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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55화 (55/116)
  • 55화. 와르르

    쾅!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 포터 운전석에 몸을 앉힌 무경이 다시 시간을 되돌려 회상했다.

    서 씨와 조금 전 있었던 그 일을 떠올려보았다.

    ‘그냥 예쁜 것도 아니제. 고것만 보면 내 여기가 발딱 일어난당게요?’

    그 말을 듣자마자 무경은 후, 짜증스러운 얼굴로 목덜미를 쓸다가 고개를 아래로 푹 떨어트리고는 킥 웃으면서 제 피로한 눈가를 한번 문지르기도 했다.

    ‘환장한다. 환장해.’

    다시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린 무경이 들고 있던 바구니를 옆으로 탁, 세게 집어던지면서 쓰고 있던 자외선 차단 모자 역시 벗어 그 바구니 위에 툭, 내던졌다.

    서 씨는 순간 움찔거렸다. 모자에 가려져 있던 날렵하고도 매끈한 남자의 얼굴이 환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무경은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를 차가운 눈매로 비스듬히 깔아보면서 옷소매를 팔뚝까지 조용히 걷어붙였다.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목소리도 태도도 완전히 뒤바뀐 무경이 한 발짝 성큼, 인부에게로 다가섰다.

    ‘당신 지금 나한테 딱 한 대만 처맞을 건데요. 뭐, 뺨 정도? 주먹은 안 쓸게요.’

    무경이 약속하겠다는 듯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려 까딱거리더니, 곧 제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열 받는다고 같이 때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내 얼굴에 작은 생채기 하나만 생겨도, 당신 장기 다 내다 팔아도 내 합의금 절대로 못 만들어냅니다.’

    당연했다. 동녘 그룹의 하 회장이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아들의 얼굴이 아닌가.

    하무경이 누군가에게 맞았다는 소리가 하 회장의 귀에 들어가는 그 순간.

    이 남자는 즉사다.

    ‘맞았다고 억울해하진 마세요. 피해자 코스프레는 더더욱 싫습니다. 당신이 먼저 처맞을 짓을 한 거니까.’

    ‘나가 뭘 했는디!’

    ‘감히 누굴 그 입에 올리면서 네 싸구려 좆을 잡아. 채 순경이 우스워요?’

    무경은 지갑 속에 있는 지폐를 모두 다 잡아채 벙쪄 있는 남자의 손에 꽉 쥐여주며 말했다.

    ‘한 이백만 원 정도 될까? 안 세어 봐서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도 딱 한 대니까, 남는 장사 아니에요?’

    무경이 서 씨를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려 매혹적으로 웃던 것도 잠시.

    쫘악!

    미소와는 다른 엄청난 소리가 과수원 내에 울려 퍼지며 서 씨가 옆으로 쿠당, 나가떨어진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다시 현실로 돌아와 핸들 위에 이마를 기댄 무경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하무경은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여자에 빠진 미친놈이 되어 와르르 무너져내렸구나.

    와르르.

    ***

    조사 과정에서 서만재의 진술을 모두 다 받은 요원은 지금, 불이 꺼진 무경의 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가 채 순경한티 맞았으믄 말도 안 하제. 그 총객이 먼디 내 뺨따구를 냅다 쌔려부냐고!’

    서 씨에겐 모욕죄에 관해 차근차근 설명해주었고 서 씨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채 순경. 그런 말 한 거슨 나가 참말로 미안하네잉. 채 사장님께도 지송하고잉.’

    자신이 맞을 만했다고 곧바로 인정한 서 씨는, 일을 더 크게 만들지 않고 마무리 짓겠다 하였고 요원 또한 그를 훈방 조치하였다.

    낮은 담벼락 너머로 어두컴컴한 집 안을 바라보는 요원의 얼굴에 많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

    ‘내 입에 담기엔 아주 더러운 얘기라서 말이에요. 그리고 내가 그 상황을 되새기게 되면 나는 존나 또 빡이 돌아서 저 새끼 뺨 한 대로 안 끝날 것 같거든요. 그래서 별로 내키질 않아요.’

    하무경 씨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구나.

    자신밖에 모를 것 같은 사람이 이렇게 남을 위해 나서주기도 하고.

    “그분, 아까 캐리어 들고 나가시던데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요원이 고개를 돌리자 도현이 뚜벅뚜벅,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 김 작가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가벼운 묵례와 함께 요원의 곁에 멈춰 선 도현이 불이 꺼진 무경의 집 안을 스윽 한번 둘러봤다가 요원을 보며 설핏 미소 지었다.

    “채 순경님.”

    그러고는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저랑 같이 좀 걸으실래요?”

    요원은 그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이상하게 저 미소가 첫날부터 낯설지가 않다고.

    도현과 요원은 일정 거리 벌리고 서서 마을 내의 하천길을 거닐었다.

    “순경님하고 밤길을 걸으니 무섭지가 않네요.”

    뒷짐을 진 도현이 둥그런 달이 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휘파람을 휘이 불었다.

