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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20화 (20/116)
  • 20화. 미풍에서 강풍으로

    동녘 그룹의 부사장 집무실엔 고요를 가장한 냉랭함이 안개처럼 자욱했다.

    하태경의 데스크 앞에서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선 태호가 서류를 넘겨보는 하태경을 긴장된 눈빛으로 응시했다.

    “하 상무는 요즘 잘하고 있나.”

    “늘 열심히 하십니다.”

    “그래. 사업계획서를 보니 알겠더군. 벌이는 데 선수야. 무모하지.”

    “하 상무님을 잘 아시잖습니까. 누구보다 추진력 있으신 분입니다. 그 점이 회장님을 참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 그건 또 그렇지.”

    하태경이 만년필로 사인을 휘갈기며 차게 웃었다.

    “하 상무가 요즘 회사에서 잘 안 보이던데.”

    “요즘 지방 출장이 잦으십니다.”

    “지방 출장 어디.”

    “여러 군데 다니고 계십니다.”

    “웃긴 게 말이야. 하 상무 행방을 아무도 모르더군. 사람을 붙여놔도 손에 쥐어지는 게 아무것도 없어. 왜겠냐. 회장님이 중간에서 손쓰시는 거지. 무슨 작당을 짜는 거야, 그 두 사람.”

    “제가 어찌 회장님과 상무님의 의중까지 다 알겠습니까.”

    “다 좋은데 말이야, 차태호 실장.”

    탁, 만년필을 서류 위로 깔끔하게 내려둔 하태경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맞물리며 깍지 꼈고 시선을 치켜 올려 태호를 쳐다봤다.

    동녘의 하 씨 가문이 원래 재벌가 중에서도 신수가 훤한 것으로 알아줬는데, 하태경 역시 나이가 50이 넘었지만 중후한 배우와도 같은 얼굴이라 태호는 생각하고 있었다.

    “너 지금 내 앞에서 누굴 높이는 거야?”

    “예?”

    “내 앞에선 상무라 칭하는 거다. 상무님이 아니라.”

    그의 뜻을 자각한 태호가 얼른 하태경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실수했습니다.”

    그런 태호를 몇 초간 더 시선으로 옥죄던 하태경이, 다시 점잖은 얼굴로 돌아와 만년필을 손에 쥐고 시선은 서류 위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첫째가 작곡에 그렇게 능하다면서.”

    “예? 아, 예.”

    “나중에 대학은 미국으로 보내보지 그래. 줄리어드나 커티스나.”

    “안 그래도 계획은 하고 있습니다.”

    “내 지인이 마침 줄리어드 음대 교수진과 친분이 있는 모양이야. 언제 한번 밖에서 같이 식사하지. 차태호 실장을 그리 오래 보고 지냈는데도 여태 식사를 한번 같이 못 했네.”

    뜻밖의 제안에 태호가 눈을 조금 커다랗게 떴다.

    “차태호 실장은 능력 있는 사람이야.”

    하태경은 서류를 넘겨본 채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충성심 또한 대단하지. 하 상무 곁을 대체 몇 년을 보좌하고 있는 건지. 그런데 난 그래.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기엔 차태호 실장이 참 아까운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부사장님. 저는 지금에 만족,”

    “회장님 가시면 난 가장 먼저 하무경 상무부터 정리할 생각이다.”

    태호의 말을 자르듯 하태경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날개를 찢고 뭉개고 밟아버릴 거다. 다시는 날아오르지 못하게 말이다.”

    태호의 눈 밑이 얕게 경련했다.

    “내가 하무경만 쳐낼까? 하 상무 라인도 다 같이 도려낼 거다. 가장 첫 번째 주자는 누구겠냐. 너다, 차태호 실장.”

    오히려 그 협박 같은 발언엔 태호의 표정이 다시 무던함을 되찾았다.

    “한 달이면 자네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되겠지. 슬슬 결정해.”

    하무경의 능력 있는 최측근을 당장에 쳐내진 못하니 제 라인으로 데려오려는 수작인 것을 태호가 모를 리 없었다.

