는 순간 정말 더 하찮은 인생이 될 것 같아서 참았다.

“그래서 일은 잘 처리하고 왔어?”

“네. 잘 숨겨 놨습니다.”

“흔적은?”

“최대한 줄였습니다만 습격의 흔적은 남았습니다.”

케일럽이 눈치를 보면서 말했고 에이든은 때를 놓치지 않고 받아쳤다.

“제대로 하는 게 없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세자를 납치하는 일이었다. 왕세자에겐 당연히 호위가 붙어 있었고 그들과 마찰이 있으니 완벽하게 숨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침실에서 빈둥대던 인물이 흔적 조금 남겼다고 저리 말하니 케일럽은 배알이 뒤틀렸다.

“죄송합니다.”

“됐고. 꼬리가 잡힐 일은 없지?”

“네. 비처에 잘 숨겨 놨습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좋아. 그럼 접경 지역에서 더 크게 소란 피우라고 해.”

순간 케일럽은 에이든의 명령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질문하는 대신 곰곰이 생각했고 이내 답을 얻었다.

“협상하실 겁니까?”

“하겠지? 우리 쪽도 실제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잖아.”

“없습니까?”

에이든의 덤덤한 말에 케일럽이 놀라 되물었다. 그렇게 준비해 놓고 왜 실제론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지 모르겠단 말투였다.

“그렇게 충성을 다한다면서 그분 생각도 모르나?”

에이든이 친절한 설명 대신 비꼬기를 시전했고 케일럽의 표정은 순간 억울해졌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우리는 실리만 챙기면 되지. 이 나라가 말이야. 첫째란 것들을 그렇게 좋아해. 그놈의 장자. 그렇게 좋아하는 장자를 인질로 잡은 상태이니 순순히 요구 사항을 들어줄걸?”

케일럽은 참 의외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모르는 그분의 생각을 읽은 건 그렇다 치고. 에이든이 왕세자를 죽이는 게 아니라 협상의 카드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 하녀에 대한 집착을 생각하면 당연히 죽여 없앨 줄 알았다.

“요구 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요?”

“그럼 진짜 전쟁 치르는 거고. 슬슬 마무리해야지.”

아니, 실제로 전쟁 일으킬 생각이 없다면서 또 이번엔 전쟁을 일으킨다고 한다. 전쟁의 시작도 어이없게 하더니 에이든은 전쟁에 대해 참으로 가볍게 생각했다. 하긴, 이 남자가 언제는 인간의 목숨을 존중했나.

케일럽은 에이든이 참 운이 타고난 놈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 시기에 왕세자가 떡하니 영지에 방문하는지. 게다가 정식 방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요란한 호위가 없었다. 덕분에 왕세자 납치치고 굉장히 손쉬웠다.

“인질을 잡아 일처리를 하다니 참 비열하십니다.”

“몰랐어? 나 엄청 비열한데.”

에이든은 아무렇지 않게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괜히 말을 던졌던 케일럽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잠시 이 인간의 똘끼는 어디까지인가 고민하던 케일럽은 말을 돌렸다.

“그런데 물건은 이동시킵니까?”

왕세자는 모르고 했겠지만 에이든이 집착하는 올리비아를 노렸다. 만약 에이든에게 그 장면을 들키지 않았다면 미수로 끝나지 않았을 거였다. 왕세자가 올리비아를 욕심낸 것 말고도, 그녀를 괴롭히고 강압하는 현장을 본 에이든이 그냥 넘어갈까?

절대 아니다. 어떻게든 복수할 거라 여겼다. 아무리 협상패라고 해도 멀쩡한 모습으로 보내 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따로 명령이 없는 게 의아했다.

“그게 문제야.”

“뭐가 문제입니까?”

“사실 협상이니까 멀쩡히 돌려주는 게 맞거든?”

“그렇죠.”

“그런데 그러기 싫단 말이지.”

“멋대로 하실 줄 알았습니다.”

케일럽은 에이든의 반응을 예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자신이 아는 에이든이었다. 그런 케일럽을 흘끗 돌아본 에이든이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싶지.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잖아.”

케일럽은 이번엔 진짜 놀랐다. 워낙 제멋대로 사는 에이든이라 왕세자에게 당연히 무언가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성적인 생각으로 멈추고 있었다니. 그는 새삼스럽게 에이든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든은 심각하게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분명히 왕세자를 건드리지 않는 게 맞다. 이성적으로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납치할 때 큰 사고가 있었던 게 아닌 이상 멀쩡한 상태로 돌려줘야 제대로 협상이 될 터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정말 그러기 싫었다. 올리비아에게 흑심을 품고 봤다는 것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데, 그는 더한 실수를 했다. 감히, 올리비아에게 강압적으로 굴었고 그때 그녀는 울 뻔했다. 왕세자는 올리비아를 서럽게 하고 무섭게 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앞뒤 볼 것 없이 사고를 칠 것이냐. 그래도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것이냐.

“그럼 포장을 계속 곱게 유지합니까?”

케일럽은 다시 에이든에게 확인했다. 이렇게 제멋대로인 인물이 상관이라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말이 바뀌기 때문에 확답을 들어 놔야 제가 편했다.

“선심 써야겠네.”

“……선심 말입니까?”

케일럽은 그런 말이 저 잘난 입에서 나온 것도 웃기고, 정말로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것은 더 놀랍다는 시선으로 에이든을 응시했다. 그런 케일럽을 보며 에이든은 너그럽게 말했다.

“응. 놈이 올리비아 보고 세운 적 있는지 확인해 봐. 정말 결백하다고 하면 봐주게.”

세워? 뭘 세워?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거 말씀이십니까?”

케일럽이 질색하며 물었지만 에이든은 산뜻하게 대답했다.

“응. 네가 생각하는 그거.”

씨발, 이젠 하다하다 왕세자 놈 좆 세운 걸 확인해 보란다. 그가 바지를 홀랑 까고 다닌 것도 아닌데 그걸 무슨 수로 확인하라고 저 지랄인지 모르겠다. 오늘도 케일럽은 힘겨웠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라고 보십니까?”

질문하는 케일럽의 목소리엔 분통 터진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감정이 에이든에게까지 닿지는 않았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그러니까 에이든의 말은 왕세자가 토설하게 만들라는 거였다. 문제는 왕세자란 놈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래, 내가 하녀를 보며 발기했다!’라고 순순히 밝힐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고문까지 해 가면서 얻어 내기엔 정보의 수준이 너무 저급하지 않은가. 차라리 국가 기밀을 알아 오라는 게 속편하겠다. 그럼 질문하게 될 자신도 덜 수치스럽지 않겠는가.

케일럽은 에이든의 잡무를 돌보며 한숨만 늘어 가는 걸 느꼈다. 빨리 이 일을 처리해 버리고 얼른 제국으로 돌아가 에이든과 연을 끊고 싶었다.

“차라리 잘라 버리라고 하시죠.”

케일럽은 이번에도 빈정거림을 숨기지 못하고 내뱉었다. 그러자 에이든의 눈길이 물끄러미 와 닿았다. 또 너무 나갔나? 후회하는 그때.

“그걸 이제야 알아들었어?”

