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하실래요? (12/19)
  • 11. 하실래요?

    올리비아는 한동안 평화롭게 지냈다. 화를 내려던 에이든 도련님이 그걸 깜빡한 뒤로 짜증을 내지 않으셨다. 시도 때도 없이 몸을 탐해서 조금 피곤은 하지만, 마음에 부담이 없으니 늘 즐거웠다.

    혼나지 않는 생활이라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그러고 보니 올리비아 인생에 이렇게 평화로운 나날은 처음인 것 같았다. 에이든 도련님이 돌아오시고 삶이 편해졌다. 여전히 할 일은 많았지만. 다른 하녀들이 일을 떠넘기는 일이 없어서 더 편했고.

    물론, 그래도 원래 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였다.

    “오늘은 빨래만 해야겠네…….”

    요즘 제법 날씨가 쌀쌀해져서 두툼한 시트를 꺼냈고 덕분에 빨랫거리가 한가득 늘어 버렸다. 가뜩이나 도련님의 침대 시트를 매일 갈아서 올리비아는 점차 빨래가 귀찮아졌다. 시트를 품에 안고 계단을 내려오는 올리비아를 발견한 캐서린이 말을 걸었다.

    “계절이 바뀌니 빨랫거리가 넘치는구나.”

    “네. 오늘 종일 빨래만 해야 해요.”

    “하녀의 삶은 너무 고달프다. 그렇지?”

    캐서린 언니의 말대로 힘들긴 했다. 어젯밤에도 에이든 도련님께 시달린 터라 꼬리뼈도 아프고, 할 수만 있다면 빨래를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계절이 변화할 땐 빨래하는 날짜가 각자 정해졌다. 백작가 전체가 모두 빨랫거리를 내놓기 때문에 빨래터가 혼잡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에 올리비아가 하녀장님을 통해서 배정받은 날짜가 오늘이었다. 오늘 미뤘다가 나중에 몰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분명히 혼쭐이 날 거다. 대신 좋은 점도 있었다. 빨래터를 혼자 쓸 수 있다는 것!

    오늘은 빨래터를 별채를 위해 내준 날이라 본채의 다른 하녀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올리비아는 즐겁게 빨래를 하기로 했다.

    “그래도 전 일할 수 있어서 좋은걸요.”

    올리비아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남들보다 아둔한 그녀는 백작가의 하녀가 되지 못했으면 매일매일 끼니를 걱정하는 삶을 살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어릴 땐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벌로 밥을 주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게 얼마나 괴로웠는지 기억한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이렇게 배를 곯지 않는 삶만으로 좋았고, 요즘엔 도련님이 케이크를 줘서 더 행복했다. 올리비아의 밝은 미소에 캐서린은 피식 웃고 말았다.

    “긍정적인 생각 좋네.”

    올리비아에 대해선 멍청해서 답답하단 소리를 듣기만 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저 밝음이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스스로의 고달픔에 비관하기보다 고마워하는 올리비아를 보고 캐서린의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그랬더니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할 만해졌다.

    그리고 올리비아가 남들보다 아둔한 구석이 있어 답답하긴 하지만 그만큼 열심히 일을 해서 그런지 그렇게 얄밉지 않았다. 사실 그 아둔함 덕분에 더 편한 걸지도.

    까칠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에이든 도련님의 화를 올리비아가 혼자 전부 받아 내서 별채 생활이 평화롭단 건 캐서린도 잘 알았다.

    캐서린은 아직도 첫 만남에서 에이든 도련님이 한 ‘지금 나보다 못생긴 이들의 시중을 받으라는 거야?’라는 말을 잊지 못했다.

    또라이도 그런 또라이가 없는데, 올리비아가 옆에 있으면 도련님의 상태는 제법 괜찮은 것 같았다. 물론 모든 화풀이를 올리비아한테 하는 것 같지만.

    “내 할 일 빨리 마치면 도와주러 갈게.”

    “감사합니다!”

    도와주러 간다는 말 한마디에 올리비아가 기뻐했다. 캐서린은 괜히 같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 올리비아에게 얼른 일하러 가라고 손짓하고 본인의 일을 하러 움직였다.

    올리비아는 우히히 웃으며 신나서 총총 뛰어 움직였다. 누가 일을 도와준다고 한 적은 처음이었다. 보통 일을 떠넘기면 떠넘겼지 빈말로라도 도와준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만 들어도 기뻤다.

    ‘캐서린 언니는 정말 좋은 것 같아! 최고야! 앞으로 캐서린 언니랑 친해져야지!’

    올리비아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빨래터에 도착했다.

    우선 장작에 불을 때고 솥을 올려 뜨거운 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큰 통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세제를 풀고 빨랫감을 넣어 불리기를 했다. 그러는 동안 별채를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며 나머지 빨랫감을 옮겼다.

    “후우…….”

    마지막 빨랫감을 내려놓고 올리비아는 이마를 팔등으로 훔쳤다. 빨랫감 옮기는 것만 해도 진이 빠진다.

    마지막에 가져온 것은 어젯밤에 도련님과 자신이 더럽힌 시트였다. 밤마다 시트를 너무 더럽히니 차라리 욕실에서 하자고 할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욕실에서 하면 바닥이 딱딱해서 무릎이고 등이고 아팠다. 결국 고생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자신만 손해 보는 느낌은 뭘까? 도련님과의 잠자리가 싫은 건 아닌데 뒤처린 귀찮았다.

    올리비아는 묘한 감정에 입술을 비쭉이며 미리 물에 담가 불려 놓은 빨래 통 안에 슬쩍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한 후 치마를 걷고 안쪽으로 발을 넣었다. 발을 신나게 놀리며 빨랫감을 팍팍 밟았다. 어릴 때부터 해 온 일이라 올리비아의 발길질은 능숙했다.

    “묵은 때야 빠져라, 시트야 깨끗해져라, 내 발길질에 쑥쑥쑥 깨끗해져라. 나는야 빨래의 요정!”

    올리비아는 더 기운차게 일하기 위해 빨래할 때마다 부르는 노동요를 소리 높여 불렀다.

    “몽실몽실 거품이 나면 시트가 깨끗해지지! 나는야 빨래의 요정!”

    “푸흐흐흡!”

    신나서 빨래를 하던 올리비아는 억지로 틀어막는 웃음소리에 멈칫했다. 고개를 휙 돌려 보니 어느새 뒤에 사람이 있었다.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반대쪽 손으론 배를 감싸며 웃음을 참고 있는 사람은 바로 본채의 손님이었다. 그는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웃음을 참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을 보고 웃는 손님의 모습에 뚱해졌다. 올리비아는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자신을 비웃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잘 느꼈다. 저건 분명히 자신을 보고 웃는 거다.

    저 사람은 왜 자꾸 만나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도대체 손님이 이 구석에 왜 왔는지도 모르겠고. 보통 귀족들은 빨래터 쪽엔 얼씬도 하지 않으니까 손님이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길 잘못 들어오셨나 본데 여기 빨래터예요. 얼른 돌아서 나가세요.”

    계속 웃는 손님을 무시하고 올리비아는 다시 팍팍 발길질을 했다. 숨죽여 웃는 소리가 계속 들려 더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네.’

    그런 신경질적인 올리비아의 발길질을 확인한 남자는 웃음을 삼켰다.

    “왜 더 노래 부르지 않아? 이제는 빨, 큽, 빨래의 크흡, 요정이 아니야?”

    사실 그는 올리비아의 노래를 듣고 놀랐다. 스스로 빨래의 요정이라고 칭하는 존재가 있다니. 듣는 순간 손발이 오그라들고 얼굴로 열이 확 몰리는 수치스러운 표현 아닌가.

    “빨래의 요정 맞는데요?”

    “푸흡!”

    올리비아의 대답이 충격적이라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뭐가 웃긴지 모르겠다고 뚱하게 바라봐서 더 웃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큼큼거리며 웃음을 진정시켰다.

    “왜, 크흡, 빨래의 요정이야?”

    단어를 꺼낼 때마다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설마 스스로가 정말로 요정이라고 생각해서 저런 표현을 쓰는 건 아니겠지?’

    살짝 맹한 올리비아 같지만 그 정도로 지능이 떨어지진 않을 거라 생각하며 물었다.

    “빨래의 요정이 와야 빨래가 깨끗하게 되죠.”

    하지만 올리비아는 도리어 왜 질문하는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대꾸를 했다. 그리고 슬쩍 눈을 흘기는 모양새가 빨래를 한 번도 하지 않아 본 사람이란, 쯧쯧쯧 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 황당했다.

    올리비아가 너무 당당하니 원래 빨래를 도와주는 빨래의 요정이 존재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걸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재밌네.”

    “뭐가요?”

    “네 순수함이.”

    좋게 말하면 순수함이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함이지만 그는 그게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저 나이 먹고 이렇게 천진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참 대단했다. 보통 사람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본인의 이해득실을 따져 이기적이고 계산적으로 변했다.

    시골 영지에 사는 순박한 사람이란 특성을 제외하더라도 올리비아의 어리숙한 반응은 심했다. 그래서 어릴 때 머리를 다친 적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저 안 순수해요.”

    올리비아가 말 속에 담긴 속내를 알아듣지 못하고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본인은 순수하지 않다고 우기는 게 귀엽다.

    괜히 목 안쪽이 근질거려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리다가 한쪽에 쌓인 시트 더미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는 순간 절로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시트에 묻은 흔적으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건 어떻게 봐도 밤놀이의 흔적이었다.

    ‘아니겠지…….’

    더러운 시트를 바라보는 걸 알면서도 올리비아는 부끄러움 한 점 없어 보였다. 저 흔적의 의미가 무언지 모를 거라고 믿고 싶었다. 빨래의 요정 때처럼. 그저 천진하기만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거라고, 이상하게도 믿고 싶었다.

    “이 시트 말이야 누구 거야?”

