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8화 (18/116)
  • 18화. 사냥꾼과 사냥감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도 지나고 화요일이 찾아왔다.

    시골 순경이 하는 일은 도시와는 다르다.

    강력 사건보단 관할 마을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건들을 다루고 해결한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아침부터 꽤 큰 사건을 담당하게 되었다.

    경운기 도난 사건과 비닐하우스 도박판 단속 등 말이다.

    이러한 사건은 늘 임성준 경장과 한 팀이 되어 다니는데, 성준은 말이 너무 많아 요원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잘 들어, 채 순경. 저 안에서 지금 엄청난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어.”

    해가 진 저녁, 비닐하우스엔 환한 불이 켜져 있고 성준은 쥐고 있는 손전등을 딸깍 켜서 그 비닐하우스를 가리켰다.

    “엄청난 돈이 오간다고 해. 돈이 떨어지면 소도 건다더군. 땅도 걸고 말이야.”

    “판이 꽤 크네요?”

    “그렇지. 이건 단순한 배추 서리 사건이 아니야. 우린 지금 거대한 도박판을 잡는 거라고. 혹시 알아? 이 도박판이 조직적으로 움직일지.”

    성준이 손전등을 하도 껐다가 켰다가를 반복해서 참다못한 요원이 그 손전등을 빼앗아 들었다.

    “경장님. 들키겠어요.”

    요원의 걱정에도 성준은 보란 듯 씩 웃었다.

    “들켜도 상관없어. 채 순경 알잖아. 나 100M 달리기 3초 컷인 거. 아무도 내게서 도망가지 못해.”

    수다스러울 뿐만 아니라 허세도 한몫해서 성준과 함께 있으면 더욱 진이 빠지는 요원이었다.

    “채 순경.”

    성준이 비닐하우스 뒤에 몸을 숨기며 요원에게 자세를 낮추라 손짓했다.

    “셋 세면 동시에 들어가 현장을 덮치는 거야.”

    “전 앞으로 들어갈게요. 그래야 출입구를 모두 막을 수 있어요.”

    “그래. 좋은 생각이야.”

    요원이 최대한 허리를 굽히고서 살금살금, 비닐하우스의 앞으로 몸을 옮겼다.

    요원이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한 성준이 손가락을 허공 위에 높이 올려 보였다.

    손가락이 하나가 되고, 두 개로 늘어나고, 세 개가 되었을 때.

    콰당!

    “어르신들! 동작 그만입니다!”

    비닐하우스를 박차고 들어온 요원과 성준을 발견한 마을 주민들이 화투판 위로 냅다 몸을 던지듯 엎어지며 소리친다.

    “이거슨 너그들이 생각하는 그거시 아니여!”

    비닐하우스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백야파출소에서 하나같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채 순경이 정녕 나를 몰라서 하는 소리당가? 고거슨 도박이 아니랑게? 심심해서 좀 논 것 가지고 하나도 모름시로 그라면 안 되제! 이러면 나는 참말로 억울하제?”

    “어르신. 증거가 다 있습니다. 이거요, 이거. 땅문서잖아요. 그리고 이 안에 현금이요.”

    요원이 보자기에 싸여있는 돈뭉치를 데스크 위에 툭 던졌다.

    “액수가 무려 90만 원이 넘습니다. 우리는 이런 걸 엄연한 도박이라 부르고요.”

    “고거슨!”

    “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요원의 평소와는 사뭇 다른 사무적인 눈빛에 그녀의 앞에 피의자 신분으로 앉아있던 마을 주민이 “아따, 대구빡 아프게 됐네잉.” 하며 제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

    비닐하우스 도박 사건을 정리하고 보니 어느덧 시간은 자정이 훌쩍 넘어있었다.

    오늘따라 피로한 몸을 이끌고 백야마을로 들어오는 요원의 터덜거리는 발걸음이 현저히 느렸고 기운 또한 없었다.

