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6화 (16/116)
  • 16화. 한번 안고 나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무경이 한 박자 쉬고 물었다.

    “그거 혹시 일부러 그래요?”

    [뭘요?]

    “아니 자꾸, 안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하시니까 내가 아주 곤란해서.”

    [곤란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해요.]

    “아니 뭘 또 사과를 하고 그래. 사람 무안해지게.”

    [곤란하다고 하셔서요.]

    어휴. 착해 빠져선.

    한숨과 함께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툭 기댄 무경이 멀어지는 한강을 시야에 담으며 그녀를 나직이 불렀다.

    “채요원 순경.”

    [네.]

    “난 키스할 거야.”

    [네?]

    “난 채요원 순경 만나자마자 할 거라고.”

    요원이 꼴깍,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순진하기는.

    무경이 작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생각해보니까 백야는 사방이 논밭이잖아요. 비닐하우스도 많던데.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들어가서 할 수 있지 않나? 밤 되면 온통 암흑이잖아요. 밖에서 뭔 짓을 해도 아무도 못 보겠던데.”

    [하무경 씨. 그런 말은 좀…… 그래요.]

    “그럼 이왕 그런 김에 하나만 더.”

    당황하는 모습이 좋아서 이상하게 자꾸만 놀리고 싶어진다.

    “궁금한 게, 채요원 순경은 야외에서 하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자꾸만 짓궂어지고 싶다.

    [진짜 잡혀가고 싶으세요?]

    “키스해도 잡아가나?”

    그 순간부터 요원은 함묵했다.

    이 침묵은 긍정인가 아니면 불쾌함의 표시인가.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피로감이 온몸에 쫙 번지며 노곤해졌다.

    [언제…… 오시는데요?]

    뒤늦게 들려오는 여자의 떨리는 음성이 확연하게 전달되어 무경은 눈을 감은 채 또 웃었다.

    아니. 어이없는 웃음이 흘렀다.

    이러니까. 유혹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내가 자꾸만 안절부절못하게 되니까.

    “계획대로라면 다음 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을지는. 글쎄. 나도 잘.”

    [선생님. 죄송한데 저 지금 순찰 나가봐야 하거든요? 이만 끊을게요!]

    “이봐요, 채 순경. 이런 식으로 끊는 법이 세상에,”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전화는 미련 없이 뚝 끊겼다.

    핸드폰을 귓가에서 떼어낸 무경은 아직 통화 시간으로 번쩍거리는 액정을 검은 시선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한번 안고 나면, 식으려나.

    남자의 얼굴에 번져있던 미소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시끄러운 밤이었다.

    ***

    파견된 동녘 본사 직원들이 업무를 보는 은평점 아웃렛 맨 꼭대기 층은, 시베리아도 울고 갈 살얼음판이었다.

    보통은 담당들이 동녘 그룹 본사로 넘어오는 게 맞았으나, 하무경 상무가 직접 아웃렛을 방문했다.

    비상이며 긴장해야 한단 뜻이었다.

    일요일임에도, 회의 시간은 벌써 다섯 시간째를 넘어가고 있었고 하무경 상무가 던진 회의 논제는 아주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 딱 두 가지였다.

    1. 매출이 왜 3년간 바닥을 쳤나.

    2. 어떻게 다시 끌어올릴 것인가.

    처음엔 장황한 대답들이 나왔으나 회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직원들의 입에서 나오는 답변들도 함께 우스워졌다.

    장황한 답변을 들을 때도, 우스운 답변을 들을 때도, 무경은 한 자세와 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데구르르 굴리며 발언자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

    마음에 드는 것인지, 들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직원들은 계속해서 그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얼마 후, 무경이 볼펜을 손에서 내려두며 팔짱을 꼈다.

    후, 싸늘한 한숨을 뱉은 무경이 고개를 젖혀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자 직원들의 어깨는 더욱더 작게 움츠러들었다.

    “이러다간 하루 다 가게 생겼네요. 일요일인데. 얼른 댁으로 돌아가 가족분들과 식사도 하셔야 할 텐데.”

    무경이 갑자기 발밑에 내려두고 있던 커다란 택배 상자 하나를 들어 회의 테이블 위에 던졌다.

    직원들의 이목이 그 상자로 쏠린다.

    “오전에 집에서 나오는데 해외에서 택배 하나가 와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무경이 손을 뻗자, 그의 신호를 즉시 알아차린 직원 하나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커터칼을 찾아 그의 손에 정중하게 쥐여주었다.

    “별건 아니고. 해외직구를 좀 했는데요.”

    무경이 자리에서 돌연 일어나자 장승처럼 우뚝 솟은 커다란 남자를 온 직원들이 시선을 들어 주시했다.

    “해외에서 유명하단 아이템 위주로 구매해봤습니다. 내가 먼저 한번 써보려고.”

    칼날을 드르륵- 올린 무경이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상자 위의 테이프를 쭉, 능숙하게 일자로 갈랐다.

    “괜찮으면 우리 동녘에서 해당 브랜드를 취급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구매자를 위한 포장 상태도 볼 겸 겸사겸사.”

    커터칼을 탁, 테이블 위에 내던진 무경이 상자를 옆으로 잡아 뜯듯 벌렸다.

    그리고 그 안에 수북이 쌓인 완충재들에 눈썹을 찡그린다.

