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5화 (5/116)
  • 5화. 유감입니다, 유감이네요, 유감이에요

    한 손으로 철제문을 붙잡고 다른 손엔 맥주캔을 비스듬히 쥐고 있는 남자.

    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잊었을 리 없다.

    “그때 그…… 하천?”

    그날은 분명 새벽이었고 아주 잠시 스쳤을 뿐인데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았음에도 불구, 저 분위기는 집에 가서도 쉬이 잊히지 않는 그 무엇이었으니.

    “순경님을 여기에서 또 뵙네요.”

    귀신이라도 본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요원과는 달리, 그녀와 재회한 남자의 반응은 한없이도 태연자약했다.

    “이사 오셨다는 분이…… 선생님이셨어요?”

    “뭐. 그런 것 같네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던 요원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그때 제게 백야마을의 가구 수를 여쭤보셨던 거군요?”

    “이야기가 또 그렇게 되나?”

    맥주캔을 입가로 가져가며 작게 웃은 무경이 눈을 비스듬히 내리깔아 요원을 제 검은 시야에 담았다.

    “그나저나 진심으로 반갑네, 순경님.”

    그렇게 말하며 맥주 몇 모금을 더 삼키니 그의 남성적인 목울대가 힘차게 울렁였다.

    자신은 없는 그 목울대를 잠시 신기한 것 보듯 바라보던 요원 역시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선생님을 다시 뵈니 무척이나 반갑네요.”

    “하무경입니다.”

    “저는 채,”

    “기억해요. 요원. 채요원. 채요원 순경.”

    그의 뛰어난 기억력에 잠시 감탄하면서 요원은 다시 상냥하게 웃었다.

    “백야마을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앞으로 거주하시면서 불편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 채요원 순경을 찾아주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가늘고 긴 목선.

    사슴. 그녀는 사슴을 닮았다.

    “그럼. 쉬세요?”

    정중하게 묵례한 요원이 다시 자전거 위에 올라타려던 순간.

    “순경님.”

    남자의 부드러운 듯 단호함을 지닌 근사한 음성이 요원의 목덜미를 잡아채듯 순식간에 붙잡았다.

    “식사는 하셨어요?”

    “식사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요원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 무경이 집 안을 가볍게 턱짓했다.

    “아직이면 들어와요. 혼자 먹기엔 양이 좀 많아서.”

    “예? 아닙니다. 저는,”

    “나에 대해 파악하셔야지?”

    끼이이이이익- 녹슨 문이 조금 더 뒤로 젖혀졌다가.

    “내가 백야의 아홉 번째 주민인데.”

    두 사람의 경계가 허물어지듯 그렇게 쿵- 문이 완전히 열렸다.

    ***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자전거를 끌고 철제문을 넘어선 요원은 자전거를 마당 한편에 세워두며 집 안을 휘- 둘러봤다.

    백야마을에서도 유독 낡고 허름한 집.

    왠지 저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 느껴지는 곳이라는 생각을 차마 떨칠 수가 없다.

    쿠당탕!

    그런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집 안에서 나온 남자가 대청마루 위에 양은 밥상을 내려둔다.

    아니, 저 정도면 거의 집어던진 거나 진배없다.

    무언가 불만이 한가득한 남자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고 곧 쇼핑백을 들고 나와 그 안에서 도시락을 꺼내 밥상 위에 내려둔다.

    밥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 포장 용기의 도시락이 눈길을 사로잡았고 쇼핑백에도 유명 호텔 이름이 쓰여 있는 것 같다.

    “와서 드세요, 순경님.”

    대청마루 위에 털썩 앉은 그가 요원을 향해 고갯짓한다.

    “저, 그런데 선생님. 식사는 정말 괜찮습니다. 물 한 잔만 주시면 되는데요.”

    “식사하셨어요?”

    “네.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원한 물 한 잔만 주시면 돼요.”

    요원이, 대청마루 위 무경에게로 다가서며 상냥한 빛으로 웃었다.

    그 얼굴을 가만 바라보던 무경이 갑자기 제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며 에이, 라는 소리를 낸다.

    “안 드셔놓고.”

    “아뇨. 저 진짜 먹었는데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요.”

    “드셨어도 또 드세요. 많이 좀 드셔야겠는데.”

    “예?”

    “오늘 못 먹으면 어차피 다 버려질 거라. 아깝잖아요?”

    무경은 손이 심심한지 라이터를 탕, 탕, 탕, 이유 없이 튕기면서 대청마루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니 드세요. 조금이라도. 한 숟가락이라도.”

    요원과 눈을 맞추며 대청마루 위를 까딱- 고갯짓한 무경이 그녀와는 아주 멀리, 그래 봤자 그렇게 멀리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연기가 닿지 않을 곳으로 발길을 성큼성큼 옮겼다.

    오늘 밤은 유독, 담배가 말렸기 때문에.

    “…….”

    담벼락에 느른하게 등을 기대선 무경이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무경의 시선은, 대청마루 쪽의 요원에게서 떠나질 못했다.

    한참을 머뭇대던 그녀가 무경을 힐끗 쳐다본다.

    무경은 눈썹을 가볍게 들었다 내리며 웃었다. 괜찮다고 상대를 안심시키듯이.

    그제야, 요원도 어색한 낯빛으로 웃으며 대청마루 위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도시락 용기를 열어본 요원의 눈이 일순 커다랗게 벌어졌다.

    버터구이 랍스터에, 전복구이에, 싱싱한 연어에, 장어에, 성게 알에, 문어에, 반건시 곶감 등.