    “오늘따라 유독 달이 큰 것 같지 않아요? 슈퍼 문, 뭐 그런 건가?”

    요원에게서 대답이 없자 도현은 곁눈질로 요원을 살폈다.

    슬며시 끌어올리고 있는 입술과는 달리 도현의 눈동자는 누구처럼 냉랭했다.

    “…….”

    요원은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아까부터 땅만 보고 걷고 있었는데, 볼수록 무경이 좋아할 만한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그 말엔 요원이 반응하듯 고개를 들어 도현을 쳐다봤다.

    “전에 중식당에서요. 동녘 그룹 얘기하셨죠?”

    도현이 냉한 눈동자를 지우고 빙그레 웃었다.

    “왜 하신 거예요?”

    “아. 그거요?”

    하무경 씨를 의심했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으니 요원은 뻔한 핑계로 둘러댔다.

    “경제 얘기 하다가 나온 거죠, 뭐.”

    “아. 그래요?”

    도현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휘파람을 휘이 불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제겐 형 하나가 있는데요, 순경님.”

    “형이요?”

    “저희 형은 겉으로 보기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인데요. 알고 보면 사람이 쓸데없이 잔정이 많아요. 좋게 포장하면 보기보다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요원의 머릿속으로 불시에 누군가가 스쳤다. 자신도 그런 남자를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고생했네. 고생 많았어요. 고생했어.’

    그 남자도 냉한 겉모습과는 달리 알면 알수록 따뜻한 사람 같아.

    “그래서 자기 사람은 아주 끔찍하게 챙기는데요. 그것 때문인지 형을 따르는 사람이 유독 많아요. 그런데 그게 또 형에겐 치명적인 단점이라서요.”

    “그게 어떻게 단점이 될 수 있죠?”

    요원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물었고, 도현은 또 한 번 휘파람을 휘이 불다가 대답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거죠. 저희 형은 회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의 사람인데요. 자기가 끔찍이도 아끼는 사람에 한해선 냉정해지지를 못해요. 예를 들어, 자기 사람을 내쳐야 하는 순간이 와도 쳐내지를 못하고 본인이 책임을 감수하고 모두 다 끌어안는 거죠. 그놈의 정 때문에.”

    요원은 어느덧 저와 일면식 하나 없는 도현의 ‘형’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버진 형의 그런 점을 예나 지금이나 아주 싫어하세요. 늘 바꾸고 싶어 하시죠. 대의를 위해서는 사사로운 감정을 버려야 한다고 믿는 분이시니까요. 또, 그게 맞기도 하고요. 때론, 그 방법이 좀 잔인해서 그렇지.”

    “김 작가님 형이 회사에서 꽤 높은 분이신가 봐요.”

    요원과 발맞춰 걷던 도현의 발걸음이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보다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던 요원이 그 자리에 함께 멈춰 서며 도현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치자 도현은 눈을 휘어 미소 지었다.

    “지금은요. 하지만 형이 그 단점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쩐지 잔뜩 꾸며진 미소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 아무것도 보여드리지 못한다면. 형이 바닥 치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거든요.”

    “바닥이요?”

    “그리고 저는, 채 순경님. 그 꼴을 절대로 못 볼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지켜온 사람인데.

    도현의 다정했던 눈빛이 조금은 차갑게 변하여 요원을 경멸스러운 것 보듯 쳐다보며 말한다.

    “제겐 참, 특별한 형이거든요.”

    왜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하냐는 듯한 의문 가득한 얼굴을 짓던 요원의 뇌리로 또다시 한 남자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빠르게 스쳤다.

    ‘가끔은 나와 같은 피가 도는 그들 때문에 잠 못 이룰 때도 있는데요.’

    왜일까. 왜 이 순간에 나는, 당신이 떠오르는 것일까.

    “채 순경님. 모두에겐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예요.”

    제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무경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던 요원이 다시금 도현을 정시했다.

    “그러니, 채 순경님은 그것만 기억해주시면 돼요.”

    도현은 어느새 제게 옆모습을 보이며, 달빛에 반짝이는 하천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하천을 계속해서 바라보며 휘이휘이 휘파람을 몇 번 더 불던 도현이 요원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형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요.”

    오늘 밤도 달빛이 참, 밝구나.

    ***

    금요일 오전의 동녘 그룹.

    “그러니까…….”

    감사팀 신입사원에게서 전해 들은 말에 민수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상무님 인사말 들으러 갈 때 핸드폰을 아예 못 들고 가게 했다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선배님.”

    사내 행사에서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것을 알기에, 민수는 종이컵을 입가로 가져가면서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왜 그랬을까?”

    신입사원에게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면서 종이컵을 입에 문 민수는 머리를 굴려보았다.

    “진짜 뭐지……?”

    포털에 사진 하나 없는 것도 그렇고. 내부 사진에 갑자기 락이 걸린 것도 그렇고. 핸드폰 압수도 그렇고.

    뭐 때문에 이렇게 하무경 상무님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하는 걸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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