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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54화 (54/116)
  • 54화. 배울 만큼 배운 놈

    목요일 아침은 어젯밤 장대비가 내린 것이 무색하리만큼 화창하고 또 맑은 날씨였다.

    “하무경 씨 잘 딛고 외우쇼잉. 우덜은 지금부텀 적과를 해야 되는디요잉. 병해충 피해과, 상처과, 기형과, 발육 부진과를 제거하는 거시요.”

    무경은, 일섭이 준 회색 아웃도어 티셔츠와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자외선 차단 모자까지 완벽하게 쓴 채로 일섭의 앞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무경이 눈썹을 한껏 찡그리고 있었는데, 이 말도 안 되는 복장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과수원으로 일하러 나와서도 아니라, 바로 어젯밤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하다 끊긴 그 무언가의 일 때문에.

    ‘……진짜 너무 아파.’

    의도하지는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그 말이 여자의 모성애를 제대로 건드렸던 것 같다.

    요원은 또다시 머리가 어떻게 된 듯 제게 먼저 격렬하게 키스했고, 제 셔츠와 바지를 급하게 벗기려 들었다.

    그 과정에서 무경의 등이 몇 번이고 벽에 찍히며 아, 하는 멋없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무경은 제 셔츠와 바지는 요원의 손에 맡긴 채로 넥타이를 정신없이 풀었다.

    ‘뒤돌아요.’

    그러고는 요원의 몸을 잽싸게 돌려 그녀의 두 팔을 뒷짐 지게 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요원의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무경은 요원의 손목을 넥타이로 약하게 묶었다.

    ‘엉성하게 묶었어요. 채 순경이 벗어나려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으니 무서워할 거 없어.’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요원의 등을 눌러 그대로 엎드리게 했다.

    ‘후.’

    바람을 불어 몇 가닥 이마 위로 흘러내려 온 앞머리를 흩날린 무경이 폭발 직전인 욕정을 최대한 자제하려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요원이 벗기다 만 바지와 드로즈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밑으로 한 번에 끌어내리려던 때.

    ‘그런데요, 하무경 씨.’

    그녀가 말한다.

    ‘저 씻고 하고 싶어요.’

    ……라고.

    무경의 세상이 두 쪽으로 쩍 갈라졌다.

    망했다, 씨발. 우리 집엔 욕실이 없는데.

    절망한 얼굴을 차마 숨길 수가 없었다.

    결론은 결국 또, 못 했다.

    요원에게 주방에서 씻겠냐고 물었다가 등신이 되었고, 빗물에서 같이 씻겠냐고 농담을 던졌다가 더한 미친놈이 되었으니.

    무경은 최대한 괜찮은 척 요원을 신사답게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조용하게 핸드폰을 꺼내 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 실장님. 늦은 시간에 전화해 미안한데요.’

    무경은 미소를 유지한 채, 양은 밥상 위 그릇들을 치웠다.

    ‘내가 꼭 할 말이 있는데. 당장 욕실 만들어요. 이 집 불태워 버리기 전에.’

    당황한 태호에게서 빠른 대답이 나오지 않자, 무경의 눈빛과 말투가 순식간에 신경질적으로 변하며 이런 말을 짓씹었다.

    ‘내가 장난 같아?’

    아니다. 남자는 진심이었다.

    “하무경 씨. 외우셨소?”

    일섭의 돌발 물음에 무경이 상념에서 깨어나 눈썹을 치떴다.

    “어째 답이 없소. 외우셨소?”

    무경의 위치는 온갖 중요한 업무 사항을 기억해야 하는 자리다.

    예를 들어 임원 회의 시간에 누군가 ‘A’를 말하면 그 ‘A’에 대한 데이터가 입 밖으로 막힘없이 줄줄줄 나갈 정도가 되어야 한다. 실수로라도 ‘B’나 ‘C’를 이야기해선 안 된다. 상대에게 얕보이기에 십상이니.

    “제가 그깟 것 하나 못 외웠겠습니까.”

    상대가 누구인지를 망각하고 코웃음 쳤던 무경이 이내 정신을 번뜩 차렸다.

    “그깟 것이요잉.”

    일섭이 들고 있는 삽으로 괜히 땅을 푹푹 찌른다. 무경은 흠, 점잖게 헛기침하며 말을 다시 정정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채 사장님.”