    저의 집으로 향하는 길엔 무경의 집이 있었는데, 요원은 그곳을 지나다니면서 항상 낮은 담벼락 너머 불이 꺼진 집 안을 잠시간 바라보곤 했다.

    오늘은 불이 켜져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왔지만 역시나 불이 꺼진 집 안의 모습에 요원은 괜스레 허전함을 느꼈다.

    금세 정이라도 든 걸까. 단 며칠 만에? 난 왜 이리도 사람에게 마음을 빨리, 쉽게 열까. 정말 바보 같다.

    요원이 나직이 실소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전거를 끌고 자신의 집을 향해 느린 걸음을 터덜터덜 옮기던 때에.

    뚜벅. 뚜벅. 뚜벅.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등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요원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일시에 요원의 사슴처럼 영롱한 눈동자가 번쩍 크게 뜨였다.

    비포장도로를 걸어오는 남자의 실루엣이 어둠을 뚫고 점차 더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넥타이 없는 슈트 차림에 윗단추 몇 개를 풀어헤친 남자의 한 손엔 커다란 캐리어가 쥐어져 있었는데, 왁스로 잘 만진 스타일이긴 하나 이마 위로 흘러내려 온 몇 가닥의 머리칼 때문인지,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흐트러져 보였다.

    “하. 너무 멀어요, 멀어. 여긴 왜 공항이 안 생기는 거야.”

    구시렁거리는 남자는 떠날 때보다 빛깔은 훨씬 더 좋아져 돌아왔으나, 그에 대비되는 피로감 짙은 얼굴은 조금 더 농염해 보였다.

    “선생…… 님?”

    무경은 대답 대신 요원과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캐리어와 함께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극명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요원을 가만 응시한다.

    바퀴 끌리는 소음이 들려오질 않으니 이제 두 사람의 주변엔 지독한 적막을 동반한 찌르르르, 찌르르르, 정겨운 풀벌레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잘 지냈어요?”

    남자의 한껏 가라앉은 음성에도 옅은 피로감이 배어있다 생각하면서, 요원도 그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서울은 잘 다녀오셨어요?”

    “뭐, 보시다시피.”

    “생각보다 많이…… 늦으셨네요.”

    “나 기다렸어요?”

    그 질문엔, 자전거를 쥐고 있는 요원의 손에 바짝 커다란 힘이 들어간 것도 같았다.

    무경의 조금 더 짙어진 눈동자가 힘이 들어간 여자의 새하얀 손을 보더니 고저 없는 음성으로 묻는다.

    “기다렸구나. 왜?”

    “서울은 어땠어요?”

    괜히 화끈거리는 마음과 얼굴을 들키기 싫어 곧장 화제를 돌렸다.

    “서울.”

    도시 이름을 입가에서 곱씹던 무경이 내내 쥐고 있던 캐리어를 손에서 조용히 놓았다.

    “서울은.”

    한 걸음, 두 걸음, 요원에게로 느리게 걸어오며 주머니를 뒤적인 남자가 멘톨 사탕 한 알을 꺼내 입안에 털어 넣는다.

    “서울은요.”

    그 걸음이 뚜벅뚜벅 조금 더 빨라지더니만.

    “서울은.”

    요원의 앞으로 다가오자마자 요원의 뺨을 양손으로 꽉 쥐고 제게로 훅 당겨.

    “아주 치열했지.”

    제 고개를 사선으로 비틀며 그대로 요원과 입술을 맞물렸다.

    “!”

    요원이 움찔거리며 그의 옷깃을 다급하게 붙잡는 통에 중심을 잃은 자전거가 옆으로 쿠당 세게 넘어갔다.

    앞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던 요원이 그의 캐리어를 건드려 콰당 넘어뜨리기도 했다.

    요원의 등은 무경의 집 철제문에 강하게 쿵 한번 찍히기도 했고.

