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78화 (78/116)
  • 78화. 나는 이미 너와 천국이었으니

    두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가운데에 둔 채 마주 앉았다.

    이로써 하무경 상무 집무실에서의 만남은 두 번째를 맞이했다.

    요원은 이준이 가져다준 수건으로 젖은 순경복과 머리를 문질러 닦고 있었고, 무경은 이마를 괸 채로 그런 그녀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참 무모해.”

    낮게 중얼거리는 음성에 요원의 손짓이 멈췄다가 다시 젖은 머리를 문지르며 답한다.

    “간절한 거예요.”

    무경은 그러냐는 듯이 눈썹을 한 번 가볍게 들었다 내리며 받아쳤다.

    “그렇다면 기특하네요.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저렇게 겁이 없어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도 되고. 뭐 여러 가지 생각이 드네.”

    “하무경 씨 인생이나 걱정하시고요.”

    요원이 축축해진 수건을 테이블 위로 집어 던지며 눈을 매섭게 한 번 치떴다.

    “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요원의 송곳 같은 질문에 무경이 피식 웃으며 이마를 괴고 있던 손을 풀었다.

    갑자기 다리를 옆으로 넓게 벌리고 앉으며 허리를 숙인 그가 다리 사이로 손깍지를 꼈다.

    “…….”

    한동안 함묵하던 무경은 무언가를 다짐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높이 치솟은 남자를, 요원은 이제 고개를 뒤로 젖혀 한껏 올려다보았다.

    모델처럼 곧은 자태로 데스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무경이, 서랍에서 명함 책자 하나를 꺼내선 그 안에 가지런히 정리된 명함을 검지로 스캔하듯 주욱 쓸어내려 가더니 한곳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원하는 명함 하나를 뺐다.

    다시 요원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테이블 상판 위에 그것을 내려둔 그가 해당 명함 위를 검지로 툭툭 내리찍으며 말한다.

    “이 사람한테 연락해요.”

    요원이 손을 뻗어 그 명함을 쥐었다.

    유명 신문사 사회부 소속 기자의 연락처였다.

    “그 박태상 기자가 우리 동녘을 아주 싫어하거든.”

    소파 등받이에 다시 몸을 깊이 묻어 앉은 무경이 쩍 벌린 자세를 바로잡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보해요. 동녘 그룹의 하무경 상무가 채 순경네 마을을 무력으로 빼앗으려 하고 있다고. 강제 철거 강행 직전이라고. 그깟 아웃렛 하나 때문에.”

    명함 속 기자의 이름과 번호를 바라보는, 물기 어린 여자의 얼굴을 음미하듯 응시하면서 무경은 제 입가를 어루만졌다.

    “다른 기자는 다 막아도 그 기자는 우리 홍보팀이 못 막아요. 뇌물이 전혀 안 먹히는 아주 빡빡한 기자거든.”

    채 순경과 결이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무경이 중얼거리다가 다음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당신 순경이잖아. 파급력 클 겁니다.”

    때마침, 노크하고 들어온 이준이 두 사람을 향해 허리 굽히며 다가와 따뜻한 찻잔을 내려뒀다.

    “드세요. 감기 걸리지 말고.”

    그 찻잔을 그러쥔 무경이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요원에게도 마시라 손짓했다.

    “언제든 리필 가능합니다.”

    웨이터 같은 발언을 남긴 이준이 집무실 문을 닫고 나갔고, 두 사람 사이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왜…….”

    목구멍에 꽉 막혀 나가질 않던 음성을 요원이 간신히 뱉었다.

    “이렇게까지 하세요?”

    “뭘 이렇게까지 해요.”

    “왜 절…… 도와주려고 하세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 백야마을, 빼앗고 싶지 않아졌다고.”

    무경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그저 웃었다.

    “그게 다예요?”

    “또 말했잖아요. 채 순경에게 그간 받은 게 많아서 돌려주고 싶다고.”

    “그게 전부,”

    “좋아해. 그래서 그래.”

    남자의 그 말에, 요원의 숨이 그대로 멎는 기분이 들었다.

    공기는 폐부로 들어왔으나 그 공기를 뱉지 못하고 잠시간 머금고만 있었다.

    “한 명은 더러운 꼴 봐야 끝나. 알잖아.”

    무경은 눈꺼풀도 별로 깜빡거리지 않고 요원과 강렬하게 눈을 맞추며 차를 마셨다.

    “그 더러운 꼴, 내가 보겠다고.”

    입을 작게 벌리고 있는 요원을 지그시 바라보던 무경이 몸을 조금 움직여 테이블 상판 위에 찻잔을 내려뒀다.