    굳건한 표정을 지키던 태호가 하태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무경 상무님의 날개를 찢고 뭉개고 밟아버리실 때가 오면. 그땐 저도 꼭 상무님과 함께 도려내 주십시오.”

    하태경의 아래턱에 일순 강한 힘이 들어간 것을 태호는 보았다.

    그러나, 늘 그래왔듯이 하태경은 점잖은 미소와 함께 태호의 의중을 되물을 뿐이었다.

    “대답으로 알면 되겠나.”

    “예. 그렇게 알아주십시오.”

    “그래. 잘 알았네. 나가 봐.”

    깔끔한 허락이 떨어지자 태호가 하태경에게 인사하며 부사장실을 나갔다.

    동녘 그룹 내에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잘 느껴지지 않는 바람이지만, 그 바람은 언젠가 미풍이 되고, 미풍에서 강풍이 되고, 강풍에서 무서운 회오리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동녘 남매의 싸움이 아닌, 하태경 부사장 라인, 하가경 전무 라인, 그리고 하무경 상무 라인.

    이젠, 동녘 그룹 임직원 전체의 싸움이기도 했으니.

    ***

    대청마루 위에서 한쪽 팔을 머리 뒤에 받치고 누워있는 무경은, 파랗고 맑은 하늘을 가만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머리 뒤에 받치고 있지 않은 손으론 멘톨 사탕이 든 틴케이스의 뚜껑을 열었다가 닫았다가를 반복하면서 시선은 계속해서 하늘 위로 고정시켰다.

    틴케이스를 대청마루 위에 챙, 내던진 그가 이젠 대청마루 위의 담뱃갑을 잡아챘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탕, 위로 올려 불을 붙인 뒤 다시 대청마루 위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만약 하 회장이, 지금 당장 저를 호출해 네가 지금까지 백야마을에서 한 일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예, 회장님. 저는 이곳에서 만난 여자와 키스했고 오늘 눈 뜨자마자 한 거라곤 여자와의 키스를 곱씹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여자만 떠올리면 제 앞이 도저히 주체가 되질 않으니 이것 참 퍽이나 난감하군요, 라고 대답해야 할 판국이었으니.

    정말로 난감한 상황에 봉착해버린 무경이 푸스스, 하는 웃음과 함께 연기를 뱉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도 재미있는 상황인가.

    한번 안고 나면 식을까.

    그렇다면, 빨리 꼬셔서 한번 안고 끝내는 것이 나을까.

    이건 욕정에 안달 난 애새끼도 아니고. 십 대 때도 하지 않던 생각이나 처하고 앉아있으니.

    담배를 빨면서 몸을 일으켜 세운 무경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비스듬히 건 채로 집 안으로 들어가 캐리어 앞에 섰다.

    후우.

    집 안에 뿌연 연기를 뱉으며 다시 몸을 낮춘 그가 담배를 다시 입에 물면서 캐리어를 주욱, 열어 무언가를 비장의 무기처럼 꺼내 들었다.

    “어르신. 계십니까?”

    무경이 반쯤 열려있는 철제문을 두 번 쿵쿵, 노크하며 안으로 들어서던 때, 대청마루 위에 앉아 사과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경복 차림의 요원과 허공에서 그대로 시선이 얽혀들었다.

    “오, 오셨어요?”

    그의 방문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사과를 뒤로 숨겼다.

    무경 역시 요원이 집에 있을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지라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요원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두 걸음,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집에 있었네요?”

    “근처에 마침 볼일이 있었거든요. 다시 돌아가야죠.”

    “근데 사과를 왜 뒤로 숨겨요? 마약이라도 발라놨나?”

    “선생님! 저 경찰입니다. 말조심을 좀…….”

    기함하는 요원의 곁으로 거리를 좁히며 다가선 무경이 여유롭게 손을 뻗어 요원이 뒤로 숨긴 사과를 태연하게 가로챘다.

    “앞으론 조심하도록 하죠, 순경 나으리.”

