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77화 (77/116)
  • 77화. 피고, 지고 (Bloom and Fall)

    특별할 것 없는 정연과의 8년 만의 재회를 끝마치고 무경의 오후 일정은 아주 바쁘게 돌아갔다.

    백화점 영등포 지점을 방문해서 지점장과 차를 한잔 마셨다.

    아직 2분기가 다 지나진 않았으나 광역 상권을 기반으로 한 지점의 목표치는 이미 달성에 성공했다.

    적극적인 마케팅과 다양한 명품 브랜드 입점으로 명품관의 매출이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시 본사로 돌아가기 전에 차를 세워두고 커피 한 잔씩을 마셨다.

    평소 직원들 앞에선 공과 사의 구별을 정확히 할 줄 아는 무경이었지만, 요즘은 종종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였는데 조금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스 커피를 테이크 아웃 해온 이준이 뒷좌석의 무경에게 깍듯하게 커피를 건넸다.

    조수석에 앉은 이준이 방 기사에게도 커피를 건네면서 막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켜던 때였다.

    “서 비서님.”

    무경이 이준을 나직이 불렀고 그 차가운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란 이준이 고개를 뒤로 돌려 무경을 쳐다봤다.

    “예, 상무님?”

    “서 비서님, 내가요.”

    이마를 괴고 있던 무경이 그 손을 치워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아직요.”

    그러쥐고 있던 커피잔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 그것을 까딱, 한 번 흔들며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응? 내가 아직.”

    웃고 있던 표정을 금세 싹 지운 무경이, 금방이라도 이준을 잡아먹을 것 같은 얼굴로 다음 말을 강강하게 외쳤다.

    “빨대도 안 꽂았잖아!”

    푸흡, 콜록콜록!

    왜 내가 마시기도 전에 네가 먼저 감히 커피를 마시냐, 라는 꼰대스러운 발언을 모를 리 없는 이준은 결국 사레에 걸려 한참 동안 거친 기침을 쏟아냈고, 방 기사는 막 입가로 가져가려던 커피를 조용히 홀더에 꽂았다.

    무경의 옆에서 스케줄러를 정리하던 태호만이 침착한 시선으로 남자의 매끈한 옆태를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던.

    언젠가 이날을 떠올리면 세 사람 모두 가벼운 웃음 한 번 정도는 지을 수 있는, 무경과의 에피소드였다.

    네 사람이 타고 있는 대형 세단은 여전히 꽉 막힌 도로를 지나 본사로 향하는 중이었다.

    “하아…….”

    땅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가 세단 안에 짙게 깔린다.

    욕실 사건에 이어 이번 커피 사건까지.

    이준은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제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태호는 아까부터 편두통에 시달려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무경을 엿보다가 오랜 시간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상무님.”

    “네.”

    “새벽에 그 순경이 왔다 갔습니다.”

    무경의 손짓이 불시에 멈췄다.

    “꽤 오래 상무님 곁을 지키다 가셨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미동 없던 무경의 손이 다시 움직여 관자놀이를 문질렀고, 생각보다 담담한 음성이 나직이 중얼거린다.

    “꿈이 아니었어요?”

    “예?”

    “난 내가 드디어 미쳐서 환청이라도 듣는 줄 알았지?”

    “연락을 먼저 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차태호 실장님.”

    무경이 제 눈언저리를 가리고 있었기에 태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그의 매끄러운 하관이 전부였는데.

    “오늘 왜 이렇게 다들 선을 넘지? 왜 그래요?”

    찰나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는지 남자의 턱 근육이 사납게 꿈틀거리며 모양을 바꾸자, 태호가 냉큼 45도 각도로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일만 합시다?”

    “예.”

    또 한 번 싸한 정적이 대형 세단 안을 덮쳤다. 아까 커피 사건과는 결이 다른 분위기였다.

    후, 한숨과 함께 무경이 제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워냈다.

    갑자기 세상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토독토독. 아직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직전의 어린 빗방울이 창문을 때렸다.

    무경은 자연스레 창밖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래 봤자 바깥에 보이는 도심의 풍경에선 운치란 건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문득 백야마을이 그리워졌다.

    갑순 할머님은 잘 계실까? 부임 할머님은? 채 사장님은? 팔각정 사장님은?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안위도 궁금해졌다.

    시골집도 그리워졌다.

    정확히는, 낡은 대청마루 위에서 바라보던 고즈넉한 백야의 분위기가 그립다고 해야 할지.

    내가 그 시골집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존나 꿈에도 몰랐네.

    정지 신호를 받고 잠시 세단이 멈춰 섰다.

    차량 옆으론,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에 남자의 재킷을 뒤집어쓰고 웃으며 달리는 어린 커플이 보인다.