    “이어서 말할게요. 그 기자에게 연락하는 게 왜 내게 복수하는 길이냐에 대해. 잘 들으세요, 채요원 순경.”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낯선 듯 낯설지가 않다.

    “정치인 A와 B가 있습니다.”

    적어도, 눈빛만큼은 여전히 자신이 좋아하던 백야마을의 하무경이었다.

    “A는 주가 조작으로 아주 큰 이익을 손에 쥐었어요. 한 수백억 정도. B는 자기의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 아랫사람을 휘둘렀다 칩시다. 국민이 더 열 받아 하는 쪽이 어느 쪽일 것 같아요?”

    그 외의 것들은 물론, 자신이 알고 있는 하무경이 아니었지만.

    “B예요. A의 상황은 보통 국민에게 피부로 와닿지 않거든. 어차피 그들만의 리그니까. 국민의 피부로 더 와닿는 뉴스는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상대에게 갑질을 부린 B가 되는 겁니다. B가 만들어낸 상황은 언젠가 자기도 겪을 수 있는 일이거든요.”

    무경이 그대로 팔을 뻗어 요원이 쥐고 있는 명함을 다시 제 손으로 가져왔다.

    요원은, 잠시 스쳤던 남자의 손끝에 아직도 저릿함을 느끼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리고 지금 동녘과 백야가 맞닥트리고 있는 이 상황이 바로 B인 겁니다.”

    무경은 테이블 상판 위에 내려둔 그 명함 위를, 다시 검지로 콕콕 두 번 찍어눌렀다.

    “무슨 말이냐. 재벌인 내가 평민을 상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갑질을 해? 그 날로 분개하는 거예요. 요즘 소비자들 똑똑하거든. 동녘을 상대로 불매 운동이 일어나겠죠.”

    무경은 별 대수롭지 않단 표정으로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렇다고 우리가 망하느냐. 아니요. 부자는 망해도 삼대가 먹고산다는데 우리는 그냥 부자도 아니고 동녘입니다. 어차피 불매 운동 일어나봐야 잠깐이고. 길어야 한, 두 달 가려나?”

    그가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으며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우리 회장님은 동녘 그룹에 그리고 내게 흠집 나는 걸 가장 못 견뎌 하실 거거든요. 그러니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란 거예요. 그러니 해봐요. 먹힐 겁니다. 회장님은 손 떼실 거고.”

    “제가 제보하면 하무경 씨는…… 어떻게 되는데요?”

    음절 사이사이가 의지와는 달리 뚝뚝 끊어졌다.

    “나?”

    나는…….

    말끝을 흐린 그가 다시 등받이에 몸을 묻어 앉는다.

    “글쎄.”

    눈을 가늘게 일그러트리며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눈길을 요원에게로 주며 눈부시게 웃었다.

    “뭐 죽이기야 하겠어요?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자식을?”

    요원이 동시에 시선을 아래로 뚝 떨어트렸다.

    이런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가 망하길 바라는 게 아니었어.

    그 형색을 알아차린 무경이 그녀가 던졌던 수건을 잡아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 순경, 하고 덧붙이는 목소리는 끝없이 다정했다.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들에게 서열 싸움은 필수예요. 치열하게 싸우잖아. 리더 자리 차지하려고.”

    뚜벅뚜벅, 요원의 뒤로 다가와 선 무경이 그 수건으로 요원의 머리칼을 천천히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 동물들도 리더 자리 차지하려고 목숨 걸고 싸우는데 우리 인간들은 어떨 것 같아요?”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의 압력이 요원의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요원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가 사는 세계는 더한 야생이에요. 채 순경은 상상도 못 해.”

    바깥의 비를 홀로 다 맞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젖어 들어가고 요원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왜 하필 우린 이런 식으로 얽혔을까.

    “그러니 행여나 내 걱정이 되는 거면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어차피 내가 한 번은 겪을 일이고 거쳐야 할 과정일 뿐이니까.”

    우린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던 마음은 채 하루를 가지 못하는구나.

    조금만 더, 남들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34년을 이런 긴장 속에서 살았어.”

    당신이 평범했으면 어땠을까. 내가 알던 백수 하무경 씨, 그 사람처럼.

    “난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 않다는 남자의 그 말에 오히려 더 가슴이 아팠다.

    “그러니 내가 말하는 대로 해요.”

    제 젖은 머리를 정성스레 말려주는 손길에 찡그린 두 눈을 더 질끈 감으면서 요원은, 제 속마음을 그대로 내질렀다.

    “미안해요, 하무경 씨.”

    제 머리를 수건으로 문질러 닦아주던 무경의 손짓이 점차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무경 씨도 원하는 바가 있었던 거, 저 알아요.”

