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06화 (완결) (106/116)
  • 106화. 동녘과 백야 (完)

    [ ※ 엔딩 추천곡 : The Cranberries - Dreams ]

    “머시여.”

    하 회장의 회색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잠시 침묵한 채 내려다보던 무경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이만큼 키우신 동녘 그룹, 제가 잘 지키겠습니다.”

    하 회장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무경이 아버지의 앙상한 손을 붙잡아 제 이마 위에 갖다 댔다.

    “더 잘 키우겠습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

    그런 무경을 꽤 오랜 시간 내려다보던 하 회장이 무경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단단한 다짐에 화답하듯 씨익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어주었다.

    “인자부텀 니가 알아서 하쇼, 하 회장.”

    나는 겁나 고단항께 인자 잔 쉬어야것네.

    중얼거리던 하 회장이 의료진에게 가자고 손짓하니 그가 앉은 휠체어가 움직여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무경을 그대로 지나쳤다.

    “…….”

    무경은 고개를 떨어트린 채로 꽤 오랜 시간 미동할 수 없었다.

    그런 무경의 앞으로 하태경이 다가왔다.

    “긴장 풀지 마라. 끝이 아니다.”

    하태경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있을 경쟁을 암시했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패배를 깔끔하게 인정하고 숨죽이고 있을 사람임을 무경은 안다.

    “회장님. 앞으로 나 잘 좀 부탁드려요? 나도 곁에서 많이 도와드릴게.”

    하가경은 무서울 정도의 빠른 태세 전환으로 무경의 편에 섰다.

    “…….”

    한동안 더 부동자세로 있던 무경이 일정 시간이 지나자 꺾인 무릎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고 머리를 한 번 쓸어올렸다.

    고개를 좌우로 우드득 한 번 비트는 것을 잊지 않으며 감고 있던 눈꺼풀을 서서히 밀어 올렸다.

    유독 검은 눈동자에 강렬한 섬광이 스쳤다.

    사실, 하태경의 말도 하가경의 말도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 무경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생각은 오직 단 하나였으니.

    나는 가야겠다. 내가 놓쳤던 내 토끼 잡으러.

    나를 사랑하는 나의 사랑, 너에게로.

    “꺄아! 웬일이야 웬일이야!”

    엄숙한 회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낭랑한 음성이 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시선이 상석의 주연에게로 향했고, 핸드폰을 바라보며 좋아하고 있던 주연이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고는 핸드폰을 엎어트리며 흠, 작게 헛기침했다.

    “미안해요. 기분 좋은 뉴스가 좀 들어와서. 이어 하시죠?”

    회의 테이블 밑에서 소녀처럼 발을 동동 구르던 주연이 자세를 바로 하고 회의를 계속할 것을 지시했다.

    “네. 방금 보고드린 것처럼…….”

    점잖은 목소리가 회의실 내를 금세 가득 메웠고, 주연은 테이블 밑으로 핸드폰을 내리며 조금 전 태호에게서 받은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라주연 상무님. 궁금해하실 것 같아 소식 전합니다. 저희 상무님께서 회장직 승계하셨습니다.

    느른하게 턱을 괸 주연이 피식 웃었다.

    축하해. 벗인 듯 벗이 아닌 나의 좋은 벗, 하무경.

    컨벤션 센터 밖으로 나온 도현의 손엔 캐리어가 쥐어져 있었다.

    오늘따라 강한 햇살을 품은 청명한 여름 하늘을 찡그린 눈으로 잠시 올려다보던 도현이 자신을 기다리는 택시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었다.

    뒷좌석에 올라탄 그가 인천공항이요, 라고 목적지를 짧게 말하면서 문을 닫았다.

    택시가 출발했고 도현은 멀어지는 컨벤션 센터를 응시하면서 무경과의 마지막 통화를 회상했다.

    ‘넌 이번 일도 어쩌면 나를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희생이 아니라 네가 날 살린 거다.’

    먹구름에 가려져 있던 정오의 해가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절대로 잊지 마라. 내게 동녘을 쥐여준 건 너야. 회장님께서 네 손에 키를 쥐여주신 거야. 그게 무슨 뜻이겠냐, 도현아.’

    그 빛에 도현의 눈앞이 환하고 또 시렸다.

    ‘넌 그간 가려져 살았지만 가려졌던 게 아니야.’

    도현이 시트에 머리를 기대며 피로한 두 눈을 감았다.

    ‘물론, 네겐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듣기 좋은 허울뿐인 말이겠지만. 고맙다, 도현아.’

    고단한 몸과는 달리 도현의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높이 씰룩였다.

    ‘내 동생.’

    변한 건 딱히 없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동녘의 막내, 하도현.’

    한 사람의 그 진심 어린 몇 마디 말에, 그간 쌓였던 설움이 한 방에 다 씻기는 기분이 들었으니.

    무경은 통화를 종료하기 전, 마지막으로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리고 이제 도현은, 동녘에게서, 하무경에게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찾아 떠난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도현의 가슴이, 무지개를 처음 본 아이처럼 마구 뛰었다.