에이든이 툭 내뱉는 말에 케일럽은 기가 막혔다. 그럼, 처음부터 그러라고 말할 것이지 왜 괜히 사람을 복잡하게 만드냐는 말이다.

발끈해서 소리칠 뻔했지만 케일럽은 참아야만 했다. 게다가 이미 왕세자를 사로잡은 상태라 자르는 것 자체가 어려울 건 없었으니까. 다만.

“자르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자른 상태로 협상이 되겠습니까?”

협상의 기본은 몸 성히 돌려주는 것인 아니던가. 특히, 다른 부위도 아니고 생식기라면 문제가 컸다.

‘처음부터 협상을 생각했었다면 잡아 올 때 터트려 놓으라고 말할 것이지.’

차라리 그럼 편했을 거다. 납치 중에 일어난 사고는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잡고 나서 보관 중에 상처가 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런 케일럽의 고민을 에이든은 단번에 잘랐다.

“협상할 때 왕세자의 바지를 까 놓고 할 거야?”

그렇지. 협상할 때 왕세자의 바지를 까 놓고 할 건 아니지. 케일럽은 에이든의 말에 수긍해 버린 자신이 싫었다. 게다가 에이든의 말도 맞지만 그건 순간의 모면이었다.

“협상 후 돌아온 왕세자가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면 과연 왕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왕세자를 백치로 만들지 않는 이상, 잡혀 있는 동안 이쪽이 일부러 거세를 했다고 주절거릴 게 뻔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왕국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 할지도 몰랐다. 케일럽의 질문에 에이든은 무슨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자꾸 뭐가 걱정이야?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처음부터 소란이 계속 일어나는 거였어. 협상할 땐 조용했으면서 뒤늦게 난리치는 왕국이 잘못이지. 그 기회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구실이 생기면 우리가 좋은 거 아닌가?”

이야, 쓰레기가 여기 있네. 진짜 자기 인생 빼고, 아니지. 아끼는 하녀의 인생 빼고 다 하찮게 여기는 쓰레기가 여기 있었다.

케일럽은 자신의 일도 아닌데 입안이 써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이제 와서 무슨 명목으로 왕세자의 거시기를 자른단 말인가.

“기사인 제가 갑자기 다리가 풀려서 왕세자의 다리 사이로 쓰러지는 연기를 해야겠군요.”

“확실히 잘라.”

케일럽이 은근히 비꽜지만 에이든은 할 일이나 제대로 하라고 받아쳤다. 사실 에이든도 처음부터 왕세자의 물건을 자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괘씸해서 안 되겠다. 감히 제까짓 게 뭐라고 올리비아의 마음을 상하게 한단 말인가. 그 여린 아이가 오들오들 떨었다.

강압적으로 굴며 올리비아를 서럽게 했으니 그놈도 강압적으로 소중한 걸 잃어 봐야 했다. 복수가 너무 소소해서 에이든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죽이는 것보다는 물건을 자르는 게 더 비참한 복수니까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그럼, 자르고 어쩔까요?”

“어쩌긴. 왕세자를 멀쩡한 상태인 것처럼 다시 포장해서 경계 지역으로 넘겨. 애초에 납치를 노린 것처럼. 곧 왕세자의 실종 소식을 알아차린 왕국군이 움직일 텐데 근처에 계속 두는 건 위험하잖아?”

에이든이 빙글거리며 말은 참으로 쉽게도 했다. 케일럽은 이번에도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알겠다고 답했다.

시킨 일을 처리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에이든의 말처럼 납치된 장소 근처에 납치된 이를 두는 건 위험한 일이니까.

* * *

콜린스 백작가에서는 계절이 지나거나 낡아 못 쓰게 된 천을 이용해 걸레 같은 자질구레한 것을 만들어 써 왔다. 이번에 대거로 낡은 천이 생겼고 캐서린과 올리비아는 함께 바느질을 하기로 했다.

올리비아가 못 쓰게 된 천을 품 안 가득 들고 발랄한 걸음으로 캐서린의 옆에 주저앉았다. 모처럼 가뿐한 올리비아의 몸짓에 캐서린이 웃으며 물었다.

“오늘 따라 기운이 넘치네?”

“네! 요즘 푹 쉬어서 그런지 기운이 넘쳐요!”

“……요즘 푹 쉬어?”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가 싶었는데 올리비아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에 캐서린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하지만 눈치 쪽으론 둔한 올리비아는 캐서린의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어제 엄청 일찍 잤어요!”

해맑은 올리비아의 반응에 캐서린은 더욱 표정 관리하기가 힘들어졌다. 별채 내에서 같이 지내다 보니 에이든과 올리비아의 관계를 모를 수가 없었다.

특히 에이든 도련님이 노골적으로 티를 내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저 맹한 아이에게 과할 정도로 집착하고, 과할 정도로 들이대며, 틈만 나면 관계를 가져 왔단 것도 안다.

캐서린은 원래도 3층에 잘 가지 않았다. 자신의 담당 구역이 아니기도 했고 에이든 도련님을 조심하느라 더 그랬다.

하지만 두 사람이 몸을 섞기 시작한 후론 올리비아가 부탁할 때가 아니면 아예 위층엔 올라가지도 않았다. 아침이고, 낮이고, 밤이고 자기가 내킬 때마다 에이든 도련님은 올리비아를 품었으니까.

그 사실을 전부 알고 있는 캐서린은 올리비아가 푹 잤다고 해맑게 말하는 이 상황이 어쩐지 불길했다.

“음, 너 최근에 늦게 자는 편 아니었어?”

너 최근 도련님과 잠자리를 갖느라 잘 못 자지 않았어? 라는 말을 캐서린은 곱게 돌려 물었다.

“네. 도련님 때문에 늦게 잤었는데 요 며칠은 절 내버려 두셔서 푹 잤어요!”

올리비아가 이번에도 밝게 답했다. 얜 도대체 얼마나 해맑은 거야? 캐서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큼, 그럼 도련님이 요즘 밤에 일찍 주무시니?”

그럼, 요즘 도련님이 널 가만히 내버려 두니? 라는 말을 또 곱게 돌려 물었다.

“네. 요즘 일찍 주무세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올리비아의 얼굴을 보면서 캐서린만 초조해졌다.

“그럼……. 도련님과 잠자리는 갖지 않는 거야?”

굉장히 무례한 질문인 걸 알면서도 차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올리비아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여서 더 걱정이 됐다. 질문을 듣고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곧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은 없었어요.”

저 그래서 푹 잤군요? 라고 이제 깨달았다는 올리비아의 표정에 캐서린은 할 말을 잃었다. 올리비아가 도련님에게 별생각 없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에이든 도련님이 더 원해서 이어지는 관계란 것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집요하게 탐하던 사람이 달라지면 의심하거나 불길하지 않나?’

당사자가 아닌 캐서린이 더 놀라 다급하게 에이든 도련님의 태도를 짚어 봤다. 두 사람의 사이가 끝났다고 보기엔 에이든 도련님이 너무 조용했다. 질렸으면 짜증을 낼 텐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홀로 판단을 내리긴 일렀다. 어쨌든 두 사람을 아주 가까이서 관찰한 건 아니었으니까. 캐서린은 최근 에이든 도련님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올리비아는 최근에 자주 눈에 띄었다. 한동안 에이든 도련님에게 붙잡혀서 보기 힘들었던 것과는 달랐다.

