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91화 (91/116)
  • 91화. 플랫폼

    원망, 했었다.

    그런데 생각을 회전하니 제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그녀를 영원히 알지 못하고 지냈을 테니.

    너는 어쩌면 나를 만나게 한 우리 아버지를 원망할지 몰라도, 사실 난 아니거든.

    이유를 조금 더 얹어서, 원망한다 말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나.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우리 아버지. 마음 편하게라도 가시게. 말이라도 그렇지 않다고 해드리는 것이 뭐 그리 어렵다고.

    뭐. 이 또한 궤변이다.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방금, 분위기를 이렇게 쑥대밭으로 만들어서도 안 됐으니.

    “회장님.”

    무경이 뚜벅뚜벅 걸어 지금껏 적정 거리를 벌리고 있던 하 회장의 앞으로 다가섰다.

    “제가 일전에 회장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드린 말씀, 혹시 기억하십니까. 오히려 저를 너무 예뻐하셔서 탈이라고.”

    “이잉. 기억난다.”

    하 회장은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무경을 고개를 젖혀 올려다보았고, 무경은 제 아버지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다가 곧 존경의 의미를 표하듯 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꺾어 앉아 하 회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하 회장의 세월이 보이는 눈동자가 무경을 엇비슥이 바라본다.

    “저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하 회장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쥔 무경은 그 손등 위에 제 이마를 갖다 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는 오히려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한때는 제 욕심에 눈이 멀고 그 눈이 회까닥 돌아버려, 누군가의 소중한 터전을 감히 돈 몇 푼으로 손쉽게 빼앗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파렴치한 저 자신이.

    “출국 전에 다시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십시오.

    몸을 일으켜 세운 무경이 하 회장과 정연에게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곧은 자태로 돌아섰다.

    “회장님. 방금 들으신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방금 하무경 저 새, 아니, 하무경 상무가 제게 덫을 놓은 것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노여움 푸시지요.”

    “아, 아, 아부지. 나도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 단순히 연애하는 거예요! 스폰 뭐 그런 거 아니고요! 나 연애하는 거라고요!”

    하 회장 앞에서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고 두 손이 발이 될 때까지 싹싹 빌 듯한 하태경과 하가경의 소란 속에서도.

    하 회장은 저 멀리 사라져가는 무경의 뒷모습에서 오랜 시간 시선을 거두지 못하였다.

    ***

    요원은 그간 쓰지 않던 휴가를 모두 한꺼번에 몰아 썼다.

    무려 2주간의 장기 휴가였다.

    소장이나 성준이나 눈치 주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채 순경은 좀 쉬어도 된다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지. 다만, 그들에게 요원은 조금 미안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런 마음은 가벼이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요원은 이 여행길에 꼭 오르고 싶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귀한 시간임을 알기에.

    고대하던 이른 아침이 밝았고, 제 몸만큼 커다란 백팩을 학생처럼 둘러멘 요원은 백야마을과 가장 가까운 기차역에 도착했다.

    플랫폼 의자에 앉아, 오기로 한 누군가를 기다렸다.

    사람들은 제각기 목적지를 향해 사라졌다.

    요원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플랫폼을 서성이는 사람도 몇 있었다.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가만 바라보았다.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관뒀다. 아직 도착 시각까지 조금 더 남았으니.

    요원이 고개를 뒤로 젖혀 청명한 여름 하늘을 가만 바라보았다.

    일정 시간이 지나고 한 열차가 눈앞에 도착했다.

    순간적으로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흩어지고 그 사이에 남자가 있었다.

    팔뚝까지 소매를 무심하게 걷어 올린 검은 후드티에 청바지 차림의 남자를 보았다. 한쪽 어깨에 자연스레 들춰 멘 베이지색 백팩까지도.

    평소처럼 화려하거나 세련된 슈트 차림이 아닌 평범한 차림 그 자체였으나,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마치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다가오는 레드 카펫의 주인공 같았다.

    남자는 원래가 그런 존재다. 타고나기를 이목을 끄는 존재.

    “…….”

    요원이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큰 보폭으로 다가온 남자가 요원의 앞에 우뚝 멈춰 서며 첫마디를 건넨다.

    “안녕, 애인.”

    설핏 미소 짓는 무경의 얼굴이 햇살에 잘게 부서졌다. 눈가가 시큰해질 정도로 눈이 다 부셨다.

    플랫폼에서 우리는 만났다.

