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5화 (15/116)
  • 15화. 마치, 변 사또와 춘향이

    무경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거린 정나경이 칵테일 잔을 입에 물며 시선을 피하는데, 그 모습에 무경은 담배를 빨며 웃음을 흘렸다.

    사모에 갓끈이라. 격에 어울리지 않는 걸 하고 있네.

    “어우, 예쁜 척. 가식. 미국에서 굴러먹다 올 만큼 온 년이 순진한 척하기는.”

    무경과 마음이 통했던지 주연도 턱을 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 혼사 얘기를 나누는 쪽은 누구. 우리 아버지? 하태경 부사장?”

    재떨이 위에 재를 터는 무경의 손짓에 옅은 짜증이 배어있었다.

    “누구겠어요. 하태경이지.”

    꼰 다리를 까딱까딱하는 주연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 상무 자기, 회장님 가시기 전에 빨리 동녘 차지해야겠더라? 하태경은 회장님 가시기만을 기다리는 눈치던데? 하긴. 따지고 보면 하태경이가 자기 아버지뻘 아니야? 그동안은 회장님 눈치 본다고 자기한테 함부로 못 했던 거지. 회장님 가셔봐. 얼마나 우리 자기를 제 손에서 멋대로 주무르려 들까? 벌써 봐봐. 혼사 얘기도 회장님 건너뛰고 하는 거.”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기 무섭게 무경은 다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라 상무.”

    “응?”

    “그래도 명색이 동녘 부사장인데 하태경 하태경, 같은 동녘 사람으로서 듣기 좀 그렇네, 내가. 편하게는 하되 도리는 지켜요.”

    그의 눈빛이 변한 것을 알아차린 주연이 꼬고 있던 다리를 냉큼 풀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미안해요, 하 상무. 그 부분은 내가 실수했어.”

    이래서 무경은 주연이 좋았다.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정과 사과가 빠르니 이 얼마나 멋진가.

    “라 상무.”

    “응?”

    “신아는 당신이 먹게 될 거야. 내가 장담하지.”

    “난 신아 말고 다른 거 한번 먹어봤으면 좋겠네?”

    이 또라이가 진짜.

    주연의 농담 같은 진담에 담배를 입에 문 채로 혀를 츳 하고 찬 무경이 라이터를 위로 탕, 튕겨 불을 붙였다.

    “어머. 정나경 이리로 온다. 그럼 두 사람, 얘기 나눠?”

    테이블 위를 콩콩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주연이 나경을 보며 “꺄! 나경 씨! 나 나경 씨 독주회 너무 잘 봤잖아!” 갑자기 친한 척 굴며 서로를 포옹했다.

    지랄. 조금 전까지 굴러먹다 올 만큼 온 년이랄 땐 언제고.

    “하무경 씨, 안녕하세요. 정나경이에요.”

    정나경이 조금 전 주연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무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실물론 처음 봬요. 사진으론 몇 번 뵈었는데.”

    무경이 대답 없이 테이블 위에 라이터를 던졌다.

    “실물이 훨씬 더 잘생기셨어요. 이런 말 많이 들어 지겨우시죠?”

    고개를 뒤로 젖힌 무경이 천장을 향해 후- 연기를 길게 뱉으며 대답했다.

    “욕보다는 낫죠.”

    “저도 오늘부로 대한 클럽 멤버예요. 반가워요.”

    “그러시구나.”

    건성으로 일관하며 담배를 태우는 무경을 눈여겨보던 정나경이 수줍은 듯 웃으며 제 머리칼을 귀 뒤로 다시금 꽂았다.

    “…….”

    두 팔을 소파 헤드 위에 걸친 무경이 그런 여자를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치면 연기를 흘리며 형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풍성하고 결 좋은 머리칼이 그녀의 가슴께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데, 무경은 담배를 빨면서 다른 여자의 머리칼을 떠올렸다.

    조금 더 자유분방했던 히피펌을.

    제 가슴께에 머물러 있는 무경의 시선을 착각한 정나경이 부끄러운 척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구두코가 무경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무경에게서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다리를 또 반대쪽으로 꼬다가 툭 건드리고.

    “어머. 죄송합니다.”

    정나경이 제 앞에서 상체를 굽혀 사과한다.

    가슴팍이 깊게 파인 블랙 원피스를 입고 가슴골이 훤히 다 드러나도록.

    누가 보아도 고의적이며 계산된 행동이다.

    여자가 대놓고 드러내는 유혹의 시그널을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다.

    그런데 이게 참 웃긴 거다.

    보란 듯 유혹하는 저런 자극적인 행동엔 전혀 반응이 오질 않고.

    순수한 얼굴로 손금을 봐준다고 제 손을 조심스레 만져보던 그 행동에.

    제 아랫입술을 지분거리던 여자의 그 소극적인 손짓에.

    욕망으로 달아올랐던 남자의 한 곳에 닿지 않기 위해, 무릎으로 대청마루 위를 있는 힘껏 찍어눌러 버티던 여자의 그 비장한 몸짓에.

    유혹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런 어설픈 행동들에 제 몸이 즉각 반응을 보였으니.

    지금 와 다시 생각해보니, 대청마루 위에서 보았던 여자의 그 결의에 가득 찬 눈빛은 마치, 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는 춘향이를 떠올리게 했었지.

    비유가 적절할진 몰라도.

    이거 존나 골 아프게 됐네.

    무경이 연기를 뱉으며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번 안고 나면 식으려나.

    담배가 걸린 손으로 저의 찡그려진 눈썹을 긁어 올리던 무경이 짙은 한숨과 함께 담배를 재떨이 위에 대충 비벼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나경 씨.”

    “네?”

