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92화 (92/116)
  • 92화. 감정의 최소치

    고진감래 주 일곱 잔에 취기가 올라왔다. 아마 고된 일정 때문이었으리라.

    먹은 것들을 깨끗하게 치우고 샤워를 하고 나온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알딸딸한 상태에서 택시를 불러 부산 시내로 나갔다.

    요원이 부산의 명물인 깡통 야시장에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여행 순서가 제멋대로이고 무계획에다가 비효율적이며 엉망진창이었지만, 함께하는 이 시간만큼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시간을 우리가 통제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시간에 맡겨 흘러가는 대로 흘려보내기로 했다.

    택시 안에서도 손가락 사이사이를 맞물리듯 깍지 끼고 있는 두 사람에게선 같은 샴푸와 바디 워시 향이 났다.

    택시 운전기사는 룸미러를 통하여 뒷좌석의 두 사람을 자꾸만 힐끔거렸다.

    잘생기고 예쁜 것을 떠나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에게 자꾸만 시선이 이끌렸기 때문이다.

    “다 왔십니데이.”

    택시 기사가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을 깡통 야시장 앞에 내려주었다.

    야시장은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고, 이런 혼잡하고 번잡스러우며 시끄러운 분위기에 질색하는 무경은 무언가 불만이 한가득한 사람처럼 눈매를 찡그린 채였다.

    반면, 마냥 즐거운 요원은 무경의 손을 붙잡고 이곳저곳을 구경하기에 바빴고 무경은 그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기에 바빴다.

    여전히 맞물린 두 사람의 손가락 사이엔 틈 하나가 없고, 잡은 체온은 뜨거워서 더웠지만 그럼에도 서로는 서로를 놓을 줄을 몰랐다.

    “어? 딸기 탕후루 드실래요?”

    “탕후루가 뭔데.”

    요원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무경을 외계인 보듯 쳐다봤다.

    “설마, 모르신다고 할 건 아니죠? 나는 재벌가의 사람이라 저런 탕후루 같은 건 모른다고. 에이. 아니죠?”

    “당연히 알지.”

    “정말 알아요?”

    “지금 네 반응을 보니 몰라도 알아야 한다고 할 것 같아.”

    요원이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덧붙였다.

    “탕후루가 뭐냐면요. 과일에 녹인 설탕 시럽을,”

    “그래. 맛있겠네.”

    건성으로 대꾸하던 무경이 갑자기 씩 짓궂게 웃었다.

    “탕후루 한 개만 사주세요, 오빠. 해봐. 그럼 사줄게.”

    “네?”

    급물살에 휩쓸리듯 그렇게 요원의 형색은 일그러졌고 무경은 싱그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한 개만 사주세요, 오빠. 해보라고. 듣고 싶어.”

    “왜 이렇게 그 오빠 소리에 집착하지?”

    “원래 남자들은 그 말에 환장하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나를 새침하게 올려다보며 오빠, 라고 한다? 그날로 방 잡는 거지 뭐.”

    “왜 또 결론이 그렇게 나요?”

    “왜? 섹스가 나쁜 거야?”

    “좀!”

    행여라도 누가 들을까 질겁한 요원이 무경의 입을 꽉 틀어막았다.

    “사람들 들으면 어쩌려고.”

    남자가 입술이 막힌 채로 킥, 웃는다.

    “숨 막힌다, 자기야.”

    무경이 손을 치우라는 듯 눈썹을 한번 치떴다.

    요원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손을 떼어내기 무섭게 무경이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서브리미널 광고라고 알아? 역치하 광고라고도 하지.”

    “그게 뭔데요.”

    “쉽게 말해, 무의식에 각인.”

    “더 어려운데요.”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해, 네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네가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아주 짧은 찰나에 팝콘을 사 먹으라는 자막이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거야. 그 속도가 너무도 빨라서 너는 정작 인지를 못 했는데 네 뇌는 이미 그것을 인지하고 팝콘이 먹고 싶어져. 그래서 나가는 길에 팝콘을 사 먹는 거지.”

    “…….”

    “실제 있었던 최초의 사례야. 물론 내 식대로 조금 바꿨지만.”

    이 남자는 참 특이하다.

    “악용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일부 국가에선 서브리미널 마케팅은 규제를 받아.”

    보통은 양아치 같은 말본새가 디폴트인데 또 작정하면 모든 것이 카멜레온처럼 순식간에 변한다. 말투도, 표정도, 태도도, 자세도, 모든 것이 다.