    끼익, 쾅! 무경이 한 손을 뻗어 그 철제문을 열면서도 두 사람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으읍…….”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기세에 요원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것을, 무경의 팔이 요원의 허리를 순식간에 휘감아 다시 위로 끌어올렸다.

    계속해서 무경과 입술을 부딪치며 뒷걸음질 치던 요원을 막아선 곳은 바로, 대청마루였다.

    요원이 무경과 입술을 계속 맞댄 채로 대청마루 위에 몸을 앉혔고, 무경도 몸을 낮추면서 요원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쳤다.

    요원의 몸이 도미노 쓰러지듯 대청마루 위로 풀썩, 힘없이 넘어갔다.

    그제야, 떨어질 줄을 모르던 두 사람의 입술도 간신히 떨어져 나갔다.

    “하아…… 하…….”

    대청마루 위에 비단처럼 흩어진 여자의 머리칼, 불규칙한 호흡을 내쉬며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여자의 눈동자는 마치 별을 박아넣은 듯 너무 맑고 또 예뻐서, 무경의 잇새에선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비집고 흘렀다.

    입안에 작게 남아있는 멘톨 사탕을 혀로 몇 번 굴려보던 무경이 아래턱에 힘을 꽉, 주어 그 멘톨 사탕을 와그작 씹어 삼켰다.

    입안에 화한 기운은 번지는데 몽롱한 기분은 여전히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후우.”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올린 무경이 요원의 상기된 뺨을 양손으로 붙잡으며 그대로 다시 허리를 숙였다.

    빛 하나 없는 대청마루 위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를 다급하게 찾아 깊숙이 맞물렸다.

    야릇하게 얽힌 입술과는 달리, 그 어떠한 것도 오가지 않는 담백한 입맞춤이었다.

    “…….”

    비스듬하게 시선을 내리깐 무경은 요원의 분초로 변해가는 표정을 감상하듯 바라봤다.

    그와 입술을 맞대고 있는 요원은, 무경의 그 어떠한 곳도 잡지 않고 그저 대청마루 위를 손톱 끝으로 긁어내리며 두 눈만 꽉 감고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찡그린 얼굴, 뻣뻣하게 경직된 요원의 둥근 어깨, 아까보다 더 새하얘진 낯빛 등.

    무경은 사냥꾼, 요원은 그런 사냥꾼 앞에서 잔뜩 겁먹은 연약한 사냥감.

    거기에서 약간의 웃음이 터졌다.

    곧 잡아먹힐 듯한 두려움을 느끼는 여자의 표정 때문이 아니라.

    아빠, 엄마, 다녀오세요. 쪽! 유치원생들이나 할 법한 이 우스운 뽀뽀 때문도 아니라.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이 담백한 입맞춤 하나로도, 터질 듯 팽팽해져 버린 제 앞이 너무도 같잖고 우스워서.

    피식, 입술을 맞댄 채로 다시 한번 실소한 무경이 요원의 입술 사이를 혀로 살살 핥으며 그 안으로 혀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요원의 혀를 부드럽게 옭아맸으나, 아까보다 더 뻣뻣하게 굳어버린 요원은 그의 키스에 장단을 맞춰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혼자서만 안달이 난 사람처럼, 능수능란하게 요원의 혀를 빨았다가 당겼다가 놓았다가 다시 붙잡았다가.

    그런데도, 상대가 보여주는 반응은 고작, 대청마루 위를 손톱 끝으로 살살 긁는 것이 전부이니.

    나 키스 존나 잘하는데. 이 키스에도 반응을 안 해?

    어딘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한 무경이 눈썹을 콱, 찡그리며 요원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고는 후, 짜증이 밴 바람을 불어 앞머리를 흩날린 그가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눈 떠.”

    여전히 남자의 입안은 화했는데 그게 레몬 맛의 멘톨 사탕 때문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달콤한 여자의 입술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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