    이름을 부르자 정나경이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저를 올려다본다.

    거절 한번 당해본 적 없던 여자의 삶이 무경의 눈에 쉽게 다 읽혔다.

    “내가 원래 궁금한 걸 잘 못 참는 성격이라.”

    무경은 풀어헤치고 있던 슈트 베스트의 단추를 정갈하게 잠그며 담백한 어조로 물었다.

    “방금 전에 일부러 그랬죠.”

    “네?”

    “일부러 그러신 것 같은데?”

    “제가 뭘 일부러…….”

    무경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정나경이 어딘지 모르게 위선적이라 생각했다.

    “아. 진짜 모르시는구나.”

    그런 말을 읊조리며 정나경을 몇 초간 고요한 눈동자로 내려다보던 무경이, 제 두 손으로 테이블 위를 턱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헉.”

    급격하게 좁혀진 거리에 정나경이 불시에 눈을 크게 떴다.

    “정나경 씨. 그럼 내가 알려드릴 테니 잘 들으세요.”

    무경은 마치 애프터 신청을 하는 사람처럼 매력적으로 웃으며 뇌까렸다.

    “그거 되게 후져요. 하나도 안 꼴린다고.”

    정나경의 입술이 작게 떨어짐과 동시에 무경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정나경에게 신사적으로 묵례하며 말했다.

    “그럼, 즐겁게 놀다 가시기를.”

    킥, 장난스레 웃은 남자가 라운지 바를 태연자약하게 빠져나간다.

    ***

    밤의 서울은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었다.

    무경이 탄 고급 세단은 한강대교를 속도감 있게 내달렸다.

    무경이 앉아있는 이그제큐티브 시트는, 꼭 항공기의 퍼스트 클래스를 떠올리게 했다.

    레그룸에 두 발을 올리고 창밖을 스치는 한강을 고요하게 바라보던 무경이 잠시 피로한 눈꺼풀을 닫았다.

    귓전에 찌르르르, 찌르르르, 찌르르르, 백야마을에서 밤마다 들었던 풀벌레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서울과 백야.

    같은 대한민국이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생활 환경도, 주변에 머무르는 사람들마저도.

    서울은 화려하지만 혼탁하고.

    백야는 소박하지만 맑다.

    모든 것들이 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달라서, 백야에 있던 그 며칠이 악몽이었나 생각해봤다.

    아니. 진짜 악몽은 어느 쪽일까.

    “…….”

    이마를 괴고 있던 손을 느릿하게 치워낸 무경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요원입니다.]

    여자의 깨끗하고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경은 몇 초간 말 대신 제 입가를 어루만질 뿐이었다.

    [여보세요? 하무경 씨?]

    여자가 제 이름 석 자를 불렀을 때, 그제야 무경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 잤어요?”

    [전화해놓고 안 잤냐고 묻는 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자는 것 같으면 전화를 안 하면 될 텐데.]

    또 이렇게 한 방 후려치시고.

    계속 제 아랫입술을 의미 없이 문지르던 무경이 딱히 할 말이 없어 픽 짧게 웃었다.

    “안 잤으면 안 잔 거지. 전화한 사람 민망하게 그래요.”

    이번엔 요원이 반대편에서 웃는다.

    [안 잤어요. 아직 근무 중이거든요.]

    무경이 제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했다.

    “이 시간에?”

    [저희는 교대 근무니까요.]

    “아. 교대 근무.”

    [면접은요? 잘 보셨어요?]

    “대차게 말아먹었죠.”

    [아…….]

    “아, 라니. 좋잖아요?”

    [네?]

    “채 순경도 좋잖아. 나 합격해서 서울 올라오는 거 채요원 순경도 싫어했잖아요.”

    [제가 언제…….]

    “이제 와 발 빼지 마. 나 일부러 말아먹은 거니까.”

    요원에게선 잠시 들려오는 말이 없었다.

    무경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요원의 표정과 행동이 어쩐지 눈앞에서 생생히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알고 지낸 지 이제 고작 며칠일 뿐임에도, 요원을 아주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처럼 말이다.

    채요원이란 사람이 단순한 것인지. 내가 관찰력이 뛰어난 것인지.

    “그나저나…….”

    괜스레 가슴 한구석이 갑갑해진 무경이 넥타이를 가슴께로 천천히 끌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생각은 해보고 있어요?”

    [뭘요?]

    “또 이러시네. 다 알면서.”

    [정말 몰라서 그래요.]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사람 부끄럽게?”

    무경이 능청스레 웃으며 뒷좌석의 창문을 내렸다.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훅 하고 차내를 덮쳤다.

    “키스 말이야.”

    바람 소리에 묻힌 무경의 음성은 방 기사에게까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요원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안 봐도 뻔하지.

    또 사슴 같은 눈망울을 떨면서 얼굴을 붉히고 있을 것이 뻔하다.

    어떻게든 해버리고 싶게.

    요원에게서 한참 동안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무경이 머리를 한번 쓸어올리며 장난스러운 어조를 뽐냈다.

    “근데 내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나 순경한테 자꾸 이런 말 해도 되나? 나 나중에 잡아갈 건 아니죠?”

    [순경도…… 사람이에요.]

    “내가 언제 순경이 괴물이라고 했어요?”

    [그런 뜻이 아니라요.]

    “아니면?”

    [순경도…….]

    한 박자 쉰 요원이 얼버무리듯 뒷말을 흐렸다.

    [욕구가…… 있다고요.]

    그 말을 똑똑하게 알아들은 무경은 찡그려진 눈썹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날카롭게 웃었다.

    춘향이와 어떻게든 한번 자고 싶어 그녀에게 집착하던 변 사또의 삐뚤어진 마음을, 이제 조금 알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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