“그럼, 혹시 최근에 에이든 도련님이 화 안 내?”

“도련님이 화를요? 아니요. 오히려 최근 들어 굉장히 조용하세요.”

올리비아가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도련님이 화를 내지 않는다는 굳건한 표정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참으로 태평한 성격이었다.

캐서린은 저도 모르게 올리비아를 빤히 훑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히히거리는 걸 보니 정말로 도련님이 성질을 부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도련님이 건드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패악을 부리지도 않는다니 의아했다. 캐서린이 보기에 에이든 도련님은 올리비아에게 미쳐 있었다. 그건 진짜 미쳤다는 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그런데 올리비아에게 손을 대지 않기 시작했다?’

처음엔 도련님이 삐친 건가 했다. 올리비아의 아둔함에 에이든 도련님이 혼자 발끈거리는 걸 알았으니까. 그런데 에이든 도련님이 올리비아에게 짜증도 내지 않는다면 삐친 건 아니란 소리였다.

에이든 도련님은 유치한 구석이 있어서 불만이 다 티가 나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삐친 것도 아니고 육체관계를 끊었다면 한 가지 결론밖에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끝이 났다.

‘그렇게 올리비아에게 미쳤었는데 이렇게 쉽게 식는다고?’

아무리 귀족들이 제멋대로고 감정도 쉽게 끓었다가 내린다곤 하지만. 캐서린은 복잡한 내심에 한숨을 삼켰다. 아랫사람이 모시는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것도 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올리비아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모른 척해야 했다. 괜히 평화로운 올리비아를 들쑤실 필요는 없다 여겼다.

“뭐……. 도련님이 화내시는 거 아니라면 상관없겠지.”

“혹시 도련님이 언니한텐 화내세요?”

캐서린의 질문이 이상했을까? 올리비아가 얼굴 가득 걱정을 담고 이상한 질문을 했다. 그 모습에 캐서린은 걱정해야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경고해 주고 싶은 걸 참았다.

‘애가 너무 맹해서 참 딱하다. 괜히 미안해지게.’

캐서린도 백작가에서 일한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올리비아에 대해서 떠도는 좋지 않은 소문도 다 알았다. 그만큼 캐서린도 올리비아를 좋게 보지 않기도 했다. 자꾸 나쁜 소리만 들으니 절로 편견이 생긴 거였다.

하지만 막상 같이 일해 보니 애가 야무지게 일하는 것뿐만 아니라 착하기까지 했다. 오히려 너무 착해서 그동안 그런 취급을 받아 왔단 걸 알 수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얌전히 당하기만 했을 테니까.

아마 에이든 도련님이 올리비아를 대놓고 끼고돌지 않았으면 계속 괴롭힘당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돌아온 후부터 자신이 올리비아를 아끼는 걸 숨기지 않았다.

시중을 들어 본 적도 없는 아이에게 전담 하녀 자리를 주고, 자신의 영역을 담당하게 하며, 가끔 짜증 내고 괴롭혔지만 올리비아의 미숙한 일 처리에 화를 내지는 않았다. 캐서린이 보기에도 이상한 올리비아의 일 처리를 허허 웃어넘겼다.

그리고 고작 하녀를 위해 주방장까지 새로 들였다. 주방장은 매일 케이크를 만들어 댔고 그건 올리비아의 입으로 들어갔다. 귀족의 음식을 하녀가 먹다니. 도련님이 대놓고 올리비아는 내 사람이라고 챙기는 거였다.

욕심에 눈이 먼 애니 같은 사람이나 올리비아를 괴롭혔지, 눈치 빠른 하녀들은 재빨리 태도를 조심했다.

그리고 에이든 도련님의 올리비아에 대한 비호의 정점은 그 애니가 사라진 사건으로 들 수 있었다. 정확히는 본채에서 올리비아가 손님의 시중을 들 뻔했고, 그걸 에이든 도련님이 구해 왔다는 이야기가 하녀들 사이에서 파다하게 퍼졌다.

에이든 도련님에게 당한 로저스 자작이 그 난리를 쳤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로저스 자작이 애니를 체벌했고 그 이유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애니가 로저스 자작에게 올리비아를 언급했던 거다. 하지만 에이든 도련님 때문에 그 일은 어그러졌고 로저스 자작은 애니에게 울분을 푼 것이다. 거기까진 작은 소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뒤 로저스 자작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죄로 갇혀 있던 애니가 실종되었다. 그 일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정말 감쪽같이 사라졌단다.

하녀가 사라지면 백작가에선 도망을 의심하고 찾아야 했지만 이상하게 침묵했다. 누구도 애니의 행방을 찾지 않고 오히려 쉬쉬했기 때문에 그 실종은 조용하고 빠르게 처리되었다.

그래서 에이든 도련님이 애니에게 무슨 일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다. 백작의 아들이라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 애니가 실종된 배후에 그가 있다고 다들 의심했다. 어리석은 몇몇 빼고는 대부분 올리비아를 조심히 대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건만 봐도 에이든 도련님이 올리비아를 가벼운 마음으로 상대하는 게 아니라 짐작했었다. 그리고 캐서린의 짐작에 확신을 준 것은 직접 목격한 사건 때문이다.

캐서린은 큰일을 겪고 혼란스러워하는 올리비아를 위해 그녀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뭐 아주 열심히는 아니더라도 이것저것 배려해서 사소한 것들은 3층에 직접 가져다주곤 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봐선 안 될 것을 보게 되었다. 에이든 도련님이 노골적으로 올리비아를 탐하는 모습 말이다.

응접실 소파에 올리비아를 엎어 놓고 에이든 도련님은 열심히 허리를 흔들었다. 그 음란한 열기에 놀랐고 대낮부터 뭐 하는 짓인지 소리칠 뻔했다.

그런데 올리비아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게 처음인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리 맹해도 강제적으로 당하는 거면 싫다고 했을 텐데.

“하응, 도련님 좋아요.”

“아, 거기요. 흐읏, 더 해 주세요!”

연신 중얼거리며 에이든 도련님의 행위를 부추겼다. 캐서린도 어엿한 성인이었고 육체관계 또한 가져 봤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보며 기겁할 정도는 아니었다.

못 본 척 물러서려 했지만 당황한 탓에 손발이 어지러워 저도 모르게 작은 소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에이든 도련님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캐서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몰래 뭘 훔쳐보냐고 소리를 지를 줄 알았다.

하지만 에이든 도련님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그는 소리치는 대신 나른한 눈웃음을 지었다. 마치 누가 보고 있는 걸 즐기는 것처럼 여유롭게 허리를 움직이며 검지를 들어 조용히 하란 신호를 내보였다.

캐서린이 반사적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에이든 도련님이 아름답게 생긴 건 알았지만 사람을 홀려 잡아먹는 악마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걸 보고 에이든 도련님이 사람이 있든 없든 멈추지 않을 거란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캐서린이 소리를 내지 않을 걸 확인한 에이든 도련님은 올리비아의 허리를 더욱 단단하게 틀어쥐었다.

“올리비아, 엉덩이 더 들어.”

“흐으…….”

