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05화 (105/116)
  • 105화. XX 삽질

    무경과 그렇게 이별을 하고 고작 하루가 지났다.

    요원은 많이도 울었다. 눈물샘이 고장이 났나 싶을 정도로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밥을 먹다가도 울고, 핸드폰을 보다가도 울고, 갑순이 깎아준 사과를 받아먹으면서도 울고, 빈집이 되어버린 무경의 집 마당에 들어가서 괜히 파란 호스를 붙잡고 울고, 그와 첫 키스를 했던 대청마루 위에 엎드려 또 울고.

    새로운 아침이 밝았으나 파출소에서도 요원은 마찬가지였다.

    민원을 받다가 울고, 순찰을 돌다가 또 울고, 동네 어르신을 도와드리다가 갑자기 또 울고.

    그녀는 혼자 다른 시간에 갇혀있었다. 공항에서 남자와 이별한 그 날에 여전히 갇혀있었다.

    하무경 씨는 언제 내 곁으로 다시 돌아올까.

    생각해보니 연락처 하나 받아둔 것이 없는데. 심지어 그의 메일 주소 하나조차 모르는데.

    “흐어어엉…….”

    “엄마, 깜짝이야.”

    팔각정에 앉아 자장면을 잘 먹던 요원이 갑자기 또 울음을 터트리자, 영문을 알 리 없는 성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야, 채 순경. 너 진짜 오늘 왜 이러냐?”

    “죄송…… 흡…… 합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요원을 보다 못한 팔각정 사장이 다가와 그들의 테이블 위에 동파육을 서비스라며 내려두었다.

    “흐어어엉!”

    그 동파육을 보자마자 요원은 무경과 함께 먹었던 그 시간들이 떠올라 더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

    팔각정 사장과 성준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녀에게 휴지를 내밀었고, 요원은 그 휴지를 받아들어 코를 풀면서도 엉엉 서럽게 울었다.

    온갖 곳에 그가 남아있다. 심지어 이 동파육에마저도.

    나는 이렇게 미쳐가는 걸까. 언제까지 아파해야 남자는 잊힐까. 잊히긴 하는 걸까?

    어머니와의 추억에 이어 남자와의 추억까지 스며든 이 백야마을이 목숨만큼 소중하면서도 또, 살기 위해선 벗어나야 할 것도 같았다.

    “맛있…… 흡…… 네요…….”

    요원은 그렇게 또 젓가락을 쥐고 동파육을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으면서도 한참을 엉엉 울었고, 성준과 팔각정 사장은 그런 요원을 안쓰럽게 바라보면서도 또 잘 먹는 모습에 웃음을 꾹 참았다.

    ***

    무경이 인도로 좌천된 셋째 날 아침엔.

    동녘 그룹이 운영하는 컨벤션 센터에서 하태경을 차기 회장으로 선임하는 안건에 대한 주주총회가 열렸다.

    경비가 삼엄했고 장내는 엄숙했다.

    하 회장, 하태경, 하가경은 맨 앞자리에 검은 슈트를 빼입고 앉아 대주주들이 모두 모이기만을 기다렸다.

    아직 장내가 3분의 1밖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콜록, 콜록!

    손수건을 입에 갖다 대며 기침을 하는 하 회장의 낯빛이 좋질 않아서 그를 곁에서 보좌하는 의료진이 계속해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지금…… 맷 시냐잉.”

    “10시 15분입니다, 회장님.”

    하 회장의 더딘 물음에 옆에 앉은 하태경이 냉큼 대답했다.

    “10시까정…… 집결하기로 한 거 아니냐……?”

    “맞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지요.”

    째깍째깍. 그렇게 하태경에겐 25일 같은 25분이란 시간이 더 흐르고 모두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그 순간에 말이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뚜벅 뚜벅 뚜벅, 수많은 구둣발 소리가 장내를 일제히 울렸다.

    동녘 家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곳으로 몰렸고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눈동자는 동시에 흡,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검은 슈트를 뻑가게 차려입은 하무경을 주축으로 그의 뒤를 따라 걸어들어오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 장내의 3분의 2를 채워야 하는 주요 인물들이기도 했고 지금쯤 인도에 있어야 할 하무경이 대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그 누구도 아는 바가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왜?!”

    기함한 하태경이 크게 소리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하가경은 한쪽 눈썹을 슬며시 들어 올렸으며.

    하 회장은 어딘지 모르게 안도한 얼굴로 몸을 축 늘어트렸다.

    계속해서 쏟아지던 기침도 완전히 멎은 상태였다.