    마치,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말라고 때때로 상대에게 제 위치를 각인시키듯이 말이다.

    “이해했어요. 그런데 그게 왜요?”

    “역치하 광고. 역치하가 뭐야. 우리 감각이 감지할 수 있는 최소치라는 거잖아.”

    “그래서 그게 왜요?”

    “나는 남녀가 나누는 감정이 그렇다고 봐. 그러니 아주 조그만 자극에도 가슴 떨리는 게 아닐까?”

    무경의 검지가 요원의 심장 부근을 콕 찌르며 화려하게 웃는다.

    “그 떨림에 우리의 몸은 반응하고 그래서 인간은 섹스를 하는 거야. 감정의 최소치를 표현하기 위해. 그러니 대답해 봐. 섹스가 나쁜 거야?”

    일목요연하고 논리정연하게 반박해서.

    혹은, 쉬운 말을 화려한 포장지에 그럴싸하게 있어 보이게 포장하는 남자의 전략에 넘어가 버려 요원은 할 말이 없었다.

    “응? 나쁜 거야? 다 큰 성인인 너랑 내가 나쁜 짓을 한 거야?”

    “아니요.”

    “거봐.”

    무경이 승자처럼 씨익 웃으며 말한다.

    “우린 우리의 감정의 최소치를 몸으로 표현했을 뿐이야. 나쁜 짓 한 거 아니야. 그러니 섹스가 나쁘고 창피하다는 편견은 제발 좀 버려. 우리가 애야?”

    청산유수인 무경을 잠시 얄밉다는 듯 바라보던 요원이 곧 백기를 올리듯 두 손을 깔끔하게 올려 보였다.

    “그냥 탕후루는 제 돈 내고 제가 사 먹을게요. 저거 하나 얻어먹으려다가 서브리미널은 왜 나오고 역치하는 또 왜 나오고 감정의 최소치는 왜 나오고. 으. 듣기 싫은 강연이라도 들은 기분이에요.”

    몸서리치는 요원을 기가 찬 듯 바라보며 무경이 하, 헛웃음 쳤다.

    “너 자꾸 이런 식으로 사람 치사하고 쪼잔하게 만들 거야?”

    “제가 치사하고 쪼잔하게 만든 게 아니라요. 하무경 씨가 지금 치사하고 쪼잔하게 군 거예요.”

    “우리 채 순경도 가만 보면 사람이 참 빡빡해?”

    “이젠 채 순경이에요?”

    “너도 방금 나 하무경 씨라고 불렀어.”

    “근데 생각해보니까 언젠가부터 나한테 완전히 말을 놓으셨네?”

    “내가 너보다 네 살이나 더 많은데 뭐. 문제 있을까?”

    “나이 많으면 막 반말해도 되나?”

    “막?”

    무경의 눈썹 앞머리가 불시에 찡그려지며 또다시 되받아친다.

    “너한텐 우리 사이가 ‘막’인가 봐.”

    “지금도 봐요. 이렇게 말꼬리 붙잡고 늘어지는 거? 되게 멋없고 하나도 안 섹시해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세요.”

    허리를 슬쩍 굽힌 무경이 요원의 귓가에 호선을 그린 입술을 붙이며 속삭이듯이 중얼거렸다.

    “당장에라도 잡아먹고 싶은 꼴린 얼굴 하고 있으면서.”

    “하무경 씨!”

    훅 들어온 공격에 이번엔 요원의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여기서 와 저러노.

    탕후루 노점의 주인은 딱 그런 눈빛으로 두 사람을 건너다보았다.

    요원의 귓불이 벌게진 것을 슬며시 내려다보던 무경이 그녀에게만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웃음기 밴 말을 덧붙였다.

    “침대 넓던데? 다양한 체위로 잡아먹혀 줄게, 자기야. 조금만 더 참아.”

    뜨거워진 요원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살짝 깨물어주면서 무경이 허리를 세워 떨어져 나갔다.

    “오빠가 몇 개 사줄까?”

    요원은 혼란한 얼굴로 검지 하나만을 어정쩡하니 들어 올렸고, 무경은 웃으며 뒤돌아 주문을 마쳤다.

    두 사람은 그 후에도 야시장 이곳저곳을 돌며 맛있어 보이는 건 일단 죄다 사고 봤다.