올리비아가 에이든 도련님의 명령을 듣듯 발끝을 세우며 엉덩이를 추켜들었다. 더욱 훤히 드러나는 곳을 에이든 도련님은 제멋대로 탐했다.

올리비아의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성기는 무자비했다. 퍽퍽 치고 들어갈 때마다 질척이는 울림이 이어졌다. 캐서린의 시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캐서린은 발이 바닥에 붙기라도 한 것 같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의 행위를 넋을 놓고 바라봤다.

“허윽, 허읏, 도, 도련님…….”

올리비아의 헐떡임에도 에이든 도련님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 올리비아의 하체에 제 하체를 치대며 괴롭혔다. 얼마나 행위가 지속되었는지 흠뻑 젖어 번들거리는 성기를 끊임없이 올리비아에게 처박기 바빴다. 에이든 도련님은 머릿속에서 캐서린의 존재가 아예 사라졌는지 둘만의 시간을 즐겼다.

“후우, 어떻게 해 줄까?”

“아, 아아, 그만, 그만 싸 주세요. 흐읏!”

“흣, 정말?”

“네, 읏, 네. 어서!”

올리비아의 사정이 있고 나서야 에이든은 허리를 크게 쳐올렸다. 그 상태로 움직임을 멈추고 바르르 떠는 걸 보니 그제야 사정한 듯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보게 된 에이든 도련님과 올리비아의 잠자리는 굉장히 노골적이었다. 캐서린의 뺨이 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저속하면서도 정력적인. 아무튼 대단했다.

어쨌든 에이든 도련님이 단순한 성욕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진심으로 대하는 건지 캐서린은 모르겠지만 맹한 올리비아에겐 어쩌면 이 상황이 다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야무지게 자신의 인생을 챙길 줄 아는 애라면 귀족과 얽히지 않는 게 속 편했다. 저런 관심은 받지 않는 게 나았다.

하지만 올리비아처럼 제 이익을 챙기지 못하는 성격이라면? 그러면 차라리 아껴 주는 도련님의 품 안에 있는 게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거 아닐까?

특히 도련님이 대놓고 끼고도니 그랬다. 그 정도로 예쁨을 받는다면 귀족의 애첩 노릇도 나쁘지 않을 거였다. 캐서린이 그런 생각을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두 사람의 관계가 이상해졌다. 물론 완전히 틀어진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관계가 멈췄다는 게 캐서린은 어떤 상황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진짜 에이든 도련님이 올리비아에게 질린 건가? 귀족들의 거만한 성향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올리비아를 생각하면 씁쓸했다. 이 착한 것이 결국 버림받았다니, 얼마나 안쓰러운지.

그래도 질렸다고 바로 내치지 않은 게 어딘가. 사실 귀족이 하녀를 제 마음대로 취하고 질린 후 버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보기 싫다고 내치지 않고 그냥 계속 이대로 일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언니 정말 도련님한테 혼났어요?”

캐서린이 생각하느라 길게 침묵하자 올리비아가 울먹였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자신의 속내가 복잡하다고 올리비아의 속내마저 복잡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캐서린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아니야. 에이든 도련님이 나한테 화내실 일이 뭐 있어.”

“그렇죠? 대부분은 친절하시죠? 도련님이 화내는 건 가끔이에요.”

올리비아의 해맑은 대답에 캐서린은 연민이 사라지고 황당함이 자리 잡았다. 누가 친절하다는 거지? 전지적 올리비아 시점인가? 객관적으로 에이든 도련님은 절대 친절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를 한 번이라도 본 하녀라면 다 똑같이 여길 거다. 전형적인 귀족으로 굉장히 무례한 인간이라고.

캐서린은 아직도 도련님과의 그 충격적인 첫 만남을 잊지 못했다.

‘지금 나보다 못생긴 이들의 시중을 받으라는 거야?’

에이든 도련님이 했던 말은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까지 열이 뻗쳤다. 스스로 최고의 미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올리비아에 비하면 자신의 미모가 모자란 것도 알지만! 그걸 저런 식으로 듣는 건 또 기분이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별채 담당이 되면서 더 확실하게 느꼈다. 에이든 도련님은 첫 만남에 가졌던 느낌대로 무례하고 제멋대로였다.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화를 내고 억지를 부렸다. 아주 전형적인 귀족의 모습이었다.

캐서린은 보이는 곳에 청소 도구를 뒀다고 에이든 도련님에게 눈물이 쏟아지도록 혼난 적이 있었다. 청소를 하다가 갑자기 하녀장님이 불러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에이든 도련님이 그걸 본 것이었다. 평소 잘 내려오지도 않던 사람이 그날따라 왜 그곳에 왔는지 참 운이 없는 날이었다.

그리고 처음 한 실수인데 그러지 말라고 좋게 충고하면 될 것을 아주 고양이가 쥐 잡듯이 잡았다. 그날 캐서린은 에이든을 저주하며 잠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든 도련님이 친절하다는 올리비아의 말에 캐서린은 절대 동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편을 들면 캐서린이 아니라고 해 봤자 들리지 않을 테니까. 캐서린은 에이든 도련님은 원래 예민한 사람이다, 라는 말을 삼키며 그냥 대충 넘겼다.

“그래. 도련님이 가끔 친절하시지.”

캐서린은 정말, 대충, 무성의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 속에 작은 비꼼까지 담았다. 하지만 그게 올리비아에겐 다르게 와닿았나 보다. 놀랍게도 올리비아가 눈빛을 반짝이며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죠? 도련님은 정말 친절하세요! 요즘엔 일부러 어지르시지도 않고, 음료를 쏟지도 않고요. 케이크도 엄청 자주 챙겨 주세요! 어젠 저 케이크 두 조각이나 먹었어요!”

‘아니, 안 착해. 어떻게 ‘가끔’이 ‘정말’로 변할 수가 있어? 그리고 케이크는 너만 챙겨 주는 거겠지.’

캐서린은 그동안 에이든 도련님에게 케이크 한 조각 제대로 얻어먹은 적 없었다. 아니, 얻어먹긴 했다. 올리비아가 먹고 남긴 것을 주방장이 챙겨 줘서. 그러니까 에이든 도련님이 자신에겐 한 번도 케이크를 챙겨 준 적은 없는 거였다. 이번에도 캐서린은 턱 끝까지 오른 말을 참았다.

“그랬어? 올리비아는 좋았겠네? 케이크 엄청 좋아하잖아.”

대신 이번에도 정말 적당히 맞장구쳐 줬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반응은 캐서린의 예상보다 열렬했다.

“네! 엄청 맛있었어요. 그리고 도련님은 참 아름답지 않아요? 요즘 도련님 보면 막 눈이 부실 때가 있어서 눈을 꽉 감아야 해요. 태양 빛도 없는데 말이죠.”

마치 그동안 에이든 도련님을 자랑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올리비아가 줄줄 도련님을 칭찬하는 말을 꺼냈다. 표현이 참 귀엽기까지 했다. 그래도 자기 일처럼 도련님을 자랑하는 올리비아를 보며 캐서린은 왜 에이든 도련님이 그녀를 끼고도는지 이해가 갔다.