    무경이 턱을 괴며 그들을 부러운 듯 가만 응시하다가…….

    영화 찍냐, 씨발?

    괜히 애먼 곳에 화풀이하며 날카롭게 헛웃음 쳤다.

    어휴, 나도 참.

    세상 찌질한 제 모습에 자조적으로 한 번 웃은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고는 좌석 옆 버튼을 누르니 고요한 소리와 함께 무경의 시트가 뒤로 완전히 젖혀졌다.

    무경이 느른하게 팔짱을 낀 채로 고단한 두 눈을 감았다.

    내일은 지구가 존나 다 멸망해버렸으면 좋겠네.

    치졸한 생각엔 끝이 없다.

    ***

    그들이 탄 세단의 차바퀴가 물을 튀며 동녘 그룹 본사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쏴아아아아. 본격적으로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장마가 시작되려나?

    차에서 먼저 내린 이준이 큼직한 검은 우산을 꺼내어 촤악 펼친 뒤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완벽한 슈트 차림의 무경이 내렸고, 이준은 혹여 그의 어깨에 물방울이라도 튈까 긴장하며 우산을 그의 머리 위에 정확하게 받쳐 들었다.

    물론,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무경 때문에 중간중간 깨금발을 들어야 했지만.

    무경이 성큼성큼 정문을 향해 걸어 나갔고, 그의 옆과 뒤로 세 사람이 붙었다.

    그렇게 거칠 것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던 무경의 발걸음이 한자리에 우뚝 멈춰 선 건 순간이었다.

    우르르르, 뛰어나온 검은 슈트 차림의 보안 요원들이 무경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쳐 정문 앞 누군가를 끌어내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한 무경의 뱀처럼 서늘해진 시선이 그들의 뒤를 좇았고, 보안 요원들이 붙잡는 여자가 자신이 아는 여자임을 인지한 머리는 곧장 회까닥 돌아버려.

    “손대지 마!”

    악에 받친 사나운 고함을 터트렸다.

    “건드리지 마. 가만 놔두라고. 안 들려?!”

    남자의 목에 핏대가 설 정도의 강한 외침이었다.

    “당장 떨어지세요. 그 손 놓고.”

    갑자기 방향을 튼 무경이 보안 요원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고, 생전 처음 보는 무경의 날것의 태도에 그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무경의 뒤를 쫓았다.

    이준은 무경이 비 한 방울이라도 맞을까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뛰어야 할 정도로 무경의 보폭은 큼지막했으니.

    “사, 상무님.”

    이제야 무경을 알아차린 보안 요원들이, 붙잡고 있던 여자의 몸에서 막 손을 떼어내며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아, 안녕하십니까.”

    “씨발 진짜, 여러분들.”

    금방이라도 목을 베어버릴 듯한 굉장한 시선으로 보안 요원들을 옥죄던 무경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터트리며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회사 꼬라지 한번 자알 돌아가네요?”

    고조되었던 목소리가 다시 평소의 것으로 돌아와 극명하게 낮아졌으나, 담배 위에 불을 붙이기 위해 입가로 라이터를 가져가는 그의 손끝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에 치밀었다는 방증이었다.

    “1인 시위는 불법이 아니고 대한민국은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며 이 사람은 그런 대한민국을 지키는 순경인데.”

    후우-, 연기를 길게 뱉으며 이준이 들고 있는 우산을 빼앗아 든 무경이 그 우산을 여자의 머리 위에 받쳐 들며 씹어뱉듯 말했다.

    “감히. 겁도 없이. 지금 누굴 건드리는 겁니까. 회사 망하는 꼴 보고 싶어 이래요?”

    그랬다. 동녘 그룹 본사 앞에서 순경복 차림으로 팻말을 들고 있는 여자는 요원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보안 요원들이 그 살벌함에 몸을 움찔 떨었고 상황을 파악한 태호가 손을 휘저으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지시했다.

    보안 요원들이 허리 굽혀 다시 인사하며 그 자리에서 황급히 사라지자마자, 무경은 꼿꼿하게 서있는 요원을 비스듬히 깔아보며 기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후-.”

    매캐한 담배 연기가, 같은 우산 아래의 두 사람을 순식간에 에워쌌다.

    빗방울 사이사이로 지독한 연기가 스며든다.

    “보자, 한번. 뭐라고 썼는데?”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있는 담배를 몇 번 더 뻑뻑 빨던 무경이 그 손을 움직여 요원이 들고 있는 팻말을 잡아 가늘게 찡그린 눈으로 글자를 읽었다.

    「동녘 그룹은 백야마을에서 당장 철수해라! 우리의 소중한 터전에 아웃렛이 웬 말인가!」

    담배 필터를 앞니로 꽉 씹었던 잇새에서 이젠 기가 찬 실소가 새어 나왔다.