    나머지 빈자리가 다 채워졌고 무경은 맨 앞자리에 있는 하 회장을 향해 계단을 뚜벅 뚜벅, 내려왔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 회장의 앞에 멈춰 선 무경이 정확한 각도로 하 회장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했다.

    “인도에 가 있어야 할 놈이 으째 여기 있냐.”

    하 회장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냉한 시선으로 무경을 옥죄며 물었고.

    “갔습니다. 비행기까지 탔는데요.”

    무경 또한 그 시선에 절대 뒤지지 않는 눈빛으로 하 회장을 조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가다 보니 제가 왜 가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안 가서 말입니다. 그걸 글쎄 하늘 위에서 깨달았지 뭡니까.”

    태호에게 비행기를 세우라고 했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이런 시끄러운 일로 매스컴을 타봤자 동녘 그룹에도 저에게도 좋을 것이 하나 없다 판단했다.

    그래서 일단은 얌전히 인도 공항으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인천으로 오는 가장 빠른 항공편을 끊었고 한국에 도착하니 그다음 날 오후였다.

    돌아오자마자 오늘 주총에 참석하는 제 라인의 주주들을 한데 모았고 기꺼이 제 편에 서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방금 무경과 함께 들어온 3분의 2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납득이 안 간께 다시 돌아왔냐잉? 납득시켜 달라고?”

    “아니요.”

    피식 짧게 웃은 무경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확고한 답을 들려주었다.

    “동녘 그룹 먹으러 왔습니다, 회장님.”

    “머시여?”

    “일전에 제힘으로 가져가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제힘으로 한번 가져보려고 왔는데요.”

    하 회장이 웃음기를 숨긴 입매로 싸늘하게 물었다.

    “니가 무슨 자격으로?”

    “제가 가진 그룹사 지분율 18.14%. 이 정도면 충분한 자격이 된다 생각하는데요. 아닙니까?”

    하 회장의 입에서 하하, 호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 건 순간이었다.

    결국엔 고라고 돼부렀구만.

    이렇게 될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하 회장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허공에서 대강 손을 휘저었다.

    어디 한번 해보라는 무언의 손짓이었다.

    반면, 도현이 무경에게 양도해준 1%를 알 리 없는 하태경의 눈동자는 혼란에 크게 요동쳤다.

    하태경과 하무경의 차이 0.01%.

    수치만으론 고작 0.01%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이 0.01%로 그룹사를 쥐락펴락,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재계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대체…… 무슨 수로…….”

    “시작하시죠?”

    무경이 하태경의 말을 댕강, 자르며 하가경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흐음…….”

    차분해 보이기 위해 마른 장밋빛 립스틱을 칠한 하가경이 제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사내 입지 및 역량, 이사진들의 평가 등을 모두 다 종합해보았을 때, 제 야망과는 달리 자신이 동녘의 총수 자리에 앉는 것은 시기상조임을 안다.

    그래서, 하태경이 저에게 원했던 대로 그에게 힘을 실어줄까 몇 번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러지 않고 버텼던 이유는.

    알게 모르게 제 무의식이 하무경을 더 높이 평가했던 건지 뭔지, 해주는 만큼 돌아오는 것은 무경 쪽이 더 크리라 판단했던 건지 뭔지, 내리사랑이라는 게 있다던데, 매일같이 서로에게 살벌하게 쌍욕을 박아대도 오빠보단 남동생을 향한 누나의 숨겨진 애틋함인지 뭔지.

    진짜 정답은 하가경만이 알 것이다.

    “우리 동생.”

    마음을 정한 하가경이 제 옆에 앉은 무경의 어깨 위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시늉을 하며 활짝 웃어 보였다.

    “오늘따라 더 멋있네?”

    썅년이 아주 씨발 지랄을 하고 자빠졌네.

    딱 그런 얼굴로 하가경을 비스듬히 깔아보던 무경 역시, 대외적인 시선을 살피듯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장단 맞췄다.

    “누님도 오늘 굉장히 아름다우세요.”

    “어머. 우리 동생은 말도 참 예쁘게 하지.”

    “시작하더라고.”

    하 회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기운을 완전히 차린 목소리였다.

    “잠시만요.”

    제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대려는 하가경의 머리통을 옆으로 툭, 밀쳐낸 무경이 의장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안건 추가해주시죠. 하태경 회장직 선임 받고 하무경 회장직 선임까지.”

    “예? 이렇게 갑자기 안건 추가를요?”

    단상 앞에서 진행을 준비 중이던 의장이 꽤 당혹스러운 얼굴로 하 회장 쪽을 쳐다봤다.