올리비아를 조금만 안다면 저 생각은 아부가 아닌 진심이란 걸 알 거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평소 에이든 도련님을 저런 식으로 대했겠지. 도련님은 착한 사람, 도련님은 좋은 사람. 이런 온전한 호의를 받은 사람은 그 호의에 더 끌릴 수밖에 없었다.

“아 참! 그리고 도련님이 엄청 똑똑한 것도 아세요? 맨날 어려운 책 읽으신다니까요? 로라 언니는 에이든 도련님이 놀기만 한다고 했는데, 절대 아니에요. 도련님도 곧 훌륭한 일 하실 거예요. 도련님이 그런다고 하신걸요.”

올리비아의 재잘거림이 이어질수록 캐서린은 걱정되기 시작했다. 스스로 모르는 것뿐이지 이미 올리비아의 감정이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맹하게 지나가는 게 나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을 텐데. 주인과 하녀의 관계였다. 괜한 꿈을 꿨다가 힘든 것은 올리비아였다. 캐서린은 가능한 두 사람의 관계에 참견하지 않으려 했지만 올리비아가 이러니 물을 수밖에 없었다.

“올리비아. 너 혹시 에이든 도련님 좋아하니?”

“네. 도련님은 좋은 분이잖아요.”

올리비아의 대답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렇게 거침없이 답할 줄 몰라서 오히려 캐서린이 당황했을 정도다. 하지만 깜빡거리는 올리비아의 눈이 너무 올곧아서, 설렘과 수줍음 같은 말랑한 감정은 조금도 없어서 캐서린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도련님이 네게 케이크를 줘서?”

“네.”

들켰네! 라는 올리비아의 표정에 캐서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빳빳하게 굳으려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런 의미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런 의미 말고요? 진지하게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올리비아의 커다란 눈이 다시금 끔뻑였다.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는 순진한 반응이었다.

아니, 분명히 처음엔 별생각 없이 몸을 섞을 수 있다. 어차피 하녀는 귀족의 요구를 거절할 권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몸을 섞을 정도면 한 번쯤 감정을 되짚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감정을 꼭 돌아봐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귀족과의 관계에서 감정을 가졌다간 상처받는 건 하녀일 뿐이니 그러지 않는 건 맞지만.

“그래도 그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 의식되지 않니?”

“어떤 의식이요?”

캐서린은 올리비아가 너무 아무렇지 않으니 실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예민한 건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물어도 올리비아는 백치 같은 눈으로 캐서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이런 애한테 무슨 고민거리를 던져 주겠나.

“으음, 아니야. 네가 별생각이 없다면 그걸로 됐지. 혹시 도련님이 네게 짜증을 자주 부리거나 하면 꼭 알려 줘.”

캐서린은 단어를 조심하며 말하려니 올리비아에게 주의를 주는 게 쉽지 않았다.

“도련님 요즘엔 화 안 내시는데…….”

“너한테 잘해 주시는 거 알아. 그런데 그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정 견디기 힘들어지면 나한테, 아니다. 집사님한테 말씀 드려. 담당 구역 바꿔 주실 테니까.”

올리비아의 얼굴이 뚱해지는 걸 알면서도 캐서린은 경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맹한 아이라면 에이든 도련님이 그녀에게 질려서 온갖 패악질을 부려도 묵묵하게 일할 걸 아니까. 이게 캐서린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네.”

하지만 대답하는 올리비아의 목소리엔 부루퉁함이 스며들었다. 한참 신나서 에이든 도련님에 대해 좋은 점만 알려 드렸는데. 캐서린 언니가 왜 이런 식으로 말하는지 모르겠다. 도련님이 화를 안 낸 지는 오래였다.

그리고 도련님이 화나셨다고 해도 그 화를 푸는 건 쉬웠다. “도련님 하실래요?” 하면 대부분 기분이 풀렸으니까. 절대 크게 혼날 일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도련님의 담당이 아니게 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도련님은 정말 착하고 친절하신데. 그리고 내가 전담 하녀인데. 나 일 잘하고 있는데.’

올리비아는 이상하게 점점 더 기분이 좋지 않아 바느질하던 것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저 남은 건 올라가서 할래요. 도련님이 언제 찾으실지 모르니까요.”

캐서린이라고 올리비아의 뚱함을 모르겠는가. 워낙 숨길 줄 모르는 아이라 다 티가 났다. 하지만 캐서린은 올리비아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아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걱정되었다.

“그래, 가서 해.”

올리비아는 대충 인사하고 위층으로 향했다. 괜히 발걸음이 씩씩거렸다. 못다 한 바느질을 해야 하는데 생각할수록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뭐지? 기분이 왜 이러지?’

올리비아는 혼자 꿍얼거리며 아까 캐서린 언니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사실 올리비아는 캐서린 언니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최근 도련님의 밤시중을 들지 않았다는 걸 자각했다.

그러고 보면 꽤 귀찮을 정도로 관계를 요구하셨던 도련님이 요즘엔 왜 그럴까? 그렇다고 도련님이 캐서린 언니의 말처럼 화를 내거나 그런 건 조금도 없었다.

도련님이 귀찮게 굴지 않으니 편해야 하는데. 분명히 도련님이 그만둔 걸 의식도 못한 상태였는데. 막상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혹시, 진짜로 도련님이 화를 낼 만한 실수한 게 있나?’

올리비아는 정말 알 수 없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도련님을 찾았다. 도련님은 친절해서 물어보면 다 답해 주시니까 직접 물어보면 됐다. 이 시간이면 서재에 계실 거다.

“도련님!”

올리비아는 서재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도련님을 불렀다. 에이든 도련님은 예상대로 책상에 앉아 서류를 열심히 보시고 계셨다. 부름을 들은 에이든 도련님이 고개를 들었고 올리비아는 눈이 마주치자 눈이 부셔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았다.

요즘 자꾸 도련님만 보면 이랬다. 막 어지럽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느낌이었다. 잠시 심호흡하고 눈을 뜨자 조금 진정됐다. 올리비아가 다시 눈을 뜰 때까지 도련님은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받자 올리비아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질문을 하러 왔는데 어쩐지 묻기 힘들었다. 그런 머뭇거림을 읽은 듯 에이든 도련님이 손안에 쥐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에이든 도련님의 목소린 차분했고,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도련님의 기분을 알 수 없었다.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도련님한테 말을 걸기 쉽지 않았다.

“차 준비해 드릴까요?”

올리비아는 답지 않게 궁금했던 질문을 꺼내지 못하고 다른 말을 했다. 이상하게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아니 괜찮아.”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리고 가만히 응시하는 눈빛은 뭐 더 할 말이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필요한 거 있으면 꼭 불러 주세요.”

올리비아는 결국 질문하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서재의 문을 닫고 나서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이상하게 목이 멨다. 기분이 울렁거렸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

얼마 전만 해도 눈이 마주치면 도련님의 눈빛이 부드러워졌었다. 그리고 도련님 하고 부르면 손을 내밀어 줬는데. 그 손 위에 손을 올리면 부드럽게 당겨 안아 줬는데. 잠자리가 딱 끊긴 후로 그런 일이 없었다.

물론 도련님이 꼭 그렇게 안아 줘야 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은 하녀니까. 그런 일이 당연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속이 많이 따끔거렸다. 올리비아는 갑자기 기운이 쭉 빠져서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 * *

“아, 짜증.”