    “그라믄 그깟 것을 함 을퍼보더랑께요.”

    “병해충 피해과, 상처과, 기형과, 발육 부진과를 제거하라는 말씀 아니셨습니까.”

    “옴마? 인자봉께 순 꼴통은 아니엇구만.”

    “꼴통이요. 제가요.”

    무경의 고저 없는 되물음에 일섭은 호탕하게 웃었다.

    “울 엄니가 그러셨어라. 먼 꼴똥 한나가 마을로 들어와가꼬 아주 속 씩인다고.”

    그 어르신은 참 나랑 안 맞네, 안 맞아.

    무경이 혀를 찼던 것도 잠시, 다시 일섭을 바라본 무경은 말했다.

    “저 배울 만큼 배운 놈입니다.”

    상대에게 최대한 호감을 주기 위한 상냥한 얼굴로 웃으면서 마지막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 채 사장님이라도 절 좀 어여쁘게 봐주시죠.”

    그리고, 배울 만큼 배운 놈이라는 무경은 지금 과수원에서 일하는 다른 남성 인부 ‘서 씨’에게 호되게 혼이 나는 중이었다.

    왜 멀쩡한 사과를 적과하냐는 이유에서였다.

    “아따 환장하것네잉! 그거슬 왜 따요, 그거슬! 멀쩡한 것을! 시방 몇 번째여. 난중에 수확할 것도 없것네잉.”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일은 익숙지 않아서요.”

    개나 소나 하는 잔소리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이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아.

    “익숙허지 않으믄 막 해도 돼? 모르거씀 물어라도 보믄서 하란 말이요.”

    상대가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라면 그러려니 이해라도 하겠다. 그런데 꼴랑 해야 40대 중반 정도 처먹은 새끼가 같잖은 텃세까지 부리니 정말 더 환장하겠는 거다.

    나 하무경에게, 감히.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으요. 눈깔이 이쓰믄 알 것 아니요. 이거슨 멀쩡한 거랑께라. 사람 참말로 답답하게 어째 그라고 알아먹덜 못 한다요? 채 사장님도 참 그래요잉. 어디서 이런 일 못 하는 총각을 뽑아가꼬 사람을 피곤하게 한디야.”

    그래도 참아야지, 생각했다. 이곳은 채 순경네가 하는 과수원이니 사람들에게 안 좋게 보여 뭐 있을까, 싶은 마음에.

    “채 사장님도 사람이 평소에도 물러터져가지고는 하는 짓이 참말로 맘에 안 든당께.”

    채 순경의 아버지를 욕하는 그 순간까지도 참으려고 했다. 나는 분명, 참으려고 했어.

    “지 애비가 그라믄 채 순경이라도 사람이 좀 약게 살아야 쓴디, 채 순경 고것도 착해 빠져가꼬.”

    여기까지도 그냥 넘어가자, 했다. 채 순경이 착한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 새끼가 말이다.

    “그래도 채 순경은 이쁭께.”

    점점 도를 지나치는 거다.

    “그냥 예쁜 것도 아니제. 고것만 보면 내 여기가 발딱 일어난당게요?”

    변태처럼 헤벌레 웃으면서 바지 앞섶을 한번 쥐는 서 씨의 징그러운 행동을 눈앞에서 마주한 그 순간.

    그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뚝.

    배울 만큼 배웠다는 무경의 머릿속 무언가가 제대로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

    아주 오랜만의 폭행 신고를 받은 요원과 성준이 경찰차에서 급하게 내리며 과수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채채 과수원 내엔 인부들이 쉴 수 있는 작은 컨테이너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요원과 성준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절대로 합의는 못 한다, 길길이 날뛰는 서 씨를 말리는 일섭의 곤혹스러운 모습이 보였다.

    서 씨의 한쪽 뺨이 벌겋게 부어올랐고 입술 끝엔 피가 터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약한 힘으로 맞은 것 같진 않았다.

    “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과수원에서 폭행이라니요?”

    제 곁으로 다가온 요원을 알아차린 일섭이 난처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하무경 씨가 우리 서 씨 귀 싸다구를 올려붙여 부럿다 안 하냐잉.”

    “하무경 씨가요? 대체 왜요?”