    요원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나는 정말 하무경 씨를 곤란하게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어요. 내가 하무경 씨에겐 정말 미안한데요.”

    “채 순경, 너 진짜 바보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집무실에 일순 울려 퍼지며 요원이 몸을 흠칫 떨었고.

    “네가 왜 사과를 해. 내가 안 했는데!”

    맹렬하게 외친 그가 수건을 집어 던졌다.

    “이봐요, 채 순경.”

    요원의 뒤에 있던 무경이 성큼성큼, 요원의 옆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기세가 얼마나 굉장했는지 요원은 눈을 감은 채로도 찬바람을 느꼈다.

    “지금부터 너 내 말 잘 들어.”

    꾹 감고 있던 두 눈을 스르륵 들어 올린 요원이 무경을 바라봤다.

    “우리 회장님.”

    무경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요원을 아래에서부터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그가 손을 뻗었다. 꽉 말아쥐고 있는 요원의 주먹을 저의 큼직한 손으로 덮는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알아.”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의 체온이 닿자마자 갑자기 감정이 울컥 차오르고 눈물은 왈칵 터져 나왔다.

    “회장님이 아예 백야마을에서 손 떼시게 만들어야 해. 회장님이 안 떼는 이상은 이거 안 끝나요. 그땐 우리 형이나 누나가 간다고. 알아? 하태경과 하가경은 나와는 다릅니다. 가차 없이 밀어버릴 거야. 대화? 안 통합니다.”

    후두두두두둑.

    갑자기 쏟아진 눈물이 요원의 뺨을 거치지 않고 곧장 허벅지 위로 아름다운 수를 놓듯 그렇게 떨어졌다.

    여자가 내 앞에서 운다.

    존나 내 마음 아프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던 무경이 애써 괜찮은 척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만 돌아가시면 다 끝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식 된 도리로서 아버지 빨리 돌아가시라고 고사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난 그 짓 못 한다. 그러니까 응? 난 괜찮으니까.”

    “…….”

    “넌 내가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이게 가장 빠른 길이야.”

    “…….”

    “동녘으로부터 지키라고. 네 마을, 백야.”

    요원이 그에게 붙잡혀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제 눈가를 가리며 갑자기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나는…… 나도 어쩔 수가…… 어르신들은…… 그분들은 거기가…… 거기에서 마지막을…… 흐어어엉…….”

    두서없는 말이 뚝뚝 끊겨 나온다. 둥그런 어깨가 처연하게 떨린다. 아직 마르지 않은 순경복이 왜 이리도 안쓰럽게 느껴지는지.

    이런 그녀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가 또 그 마음이 오죽할까 싶어 무경도 하마터면 요원을 붙들고 같이 울 뻔했다.

    근데 그러면 안 되니까. 그러면 너는 더 못 할 테니까.

    나는 그저…….

    “너 나한테 자꾸 사과하지 마. 네 잘못 하나 없어.”

    네 앞에서 그저 웃으면 되는 거다.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제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확 치워낸 요원이 그대로 무경에게 점프하듯 그렇게 또 달려들었다.

    “!”

    입술이 마구 엉망으로 어설프게 비벼졌다.

    얼마나 눈물이 뚝뚝 흘렀는지 입안에서 짠맛이 다 느껴졌다.

    잠시 놀란 눈을 커다랗게 떴던 무경의 눈매가 다시 가느다래지더니, 요원의 목덜미를 감싸 쥔 그가 고개를 사선으로 더욱 비틀었다.

    요원의 입술을 강제로 벌려 혀를 밀어 넣었다.

    낮추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요원의 입안으로 더 깊숙이 자신을 밀어 넣었다.

    요원의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 무경의 셔츠를 꽉 틀어쥔다. 무경은 그 손등을 겹쳐 잡으면서 그녀를 소파 위에 아예 눕혔다.

    요원은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제 위에 있는 무경을 거칠게 밀어냈다가 다시 넥타이를 끌어당겼다가.

    무경을 세게 때리며 밀어냈다가 또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러 당기며 입 맞췄다가.

    그때마다 무경은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 어쩌자고. 어쩌라는 거야. 키스를 하자고? 아니면 말자고.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 요원의 두 손목을 결박시켜 위로 단숨에 끌어올리며 그녀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혀로 두드려 머뭇대는 그녀의 입술을 열고 단맛이 나는 살덩이를 빨아들였다.

    여전히 여자에게선 마르지 않은 빗물의 냄새가 났고 그게 내 마음을 자꾸만 건드린다.

    내일 지구가 당장 멸망해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이미 너와 천국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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