    요원이 베어 먹었던 부분의 알맹이를 무경이 한 입 와삭, 베어 먹었다.

    입안에서 터지는 사과의 달콤한 과즙이 어제 맛보았던 누군가의 타액처럼 달다 순간 생각했던 것도 같다.

    “드셔도 왜 하필 그 부분을…….”

    그런 무경의 돌발 행동에 요원은 당황한 표정을 차마 숨기지 못했다.

    “왜요. 내 혀가 닿아 더러워요?”

    요원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무경이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사람치곤 잘만 빨던데?”

    “선생님!”

    얼굴 쪽으로 훅, 하고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로만 혈류가 몰리는 기분. 요원은 뜨거워진 제 얼굴 위로 손부채질을 하며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 쳤다.

    “어르신은 어디에 계세요.”

    무경은 당황한 요원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먹었다.

    “드릴 게 좀 있는데.”

    “……주방에요.”

    “그럼 좀 기다려야겠네.”

    대청마루 위에 몸을 앉힌 무경이 제 곁에서 뻣뻣하게 서있는 요원을 눈을 치켜떠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한번 까딱했다.

    “앉아요?”

    “서있는 게 편해요.”

    “거짓말하지 말고 앉아요.”

    “그럴까요, 그럼.”

    그제야 요원이 무경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나 참. 내 입술 좋다고 물고 빨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 내외하는 거야?

    무경이 뻐근한 목을 문지르며 요원에게 퉁명스레 물었다.

    “잘 잤어요?”

    잘 잤을 리 없다. 그러나 잘 잤다고 흘리듯 대답하면서 요원은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그건 뭐예요?”

    “아. 이거?”

    먹다 남은 사과를 대청마루 위에 내려둠과 동시에 그 위에 오렌지색의 상자 하나를 내려둔 무경이 그 상자 뚜껑을 열어 안에서 색감이 고운 실크 스카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전에 전복죽 말이에요. 어르신께 감사해서.”

    “그런 거 안 주셔도 된다고 제가 분명…….”

    요원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실크 스카프를 허공에서 한번 펄럭였던 무경이 그 스카프를 요원의 목에 순식간에 둘렀기 때문이다.

    새하얀 목덜미를 스치는 손끝은 아주 찰나였지만, 온몸에 전율이 이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킬 정도로 아찔했다.

    “채 순경은 확실히 얼굴이 하얘서 이런 파스텔 톤이 잘 받네요.”

    핏줄이 우뚝 선 사나운 느낌의 손과는 달리 스카프를 매듭짓는 손길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기만 했다.

    “…….”

    요원은 입술을 작게 떨어트린 채로 스카프를 매는 데에 집중하는 남자의 반듯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평소와는 다르게 점차 거세지는 심장 박동을 자각할 때 즈음.

    “잠. 잘 잤다고 했었나?”

    그가 속삭이는 듯한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좀 억울하네. 난 아니라서.”

    매듭을 짓다 말고 시선을 올린 그가, 반쯤 넋이 나간 요원을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꿰뚫어 볼 듯 쳐다보며 말한다.

    “설쳤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왜요?”

    “채요원 순경 때문에 설친 게 97%. 밤새도록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망할 놈의 톰과 제리 때문에 설친 건 한 3% 정도 되겠네요.”

    “톰과 제리요?”

    “고양이랑 쥐 새끼요.”

    “아…….”

    “참. 채요원 순경 선물도 있어요. 집에 두고 왔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거든. 이따 밤에 잠시 들러요.”

    그가 뱉은 ‘밤’이란 단어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요원이 제 목 언저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 무경의 손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 괜찮습니다. 그럼 볼일 보고 가세요.”

    무경을 향해 꾸벅, 묵례한 요원이 막 그를 스쳐 지나가려던 때에.

    “채 순경은, 참.”

    긴 팔을 대번에 쭉 뻗은 무경이 요원의 손목을 잡아 단숨에 되돌리며 짓씹었다.

    “도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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