    “근데, 내가 직구를 할 때마다 문제점을 발견해요. 바로 이…….”

    상자의 한 부분을 잡아 비스듬히 세운 그가,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완충재들을 테이블 위에 대번에 쏟아버렸다.

    “과대포장입니다.”

    와르르르 쏟아지는 완충재들을 바라보는 직원들은 여전히 그의 말의 핵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얼굴이다.

    “봐요, 이거. 완충재를 걷어냈는데도, 이 에어캡.”

    그가 또 물건을 감싸고 있는 에어캡을 강하게 뜯어내서 테이블 위에 던진다.

    “이 에어캡을 걷어냈는데도, 이 상자. 이 상자를 열면 물건이 또 플라스틱에 싸여있어요.”

    말을 하면서 포장지를 다 뜯어낸 그가 혀를 끌끌 차면서 최종 물건을 테이블 정중앙 위에 보란 듯 탁, 세웠다.

    짧은 시간 내에 테이블 위에 쌓인 쓰레기들을 직원들은 별 감흥 없이 바라봤다.

    “자.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잘 따라오고 있습니까?”

    양손으로 테이블 위를 짚으며 허리를 낮춘 무경이 직원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정면에서 맞추며 다시 한번 물었다.

    “잘 따라오고 있어요?”

    “예, 상무님.”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그 물음에 직원들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고, 무경은 왠지 피로한 얼굴로 더는 말을 돌리지 않고 진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기본 물건이 좋으면 이딴 화려한 껍데기는 다 필요 없다는 겁니다. 기본만 지키면 다른 건 다 필요 없다고. 무슨 말인지 진짜 알겠어?”

    재확인차 눈썹을 한번 들었다 내리는 소소한 행동만으로도 상대를 휘어잡는 포스가 실로 엄청나다 느꼈다.

    “내가 이 다섯 시간 동안 여러분들에게서 듣고 싶고 바라던 답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기본으로 돌아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유를 품었던 나른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서늘해져 직원들의 숨통을 조이듯 꽉, 단숨에 옥죄어버린다.

    “그런데 왜 그 가장 쉬운 말이 안 나와.”

    직원들이 자세와 표정을 금세 바꾸었다.

    “여러분.”

    왜 동녘 그룹에서 그를 ‘검은 재규어’라 부르는지 한숨에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기본을 지키세요.”

    하무경 상무는, 다른 색의 지배를 받지 않는 우세한 검은색이니까.

    ***

    은평점에서의 회의를 마치고 무경을 태운 세단이 다시 동녘 본사로 향하던 시간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이마를 괸 채 눈을 감고 있던 무경이 진동 소리에 눈을 떠 액정을 확인했다.

    액정에 뜨는 태호의 이름에 피로한 눈가를 쓸며 핸드폰을 귓가에 바짝 밀착시켰다.

    “네, 실장님.”

    [상무님. 마라톤 회의한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막내 생일은요. 잘 챙겨주셨어요?”

    [상무님 덕분에 잘 챙겨줬습니다.]

    “덕분은 무슨.”

    [선물 보내주셨잖습니까. 레스토랑도 잡아주시고. 매년 감사합니다, 상무님.]

    “아아. 그만. 용건만 하세요.”

    생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무경이 낮게 혀를 찼다.

    그를 잘 아는 태호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부사장실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린 무경이 찌푸린 얼굴로 귀를 파는 시늉을 했다.

    [상무님께서 맡고 계신 프로젝트 및 사업계획서를 모두 다 검토해보겠다고 자료 올리라고 합니다.]

    “올리세요.”

    넥타이 매듭을 느릿하게 풀어헤친 무경이 간결하게 지시했다.

    [하지만, 상무님.]

    “드리세요. 뭐 걸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아니지만…….]

    “줘요. 달라는 대로 다.”

    [흠집 내기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연례행사 아닙니까.”

    세단에 보관해둔 ‘더맥칼랜 1926’을 꺼내든 무경이 잔을 찾아 양주를 따르며 웃었다.

    “그래서 그분이 내게 생채기 하나라도 낼 수 있었습니까? 아니잖아.”

    룸미러를 통해 무경을 바라보는 방 기사의 눈동자에 걱정이 한가득 서렸다.

    제가 알기로 무경은 오늘 빈속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알아보란 건 어떻게 됐습니까.”

    무경은 고개를 틀어 창밖을 바라보며 쓰디쓴 양주 한 잔을 금세 다 비웠다.

    [상무님 예상이 맞았습니다. 하 부사장이 상무님의 혼사 얘기를 나누는 쪽은 모두 정계입니다.]

    목에 이어 빈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에 무경이 제 배를 어루만지며 코웃음 쳤다.

    이런 식으로 손발을 묶으려는 것이다.

    어차피 정계는 재계와는 달리 정권이 바뀌면 힘 떨어지는 건 순간이니까.

    라주연 상무 말마따나 기업체는 기업체랑 묶이는 쪽이 몸집을 불리고 힘을 키우는 데 제일이다.

    하태경은 내가, 많이 무섭구나.

    빈 잔에 양주를 조금 더 따른 무경이 그 잔을 입에 물고 피식 웃으면서 방 기사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방 기사님. 우리 행선지 좀 바꿀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