에이든은 신경질적인 기분이 되어 눈을 감으며 손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끈질기게 괴롭혔다. 속을 오르내리는 화끈한 열기는 어떻고.

방금 올리비아가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말을 걸어서 더 열이 올랐다. 이놈의 몸뚱인 올리비아만 보면 자동으로 반응하지 않는가. 시답지 않은 대화만 하고 보냈더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귀여운 얼굴을 보는 순간 엎어 놓고 치마를 걷어 올리고 제멋대로 탐하고 싶은 걸 참고 또 참았다. 이 풀지 못하는 열기에 에이든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왜 짜증을 부리십니까?”

“짜증 나니까 짜증을 내지.”

케일럽의 반문에 에이든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 날카로움은 지금까지의 짜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욕구 불만입니까?”

케일럽의 말을 듣고 에이든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그런가? 이게 정말 욕구 불만인가?’

사실 에이든은 자발적 금욕 중이었다. 잠든 올리비아에게 질문을 해 좋아한단 말을 들은 후. 멍청하게도 거기서 만족 못하고 그놈의 케이크와 승부를 벌였다가 완패한 이후부터였다. 괜히 시름에 잠겨서 올리비아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생리적 반응이 없단 소리가 아니었다. 지금도 잠깐 올리비아의 얼굴만 봤다고 의지는 벌떡 일어섰다. 의지 놈이 반응을 하니 신체적 결함은 절대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무거워 손을 내밀기 꺼려졌다. 작은 심리적 문제랄까.

혹시 이대로 케이크를 이기기 전엔 손대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느낌이 살짝 들긴 했다.

그 와중에 또 올리비아 얼굴만 보면 열이 오르니 미칠 지경이다. 요즘 자신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올리비아가 답지 않게 자꾸 주변을 기웃거렸다. 평소와 다르게 먼저 다가와 질문하는 모습이 환장하게 귀여웠다. 당장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귀여움을 볼 때마다 에이든은 불쑥 열이 올랐다. 그 풀지 못하는 열기는 짜증으로 나타났고 여기서 그 짜증을 받아 줘야 하는 대상은 딱 한 명뿐이었다.

늘 에이든의 옆을 지켜야 하는 케일럽. 그는 에이든의 쓸데없는 신경질을 다 받아 내느라 머리털이 다 사라질 지경이었다. 이러다 젊은 나이에 대머리가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계속 들었다.

만약 대머리가 되어 버리면 꼭 에이든에게 소송을 걸고 말 테다.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 거지 같은 인간의 곁에 있으며 자신의 인성이 점점 더 박살 나는 기분이다. 기사의 표본이었던 자신이! 말끝마다 험한 말을 떠올리게 되다니! 케일럽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겉으론 멀쩡하게 말을 했다.

“그러지 말고 안으시죠. 요즘 하녀도 곁을 얼쩡거리지 않습니까?”

“네가 보기에도 올리비아가 내 주변을 기웃거리는 거 같지?”

그래, 그리고 이 점이 너무나 신경 쓰였다. 그동안의 관계에선 에이든이 올리비아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왔다. 당연히 올리비아는 거절하지 않았고. 그렇게 관계가 이어져 왔으니까 에이든이 손을 내밀지 않는 지금 그녀와의 잠자리는 뚝 끊겼다.

그런데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하게 올리비아가 에이든의 곁을 기웃거리는 게 늘었다. 마치 봐 달라는 것처럼 흘긋 보고 가지 않나. 용건도 없으면서 말을 붙이질 않나. 예전엔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던 이가 지금은 먼저 눈에 띄는 곳에 나타났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혹시 좋다더니 그 마음의 반영일까?’

올리비아 안에서 조금은 자신의 위치가 더 격상한 건 아닐까? 별의별 즐거운 생각으로 번지다가도, 끝은 케이크보다 못한 인생으로 결론이 났다. 그때마다 세상에서 케이크를 없애 버리고 싶단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러다가 케이크가 사라지면 올리비아가 시무룩해할 걸 떠올려서 그건 포기해야 했지만.

‘아, 근데 진짜로 왜 주변을 배회하지? 귀엽게.’

그 귀여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에이든은 입안이 근질거렸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입에 넣고 물고 빨고 싶었다.

그런 표정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케일럽이 빈정거렸다.

“그러니 욕구 불만이나 해결하시죠? 어차피 거절하지 않을 텐데요.”

“내 하반신 사정은 신경 끄고. 왕세자 잘 옮기고 있어? 꼬리는 안 붙었고?”

케일럽은 그 하반신 사정 때문에 자신이 고달프지 않냐는 말을 참아야 하는 참된 극한 직업을 체험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호위 기사가 제일 힘든 일임을 요즘 통감하고 있었다.

하긴 저 인간 때문에 같은 남자로서 해서는 안 될 죄질인 남자의 소중한 부위도 잘라 봤는데 더한 게 뭐가 있나 싶다. 이 인간을 만난 뒤로 인성뿐만 아니라 인생까지 썩어 가고 있었다.

“네. 제대로 옮기고 있습니다. 그보다 곧 백작가에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이미 예정된 일이었기에 에이든은 놀라지 않았다.

“왕실에서 왕세자의 실종을 알아차렸나?”

케일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실종이 아니라 납치라는 흔적도 발견했지요.”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왕실 기사단도 생각보다 무능하지는 않나 봐.”

“잡을 때 흔적이 남았으니까요.”

조사단이 머저리가 아니니 조금만 조사하면 왕세자가 마지막으로 머무른 곳이 콜린스 백작가임을 알 거다. 당연한 순으로 그들은 백작가를 조사해야 했다.

“조사단이 언제쯤 백작가에 도착할까?”

“책임자의 성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하루 이틀이면 될 겁니다.”

딱 예상했던 답이었다. 에이든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즐거움을 내비쳤다.

“아, 기대된다.”

얼른 이놈의 백작가가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 그럼, 이제 어쩌냐고 울먹이는 올리비아를 홀랑 안아 들고 떠날 텐데. 그럴 날도 머지않았다고 여기며 에이든은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번뜩 잊고 있던, 아니 미뤄 뒀던 일이 떠올라 몸을 튕겼다.

“참, 그거 어떻게 됐어?”

“뭘 말입니까?”

“켈타족. 그들에게 접근한다고 하고 어떻게 됐지?”

에이든은 그들이 찾는 사람이 올리비아가 아닐까 의심했다. 정확히는 올리비아의 어머니겠지만 이미 그분이 돌아가신 이상 켈타족이 마지막에 찾을 존재는 그분의 딸인 올리비아였다.

전에 켈타족에게 접근해 보라고 시켜 놓고 잊고 있었다. 엄한 놈이 등장해서 올리비아를 괴롭혀 그 복수를 우선시하느라 깜빡하고 있었다. 이 중요한 일을. 에이든은 올리비아와 연관만 되면 자신이 굉장히 단순해지는 걸 깨달았다.

“접근엔 성공했습니다만 의외로 그들이 말을 아끼더군요.”