    “도련님 거요.”

    “네가 모시는 도련님?”

    “네.”

    “……많이 지저분하네.”

    차마 노골적으로 묻지 못해서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도련님이 잠자리를 좋아해서요.”

    그걸 올리비아가 곧이곧대로 말할 줄 몰라서 그는 오히려 당황했다. 이번에도 그녀의 얼굴은 수치심이라곤 조금도 없이 해맑았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묻고 말았다.

    “너랑?”

    답을 기대하고 물은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흘러나온 것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그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니까.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으니까.

    “네.”

    하지만 답하는 올리비아의 목소리엔 거리낌이 없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솟았고, 그건 곧 분노가 되었다.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이 하녀가 굉장히 순진하고 깨끗할 거라는 혼자만의 착각.

    제멋대로 그려 놓은 이상에 맞지 않다고 이 하녀를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알지만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을 봤다고 여겼는데, 그게 실제론 더러운 거였다니. 전부 거짓이었다니.

    “너 밤시중도 드는 하녀였어?”

    절로 목소리에서 빈정거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명백한 시비조에 하녀는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네.”

    “왜?”

    “그게 제 일이니까요.”

    하녀는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렇게 답답할 수가.

    “그게 왜 네 일이지?”

    “전 하녀인걸요.”

    말갛게 올려다보는 하녀를 보며 말문이 콱 막혔다. 그게 어떤 부당한 일이든 하녀에겐 애초에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그저 재산일 뿐이니까, 주인이 마음대로 다뤄도 되는 존재였다.

    귀족이 말을 듣지 않는 하녀를 내버려 둘 리 없으니 애초에 이 하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머리론 알면서도, 어쩐지 가슴에서 불길이 일었다. 혼자만의 오해와 착각임을 알면서도 화가 났다. 그래서 또 거친 말이 튀어 나갔다.

    “그러면 내 밤시중도 들 수 있겠네?”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응시했다. 초록빛보다는 조금 옅은 빛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그는 일부러 냉정한 시선을 보냈다. 거절하지 못하도록 오만한 귀족임을 드러냈다.

    하녀는 곤혹스러운 듯 소리 없이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네.”

    라고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하녀가 바로 고개를 숙여 버려서 표정을 볼 순 없었다. 하지만 대답을 듣고 나서 그는 괜히 기분이 더 나빠졌다.

    정확히 설명하기 힘든, 속이 타 버리는 것 같은 감정이었다. 고작 손길이 닿았다고 강간 운운할 땐 언제더니 밤시중을 들 수 있다고 참 쉽게도 답했다.

    “그럼 내 시중도 들어.”

    밤시중을 들 수 있다고? 그럼 들어 봐! 라는 오기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이 제안을 허락한 하녀에게 화가 난 건지, 이 상황을 틈타 야욕을 취하는 스스로에게 실망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뱉는 말은 명령조에 가까웠다. 그만큼 하녀는 더욱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하녀가 빨래를 하려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 드러나는 흰 목덜미에 묘하게 음욕을 느끼는 상황이 짜증이 났다. 가늘어서 이를 세워 박아 넣고 싶은 가학심이 생긴다.

    “……언제요?”

    “오늘 밤.”

    이렇게 강제하듯 행동하는 게 맞나, 그는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면서도 어쩐지 자꾸 요구하게 되었다. 이게 하녀를 취할 수 있는 손쉬운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거였다.

    “저, 그런데…….”

    “왜?”

    하녀의 망설이는 말을 재빨리 끊었다. 아둔한 하녀라고 해도 시간을 끌면 이 상황이 이상하단 걸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에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전 에이든 도련님 전담 하녀인데요.”

    “그래서?”

    “에이든 도련님이, 도련님 말씀만 들으라고…….”

    바로 이렇게 말이다. 아둔한 주제에 바로 도망갈 구석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도 기회를 놓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모든 걸 홀라당 앗아 가는 약탈자에 가까웠다.

    팔짱을 느리게 끼며 하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최대한 오만하면서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그러자 하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눈치를 봤다. 역시나 권력자의 강압에 반항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보였다.

    “집사한테 말하면 되나?”

    그래서 겁을 줬다. 손님보다 더 두려워할 집사를 언급했다. 역시나 하녀는 더욱 눈에 띄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손님의 요청을 거절한 이야기가 집사한테 들어가면 혼날 걸 걱정하는 게 빤히 보였다. 일부러 인상까지 찡그리자 하녀가 곧바로 웅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도련님 요구가 먼저라서요.”

    “그러니까, 네 도련님이 오늘도 시중을 들라고 할 거다?”

    “네!”

    하녀가 밝게 답했다. 이렇게 반색하면 봐주려던 마음이 사라진다. 미약하게 있던 죄책감마저도 없어졌다. 하녀의 어리숙함을 통해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던 행태가 싫어 생기던 망설임은 흔적도 없이 전부 사라졌다.

    하녀는 하녀였다. 이쪽에서 소중하게 대해 준다고 소중하게 돌아올 것도 아니었다. 절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네 도련님 요구에 응하고 오면 되겠네.”

    “네?”

    “네 도련님과 일이 끝나면 내 침실로 오라고.”

    혼란스러워하는 하녀에게 단호하게 알렸다.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하녀는 눈치만 봤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하는 기색에 짜증이 치솟았다. 그 도련님이란 놈의 시중은 들면서 제 시중은 들기 싫다는 듯한 행동이 얄미웠다.

    계속 시선을 피하는 것도 열받았다. 손을 뻗어 하녀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앗!”

    휘청하는 하녀를 붙잡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똑바로 눈을 응시했다. 가까이서 본 하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손끝에 닿는 살결이 하녀의 것이라고 하기엔 부드러웠다. 목덜미를 따라 온 피부를 쓰다듬고 싶어지는 감촉이었다.

    하녀가 당황해 작고 빠르게 내뱉는 숨결이 느껴졌다. 마치 손아귀에 잡힌 작은 새 같았다. 소중하게 귀여워해 주고 싶으면서도 날개를 부러뜨려 제 곁에만 두고 싶은 상반된 마음이 동시에 떠오르는 연약한 존재.

    그래서 정욕이 제대로 치솟았다.

    “아직도 이해 못했어? 얼마든 늦어도 되니까 내 침실로 오라고.”

    하녀의 떨림과 그 안에 담긴 망설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하녀가 두려워하는 것이 뭔지 알아서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집사를 통해 널 불러야겠어?”

    여린 눈동자를 보며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집사 소리가 나오자 하녀는 역시나 눈동자를 더욱 흔들었고, 결국.

    “……네. 늦더라도 찾아갈게요.”

    원하는 답을 얻어 냈다. 마음 같아선 코앞에서 숨결을 뱉어 내는 붉은 입술을 머금어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입을 맞췄다간 왠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랬다간 하녀가 숨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맛있는 건,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음미하면서 먹는 편이니까.

    목덜미를 잡았던 것을 놓아주며 한 발 물러서자 하녀는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잊지 마. 오늘 밤 오지 않으면…….”

    “오, 오지 않으면요?”

    일부러 말을 끌었더니 더 오들오들 떠는 모양새란.

    “네가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겠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아직 떨림을 진정시키지 못한 하녀에게 한 번 더 경고했다. 하녀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걸 확인하고 돌아섰다.

    오늘 밤, 저 하녀는 자신을 찾아올 거다.

    * * *

    최근 에이든은 행복했다. 미묘하게 거슬리는 인간이 있었지만 그 인간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사실 아직도 그 남자의 정체에 대해 보고하지 않는 호위 기사에게 난리를 쳐야 했지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정체 모를 남자의 향기에 분노했던 다음부터, 올리비아가 묘하게 잠자리에 적극적이었다. 원래도 거부가 없는 성격이었지만 요즘엔 본인의 의지가 들어간 느낌이랄까. 그런 작은 변화가 에이든을 기쁘게 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언젠간 둘 사이의 관계가 변할지도 모른다는 신호였으니까.

    올리비아는 평생 하녀였다. 그렇게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하녀가 아닌 다른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였다. 약삭빠르거나 본인의 인생이 달라지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올리비아는 특유의 맹함으로 현실에 만족했다.

    그건 하나의 경계선이었다. 하녀와 주인님 사이라 올리비아는 절대 에이든을 이성으로, 또는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못했다.

    그런 순수한 점 때문에 에이든은 올리비아에게 사로잡혔지만 반대로 그런 점 때문에 올리비아에게 마음껏 퍼 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에이든은 그냥 ‘도련님’일 뿐이니까. 에이든이라고 왜 올리비아에게 뭐든지 퍼 주고 싶지 않겠는가.

    좋은 걸 잔뜩 사 주고,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도록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조차 정색하는 사람이었다. 진득하게 몸을 섞고 나서도 방 한구석에 딸린 하녀의 방, 초라한 침대로 기어가는 꼴을 볼 때마다 화가 날 정도였다.

    에이든이 조금만 좋은 걸 줘도 이건 자신에게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일하지 말고 쉬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쉬면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냐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에이든은 차라리 올리비아가 임신해 버렸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몸이 무거워지면 일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할 수 없을 테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씨앗을 품었단 이유로 침대에만 눕혀 둘 수 있을 테니까. 아예 백작가를 벗어나자고 설득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았다. 이 정도 몸을 섞었으면 임신을 했어도 벌써 했어야 하는데 왜 안 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매일매일 한계까지 쏟아붓는데도 노력이 부족한가?

    부족하면 더 노력해야지. 나른히 누워 있던 에이든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찾아 헤맸다.

    “올리비아? 올리비아?”

    “도련님 필요한 것 있으세요? 올리비아 빨래하러 갔어요. 한참 걸릴 거니 제게 말씀하세요.”

    “됐어.”