    열기를 품은 바닷바람은 멀리서부터 불어오고,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보며 아스라이 웃었다.

    끝이 정해진 여행길의 시작이었다.

    ***

    두 사람의 첫 여행지는 요원이 정한 부산의 한 글램핑장이었다.

    백야마을 인근 역에서 부산역까지 가는 KTX가 없는 관계로.

    저기에서 내려 무궁화를 타고 또 그곳에서 내려 ITX를 타고 부산역에서 내려 차량 렌트를 하고 마트에 들러 필요한 것들을 사고 글램핑장까지 들어오다 보니 시간은 벌써 오후 5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녹초가 된 두 사람은, 사실 글램핑도 처음이었기에 주차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체크인하는 모습까지 꽤 어설펐다.

    안내받은 투베드 원룸형 독채의 지붕은 텐트처럼 모양이 예쁘게 잡혀있었고, 그 주변으로 주렁주렁 달린 무드 전구는 형형색색으로 빛나 깊은 밤에 빛을 제대로 발할 예정이었다.

    내부는 침대도 있고 TV도 있고 욕실도 있고 독채 앞에 마련된 데크에선 개별 바비큐가 가능하고 데크 한편엔 각종 취사도구를 겸비한 주방도 존재하는, 아늑한 펜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꽤 만족스러운 숙소였다.

    물론 무경에겐 아니고 요원에게 말이다.

    “바로 고기 드실 낍니까? 불 넣어드릴까예?”

    “가져오세요.”

    사투리가 진한 직원의 질문에 내부를 휘 무심하게 살피던 무경은 버릇처럼 지시를 내렸다.

    무경의 시야로 보는 숙소는 이랬다.

    여기는 그래도 씨발, 망할 놈의 욕실은 있네.

    “하무경 씨. 짐부터 정리하죠?”

    백팩에서 옷과 화장품 등등을 꺼내 정리하는 요원을, 무경은 조금 비딱하게 쳐다봤다.

    “이건 뭐 어디 여행지에서 만난 백팩커들도 아니고. 하무경 씨가 뭐야. 정 없게.”

    “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불렀는데요?”

    “그때야 우리가 아무 사이 아니었을 때고. 지금은 우리 연애하는 거잖아요. 그럼 호칭도 맞게 변해야지.”

    “성 빼고 무경 씨는 어때요?”

    “별론데요.”

    “무경아, 는요?”

    “까부네. 내가 그래도 네 살이나 많은데.”

    “그럼 오빠라고 부를까요?”

    훅 들어온 공격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오빠?”

    “네. 원하시면요.”

    여전히 신발도 벗지 않고 밖에 서 있는 무경은 안에서 무던한 표정으로 짐 정리를 하는 요원을 바라봤는데, 자신의 귀가 벌게졌다는 것을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싫어요?”

    요원이 말이 없는 무경과 눈을 맞추며 되물었다.

    “그래, 뭐. 편할 대로.”

    애써 태연하게 대꾸한 그가 뒤돌았다.

    “뜨겁십니데이. 조심하이소.”

    마침, 숯불과 BBQ 플래터가 든 바구니를 들고 오는 직원을 맞닥트린 무경의 입꼬리가 자꾸만 의지와는 달리 호선으로 휘어졌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의 데크에서 두 사람은 마치 신혼처럼 각자가 맡은 일을 했다.

    무경은 어울리지도 않는 목장갑을 낀 채로 고기, 소시지, 버섯 등을 불판 위에서 노릇하게 구웠고 요원은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넣어 돌리고 야채와 쌈 종류를 씻었다.

    치이익. 삼겹살과 목살을 뒤집으면서 무경이 존나 덥네, 하고 구시렁거렸다.

    여름에 숯불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까 아주 환장하게 더운 거다.

    무경이 땀도 나지 않는 제 이마를 팔로 문지르려던 때였다.

    “하무경 씨.”

    “또 그러네.”

    “아, 맞다. 오…….”

    아직은 그 호칭이 어색한지 요원이 한 박자 쉬고 나머지를 뱉었다.

    “……빠.”

    머뭇거리며 다가온 요원이 무경의 앞에 빨대가 꽂힌 유리잔을 내밀었다.

    “아메리카노예요. 시원하게 드세요.”

    “시럽?”

    “안 들어갔어요.”

    “물려줘.”

    “뭘요?”

    “빨대.”

    무경은 목장갑 낀 제 손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손이 없단 제스처를 취했다.