접촉해 떠보긴 했지만 제대로 된 정보는 듣지 못했단 소리다. 무슨 대단한 비밀을 숨기고 있기에 말을 아낀단 말인가. 갑자기 에이든은 초조해졌다. 올리비아와 연관된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문제의 여지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아니, 말을 아끼면서 어떻게 사람을 찾는다는 거야?”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담담한 케일럽의 대꾸에 에이든이 짜증스레 되물었다. 일 처리를 거지같이 했다면 그의 처지도 거지같이 만들어 줄 거라 생각했다.

“우선 그들을 영지 밖으로 유인했습니다.”

“유인?”

“네. 영지 안에서 계속 머물다간 혹시 이쪽의 정보를 얻을지 모르니까요. 가짜 정보를 만들어 그걸 따라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에이든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의외로 케일럽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 에이든은 나름 감탄했다.

“대단하네.”

머리라곤 쓸 줄 모르던 기사가 언제부터 일을 이렇게 잘하게 되었을까? 역시 사람은 굴리면 굴리는 대로 발전하긴 하나 보다.

“흔적 하나 만드는 거야 쉽지요.”

어쩐지 케일럽의 음성이 뿌듯했다. 일을 알아서 척척 했다는 점에서 놀란 건데, 케일럽은 일 자체를 잘했다고 칭찬한 거로 받아들인 듯했다. 뭐 그게 그거니까 상관은 없나.

“그럼 지금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다는 거지?”

“네. 사람을 붙여 뒀으니 변동 사항이 있으면 연락이 올 겁니다.”

에이든은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놀랐다. 일 처리가 이렇게 깔끔하다니. 이젠 호위 기사가 아니라 보좌관 노릇을 톡톡하게 하고 있었다. 일이 마무리되고 제국에 가게 되면 꼭 케일럽을 임시 말고 전담 호위 기사로 보내 달라고 해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걸로 끝나면 안 돼. 알지? 왜 찾는지가 가장 중요한 거.”

“걸리지 않는 선에서 계속 떠보라고 이야기해 놨습니다.”

케일럽은 에이든이 자신의 안위와 관련된 끔찍한 생각을 하는 중인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에이든은 다시 방만하게 몸을 소파에 눕혔다. 일이 착착 진행되는 건 언제나 즐겁다. 특히 남들이 헛다리 짚거나 불행해지는 일은 보람까지 느껴졌다. 에이든은 한결 누그러진 기분으로 여유를 만끽했다.

* * *

에이든이 올리비아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두 사람이 완전히 내외하는 건 아니었다. 에이든의 시중을 드는 건 올리비아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마주했다. 단지 접촉이 조금 줄었을 뿐이다.

그래도 에이든은 행복했다. 원래 에이든은 올리비아만 보면 행복했으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옆에서 숨만 쉬어도 행복했다.

하지만 에이든은 최근 미묘한 감정 때문에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니까 기쁘면서도 속이 덜덜덜 떨리고, 한편으로 참담함이 느껴지는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도 저녁 식후로 나온 디저트를 올리비아에게 주었다. 연신 포크를 놀리며 눈을 반짝이는 올리비아는 귀여웠다. 얼마나 맛있는지 허겁지겁 입안으로 집어넣기 바빴고 입가에 크림이 묻는 것도 모르고 먹고 있었다.

직접 닦아 주고 싶은 마음을 에이든은 꾹 참았다. 손을 내밀지 않기 위해 턱을 괴고 올리비아를 구경했다.

“맛있어?”

“도, 도련님! 이거 최고예요! 초코 맛 케이크라니! 진짜 맛있어요!”

표정 가득 행복함을 숨기지 못하는 올리비아는 정말, 정말, 정말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내내 눈치를 보던 것은 까맣게 잊은 듯 올리비아는 케이크를 먹는 시간엔 솔직하게 즐거워했다. 너무 예뻐서 보고 있기만 해도 에이든은 입에 침이 고였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지?’

깜빡이는 눈은 얼마나 귀엽고, 오물오물거리는 입술은 앙증맞고, 배시시 웃느라 올라간 뺨은 만지고 싶었다. 사람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 이 정도로 사랑스러우면 사람이 맞는지 의심해야 했다.

에이든은 올리비아를 보는 것만으로 속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자신을 좋아하다니. 얼마나 짜릿하고 황홀한 일이란 말인가. 기뻐서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진짜 케이크는 너무 좋아요!”

올리비아의 발랄한 외침에 에이든의 행복은 파사삭 식고 말았지만. 그렇게 행복하던 마음이 차디차게 식으며 한 가지만 떠올랐다.

케이크만도 못한 인생.

“씨발, 진짜…….”

에이든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이 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온 거였다. 그런 에이든을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었다. 에이든은 포크질이 멈춘 게 신경 쓰였다.

“왜? 괜찮아. 더 먹어.”

에이든이 말해 주자 올리비아는 다시 포크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보다 한결 느려진 움직임이었다. 한 입 떠서 냠 맛을 보고 있던 올리비아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또 눈치를 보는 모양새였다.

괜찮다고 얼른 먹으라고 손짓했지만 올리비아는 포크를 입에 물고 에이든을 흘긋거렸다. 올리비아가 그렇게 좋아하는 케이크를 마다했다는 게 의아해서 결국 에이든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도련님, 저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올리비아가 조그마한 입술을 벌리며 물었을 때, 에이든은 이상하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되었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그동안 고민했던 내용을 털어놓는 건가? 올리비아가 고민할 일이 뭐가 있지? 혹시 별채에 숨어서 드나드는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챘나?

에이든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았다. 하지만 최고로 쉬운 것 같으면서 어려운 존재가 올리비아였고 그만큼 그녀의 생각을 에이든은 짐작할 수 없었다. 결국 뭐든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거다. 에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응. 말해 봐.”

“진짜 궁금했던 건데요.”

“괜찮아. 말해. 다 알려 줄게.”

올리비아가 쉽사리 질문하지 못하자 에이든은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불안한 듯 주변을 훑던 올리비아가 에이든과 눈을 마주쳐 왔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씨발이 무슨 뜻이에요?”

씨, 씨발이라니. 저 조막만 하고 어여쁜 입에서 지금 씨발이란 단어가 나온 건가? 너무 순수한 올리비아의 눈동자에 에이든은 숨이 턱 막혔다. 갑자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인생 최고의 문제를 눈앞에 뒀다는 걸 짐작했다.

에이든은 제 입버릇이 예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험한 말을 쓰는 모습이 저속하고 없어 보인다고 해도 상관 안 했다. 자신이 뭐 엄청난 대단한 인물이라고 체면을 차리면서 산단 말인가. 그냥 편하고 제멋대로 사는 게 최고라고 생각해서 말을 곱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막상 올리비아의 입에서 저 단어가 나오니 진짜로 숨이 콱 막혔다. 누군가 억지로 숨통을 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올리비아가 씨발이 욕이란 것도 모르고 있었단 사실에도 기가 막혔다.

‘씨발이 뭐냐니. 씨발은 그냥 씨발이야. 씨발!’

아니, 뜻은 몰라도 그때의 상황이나 어조를 보면 대충 안 좋은 뜻인 거라는 걸 알아차려야 하는 거 아닌가? 하긴, 올리비아지. 그런 걸 전부 알아차리면 올리비아가 아니지. 굳어 버린 에이든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올리비아가 뒤이어 조잘거렸다.