    특히 요원은 디저트 종류를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마시멜로 아이스크림을 먹고는 너무 쫀득하고 맛있다고 눈이 휘둥그레져선 양손 가득 무겁게 들고 있는 무경에게 먹여주기도 했다.

    그때마다 무경은 으, 달아 하며 질색했고 그런 거 많이 먹다가 당뇨 오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요원은 그런 그에게 원래 이렇게 잔소리가 많았냐며 투덜거렸지만 웃고 있는 입매까진 차마 숨길 순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혀라도 깨문 사람처럼 흠칫 놀라선 그 자리에 황급히 멈춰 섰다.

    요원이 멈추어 선 것을 모른 채로 무경은 계속해서 앞서 나아가고 있었다.

    “…….”

    무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요원의 눈동자가 무질서하게 흔들렸다.

    내가 자꾸만 잊는다. 나를 속인 그대를. 당신을 난처하게 만든 나를.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태생의 천지 차이를. 어울리지 않는 우리를. 첫 단추부터 잘못 꿰인 우리를. 가망 없는 우리의 관계를.

    다 알면서도 저 남자가 좋다. 나는 저 남자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좋아.

    여행이 끝나는 날에 말해볼까.

    당신이 언젠가 수준에 맞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한다 해도. 이런 관계라도 나는 좋으니 유지하자고 한다면. 이런 비틀어진 관계라도 나는 좋다고.

    당신도 나를 좋아하니까, 이 정도 사이는 괜찮지 않을까?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다시 젓는다.

    아니지. 아니야. 이런 불순한 생각을 하는 나는 여러 가지로 순경 실격이다.

    요원이 다시금 남자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사람을 보는 것처럼, 제 시야에 꼭꼭 곱씹듯이 그렇게 남자를 삼켰다.

    산릉선에 걸친 붉은 노을과도 같은 시선으로.

    ***

    택시를 타고 두 사람은 다시 글램핑장으로 돌아왔다.

    빈손으로 갔다가 양손 가득 돌아왔다.

    글램핑장 입구에서 내려 자신들의 독채로 걸어가는 두 사람은 아까와는 달리 말이 없었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찌르르르.

    주변은 산이라 벌레가 많았고 다리 달린 건 죄다 질색하는 무경은 갑자기 어디선가 뛰쳐나온 메뚜기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움찔거렸다.

    “아, 씨발. 깜짝이야.”

    마음의 소리가 그대로 튀어나왔다. 요원은 그런 무경을 조금 어이없이 바라봤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벌레 싫어하세요?”

    “저 징그러운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자기야?”

    “전 좋아요. 아직 자연이 살아있다는 뜻 같아서.”

    아무튼, 특이해. 특이하면서도 사상이 참 올바른 여자야.

    무경이 생각하며 웃었다.

    두 사람이 커다란 텐트처럼 생긴 독채 안으로 신발을 벗고 나란히 들어왔다.

    짐을 한꺼번에 바닥에 던지듯 내려둔 무경은 다짜고짜 요원의 손목을 낚아채고 제게로 끌어당겨 입술을 갈급하게 맞물렸다.

    “으음?”

    갑작스러운 키스에 그의 옷깃을 틀어잡으면서 요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아.”

    무경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읊조리면서 그녀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정말 달다.

    새콤하고 달콤한 딸기 탕후루에, 머리털까지 쭈뼛 설 정도로 달았던 마시멜로 아이스크림을 먹은 입술이라서가 아니라.

    여자는 늘 제게 새콤하고도 달콤한 존재였으니.

    “어쩌지.”

    “하…… 뭐가요?”

    “꼴려서 서버렸어.”

    무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요원의 벌어진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바로 넣어도 돼?”

    그가 손을 아래로 내려 그녀가 입고 있는 청바지의 버클을 풀려던 때였다.

    “따, 땀 흘렸어요.”

    무경의 단단한 가슴팍을 조심스레 밀어내면서 요원은 떨어져 나갔다.

    “일단 씻을게요. 그리고 계획을 짜봤으면 좋겠어요.”

    “계획? 무슨 계획.”

    한껏 달아올랐다가 갑자기 김이 팍 샌 사람처럼 무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모레는 우리 또 청산도로 넘어가야 하는데 쉽지 않은 여정이라 계획이 필요해요.”

    서랍에서 잘 정리해둔 속옷과 간편한 파자마를 꺼내면서 요원은 무경에게 등을 보이고 욕실로 사라졌고.

    이번엔 무경이 요원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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