    휴우, 정말이지.

    애써 싫은 척 한숨을 내쉬며 요원은 그의 벌어진 입술 사이에 빨대를 물려주었다.

    무경이 빨대를 물고 쪼르륵 빨아 액체를 끌어올렸다.

    목 넘김 할 때마다 돋보이는 그의 목울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꾸만 요원을 매료시켰다.

    차디찬 커피를 몇 모금 더 삼키던 무경이 물고 있던 빨대에서 입술을 떼어내며 묻는다.

    “커피. 자기가 탔어?”

    자기라는 간지러운 호칭에 요원의 눈이 벌어졌다.

    “자기요?”

    “애인이잖아. 그래서 자기라 부르려고. 왜? 싫어?”

    자기라는 호칭은 원래 낯간지럽다고만 생각해서 싫어했는데, 남자의 목소리로 듣는 ‘자기’라는 호칭은 감당이 어려울 정도로 제 가슴을 날뛰게 하였기에.

    “아니요. 뭐…… 편하실 대로.”

    조금 전, 무경과 같은 반응을 보이며 돌아선 요원의 입꼬리도 자꾸만 의지와는 달리 씰룩였다.

    다 구워진 고기와 소시지와 버섯 등을 접시에 잘 담아 세팅하는 무경과, 잘 씻은 쌈 재료와 햇반과 자신들이 사 온 소주와 맥주와 콜라 등을 분주하게 내려두는 요원 덕에 식탁 위는 금세 한 상으로 가득 찼다.

    “말아드릴까요?”

    “뭘 말아줘요.”

    막 의자를 빼 앉은 무경이 눈썹을 들어 올렸고 요원도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

    “고진감래 주요.”

    “그게 뭔데.”

    “폭탄주죠?”

    하하. 무경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애인에게서 폭탄주를 말아드리냐는 신박한 질문을 받을 줄은 또 몰라서.

    “그거. 소맥이랑 다른가?”

    “콜라가 들어가요.”

    “왜 고진감래 주지?”

    “첫맛은 쓴데 끝 맛은 콜라 때문에 달콤하다고 해서요.”

    “아하. 고생 끝에 낙이 온다?”

    “그런 거죠.”

    “맛있어?”

    “마실 만해요.”

    “그래. 그럼 오빠 한번 말아줘 봐.”

    이건 뭐, 신입사원에게 신박한 폭탄주 설명이나 듣고 앉아있는 상사의 회식 자리도 아니고.

    피식 다시 한번 실소한 무경이 여유롭게 팔짱을 끼면서 요원을 웃는 낯으로 바라봤다.

    요원은 글램핑장에서 얻은 소주잔과 맥주잔으로 고진감래 주를 제조하고 있었다.

    먼저 한 개의 소주잔을 맥주잔 안에 넣는다. 그다음엔 그 소주잔에 콜라를 3분의 2 정도 채운다.

    콜라가 담긴 소주잔 위에 다른 소주잔을 겹쳐 올리고 그 잔에 또 소주를 반 정도 채운다.

    마지막으론, 안에 세팅된 잔에 술이 들어가지 않도록 맥주잔 벽에 최대한 맥주병을 기대어 맥주를 채우면 끝이다.

    무경은 마치 예술을 감상하는 것처럼 그 과정을 바라보았고, 요원은 집중하고 있는 그의 앞에 고진감래 주를 내밀며 웃었다.

    “원샷.”

    그 잔을 그러쥔 무경이 요원을 제 다정한 시야에 새기면서 건배사를 말하듯 나직이 읊조렸다.

    “채요원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여행을 만들어줄게.”

    무경을 가만 바라보던 요원이 설핏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이 쥐고 있는 잔을 비스듬히 기울여 무경의 잔과 쨍- 하고 부딪치며 화답하듯 말했다.

    “저도요.”

    요원이 잔을 먼저 꺾었고 무경도 그 잔을 꺾었다.

    몇 모금 만에 한 잔을 모두 다 비운 무경은 와인을 테이스팅하는 사람처럼 입안을 혀로 훑으면서 맛을 음미했다.

    첫맛은 썼으나 끝 맛은 가장 마지막에 넘어오는 콜라로 하여금 아주 달콤했다.

    이래서 고진감래 주구나.

    빈 잔을 바라보며 끝 맛을 되새기는 두 사람은, 어쩌면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유감이다. 우리의 끝은 달콤할 수 없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