    하 회장은 의장을 쳐다보며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어째 나를 보냐. 최대주주께서 그라시자는디 저 사람 말 들으소.”

    최대주주라는 하 회장의 발언에 무덤 속처럼 고요하던 장내가 일순 술렁였고, 애써 점잖게 앉아있는 하태경의 주먹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예. 그럼…….”

    의장이 마이크에 입술을 갖다 댔다.

    “어려운 시간 내어 참석해주신 주주님들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오늘의 안건은 앞으로 동녘 그룹의 미래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니만큼 표결에 부치도록 하겠으며 기명투표 대신 거수로 진행합니다.”

    의장이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뒤 말을 이었다.

    “하태경 사장 회장직 선임 안건에 대해 찬성이신 분들은 거수해 주십시오.”

    이미 마음을 정하고 온 3분의 1의 주주들이 동요했다. 변수가 발생했다. 그것도 엄청난 변수가.

    그래도 고민하고 고민하던 그들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이미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마친 하가경은 미소 지은 채 꼰 다리를 까딱까딱하며 정면만을 주시했다.

    “반대이신 분들, 거수해 주십시오.”

    장내의 3분의 2가 손을 들어 올렸다. 하가경 역시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손을 올렸다.

    “너 이 씨…….”

    하태경은 그런 하가경을 매섭게 쏘아보았고 하가경은 그런 하태경과 잠시 눈을 맞추며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이 바닥에 영원한 편은 없지 않겠냐는 무언의 신호였으리라.

    “본 안건은 부결되었음을 알립니다.”

    어디에선가 아쉬움의 탄식이 소심하게 흐른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하무경 상무 회장직 선임 안건입니다.”

    태연하게 턱을 괸 채, 의장을 응시하는 무경의 시선에 더는 두려울 것도 불안할 것도 없었다.

    늘 정상에 있었을 때야 추락이 두려웠지. 이미 바닥까지 찍어봤던 놈이 뭐가 더 두렵겠나. 한 번 내려가 본 바닥, 두 번 내려가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찬성은 거수,”

    “반대부터 가시죠?”

    턱을 괸 자세를 유지한 채로 무경은, 의장의 말을 뚝 끊으며 의견을 제시했다.

    예, 하며 무경을 향해 짧게 묵례한 의장이 다시 말을 정정했다.

    “반대, 거수해 주십시오.”

    무경을 제외한 동녘 家의 세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하태경을 지지하던 3분의 1은 주저하고 있었다.

    의장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반대, 거수해 주십시오.”

    하태경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하태경에게 찬성표를 던졌던 3분의 1의 주주들은 지금은 차마 손을 들지 못했다.

    최대주주가 경영을 하시겠다는데 감히 반대를 하지 못하는 거다.

    그것도 그냥 최대주주인가? 동녘 그룹에서 독보적으로 빛났던 하무경 상무가 아니던가.

    장내를 슥 둘러보던 의장이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마이크에 입술을 붙이며 결론을 내렸다.

    “하무경 상무 회장직 선임 안건, 의결되었습니다.”

    주주들이 기립했고 일부에선 박수까지 터져 나왔다.

    그 환호성이 울려 퍼지던 때에 무경은 찡그린 두 눈을 감으며 씨발, 하고 속으로 욕을 씹었다.

    탯줄을 잘랐을 때부터 갈망하던 이 자리를 드디어 차지해서가 아니다.

    해냈다! 하는 벅찬 승리감 때문도 아니다.

    이 자리를 손에 넣는 게 사실상, 숟가락을 쥐고 밥을 떠먹는 것처럼 쉬웠기 때문이다.

    아주 우스울 정도로 쉬웠기 때문이다.

    내가 씨발, 이 쉬운 걸 모르고 그간 땅을 파고 파고 또 파고 그래도 파고 파고 계속 파고 존나게 삽질을 했었나, 하는 생각에.

    상당히 헛헛했고 허무했으며 허탈했고 또 공허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상무님, 되셨다.”

    저 뒤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태호가 이준에게 상황을 알렸다.

    건너편에서 듣고 있던 하무경 상무 비서실 사람들이 쾌재를 부르는 소리가 태호의 귀에 낭랑히 울려 퍼졌다.

    “…….”

    잠시 눈을 감은 채 몇 번의 긴 호흡을 하던 하 회장이 눈을 더디게 밀어 올렸다.

    “다들 욕 봐따잉.”

    자리에서 일어난 하 회장이 의료진이 끌고 온 휠체어에 앉으면서 장내를 막 나가려던 순간.

    “회장님.”

    무경이 하 회장의 앞을 가로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