    “채 순경. 이렇게 해선 우리 못 이긴다니까?”

    빗물에 촉촉이 젖은 요원이 제 앞에 서 있는 무경을 감정 없는 얼굴로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압니다. 하지만 마을 지키려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말씀하셨듯이 저 같은 일개 순경이 어떻게 감히 동녘을 상대합니까. 저 사실 동녘 그룹 무섭거든요.”

    새파랗게 질린 여자의 입술이 신경 쓰여서 무경은 미간을 좁힌 채로 담배를 다시 입에 물며 재킷을 벗었다.

    그러고는 그 재킷을 여자의 둥그런 어깨 위로 툭, 무심하게 떨어트렸다.

    “그래서. 이다음 플랜은 뭔데요.”

    담배꽁초를 발밑에 떨어트린 무경이 구둣발로 불씨를 콱 꺼트렸다.

    “기자들에게 제보라도 할 건가? 응?”

    발끝으로 떨어트렸던 시선을 다시 치떠 요원의 눈을 싸늘하게 직시했다.

    “그런데 이거 어쩌지? 우리 홍보팀이 일을 좀 많이 잘해서 말이에요. 채 순경이 제보하는 기자는 죄다 데스크에서부터 막힐 텐데.”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 있나요. 꿈틀이라도 대보는 거죠.”

    “왜 쉬운 길을 놔두고 돌아가요? 사인 하나면 내가 지켜줄 수도 있는데.”

    “무슨 사인이요. 앞으로 하무경 씨의 섹스 토이가 되겠다는 그 말도 안 되는 합의서요? 지금 그게 순경에게 할 소립니까?”

    “섹스 토이라니. 말씀 한번 서운하게 하시네.”

    무경이 웃으며 한 걸음 더 요원의 앞으로 다가섰다.

    “할 거 다 해본 사이에 무슨.”

    자연스레 고개를 뒤로 더 젖히게 된 요원은 제게로 다가온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섰다.

    젖은 땅의 습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와 두 사람의 모든 것을 적시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야. 채 순경, 눈빛 좋은데요? 패기가 넘쳐. 우리 동녘이 잘하면 지겠다.”

    “죄송합니다, 하무경 씨. 하무경 씨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유감이에요.”

    여자는 사과했고 무경은 하지 말란 듯, 손을 올려 저지했다.

    “채 순경에게 한 가지 더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요. 김 작가 있죠? 백야마을의 열 번째 가구 주민.”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이 마치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네온사인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걔 사실 내 동생이야.”

    여자의 눈동자가 깜빡일 때마다, 제 머릿속 필라멘트가 이어졌다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본명은 하도현.”

    뭐 이런 미친놈들이?

    불시에 찡그려진 요원의 눈썹 앞머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새벽에 와서 나 간호해줬다면서. 고마워.”

    무경의 화제는 정신없이 휙휙 바뀌었고 요원은 따라갈 수 없었다. 자꾸만 변하는 그녀의 표정이 그 말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하무경 상무 라인이 왜 우리 형, 누나 라인과는 달리 단단한 줄 알아요?”

    갑자기 다가온 무경의 손이 요원의 턱을 사납게 덥석 붙잡았다. 흡, 요원의 몸은 순간 경직됐다. 나긋한 음성과는 사뭇 다른 손짓이었기에.

    “나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사람이거든.”

    담배 향이 짙게 밴 손가락이 이제 요원의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주며 화려하게 웃는다.

    “나 채 순경에게 그간 너무 받기만 한 것 같아서. 이제 채 순경에게 돌려줄까 합니다.”

    그 손가락이 다시 여자의 턱을 들어 올려 저를 똑바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나한테 복수하고 싶지.”

    남자의 얼굴에서 장난처럼 웃음기가 금세 사라졌다.

    “하고 싶어 죽겠잖아.”

    여자의 비에 젖은 그 말간 얼굴을 감정사와 같은 눈으로 샅샅이 훑어내린다.

    이런 순간에도, 여자의 모든 것을 다 씹어먹고 싶을 정도로 꼴리는 자신은 정말 미친놈이라 생각했다.

    “그럼 해.”

    이런 순간에도, 냉담하고 비정한 눈길 그리고 남자의 관능적인 탁음이 비가 오는 날씨와 지독히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요원은, 자신을 정말 미친년이라 생각했다.

    “내가 방법을 알려줄 테니.”

    채 순경. 나는 언젠가 네 손에 죽을 거란 생각을 종종 했었거든.

    “해요.”

    죽여. 네 손에 기꺼이 죽어줄 테니.

    “하라고.”

    영광이야, 채요원 순경.

    이제는 네가 피고(Bloom), 내가 질(Fall)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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