    ***

    무경과 이별한 지도 벌써 4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람은 누구나 좌절을 경험한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행복보단 불행에 익숙해진다.

    책임감은 커지고 자신의 의지는 꺾이고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점차 알아가게 된다.

    보통 하늘은 그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시련을 준다지만, 지금 요원의 것은 달랐다.

    모래로 쌓은 성의 축대를 큼지막한 거인의 손이 다가와 뭉텅뭉텅 빼가듯, 그렇게,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던 슬픔이란 감정은 어느덧 분노로 그 형태를 바꾸었다.

    이제 보니 남자는 칼날이다.

    그 칼날이 내 갈비뼈를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그 칼날을 빼면 더 많은 피를 흘릴까 두려워, 그대로 둘 수밖에 없는 현실이 괴롭다.

    그 남자는 대체 왜, 평온하던 내 인생이란 고요한 호숫가에 돌멩이를 던져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나.

    개새끼. 내 인생에 왜 굳이 꾸역꾸역 기어들어 와선.

    개자식. 내 인생을 망치러 온 개자식.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욕과 저주를 죄다 하무경을 향해 퍼붓고 싶었으나, 또 이것보다 심한 욕은 차마 남자를 향해 던질 수가 없는 마음이다.

    저주보다 행복을 바라주고 싶은 애달픈 마음이다.

    햇살이 가장 강한 정오쯤 되었을까?

    요원은 오늘도 자전거를 끌고 하천을 거닐었다.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하면 자꾸만 눈물이 나니까, 머리도 마음도 모두 텅텅 비운 채로 하천을 거닐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남자가 떠오르니까. 백야마을 전체에 남자가 스며들어 있으니까. 보다 보면 또 남자가 떠오르니까.

    차마 풍경은 보지도 못하고 발끝으로 시선을 떨어트린 채로 계속해서 거닐었다.

    그러다가 우뚝, 멈춰 섰다.

    잠시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작열하는 뜨거운 여름이다.

    강하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이 피부로 스민다.

    시원한 하천의 물소리는 귓가로 스며든다.

    남자와의 첫 만남이 또 뇌리를 스미려 하여서, 요원은 그 생각을 떨쳐내듯 고개를 빠르게 휘저으며 다시 자전거를 끌고 앞을 향해 거닐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발끝에 고정된 채다.

    그러다가 요원의 발걸음이 다시 한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이번엔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어디에선가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다. 익숙한 체향이 넘실대는 뜨거운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

    땅에 깔려있던 요원의 시선이 서서히 정면으로 향했다.

    불어온 바람에 나뭇가지 끝이 흔들렸고, 바람에 떨어진 꽃잎들은 톱밥처럼 사방에 뿌려졌다.

    눈처럼 사선으로 흩날리는 꽃잎 속에 남자가 있었다.

    바람에 눈이 시린 듯, 요원은 가늘게 뜬 눈으로 비현실적인 풍경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눈에 꼭꼭 새겨 담았다.

    “그런데 말이에요, 순경님.”

    바람이 제게로 다가온다. 익숙한 체향이 넘실넘실 파도치는 바람이.

    “여기, 총 여덟 가구 맞습니까.”

    요원은 여전히 넋이 나간 채로 두 눈만 멍하니 껌뻑였고, 무경은 눈썹을 한 번 치뜨며 되물었다.

    “응? 맞아요?”

    바람에 실려 오듯 제게로 점차 다가오는 무경을 바라보면서 요원은, 지금 내가 꿈을 꾸나 싶었다.

    꿈이어도 좋았다. 이렇게라도 다시 볼 수 있으니.

    그래서 요원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의 얼굴로 대답했다.

    “아홉 가구였는데…… 다시 여덟 가구가 되었네요.”

    “그건 왜 그렇죠?”

    “누군가가 떠났거든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너무 슬퍼서요.”

    그 대답을 하자마자 기다렸단 듯이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요원은 흐릿한 눈으로 무경을 바라보았다.

    언제 또 연기처럼 사라질지 모르는 환영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요원은 눈앞에 무경이 있었음에도 무경이 없다고 생각했다.

    요원은 눈앞의 남자가 정말로 꿈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드디어 미쳐 환상을 보는 거로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까.

    “왜 이렇게 울어요.”

    그래서, 눈앞의 남자를 아주 원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서요.”

    “보고 있잖아.”

    무경이 미소 지으며 뚜벅뚜벅 느리게 걸어온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한 모습이었고, 또 현실이라고 하기엔 풍경도 남자도 너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남자가 일정 거리를 벌려둔 채로 멈춰 섰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음을 알기에, 요원은 그저 그를 바라만 보았다.

    “그런데 말이에요, 채 순경. 네가 날 뭘 한다고 했었지?”

    꿈속의 남자가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태연하게 묻는다.

    “내가 공항에선 잘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봐. 응? 네가 날 뭘 한다고?”

    “사랑해요.”

    “사랑해?”