    방문을 죄다 열고 다니다가 중간에 만난 다른 하녀에게 올리비아가 빨래를 하러 갔다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에이든은 거기서 올리비아가 의외의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뭐야? 저 인간이 왜 여기 있어?”

    올리비아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상대를 에이든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에이든은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저 인간이 왜 여기서 나와?’

    예상치 못한 인물을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니 에이든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 와중에 거슬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멀리 있어서 대화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 사람은 올리비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즉, 초면이 아니란 소리다. 잠시 생각하던 에이든의 머릿속에 번뜩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너 알고 있었어? 저 인간이 여기 있었던 거?”

    에이든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자 몸을 숨기고 따라오던 케일럽이 가까이 다가왔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라 더 열받는다. 본채를 감시하는 케일럽이 저 인간이 이곳에 있단 걸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아마 진작 알았을 거고 본인이 귀찮아지기 싫어서 보고하지 않은 걸 거다. 케일럽을 진작 단속할 걸 그에게 자유를 너무 줬나 보다. 에이든은 잠깐 짜증을 가라앉히다가 다른 어떤 일을 떠올렸다.

    “저 녀석이지! 올리비아에게 접근했던 놈이.”

    답을 듣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질문을 듣자마자 케일럽의 얼굴에 소름 돋는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어? 뻔하지. 내가 올리비아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니까, 상대의 정체를 알면서도 달려가 난리를 쳐서 계획이 어그러질까 봐 보고하지 않은 거 아니야?”

    어쩐지 정체불명의 남자에 대해 보고를 하지 않더라니. 이번에도 케일럽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돌아가긴 하는구나, 하녀만 생각하면 멍청해지는 줄 알았지, 하는 호위 기사의 솔직한 표정에 에이든의 이마에 힘줄이 돋는다. 온갖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저 인간이 뭘 알고 온 것 같아?”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 나라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머물게 된 모양입니다.”

    “그럼 잠깐 머물고 갈 것이지, 이 촌구석에서 뭐 하는 짓이래.”

    그렇게 중얼거리며 저쪽의 동향을 살피던 에이든은 점차 눈에 들어오는 상황에 짜증이 났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대화인지 잘 들리지 않아서 더 문제였다.

    슬금슬금 거리를 좁혔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 올리비아를 끌고 오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 신중을 기해야 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둘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러면 내 밤시중도 들 수 있겠네?”

    ‘뭐! 어디서 개 같은 것이 등장해서 올리비아한테 헛소리야!’

    올리비아의 울상을 발견한 에이든의 이성이 끊겨 욕설을 내뱉으려는 순간, 케일럽이 뒤에서 튀어나와 그의 입을 막았다. 욱욱거리며 발버둥 쳤지만 에이든의 반항을 케일럽은 간단하게 제압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에이든을 더 기가 막히게 하는 올리비아의 답이 들렸다.

    “……네.”

    ‘거기서 왜 그렇게 대답해!’

    에이든의 눈앞이 분노로 시뻘겋게 변했다. 집적거리는 남자도 병신 같은 놈이고, 거기에 울상 지으며 넘어가는 올리비아는 답답해 미치겠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에 하녀라서 자신의 밤시중을 든다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살짝 좌절도 했다. 그러면서 이들의 대화가 점차 이상해져 좀 놔 보라고 반행했지만 케일럽의 단단한 손길을 에이든은 벗어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대화를 강제로 들으며 에이든은 점차 분노로 숨이 막혔다. 집사를 들먹이는 협박에 올리비아가 겁을 먹고 네, 네거리는 것 아닌가.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에이든은 머리로 열이 올랐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입에서 나오지 말아야 하는 답이 나오는 순간.

    “……네. 늦더라도 찾아갈게요.”

    에이든은 이게 분노의 한계치에 달하면 뒷목을 잡는다는 거구나를 느끼며 눈앞이 흐려지는 걸 느꼈다. 정말, 씨발에 염병이었다.

    * * *

    눈을 떴을 때, 에이든은 굉장한 불쾌감을 느꼈다. 언제 옮겨졌는지 방 안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기절하기 전 마지막 기억이 잊히지가 않는다. 올리비아와 그놈의 대화. 별 거지 같은 일로 기절을 했기 때문인지, 올리비아가 헛소리를 수락한 것에 열받는 건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래서 있는 대로 난리를 쳤다.

    “씨발! 너 미쳤어? 왜 멋대로 말려서 일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온갖 물건을 손에 잡히는 대로 던졌지만 케일럽은 쏙쏙 잘도 피했다. 기사가 아니라 아주 쥐새끼 같았다. 그러면서 입은 또 잘도 나불거렸다.

    “위험할 것 같으면 말리라고 명령받았습니다.”

    “위험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이 새끼야!”

    “그쪽도 호위 하나 없겠습니까? 나서는 순간 경고보다 칼날을 몸으로 받았을 겁니다.”

    아까 에이든은 감지하지 못했던 남자의 호위 기사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저래 보여도 기사로서의 능력은 굉장히 출중한 편이니까.

    머리론 이해를 하는데, 지금 현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미칠 것 같았다. 게다가 케일럽의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도가 얄미워서 더 열받았다.

    ‘저 새끼 때문에, 올리비아가…….’

    아니지, 결론은 올리비아의 잘못인가? 놈이 협박을 했더라도 그걸 허락한 건 올리비아였다. 집사가 무서우면 나한테 와서 도와달라고 해야지! 그 아둔함이 오늘만큼 화나긴 처음이었다. 이 상황을 어째야 한단 말인가. 에이든이 한참을 씩씩거렸다.

    “아, 몰라. 책임져.”

    “뭘 말입니까?”

    “너 때문에 올리비아가 헛소리에 응했잖아!”

    “제가 뭘 어떻게 책임집니까?”

    “가서 몰래 목을 따든! 뭐든 하라고!”

    에이든의 우기기에 케일럽은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기회긴 합니다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조용히 처리할 순 있고?”

    가능성 있다는 소리에 에이든이 반색했다. 그러자 케일럽은 진지하게 따져 보더니 담담하게 답했다.

    “처리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도망이 문제입니다. 하녀의 안전까지는 보장하지 못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그쪽 호위 기사들도 꽤 합니다.”

    “그럼, 하지 마.”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계획을 단칼에 잘랐다. 확실히 밤새 놈의 목이 잘리면 백작가가 뒤집어져서 혼란스러워질 거다.

    그러는 와중 올리비아를 안전하게 빼낼 수 있단 보장이 없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상황이니까.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황 자체를 피하고 싶었다.

    그놈을 쫓아낼 방법이 필요했다. 놈이 자꾸 올리비아의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에이든은 안다. 그놈은 자신과 동류였다. 눈에 들었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기필코 가질 거다. 그런 존재를 올리비아의 가까이에 둘 수 없었다.

    “안 되겠다. 위에 연락해서 얼른 치라고 그래.”

    에이든의 말이 떨어지자 여태껏 뻔뻔하게 굴던 케일럽이 굳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계획을 실행하라고요? 아직 아니라면서요.”

    “지금도 괜찮아.”

    에이든의 확답에 케일럽은 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한숨을 여러 번 쉬더니 다시금 물어 왔다.

    “그러니까, 고작 하녀의 곁에서 사람 하나 치우겠다고 지금 전쟁을 일으키시겠단 겁니까?!”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었고, 그걸 앞당긴 것뿐이야.”

    에이든의 당당한 대꾸에 케일럽이 제 가슴을 쳤다.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마치 오랑우탄의 포효 같았다.

    “얼른 연락하기나 해. 한 나라의 왕세자라면 연락을 받는 즉시 당장 왕성으로 가겠지.”

    에이든은 이죽거렸다. 그랬다. 올리비아를 괴롭히던 남자의 정체는 이 나라의 왕세자인 로건 밀리엄이었다.

    ‘아니, 왕세자씩이나 되는 분이 왜 하찮은 변방에 와서 제일 예쁜 하녀를 탐낸단 말인가.’

    에이든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중얼거렸다. 그게 제 명과 국운을 망치는 것인 걸 모르겠지. 꼴좋다.

    “진짜 연락합니까?”

    “어차피 전쟁은 준비하고 있었잖아. 실행하라고 해. 그리고 알지? 그놈이 허겁지겁 올라갈 때 미리 자리 잡고 있다가 쓱싹하면 좋잖아.”

    에이든은 엄지만 들어 목 앞에서 그어 보였다. 케일럽은 왕세자를 처리하란 소리를 알아들었다. 개인적인 욕심인 것 같지만, 사실 절호의 기회기도 했다. 이렇게 운 좋게 왕세자를 만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일이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지만. 에라, 모르겠다. 에이든의 말대로 우선 위에 전하고 보기로 했다.

    * * *

    올리비아는 한숨을 삼켰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문을 열자마자 잔뜩 어질러진 방 안이 보였다. 가뜩이나 아까 만난 손님 때문에 마음도 심란한데.

    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널브러진 책들과 깨진 화병, 덕분에 젖어 버린 카펫까지. 제자리에 있어야 할 물건들이 죄다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도둑이 들어도 이렇게까지 난장판이 되지는 않았겠다. 필시 방의 주인이 일부러 그랬을 터. 요 며칠 잠잠하더니 다시 심술병이 도졌나? 올리비아는 이렇게 만들어 놓은 당사자를 찾았다.

    역시나, 도련님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소파 한쪽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방 안을 뒤집고 어지르는 건 한순간이지만, 정리하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전부 치우려면 힘든데. 푹푹 올라오는 불만을 삼켰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단단히 심사가 뒤틀린 일이 있는지 도련님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졌다. 올리비아는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들며 도련님을 향해 물었다.

    “에이든 도련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흘긋 그녀를 빠르게 일별한 그는 흥 소리를 냈다. 말도 하기 싫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그럼 엉망이 된 방 안 청소나 해야겠다. 올리비아는 더 묻지 않고 도련님에게서 관심을 껐다.