    “아따 시방 지금 그걸 모르것당께. 서 씨도 말을 안 해주고, 하무경 씨도 암 말도 안 하고잉.”

    “하무경 씨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

    “밖에 읍냐? 담배 한 대 태우고 오것다고 했는디.”

    “경장님. 저는 하무경 씨를 찾아볼 테니 경장님께선 여길 좀 맡아주세요.”

    “어어, 그래. 얼른 찾아봐.”

    요원이 컨테이너 문을 열고 과수원 내를 달려 무경을 찾기 시작했다.

    요원이 무경을 발견한 곳은 의외로 가까운 곳이었다.

    남자는 과수원 입구 쪽 작은 화단 앞에서 화단 내의 붉은 꽃들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아까는 주변을 살피지 못하여 무경을 못 보고 그냥 지나친 모양이다.

    “하무경 씨!”

    요원이 성큼성큼 빠른 보폭으로 무경의 곁에 다가가 섰지만, 무경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여전히 붉은 꽃들에 시선을 내리깐 채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꽃. 양귀비 맞나?”

    “네, 맞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요원이 언성을 높였다가 후우,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다.

    “서만재 씨 뺨 때린 거 맞아요?”

    “이름도 존나 그지 같네.”

    “여보세요, 하무경 씨. 지금 저분은 합의 못 한다고 하고 계세요. 하무경 씨가 때린 거 맞아요? 하무경 씨 얼굴을 보니 쌍방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합의를 못 해?”

    킥, 조소한 무경이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후우-.

    요원과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연기를 길게 뱉은 무경이 꽁초를 발밑에 툭, 떨어트려 그것을 짓이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웬만하면 하라고 하세요. 그게 서로에게 좋아.”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무경이 몸을 반쯤 돌려 요원을 마주 보며 웃는다. 누가 보아도 억지로 웃는 서늘한 미소였다.

    “채 사장님껜 피해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하무경 씨.”

    “나 잘린 게 아니라면 알바는 다음 주부터 정식으로 나오겠다고도 전해주시고. 오늘은 내가 급한 일이 생겨서 직접 말씀은 못 드리겠네.”

    주머니에서 한 손을 빼낸 무경이 요원의 뺨을 검지로 툭툭 두드리며 그녀를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늘 모든 상황을 가볍게 여기는 남자의 태도에 화가 나서.

    어쩌면, 남자도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서.

    또는, 그의 앞날이 염려되어서.

    “하무경 씨, 가긴 어딜 가요 지금!”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경의 팔뚝을 덥석 붙잡은 요원이 그를 멈춰 세우며 소리쳤다.

    “이게 장난이야? 장난 같아? 때렸냐고 물었잖아. 몸 좀 한번 맞댔다고 순경인 내가 당신에겐 아주 우스워요?!”

    “하나도 안 우스워요, 채요원 순경.”

    요원을 돌아본 무경이 흥분한 저와는 달리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받아쳤다.

    “네가 우스웠다면 내가, 그 자리에서 저 새끼랑 같이 낄낄거리면서 앞섶을 붙잡았겠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가 금세 힘을 푼 남자가 또 다음 말을 차갑게 짓씹는다.

    “나는 먹어봤다고 씨발 자랑질하면서?”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요원은 그대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앞섶을 붙잡아요?”

    “궁금하시면 저 새끼한테 듣든지. 사과도 꼭 같이 받으시고. 아니다. 깔끔하게 그냥 처넣어요. 경찰 모욕죄 이런 거로.”

    “알아듣게 설명 좀 해주세요.”

    “설명하기 싫은데요.”

    남자의 눈매가 아주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내 입에 담기엔 아주 더러운 얘기라서 말이에요.”

    입매도 삐딱하게 올라선다.

    “그리고 내가 그 상황을 되새기게 되면 나는 존나 또 빡이 돌아서 저 새끼 뺨 한 대로 안 끝날 것 같거든요. 그래서 별로 내키질 않아요.”

    아까부터 무경의 말을 이해해보려 애쓰는 요원을 보며 피식, 웃은 무경이 마지막 말과 함께 그녀를 완벽하게 등지고 돌아섰다.

    “인생 종 치고 싶지 않으면 합의하라고 하세요. 그게 여러 사람에게 좋아.”

    제 포터를 향해 성난 기척으로 향하는 남자의 차게 식은 표정은 더는 웃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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