    “네. 사랑해요.”

    “채 순경이 날 사랑해?”

    “네.”

    “채요원이 나 하무경을 사랑해?”

    “네. 사랑해요.”

    “그래?”

    여름 바람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인 남자가 갑자기 두 팔을 옆으로 넓게 활짝 벌렸다.

    그 순간에.

    “……아.”

    꽃잎은 여전히 주변에 흩날리고 그의 향기가 사방에 진동하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아?”

    요원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임을.

    “……어?!”

    하무경 씨가 내 앞에 진짜 있구나. 내 앞에 다시 와주었구나. 내 곁으로 다시 돌아와 주었구나.

    눈앞의 남자는 환영이 아닌, 진짜 하무경이구나!

    “하무경 씨……?”

    “왜 불러요, 채요원 순경.”

    “정말…… 진짜 하무경 씨가 맞아요?”

    요원이 손등으로 눈가를 정신없이 비볐다.

    “내가 지금…… 미친 게 아니죠? 꿈을 꾸는 게 아니죠? 하무경 씨를 보고 있는 게 맞죠? 정말 하무경 씨가 내 앞에 있는 게 맞죠?”

    “아니. 나는 사실 귀신이야. 비행기 사고가 나서 유령이 되어 네 앞에 돌아왔어.”

    “……네?”

    요원이 그 황당한 말을 정말 믿는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리자, 무경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조소하며 혀를 츳 찼다.

    “그럼 내가 진짜 하무경이지, 가짜 하무경이야?”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비딱한 미소가 딱, 하무경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와.”

    “…….”

    “빨리 와서 넌 나 안아줘.”

    무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팔을 더 옆으로 넓게 벌리며 말한다.

    “동녘이 백야를 영원히 지켜주러 왔잖아.”

    자전거를 쥐고 있던 요원의 손에 불시에 힘이 빠지면서 자전거가 옆으로 쿠당 넘어졌다.

    “하무경 씨…….”

    무경을 향해 다가가는 요원의 걸음은 현저히 느렸다.

    “하무경 씨…….”

    그러다가 그 걸음이 조금 더 빨라지고.

    “하무경 씨!”

    타타탁!

    몇 걸음 더 빠르게 내달려 남자의 품에 덥석 안겨들었다.

    무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요원을 허공으로 높이 번쩍 안아 들었다.

    하무경 씨, 하무경 씨, 하무경 씨.

    요원의 두 팔은 무경의 목덜미를 세게 끌어안고, 그녀의 두 다리는 무경의 허리를 칭칭 감았다.

    하무경 씨, 하무경 씨, 하무경 씨!

    무경은 쉬지 않고 제 이름을 읊조리는 요원의 작은 뒤통수를 제게로 급하게 끌어당겨 입 맞췄다.

    요원의 도톰한 입술을 혀로 벌려 비집고 들어가 야릇하게 키스했다.

    얽히고설키는 혀가, 다시는 서로를 놓지 않겠다고 다짐하듯이 그렇게 끊임없이 엉겨들었다.

    “저것들이 시방 지금 먼 지랄이래?”

    “성님. 이 시상이 많이 변해부럿네요잉.”

    때마침, 근방을 지나가고 있던 갑순과 부임이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혀를 끌끌 내차며 그들을 등졌다.

    이러한 주변의 따가운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들은, 서로의 입술이 아플 정도로 물고 빨고 깨물고를 반복하다가 서로에게서 겨우겨우 떨어져 나갔다.

    “하아, 채 순경. 나랑 담배나 한 대 빨러 갈래?”

    무경은 요원에게 상황과는 맞지 않는 질문을 대뜸 던졌다.

    “물론 다른 거 빨아도 되고.”

    잇따른 무경의 가벼운 발언에 요원은 기가 차다 못해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간의 4일을 지옥 속에서 살았던 자신이 한순간에 바보가 된 기분이라서.

    “4일 만에 만나서…… 고작 한다는 말이…….”

    남자는 정작 태평한데 나 혼자만 이렇게 아파했던 것 같아서.

    “그것도 비흡연자한테……, 지금 그게 대체 무슨 멋 없는!”

    감동이 와장창 다 깨진 얼굴로 요원이 억울해서 막 울먹이던 때였다.

    “우리 참, 멀리 어렵게도 돌아왔다.”

    무경이 요원의 모자챙을 툭툭 가볍게 치면서 웃었다.

    “사랑해.”

    그러고는 최선을 다해 진심을 전했다.

    “내가 널 사랑해. 나는 널 이곳에서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너에게 지독히도 감겨버렸어. 열병의 시작이었어.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해, 채요원. 나의 채 순경.”

    그제야 요원도 감동을 되찾은 얼굴로 무경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서로를 지그시 응시한 채 오래도록 해사하게 웃었다.

    그들의 위에서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보다도 더 눈이 부신 미소로. 더 뜨거운 마음으로.

    다시 동녘에서 태양이 떠올랐구나. 그 태양이 다시, 백야를 비추는구나.

    <동녘과 백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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