“도련님이 자주 씨발, 씨발 말씀하시는데, 무슨 뜻인지 정말 궁금했어요.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모른다고 혼날까 봐 묻지 못했어요. 씨발이 무슨 뜻인지 알려 주시면 안 돼요?”

올리비아의 입에서 씨발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에이든의 심장에 날카로운 것이 푹푹 박혀 들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올 땐 별생각이 없었는데, 저 앙증맞은 입술 사이로 흩어지는 단어가 참 저속해 보였다.

세상 제일의 천박한 단어가 올리비아의 순수성을 훼손한 것 같았다. 이 예쁜 아이를 자신이 망치는 것만 같았다. 에이든은 이대로 내버려 두면 올리비아의 입에서 계속 씨발이 나올 것 같아 다급하게 정색했다.

“쓰지 마. 나쁜 뜻이야.”

“나쁜 뜻이요?”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눈동자가 쏟아질 정도로 크게 뜨인 눈은 그녀가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곧 미간이 좁혀지고 아랫입술을 꽉 무는 올리비아의 표정에 에이든은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응. 욕이야. 아주, 아주 나쁜 의미니까 쓰지 마.”

“도련님, 그동안 그렇게 나쁜 욕을 많이 써 왔던 거예요?”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처연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그렇게 욕을 많이 했냐고 꼭 비난하는 것 같았다. 에이든의 심장이 옥죄어 왔다. 이젠 아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씨발, 그동안 이거 물어보고 싶어서 눈치를 봤구나. 올리비아의 이상 행동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몹쓸 짓을 저지른 것 같은 죄책감에 에이든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죄책감이란 단어는 사전에만 나오는 줄 알았다. 진짜 죄책감이란 걸 살면서 느끼는 날이 올 줄이야. 이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나도 앞으로 안 쓸 거니까. 너도 쓰지 마. 알겠어?”

“……네.”

대답하는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입을 삐죽이고 있는 올리비아를 보니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뻔했다.

“그것보다 케이크 다 먹었어? 안 먹으면 치우고.”

에이든은 얼른 말을 덧붙여 올리비아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아니요. 다 먹을 거예요!”

치운다는 소리에 올리비아가 눈을 크게 뜨더니 허겁지겁 포크질을 이어 갔다. 한 입 먹자마자 그녀의 표정은 달콤함에 사르르 풀렸다. 그리고 다시금 포크질에 집중했다.

에이든은 케이크 효과로 올리비아가 욕에 대한 건 싹 잊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 앞에선 물 마시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더니. 이러다 올리비아가 욕을 배울 뻔했다.

이 착한 아이에게 무슨 몹쓸 짓을 저지를 뻔했단 말인가. 좋은 거, 순수한 거만 주기도 바쁜 와중에. 에이든은 그동안 자신의 말투를 되짚어 봤다. 말끝마다 씨발거렸지. 생각 없이 말하긴 엄청 말했다. 식은땀으로 두피까지 축축해질 지경이었다.

앞으로 말조심을 해야겠다고, 가급적이면 욕은 속으로만 써야겠다고 에이든은 굳게 다짐했다.

* * *

“도련님 주무실 거죠?”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물음에 눈을 꼭 감고 침대 시트를 부여잡았다. 올리비아가 속삭일 때마다 속이 뜨끈해졌다. 또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풍기는 향기에 코를 절로 벌름거리게 되었다. 본능은 손을 뻗으라 하지만 그러지 않아야 했다.

지금 에이든이 손을 내밀면 올리비아는 거리낌 없이 침대로 올라올 거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옷을 벗고 아무렇지 않게 다리를 벌릴 거다. 자신의 성기를 냠냠 맛있게 먹어 치우겠지.

알기 때문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에이든이 참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케이크로 생긴 마음의 상처 때문이 아니다. 바로 올리비아와 관계를 재정립하고 싶었다.

올리비아가 자신을 ‘좋다’라고 생각한 걸 알게 된 순간. 더 욕심이 나 버렸다. 그냥 좋아라는 가벼운 감정 말고, 진심으로, 제대로 이성으로 봐 주었으면 했다. 그냥 도련님의 말씀이니까 따르는 게 아닌, 자신을 원해서 안기길 바랐다. 이젠 몸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에이든이 올리비아의 몸으로 만족 못한다는 것 자체가 말은 안 되지만. 어쨌든 에이든은 그냥 올리비아의 전부를 갖고 싶었다. 생각, 마음까지 모든 것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다.

그러니 올리비아를 유혹해 볼 참이다. 올리비아의 입에서 ‘도련님이 최고로 좋아요’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노력해 봐야겠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올리비아를 안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막상 유혹할 생각을 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복잡하기도 했다. 상대가 올리비아니까.

여기까지 떠올리자 옆에서 얼쩡거리는 올리비아 때문에 서서히 힘이 몰리던 하반신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이럴 때 보면 참 하찮은 의지 새끼였다.

‘그래 시든 김에 계속 시들어 있어라. 흥분해 봤자 열만 오르지.’

에이든은 모든 걸 내려놓자는 마음가짐으로 말했다.

“바로 잘 거야.”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러자 올리비아가 빠르게 답하며 시트 정돈을 마무리하고 몸을 돌렸다. 씨발, 며칠 동안 손도 안 댔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달라붙다가 손도 안 대면 이상함을 느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이상함은 못 느껴도 아쉬움 정도는 느껴야 하는 거 아닌가?

분명히 올리비아도 잠자리는 즐겼다. 잘 느끼고 가끔은 더 원할 정도였는데. 올리비아의 매정한 모습에 에이든은 발끈했지만 곧 욱하는 속을 다스렸다.

어차피 케이크만도 못한 인생이니까. 조금 더 참자. 진심으로 마음이 통하고 몸도 통하면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좋을 게 뻔했다. 그건 천국일 거다. 에이든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응. 너도 잘 자.”

눈도 뜨지 않고 대답하는 도련님의 답을 듣고 올리비아는 방으로 향했다. 미리 떠 놓았던 세숫물로 세수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얼마 전엔 눕기 바쁘게 잠이 들었는데 몸이 조금 편해지니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오늘도 도련님은 잠자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피곤할 정도로 원하시더니. 한순간에 뚝 끊겼다.

‘앞으로 그럴 일이 없는 걸까? 그럼, 쭉 몸은 편할 것 같긴 한데…….’

올리비아는 이유 모를 갑갑함에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가 저녁 식사 때 대화가 떠올랐다. 그 어마어마한 일을 잊고 있었다니.

정말 꿈에도 몰랐다. 도련님의 말투가 곱지 않은 건 알았지만 그렇게 욕을 많이 해 왔었다니! 도련님은 나쁘다. 친절하다고 캐서린 언니한테 막 칭찬했었는데 그런 나쁜 행동을 했다니 실망이다.

나쁜 도련님의 말은 올리비아도 듣고 싶지 않았다. 도련님이 잠자리를 요구하지 않는 게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른다. 이런 기분으로는 도련님의 요구를 받아도 기분이 별로였을 테니까.

올리비아는 괜히 씩씩거리면서 애써 잠을 청했다. 도련님은 참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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