    값비싼 책이 바닥에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 묵묵히 책을 주워 소파 옆에 있는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뒤돌아 깨진 화병을 주우려 하는데 뒤에서 후드득 무자비한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떨어진 책을 확인하고 그걸 행한 손을 바라보았다. 하얀 손이 보란 듯이 까딱거렸다.

    마지막으로 주시하고 있는 에이든 도련님을 응시하자 그는 또 한 번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심술맞은 표정.

    고의라는 것을 알리는 행동에 올리비아가 한숨을 삼켰다. 저택 사람들 모두 상대하기 어렵고 힘들었다. 그중에서 도련님은 특히 더 예민했다. 얼마나 까다로우신지 마주칠 때마다 화내시는 것 같았다.

    한동안 기분이 좋아 보여 편했었는데, 이렇게 영문 모를 상황에 맞닥뜨리면 올리비아는 참 곤란했다. 이유라도 알아야 잘못을 빌 수 있었다. 도련님은 무작정 잘못을 빌면 그것 가지고 또 치도곤을 하시니 사죄도 함부로 못 했다.

    하루 열두 번도 기분이 휙휙 변하는 상전을 모시는 건 언제나 힘들다.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탁자에 올렸다. 본채 서재에서 가져온 거라 망가지면 집사님께 혼날 텐데.

    다시 도련님이 어지르지 못하게 멀리 놓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시위하냐고 혼날 테니 참았다. 대신 올리비아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도련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도련님 혹시 저한테 화나셨나요? 제가 뭐 잘못한 게 있어요?”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보란 듯이 심술궂은 행동을 할 리 없으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올리비아는 다른 사람보다 아둔한 편이었다.

    하녀장에겐 늘 구박을 받았고, 다른 선임 하녀들에게도 항상 지적을 받았다. 집사와 하녀장님은 그녀를 발견하면 자동으로 도끼눈이 되었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언제나 최선을 다해도 혼나는 일뿐이다. 눈치라도 빠르면 좋았을 텐데 지적하지 않고 눈치만 주면 무뎌서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에이든 도련님도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냥 속 시원하게 직접 말해 주시면 좋으련만.

    불퉁한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던 도련님이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책을 펴 자신의 얼굴 위에 덮었다. 이번 신호는 확실했다. 말 걸지 말란 소리. 도련님이 얌전한 이때 빨리 방 안을 정리해야 했다.

    다시 성질내서 뒤집기 전에 올리비아가 허리를 숙여 재빠르게 깨진 화병 조각을 주웠다. 도련님의 심기를 더 거슬리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위험한 유리 조각을 한쪽으로 치웠다.

    소음은 최대한 줄이고, 손놀림은 빨리했다. 도련님이 변덕을 부려 다시 난동을 피우면 청소를 끝마치지 못한다. 올리비아는 온 힘을 다해 방 안을 정리했다.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움직이는 올리비아를 바라보는 도련님, 에이든은 더 분노가 치솟았다. 슬쩍 책을 내리고 관찰하니 그녀는 어질러진 것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알아달라 표현하고 있는데, 저 아둔한 여인은 당최 알아듣지를 못했다.

    ‘저 유리병보다 내가 못하단 말인가?’

    이게 기회다 여기며 청소에 열중한다. 답답하고 속 터졌다. 쪼르르 다가와 팔을 붙잡고 그 큰 눈을 깜빡이며 왜 화났는지 물어보면 마지못한 척 다 알려 줄 텐데. 휙 성의 없이 묻고 끝이다. 계집이 어찌나 우둔한지 약은 꾀를 부릴 줄 몰랐다.

    아무리 바삐 움직이는 손이 어여쁘고, 살랑거리는 엉덩이가 귀엽고, 열중하는 얼굴이 사랑스러우면 뭐 하나. 저렇게 둔해 터진 것을. 그러니 밖에서 별 잡것들에게 농락을 당하고 그것도 모른 채 지나가지.

    조금 전 우연히 보게 된 불쾌한 일을 다시 떠올린 에이든의 속이 부글거렸다.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응하겠다고 저 조그마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것을 요구한 멍청한 놈도 짜증 나고, 순순히 답한 올리비아도 미워 죽겠다.

    그녀가 별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더 화난다. 매번 자신만 안달하는 것이 싫었다. 맹한 얼굴로 천진하게 사람 속을 뒤집는 데 선수다.

    ‘어째서! 어째서 나만 이렇게 초조해해야 해?’

    완전히 뒷전이다. 일하느라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 무척 얄밉다. 이렇게 알아봐 달라 신호하는데 눈길조차 주지 않는 올리비아의 행동에 서운함이 울컥 치솟았다. 보지 않는다면 보게 만들면 되지. 에이든은 가슴께에 올려놓았던 책을 강하게 움켜쥐고 던졌다.

    퍽!

    올리비아가 바닥에 떨어진 물품들을 주워 협탁에 올리는 순간, 그녀의 얼굴 옆을 무언가 재빠르게 스치고 지나가 벽에 부딪쳤다. 흠칫 놀라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보니 아까 도련님의 얼굴을 덮었던 책이다.

    올리비아가 조심스럽게 도련님을 돌아보았다. 이마를 찡그리고 씩씩거리며 거칠어진 숨을 어깨로 내쉬고 있었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칠 것 같은 모습에 올리비아는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했다.

    오늘은 지난 계절에 사용한 이불과 커튼을 전부 세탁하느라 힘들어서 이 방법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도련님이 무작정 화가 났을 때는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란 것을 얼마 전에 깨달았다.

    “도련님 지금 하실래요?”

    올리비아는 엉덩이를 도련님을 향해 내보이며 훌러덩 치마를 뒤집었다. 전혀 망설임 없는 태도였고, 더 나아가 아무렇지 않게 속옷을 잡아 끌어 내렸다. 뽀얀 살덩이 사이에 파묻힌 여성의 은밀한 곳이 순식간에 훤히 드러났다.

    거세게 성질을 내려던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거침없는 행동에 다른 의미로 열이 뻗치고 당혹스러워 크게 외쳤다.

    “야! 넌 겁도 없이 어디서 치마를 훌렁훌렁 올려붙여?”

    하체를 훤히 드러낸 상태의 올리비아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에이든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뜨끈한 열기가 치밀었다. 사춘기 소년처럼 찾아온 욕망과 열기에 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꼴깍, 맛난 음식을 눈앞에 둔 짐승처럼 침이 넘어갔다. 전체적으로 빼빼 마른 몸과 다르게 올리비아의 둔부와 가슴만큼은 풍만해 만지는 즐거움이 있었다.

    저 달덩이처럼 흰 살이 얼마나 말랑거리고 보드라운지, 그래서 밀지에 성난 남성을 묻고 마구잡이로 치댈 때 허벅지에 얼마나 달콤한 자극을 주는지 이미 잘 알지 않은가. 귀엽게 주름진 구멍을 지나 수풀 사이에 숨겨진 여린 살 틈이 얼마나 촉촉하고 쫀득한지도.

    에이든은 조급함이 치밀었다. 올리비아가 할 거냐고 물었을 때부터 급속도로 팽창하며 빳빳해진 하체는 완벽하게 발기해 벌써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처음엔 손대기도 아까웠다. 하지만 한번 맛보고 나니 그 달큰함에 중독되어 헤어 나올 수 없었다. 화내야 하는데, 아까 일을 추궁해야 하는데. 황홀경을 알아 당장 올리비아의 몸에 들어가고 싶다고 제 아랫도리가 강하게 주장했다. 에이든은 갈등에 번민했다.

    “하기 싫으세요? 하지 말까요?”

    망설이는 에이든 도련님의 행동에 이게 아닌가 싶다 여긴 올리비아가 무릎에 걸린 속옷을 다시 끌어 올렸다. 유혹적인 둔부가 천으로 가려졌다. 욕망과 이성 사이에 갈등하던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무심한 행동에 기회를 놓칠까 봐 빼액 외쳤다.

    “누가 안 한대!”

    “노려보시기만 하시니까…….”

    올리비아가 작게 꿍얼거렸다. 올라가던 속옷이 다시 머뭇거림 없이 내려가 탐스러운 볼기가 드러났다. 이번에도 그녀의 손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에이든의 얼굴은 흥분과 민망함으로 붉게 달아올랐는데, 올리비아에게선 부끄러운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남자 앞에 엉덩이를 내민 채였음에도. 늘 그렇듯 맹하고, 생각 없는 얼굴.

    아무래도 평가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저게 어딜 봐서 눈치 없고 둔한 여인인가, 남자를 제 마음대로 들었다 놓는 천하의 요부다. 저 순진한 얼굴에 속아 넘어가는 거다.

    그렇게 떠올리면서도 솔직하게 반응하는 몸뚱이 때문에 에이든은 어그적 일어나 불편한 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협탁에 기대 얼른 들어오라고 엉덩이를 쭉 빼고 있는 올리비아의 뒤에 자리 잡고 바지춤을 풀었다.

    옷 안에 억눌려 있던 흥분된 물건이 튕겨져 나와 꺼떡거렸다. 빌어먹을, 올리비아만 보면 아주 자동이다. 제 몸뚱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벌써 찔끔거리고 있었고, 부푼 성기가 아파서 화가 날 정도. 거칠게 하기 싫은데 이 상태로 했다간 자제 못할 것 같았다. 진정 좀 시키고 진입하자.

    “도련님?”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쉽사리 넣지 못하고 있는데, 속내도 모르는 올리비아가 재촉하듯 에이든을 불렀다. 가늘고 영롱한 목소리가 애원하는 것 같았다. 뒤돌아보는 옆얼굴이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이 앙큼한 여자가 아주 자기를 가지고 놀았다. 남아 있던 에이든의 이성이 뚝 끊어지는 기분이다.

    “씨발, 넣게 제대로 벌려 봐.”

    거친 언성에도 올리비아는 언제나 순종적이었다. 가느다란 손이 뒤로 넘어와 제 엉덩이를 벌렸다. 분홍빛보다 짙은 속살이 드러나고 탐스럽게 빠끔거렸다. 서늘한 공기에 오물오물 움직이며 음험한 에이든의 욕구를 더 자극했다.

    보기만 해도 갈 것 같다. 저 쫀득한 구멍에 단번에 제 성기를 쑤셔 넣고 미친 듯이 박고 싶었다. 더 참다간 제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 넘치는 욕망을 풀기 위해 페니스를 빠끔거리는 입구에 가져다 댔다.

    맑은 액체를 찔끔거리는 끝을 잡아 올리비아의 입구에 문댔다. 자극에 반응하듯 올리비아의 입구가 꿈틀거렸다. 귀두에 걸리는 움직임이 요망하기 그지없었다. 어서 넣어 달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미쳤다. 미쳤어. 씨발, 진짜. 얜 왜 이렇게 야한 거야?’

    몸 구석구석 유혹적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올리비아는 마치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에이든은 더 올라오는 욕설을 삼키며 성기를 빠끔거리는 곳에 집어넣었다.

    “읏!”

    하지만 숨죽인 올리비아의 신음과 확 조여드는 입구에 삽입을 성공시키지는 못했다. 전희가 아무것도 없었던 탓에 입구가 말라 있었다. 뒤늦게 에이든은 살짝 이성이 돌아왔다. 이 상태로 유혹한 올리비아에게 화가 나서 씩씩거리다 보니, 아까 속 터지는 대화도 떠올랐다.

    ‘이러면서 다른 놈의 시중을 들겠다고?’

    “씨발, 하나도 준비도 안 됐는데 하자고 그래?”

    절로 빈정거리는 소리가 나갔다. 지금부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저녁엔 그 자식을 향해 가려는 수작질로 보였다.

    물론, 다른 쪽 이성으론 올리비아가 자의로 그 남자의 시중을 들겠다는 게 아니란 것을 안다. 알지만 그 남자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허락했다는 점에서 에이든은 용서할 수 없었다.

    에이든이 신경질적으로 다시 올리비아의 입구에 성기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역시나 튕겨져 나왔다. 분명히 찔끔찔끔 액체를 뱉어 내며 젖어 들고는 있었지만, 충분히 젖지 않은 곳은 에이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늘 저를 쏘옥 황홀하게 빨아들이던 곳답지 않았다. 이조차 올리비아의 거부로 느껴질 정도로 에이든은 눈이 돌아갔다.

    “이 상태로 할 수 있겠어?”

    에이든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벌주듯 토실한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이 와중에 손에 걸리는 감촉은 황홀하게 말랑거렸고, 흰 피부를 붉게 물들이는 손자국이 못 견디게 야했다.

    “자, 잠시만요…….”

    올리비아는 제 앞치마에 달린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더듬더듬 찾던 것을 손에 쥔 후 팔을 뒤로 내밀어 에이든을 향해 건넸다.

    “도, 도련님 이거…….”

    “뭐야?”

    “향유요.”

    올리비아의 대답에 짜증으로 뒤범벅투성이었던 그는 충격으로 굳어 버렸다. 언제부터 향유가 하녀의 필수품이 되었단 말인가. 서랍장에서 꺼낸 것도 아니고 주머니에서 꺼냈다는 점에서 더 충격이었다.

    “그게 왜 거기서 나와? 너 그거 들고 다녀?”

    “네.”

    너무 담담한 대답에 에이든은 기가 막혔다. 향유의 용도는 뻔했고, 들고 다닐 이유 또한 뻔하지 않은가. 에이든의 눈이 벌겋게 변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올리비아가 엉뚱한 짓을 하고 다녔을까 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그는 올리비아의 손에서 거칠게 향유병을 낚아챘다.

    “씨발, 언제부터, 무슨 의도로 그걸 들고 다니는 거야?”

    에이든의 목소리가 사납게 튀어 나갔다. 그리고 흉흉한 기색을 느낀 올리비아가 조심스럽게 에이든을 돌아봤다.

    에이든 도련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한 번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실 줄 알았는데 아닌가? 도련님의 분노가 너무 거세서 두려웠다. 사납게 노려보는 눈길에 올리비아가 우물거렸다.

    “도련님이랑 할 때 쓰라고 집사님이 챙겨 주셨어요.”

    에이든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애가 얼마나 맹하면 집사하고 이런 이야기를 했지? 제 잠자리 사정을 아무렇지 않게 타인과 공유하는 점에서 어이가 없으면서도.

    “나, 나랑 쓰려고 챙긴 거라고?”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과 섹스를 하려고 향유를 챙기고 다녔단 말이 미치도록 달콤했다. 얼마나 좋은지 분노가 싹 사라지고 기대감에 목소리가 떨릴 지경이었다.

    “……네. 그거 도련님이랑 할 때 쓰는 거랬어요.”

    올리비아의 천진한 말투가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에이든의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정말 나랑만 쓰려고 했던 거지?”

    “도련님이랑 아니면 누구랑 써요?”

    에이든이 감격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묻자 올리비아가 당연하다는 듯 되물었다. 당연히 이런 짓을 할 상대는 자신뿐이라는 건가? 진짜 못 살겠다.

    에이든은 절대 이 애한테 화낼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엎드린 올리비아의 등을 끌어안았다. 사랑스러워서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가슴이 터질 듯 행복했다. 품에 꽉 차는 몸이 안아도 부족한 것만 같았다. 좋다. 진짜 너무 좋다. 이 애가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

    올리비아의 향기가 콧속을 물들이며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올리비아는 때때로 사람을 열받아서 미치게 했다가도, 순식간에 기뻐서 환장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 와중에 흥분한 성기를 엉덩이골 사이에 끼고 슬슬 비비는 본능은 모른 척 넘어가 주자. 에이든은 가슴으로는 뿌듯한 행복감을, 하반신으로는 아릿하게 퍼지는 쾌락을 느끼며 이 기쁜 순간을 즐겼다.

    “그래도 어쩐 일이야? 향유까지 챙기고.”

    에이든의 입에서 절로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올리비아와 잠자리를 하며 딱히 향유를 챙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래서 의외의 물건이 등장해서 더 화났던 건데. 자신과 쓰기 위해서라니. 손으론 슬쩍 가슴을 탐하고 입은 히죽이면서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가녀린 목덜미에 입술을 찍었다.

    “으응, 낮에 할 때는 좀 힘들어서요.”

    에이든은 또 다른 의미로 굳어 버렸다.

    ‘히, 힘들다니?’

    물론, 낮에 할 땐 밤에 할 때보다 정성 들여 애무해 주지 않긴 했지만 그렇게 아팠나? 그동안 상처를 줬던 거야? 본능적으로 팽팽하던 에이든의 성기가 양심적으로 수그러들었다.

    아주 예민한 놈이라서 순식간에 기운을 잃었다. 에이든이 자신감을 잃은 만큼 의지도 자신감을 잃었다. 그리고 자괴감이 몰려왔다.

    “혹시 그동안 나랑 하면서 아팠어?”

    에이든은 스스로가 잠자리에서 미숙함을 잘 알았다. 나름 올리비아의 반응을 보며 노력하지만 책을 보고 쌓은 지식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무수한 실전 속에서 맨날 더 정신없이 빠져드는 쪽은 에이든이었다. 그리고 실제 경험은 적어서 1초 찍도 자주 하지 않던가.

    그래서 가뜩이나 올리비아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힘들었다니! 그 소리에 에이든은 기운이 쭉 빠졌다. 에이든이 힘없이 중얼거리자 목덜미에 스치는 입김에 몸을 흠칫 떤 올리비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프다기보다, 으음, 가끔 급하게 넣으시면 힘들었어요. 으응…….”

    달큰한 열기를 품기 시작한 올리비아의 목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에이든은 좌절했다.

    그렇게 기운 없이 축 늘어진 에이든과 다르게 올리비아는 슬슬 열이 오르고 있었다. 엉덩이골을 타고 슥슥 문대는 물건에 아래가 빠끔거렸다. 품고 싶어 배 속에 열기가 고였다. 다리 사이가 근질거렸다.

    그런데 가슴을 주물럭거리던 손이 멈추고 엉덩이에 비비적거리던 것이 멈추자 괜히 안달이 났다. 갑자기 에이든 도련님의 달라진 태도를 이해 못했다. 그저 하려다가 멈춘 게 야속했다.

    “도련님?”

    그래서 언제 하냐고 불렀더니.

    “알았어. 앞으로 조심할게.”

    에이든 도련님이 상체를 떼고 일어서며 힘없이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슬쩍 하체에 닿았던 것이 멀어지고 가슴을 감싼 손이 떨어져 올리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에이든 도련님의 손 위를 덥석 덮었다. 에이든 도련님 손바닥에 우뚝 선 유실이 문질러지면서 저릿함이 번졌다.

    “아응, 하지 않으시려고요?”

    올리비아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더 뒤로 빼며 엉덩이에 물건이 닿게 했다. 아까의 딱딱함을 잃은 물건이지만 이건 조금만 자극해 줘도 금방 섰다.

    “전 하고 싶은데…….”

    엉덩이를 더욱 쭉 빼며 흔들자 역시나, 에이든 도련님의 물건이 다시 서서히 단단해졌다. 엉덩이에 문대지는 살덩이에 다리 사이가 찡 울렸다. 짙은 쾌락에 대한 기대감으로 올리비아는 온몸이 뒤틀렸다. 어서 넣고 짜릿한 쾌락을 맛보고 싶어서 몸이 안달이 났다.

    “아아……. 가슴도 더 만져 주세요.”

    그리고 올리비아가 원하는 대로 가슴을 주물러 주면서 예상치 못한 황홀경을 눈앞에서 본 에이든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씨, 씨발…….”

    에이든은 덫에 걸린 쥐새끼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분명히 자괴감이 찾아왔다. 같이 즐긴 줄 알았는데 그동안 올리비아가 아파 왔단 사실에, 잠자리가 미숙했단 걸 지적당한 것 같아서 온갖 우울함이 몰려왔었다.

    그래서 올리비아의 머리카락만 봐도 불끈거리던 녀석도 기운을 잃고 축 늘어졌는데. 그런데 지금 이 황홀경은 뭐지? 꿈인가?

    “으응, 도련님, 거기 직접 꽈악 해 주세요.”

    머릿속이 멍한 와중에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요구대로 손을 움직거렸다. 옷 속으로 손바닥을 집어넣어 그녀가 원하는 대로 가슴을 꽉 틀어쥐었다.

    “하으, 더요.”

    에이든은 달콤한 목소리를 계속 따랐다. 희고 말랑거리는 살결이 손을 가득 채웠고, 우뚝 선 유실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감촉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풀이 죽었던 아랫도리가 ‘어라? 올리비아의 가슴이잖아?’ 하면서 고개를 치켜드는 것 같았다.

    이렇게 쥐면 이 모양대로 뭉개지고 저렇게 쥐면 저 모양대로 뭉개지는 탄력 있는 가슴, 정말 올리비아의 가슴이 맞는데?

    “흐읏!”

    좋아서 야릇한 소리를 흘리는 올리비아는 현실이었다. 이건 에이든이 시켜서 하는 것과 달랐다. 올리비아가 먼저 요구하고 있었다.

    ‘진짜야? 진짜 올리비아가 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거야?’

    씨발, 에이든은 지금 이대로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언제 기운을 잃었느냔 것처럼 아랫도리가 불끈하고 일어섰다. 그걸 느낀 듯 올리비아의 엉덩이가 성기를 자극해 왔다.

    “하으, 도련님 안 넣어요?”

    올리비아가 제 엉덩이골 사이에 성기를 끼우고 비비적거리는 음란한 모습에 에이든은 코피를 쏟을 뻔했다. 아니면 정액이든가.

    씨발, 삽입도 아니고, 핥은 것도 아닌데 싸게 생겼다. 이놈의 의지 새끼는 진짜 의지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버티지 못하고 매일매일 줄줄 흘려 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올리비아의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에이든이 아무리 엉덩이에 힘을 강하게 주고 ‘버텨라! 몹쓸 의지박약!’을 머릿속에 새겨 넣어도 버티기 힘든 자극이었다. 찔끔거리는 액체를 토해 내는 페니스는 진짜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지, 진짜로 넣어?”

    에이든은 덜떨어진 놈처럼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 심장이 두근거려서 그랬다.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리고 사실 떨리는 건 에이든의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걸 보여 주듯 에이든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올리비아가 다시 고개를 틀어 에이든을 돌아봤다. 측면으로 보이는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이, 열 오른 눈이 아찔했다. 올리비아의 혀가 나와 갈증 난다는 듯 제 입술을 핥았다.

    “으응, 전 하고 싶어요…….”

    미쳤다. 이것이야말로 미친 상황이다! 에이든의 이성이 저세상으로 날아갔다. 자괴감이고 뭐고 떠올릴 새가 없었다. 그저 이 욕망을 터트려야 할 시간이었다.

    기쁨과 흥분의 환호성을 삼키며 에이든은 손에 꽉 쥐고 있던 향유 뚜껑을 열었다. 뽕 하고 들리는 차진 소리에 올리비아는 엉덩이를 더욱 쭉 뺐다. 에이든은 갈라진 둔덕으로 향유를 아낌없이 뿌렸다.

    “너, 진짜! 야해 빠져서 사람을 가지고 놀지?”

    “히잇! 아, 아니에요. 그런 적 없는데…….”

    달아오른 몸에 닿은 향유가 차가운지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올라갔다가 내려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에이든은 즉시 손을 내려 둔덕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를 올리비아의 입구에 펴 발랐다.

    “흐응!”

    아까 페니스를 거부한 적 없는 것처럼 올리비아의 입구가 앙큼하게 에이든의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손가락 전체를 통해 전해지는 질벽의 압박감에 에이든의 페니스가 또 찔끔 액체를 뱉어 냈다. 씨발.

    “아니라고? 이렇게 잘근잘근 씹어 대면서 아니라고?”

    올리비아가 흥분한 탓인지, 미끌거리는 향유 덕분인지 모른다. 에이든의 손가락은 너무도 손쉽게 올리비아의 안쪽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만큼 올리비아의 풍만한 엉덩이가 요염하게 흔들렸다.

    “아, 아, 아! 거기 기분 좋아요.”

    “여기? 여기?”

    “으읏, 앞에, 흥, 앞에요!”

    오늘따라 올리비아가 더 솔직한 것 같았다. 그래서 에이든은 더 흥분했다. 원하는 대로 손가락을 놀려 주자 올리비아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하악, 하악!”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조임이 심상치 않았다.

    “후, 올리비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발정 났어?”

    “모, 몰라요. 흐읏, 도련님 어서 넣어 주세요. 아아, 빨리 하고 싶어요. 흐윽!”

    올리비아의 재촉에 에이든은 그 소망을 이뤄 주기로 했다. 제 손으로 성기를 잡아 쓰다듬으며 다시 올리비아의 입구에 문댔다. 귀두에 걸리는 감각은 아까 바짝 말라 튕겨 나온 적 없었던 것처럼 질척거리다 못해 흥건했다.

    진짜 미치겠다. 돌아 버리겠어. 에이든은 속에서 올라오는 험한 말을 씹어 삼켰다. 대신,

    “올리비아, 하고 싶으면 스스로 벌려야지.”

    이번에도 올리비아의 손은 스스럼없이 올라와 제 양 엉덩이를 잡고 벌렸다. 붉게 달아올라 벌름거리는 입구에 에이든도 더 참지 못하고 제 성기를 박아 넣었다. 향유의 힘은 대단했다. 여태껏 느꼈던 것과 다른 미끄덩한 삽입감에 에이든은 발끝까지 저릿했다.

    “히익!”

    준비된 입구는 순식간에 에이든의 성기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꾸물거리는 페니스를 조여 와 에이든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당장 쏟아 낼 것만 같았다. 지끈지끈 퍼지는 쾌락이 너무 커서 에이든은 신경질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아읏!”

    올리비아의 볼기가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뒤에서 치고 드는 힘이 강해졌지만 그녀가 느끼는 것은 쾌감뿐이었다. 단단한 것이 제 안을 들쑤실 때마다 등줄기가 저릿해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늘따라 배 속을 어지럽히는 에이든 도련님의 물건이 더욱 뜨겁고 강렬했다. 버거우면서 더 원하는 마음이 섞여 뒤죽박죽이었다. 뒤에서 턱턱 치받는 힘에 올리비아의 온몸이 들썩였다. 앞으로 밀려가지 않도록 협탁을 잡고 버텼지만 몸이 앞으로 자꾸 기울어졌다.

    “흐윽, 도련님…….”

    올리비아의 파들파들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제 성기를 미칠 듯 조이는 질벽은 또 욕망을 부추겼다. 에이든은 허리를 퍽퍽 쳐올리며 물었다.

    “하아, 왜?”

    에이든의 거친 움직임에도 올리비아의 안쪽은 꿈지럭꿈지럭 잘도 삼켜 댔다. 뿐만 아니라 아득하게끔 페니스를 감싸 쥐고 주물렀다. 내벽이 어서 정액을 내놓으라고 호소하는 것만 같았다.

    진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씹어 삼키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제 욕심껏 굴었다간 에이든은 정말 올리비아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그런 말도 못하는 욕망을 가졌다.

    올리비아가 해 달라는 대로 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이 여린 아이를 잡아먹어 버리고 말리라. 에이든이 스스로의 욕심이 두려워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후응! 앗, 거기! 웃, 더 세게 해 주세요…….”

    올리비아가 원한 것은 더 해 달란 말이었다.

    ‘이런 미친, 젠장, 씨발!’

    에이든은 환호인지 절규인지 모를 욕설을 떠올리며 허리 짓을 강하게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빈틈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뿌리 끝까지 성기를 박아 넣었다.

    “흣, 이렇게?”

    “흑, 흣, 핫! 네! 아앗, 좋아…….”

    연약한 몸이 부서져 버릴 정도로 성기를 박아 넣는데, 올리비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환희였다. 쾌락에 물든 아득한 목소리였다.

    올리비아는 늪이었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늪. 저를 순식간에 잡아먹고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맬 지독한 늪. 그걸 알면서도 발버둥 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조금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자신을 전부 주고 싶었다.

    “하으, 하응…….”

    힘이 빠져 아래로 처지는 가는 허리를 부여잡고 에이든은 강하게 제 페니스로 쑤셔 댔다. 철퍽이는 아래를 다신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 것처럼 격렬하게 탐했다.

    그 와중에 다른 놈이 이곳을 드나들 뻔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더 미칠 듯이 열이 올랐다. 감히, 다른 이를 품는다고?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신만 봐야 했다.

    질투하며 이성을 잃은 에이든의 움직임이 무자비해지기 직전이었다.

    “하읏, 하윽, 도련님, 제발 싸 주세요. 흐으…….”

    올리비아의 애원이 에이든의 귓전을 때렸다. 쾌락과 힘겨움이 담긴 귀여운 울먹임이 심장을 옥죄었다. 씨발, 진짜. 뭘 알고 하는 애원이 아니었다. 베갯머리송사 같은 앙큼한 행동은 더 아니었다.

    하지만 에이든의 이성을 앗아 가던 무자비함은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확 치솟던 분노가 놀랄 정도로 쉽게 가라앉았다.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좋아하는 곳을 두어 번 더 들쑤셔 그녀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올리비아의 가장 깊은 곳에 성기를 밀어 넣고 사정했다. 올리비아의 내벽이 달달달 경련하며 정액을 남은 한 방울까지 쥐어 짜냈다. 쾌감이 너무 강해서 에이든은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한 번의 쾌락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올리비아가 먼저 달아오른 엄청 특별한 날. 그리고 이런 날은 제대로 만족시켜 줘야 했다.

    그다음부터는 광란의 시간이었다. 성욕만 남은 짐승이 된 것 같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붙어서 욕실로 이동했고, 거기서도 뜨거운 시간을 가졌다. 씻는 건지 물을 뒤집어쓰는 건지 모를 상태로 얽혀 들었다.

    침실로 이동하면서도 다급하게 서로를 탐했고 마지막엔 침대에 올라가서는 정신을 놓고 욕망을 풀어냈다. 처음 결합했을 때부터 하체는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었다. 계속 난잡하게 접붙이고 입술도 서로를 집어삼켰다.

    아까 올리비아를 놀리기 위해 발정 났단 말을 던졌는데, 그게 진실이라도 되는지 오늘따라 그녀 또한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도련님, 아앙, 좋아! 좋아요! 흣!”

    평소보다 더욱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야하게 굴었다. 에이든은 격렬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올리비아의 흰 나신에 덕지덕지 잇자국을 남겼다. 순간순간 욕망을 자제 못해 한 실수였다.

    “아얏! 아, 아프, 흐응…….”

    “헉, 헉, 아프긴, 이렇게 잘라 먹을 것처럼 조이면서!”

    하지만 반성은커녕 올리비아가 아프다고 울먹이면 더욱 아랫배가 조여들고 열이 홧홧 났다. 그래서 에이든은 더 정신을 차릴 수 없으면서도 한 가닥 남은 이성으로 의지를 불태웠다.

    더욱 힘차게 허리를 놀려 올리비아의 젖은 내벽을 자극했다. 쾌락에 정신이 마비되는 것 같으면서도 아까 그 개 같은 대화가 자꾸 떠올랐다. 이 나라의 왕세자란 놈과 올리비아의 미친 대화가.

    이 행위가 끝나면 올리비아가 그 녀석에게 갈지 모른다. 자신을 지쳐 잠들게 하고 올리비아가 다른 놈의 품에 안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의지를 굳건히 세웠다.

    “흐윽, 도련니임, 제발, 읏웅, 그만!”

    “흐으, 흐으, 힘들, 힘들어요.”

    “아, 아, 싫어!”

    몇 번의 전율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올리비아가 그만하자고 애원해도 이번엔 멈출 수 없었다. 평소의 에이든이었으면 흐물흐물 녹아 올리비아의 요청을 당연히 들어줬을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스럽고 뭐든 들어주고 싶게끔 울먹여도, 오늘은 기를 쓰고 의지를 세우고 또 세웠다.

    사실 나중엔 에이든도 쾌락을 넘어 지끈거리는 고통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힘을 냈고 마지막 사정엔 정액이 아니라 묽은 액체를 흘려 냈다.

    “이제, 진짜 그만…….”

    마지막 절정에 숨넘어갈 것 같던 올리비아가 내뱉은 간절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곧바로 기절하듯 잠든 걸 확인한 후에야 에이든은 속으로 외칠 수 있었다.

    ‘해냈도다. 의지가 드디어 올리비아의 체력을 이겼도다!’

    사실 에이든이 병약한 몸을 가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곱게 자란 도련님이었고, 기사가 아닌 학자였다. 평생 몸을 쓰며 일해 온 올리비아와 비교하면 묘하게 체력적으로 부족한 느낌을 받곤 했었다.

    그걸 증명하듯 잠자리를 가진 후에 먼저 지치는 건 늘 에이든이었다. 그러다 보니 성욕에 미쳐 날뛴 후 쾌락의 여운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에이든의 뒤처리를 해 주는 것도 항상 올리비아였다.

    비록 지금 하늘이 노랗고 팔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에이든은 지쳐 잠든 올리비아를 보며 묘한 성취감마저 느껴졌다. 특히, 잠자리에서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단 점에서 고취감도 느꼈다. 나중엔 더 성숙한 기술로 혼을 쏙 빼놓을 테다.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에이든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올리비아가 그랬던 것처럼 욕실로 가서 따뜻한 물과 수건을 챙겨 왔다.

    그리고 적셔 가며 잠든 올리비아의 몸을 닦았다. 마음 같아선 번쩍 안고 가 욕실에서 씻겨 주고 싶지만 그럴 체력이 없었다.

    하도 씹어서 생긴 잇자국과 붉은 멍울에 미안함과 충족감이 동시에 든 걸 보면 자신은 진짜 변태가 틀림없다. 제 것이라는 흔적이 가득하니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 줄어들었다.

    올리비아의 다리 사이를 닦으며 닦아도 계속 묻어 나오는 제 정액을 보면서 얼마나 뿌듯하던지. 에이든은 모처럼 의지 녀석을 칭찬해 줬다.

    그러다가 떠오르는 게 있어 입술을 내려 납작한 배에 입을 맞췄다. 판판한 배가 사랑스러워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간절하게 응원했다.

    ‘제발 힘내라 내 씨앗들아, 올리비아 너도 힘내렴. 우리 힘내서 싹 좀 틔우자.’

    아기가 들어서면 올리비아도 그런 헛소리에 알겠다고 답하지 않을 것 아닌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왜 들어서질 않는지 의문이었다. 생겨도 진작 생겼어야 할 것 같은데.

    에이든은 간절히 염원하며 몇 번이고 손바닥으로 배를 쓸어내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닦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툰 손길로 올리비아의 몸을 더럽힌 체액을 닦아 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제 몸은 대충 닦았다. 올리비아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에이든은 수건을 던져 놓고 잠든 올리비아의 몸을 시트로 꽁꽁 감싼 후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이런 일련의 행동을 하는 동안 올리비아는 한 번도 깨지 않고 잘도 잤다.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살랑거리는 봄바람처럼 에이든의 가슴을 간질였다.

    좋다. 올리비아가 제 침대 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에이든은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깨방정 떨며 좋아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올리비아가 깰지 모르니 그건 참았다.

    깜빡 잠든 사이에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로 감싸고 어깨를 끌어당겨 제 품에 쏙 가뒀다. 올가미처럼 온몸으로 감싸고 나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가슴에 폭 안고 한참을 있다가 이 황홀한 순간을 그냥 보내는 게 또 아까워 살짝 떼어 내 잠든 올리비아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다시 품에 안았다가, 다시 또 얼굴을 감상하는 일을 무한 반복했다.

    같이 자자고 하면 펄쩍 뛰는 그 올리비아가 자신의 품에 안겨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것만으로 에이든은 전율했다.

    ‘품에 있는데 왜 자꾸 보고 싶을까?’

    슬쩍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니 또 감동으로 찌릿했다. 볼 때마다 어쩜 이렇게 색다르게 예쁜지.

    하도 빨아 대서 퉁퉁 부은 입술이 야했다. 쾌락의 정점에 흘린 눈물로 짓무른 눈가도 섹시했다. 젖은 속눈썹도 야릇하고, 최근 케이크를 많이 먹어 통통해진 뺨은 또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에이든은 살짝 입술을 내려 올리비아의 뺨을 이로 약하게 긁었다. 입술 안쪽 점막에 닿는 올리비아의 피부가 너무 좋았다. 평생 입술을 붙이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매끄러운 감촉이었다.

    에이든은 홀린 듯 잠든 올리비아를 탐했다. 마치 잡아먹을 것 같은 게걸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에이든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응…….”

    피부 위를 기어 다니는 음흉한 것에 거부감을 느낀 것처럼 올리비아가 고개를 흔들며 뒤척였다. 저도 모르게 열심히 사랑스러운 볼을 핥아 대던 에이든은 그 신음에 움찔 멈췄다.

    얼마나 개새끼처럼 핥아 댔는지 올리비아의 피부가 타액으로 범벅되어 번들거렸다. 이제 그만해야겠다. 많이 괴롭혔으니 잠이라도 푹 자게 해 줘야지. 에이든은 만족감에 다시 올리비아를 품에 안았다. 물론, 그러고 한참을 있다가 다시 아쉬워서 빼꼼 올리비아의 얼굴을 훔쳐봤지만.

    에이든은 이 첫날밤이 설레서 거의 밤을 새다시피 했다.

    * * *

    그렇게 에이든이 최고로 흡족한 밤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와 다른 의미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아?”

    결국 아침 해가 떠오르는 걸 바라보며 로건은 으득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강제로 요구했지만 이렇게 하녀에게 농락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로건은 들뜬 마음으로 초저녁부터 침실에서 하녀를 기다렸다. 아득하게 흔들리던 눈망울을 떠올리며 하녀를 품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떴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강렬한 욕구에 시간이 얼른 갔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억지로 요구했다는 점에서 미안함과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비열함에 치를 떨면서 하녀를 기다렸다.

    밤이 점차 깊어지고, 더욱 깊어질수록. 로건은 들뜨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고, 또 더 흘러 새벽이 되었을 때는 욕설이 나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하녀는 오지 않았다.

    그 도련님이란 새끼가 얼마나 짐승 새끼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하녀가 단순히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짜증은 분노가 되었고, 로건이 부들거리는 사이 결국 아침 해가 떠올랐다.

    “최대한 조용히, 좋게 양보받을 생각이었는데……. 감히!”

    왕세자 체면에 이렇게 농락당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강제로라도 빼앗아야겠다. 억지로라도 취해야겠다. 비틀린 마음은 뒤틀린 욕구만을 떠올렸다.

    그는 뜬눈으로 밤새 벌게진 눈과 그동안 쌓인 분노로 흉악한 얼굴을 한 채 방문을 열었다. 당장 백작을 찾아가 하녀를 달라고 할 속셈이었다. 왕세자인 자신의 말을 거절할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로건의 발걸음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왕궁에서부터 따라온 자신의 시종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문제는 그의 하얗게 탈색된 얼굴이었다.

    “저, 전하. 큰일이옵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짜증 나 죽겠는데 무슨 큰일이란 말인가. 별 시답지 않은 일이면 시종에게도 벌을 내릴 거라 다짐하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뜬금없이 무슨 전쟁이란 말인가? 평화로운 시기였다. 로건은 자신의 대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곤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왕이 되고 후에 죽을 때까지 통치를 하게 된다면, 그 긴 시간 동안 아예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으니 살면서 한 번쯤은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하긴 했다.

    그래도, 설마 이렇게 전조도 없이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아무리 외유 중이라고 해도 로건은 수시로 왕성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이상한 낌새가 있었다면 진작 연락이 왔었을 거다.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조짐이 없었다. 왕국의 대신들 중 누구도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짐작하지 못했던 거였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다고? 로건의 이성이 냉철해졌다.

    “전쟁이라니? 무슨 소리야?”

    “정확히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고, 일어날 것 같습니다.”

    싸늘한 로건의 물음에 시종은 더욱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다. 로건의 표정이 굳자 결국 시종은 설명하기 힘든지 들고 있던 전서를 내밀었다.

    “여기, 제국이 나섰답니다.”

    얌전히 있던 제국이 왜? 로건은 시종의 손에서 전서를 신경질적으로 낚아챘다. 그리고 재빠르게 내용을 확인했다. 서신을 보낼 때의 다급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흔들리는 필체였다. 내용은 시종이 한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국경 지역에서 군사 이동으로 짐작되는 소란스러움이 있고, 선전 포고문이 도착했다. 그러니 하루빨리 왕성으로 돌아오라는 내용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제국에서 왜 선전 포고를 했고, 무엇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려는지에 대한 내용은 조금도 없었다.

    왕세자의 측근은 누구든 서신을 확인할 수 있게끔 보냈다는 것에서부터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측근 누구라도 이 서신을 읽는 즉시, 왕세자를 왕성으로 피신시키라는 의미였으니까.

    “이것뿐이더냐?”

    “네, 네! 어쩌시겠습니까?”

    이 일을 보고 어쩌겠냐는 질문이 나오는 건가? 시종의 어리바리함이 로건을 더 짜증 나게 했다.

    “뭐 하느냐? 당장 떠날 채비를 해라.”

    “네! 알겠습니다!”

    로건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시종이 바짝 얼어 소리쳤다. 로건은 신경질이 치밀었다. 이건 흘려 넘길 수 없는 상황이었고, 화급을 다투는 일이었다. 백작을 찾아가 하녀를 달라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요한 일 말이다.

    그런데 왜일까? 이성적으로 더 신경 써야 할 일이 전쟁에 관한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자꾸 미련이 남았다. 콜린스 백작에게 말 한마디 하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 백작과 이야기를 끝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자신이 하녀한테 보이는 건 과한 반응이었다. 한 번도 품어 보지도 않은 하녀에게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을 기만한 사람이 아니던가.

    “전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렇게 미련으로 고뇌하는 사이에 시종이 다가와 마차가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이번 일이 먼저다. 로건은 신경질적으로 마차에 막 발을 디뎠다.

    “왕세자 전하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떠나십니까? 혹시 저희 쪽에서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는지요?”

    뒤늦게 로건이 떠난다는 소리를 전달받은 집사가 부랴부랴 쫓아와 물었다. 이른 시간이라 백작이 아니라 집사가 찾아온 듯했다. 로건은 집사를 관찰했다. 집사의 태도를 보아하니 아직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소식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수도에 급한 일이 있어서 떠나게 됐네. 집 주인에게 너무 이른 시간이라 인사도 못 하고 떠난다고 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전해 주게.”

    혹시 몰라서 그는 수도에서 받은 정보는 생략했다. 로건의 정체를 알고 있는 집사는 그의 말에 더 붙잡지 못했다. 그저 조심히 왕세자의 반응을 살펴 이 집안에 불만이 있어서 떠나는 게 아니란 것만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

    “네, 전해 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잘 지내다 가네.”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로건은 마차에 앉았다. 시종이 뒤따라 타 화급하게 문을 닫았고, 마차는 지체 없이 떠났다.

    제국과 무슨 말도 안 되는 오해가 있는 걸 거다. 그것만 해결하고 나면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리고 그때…….

    로건은 누구도 듣지 못할 다짐을 하며 콜린스 백작가를 떠났다.

    * * *

    올리비아는 훌륭한 하녀였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만큼 성실하고 본분에 충실한 하녀가 없다고 자부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지쳐 잠들어도 그다음 날 제때에 일어났다. 평생 하녀로 살아왔기에 몸에 밴 습관이었다.

    오늘도 평소와 똑같이 일어날 시간이란 느낌에 올리비아는 눈을 반짝 떴다. 이상하게 엄청 피곤하지만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로 멍한 정신을 일깨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방이 어둡고 마치 시트를 뒤집어쓴 것처럼 더웠다. 게다가 온몸이 아프고 무거웠다. 무언가 제 몸을 묶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으으…….”

    올리비아가 움직이려고 했지만 팔을 들 수도, 발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뭐지? 왜 이러지? 이게 말로만 듣던 가위에 눌린다는 건가?’

    그럴 땐 손가락부터 움직이라고 했다. 올리비아가 조심히 손가락을 까딱했는데 신기할 정도로 잘 움직였다. 손목까지 제대로 돌아가고, 발가락도 꼼지락거릴 수 있는데 몸 전체를 움직일 순 없었다. 마치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올리비아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고 그만큼 발버둥이 심해졌다.

    “끄응!”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고 그제야, 등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 몸을 흔들자 잠기운이 나른하게 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더 자자.”

    갈라진 음성이라 마치 피부 위를 긁어 내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올리비아는 목소리의 주인이 에이든 도련님임을 알아채고 작게 호흡을 골랐다.

    “도련님?”

    올리비아의 부름에 등을 토닥토닥하던 손길이 멈췄다. 그리고 저를 꽁꽁 감쌌던 무언가가 느슨해졌다.

    “응?”

    나직한 대답과 함께 앞을 가리다시피 했던 시트가 내려가자 올리비아는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자신이 시트에 둘둘 말린 채 에이든 도련님의 품에서 눈을 뜬 것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감히 모시는 도련님의 침대에서 잠이 들다니, 하녀로서 실격이었다. 이건 처벌받아도 어쩔 수 없는 실수였다. 가뜩이나 어제 에이든 도련님은 기분이 나쁘셨는데, 이걸로 기분이 더 나빠지셨으면 어쩌지?

    도련님 기분을 풀겠다고 생각했으면서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올리비아가 안절부절못해 에이든 도련님을 응시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에이든 도련님은 반쯤 잠에 취해 있었다.

    가물가물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고 그게 참 예뻤다. 에이든 도련님이 예쁘게 생긴 건 알았지만 코앞에서 그것도 눈 뜨자마자 바라보니 더 예뻐 보였다. 특히, 신경질 내지 않고 평화로운 얼굴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다.

    입매가 느슨하게 풀려 미소를 짓고 계시니 올리비아는 어쩐지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누가 배 속을 간지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 어딘가가 보들보들했다.

    그리고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올리비아는 헤헤 웃으며 앞에 있는 에이든 도련님의 가슴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아깐 답답하단 생각뿐이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따스하고 편한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기분이 좋아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웃으며 앞에 있는 가슴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그때 갑자기 저를 감쌌던 팔이 힘주어 잡아 왔다. 아플 정도로 꽉 눌러 와 놀라 고개를 들자, 에이든 도련님이 잠이 확 달아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올리비아?”

    올리비아는 에이든 도련님이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는 몰랐다. 다만 어제의 화가 많이 풀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역시 잠자리 갖고 나시면 기분이 좋아지시는 건가?’

    하지만 화가 전부 풀렸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서 혹시 몰라서 물었다.

    “도련님, 이제 화 다 풀리셨어요?”

    “뭐?”

    “어제 조금 화나셨잖아요.”

    올리비아가 조마조마한 눈길로 올려다보자, 멍하니 있던 에이든 도련님은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큰 소리로 와하하 웃으며 저를 확 끌어당기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다시 에이든 도련님의 가슴에 뺨을 기대고 웃음이 멈추길 기다렸다. 그 호쾌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올리비아는 기다리는 동안 영문 모르게 자신의 입가에서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단 걸 몰랐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올리비아.”

    에이든 도련님이 한참을 웃고 나서 목을 가다듬고 저를 불렀다.

    “네?”

    “내가 화내는 게 싫어?”

    “…….”

    올리비아가 답하지 못하자 에이든 도련님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솔직히 말해도 돼.”

    “네. 무서워요.”

    아차, 말하란다고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처음엔 버텼는데 저도 모르게 답해 버렸다. 올리비아는 놀라서 움찔 떨었지만, 에이든 도련님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표정이라 오히려 얼떨떨했다.

    그래서 멍하니 올려다보자 다시 한참을 웃던 도련님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 에이든 도련님이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진짜, 못 당하겠다. 그렇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괜히 자신의 심장마저 떨리는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올리비아는 괜히 입안이 마른 느낌에 침을 꿀떡 삼켰다. 뭘 못 당하겠다는 소린지는 모르겠다.

    올리비아는 그저 눈만 깜빡이다가 에이든 도련님이 즐거워 보여 그냥 같이 웃었다. 그러자 에이든 도련님은 더욱 짙은 웃음을 터트리며 뺨에 입을 맞춰 왔다.

    이상하다. 올리비아는 뭔가 잘 모르겠는데, 도련님의 웃음소리를 들을수록 그냥 기쁜 거 같아 같이 웃었다. 심장 근처가 꽉 조여드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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