    보통 도시락이 아님을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물적으로 판단해선 안 되지만, 세련된 자태에 그렇지 못한 집, 싸구려 양은 밥상 위에 그렇지 못한 도시락.

    순경이 가진 직감인가?

    요원은 순간적으로 그를 수상쩍게 여기며 다시금 그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

    낮은 담벼락에 삐딱하게 기대선 남자는 한 번에 다 훑을 수 없을 정도의 장신이었는데,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담배를 빨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 적나라한 검은 시선에, 요원은 생전 처음으로 맹수 앞의 먹잇감 같은 무력함을 느끼며 먼저 시선을 피했다.

    “왜 안 드세요.”

    별로 태우지도 않은 것 같은 담배꽁초를 바닥 위로 툭툭 털어 던진 남자가 어느덧 저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었다.

    “그거 맛있는 건데.”

    대청마루 위에 대충 엉덩이를 걸터앉은 무경이 물티슈를 뜯어 손을 깨끗하게 닦은 뒤, 새 나무젓가락도 뜯었다.

    “이것 좀 드셔보세요. 좋은 건데.”

    전복구이 하나를 집은 그가, 요원이 아직 손도 대지 않은 밥 위에 그것을 내려두었다.

    “아. 감사합니다.”

    이상하게도 그의 친절이 부담스럽게 여겨졌고, 그런 요원을 알아차렸는지 남자가 설핏 웃는 소리가 들린다.

    “채 순경님은 이곳에서 얼마나 거주하셨어요.”

    남자가 능숙하게 랍스터 살을 바르며 물었다.

    “저는 20년이요.”

    “그렇게 오래. 토박이시네.”

    “그런 셈이죠.”

    “그럼 순경님은 마을 사람들에 대해 아주 잘 아시겠다.”

    “아무래도요.”

    “굴러들어온 복덩이네.”

    “예?”

    “랍스터 안 좋아하시냐고.”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두툼한 랍스터 순살을 다 바른 무경이 그것을 요원의 밥 위에 또다시 올려두고 있었다.

    “제가 먹을게요. 괜찮습니다.”

    요원이 정중하게 사양했고 무경은 요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계속 싱그럽게 웃었다.

    “우리 순경님은 내가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다.”

    상대의 머릿속을 훤히 다 꿰고 있는 듯한 불쾌한 기분을 남자에게서 처음 받았다. 그것도, 독심술을 하는 사람처럼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이다.

    “편한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 전 선생님을 이제 겨우 두 번 뵈었는데요.”

    요원의 대답에 남자의 얼굴에 찬 기운이 잠시 서렸다가 사라졌다.

    그러다가 음, 하며 제 아래턱을 어루만지던 무경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 또 웃는다.

    “듣고 보니 순경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네요. 내가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난 단지 순경님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저랑 왜요?”

    ‘친절한 순경’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자신답지 않게, 요원은 의지와는 달리 무경을 한껏 경계하고 있었다.

    “왜?”

    되물으며 성게 알을 요원의 밥 위에 또 올린 무경이 요원과 시선을 맞추며 친절하게 웃는다.

    “이유가 있나요. 젊은 피끼리 잘 지내보잔 거지.”

    수상할 정도로 과한 친절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태도가 아니라, 몹시 포장되고 꾸며진 느낌을 차마 떨칠 수가 없다.

    어디 그뿐이랴.

    “순경님은 혼자 사시나?”

    대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닌, 어딘지 모르게 캐내는 느낌이다. 취조하듯이.

    “아니요. 저는 아버지랑 할머니랑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작게 벌린 입안으로 향하던 요원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일순 멈칫했다.

    “어머니요?”

    “네. 어머니요.”

    “저희 어머니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까는 여자의 처연한 표정을 바라보던 무경의 한쪽 눈썹이 위로 비딱하게 치솟았다.

    “미안해요.”

    남자가 깔끔하게 사과하며 젓가락을 밥상 위에 내려두었다.

    “대답 안 해도 돼요. 내가 본의 아니게 실례를.”

    “아니요. 아닙니다.”

    손사래 치는 요원을 가만 바라보던 무경이 두 팔을 뒤로하며 대청마루 위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틀어 정면을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어머니가 서울분이라고 했었나요?”

    흠칫 놀란 요원이 그의 옆태를 바라봤다.

    “어릴 때 내려왔다고 했었죠? 이 백야마을에.”

    내가 얘기한 적이 있던가? 있었더라면 하천에서 흘리듯 얘기한 게 전부일 텐데.

    아까부터 느꼈지만, 기억력이 보통이 아닌 남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남자.

    하천에서도 느꼈지만, 유명 배우조차 기죽일 외모를 지녔다.

    남성적인 분위기를 뒤로하고 보면 참 고운 남자란 생각도 했다. 화려하다. 살짝 찡그리는 저 표정도.

    제 머리칼 안쪽에 찔러넣는 저 매끄러운 손가락조차도 어딘지 모르게 있어 보이는 남자.

    뜯어보면 볼수록, 이 시골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

    “어머니와의 추억이 참 많겠네.”

    요원의 생각을 또 한 번 방해하듯 남자가 그렇게 작게 읊조렸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와 남자의 목소리가 오묘하게 잘 어우러지는 밤이란 생각이 들었다.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둔 요원 역시 남자에게 질기게도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거두며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많이…… 좋아하셨어요.”

    낮은 담벼락 너머의 저 어둑한 백야마을의 풍경을.

    “어머니가 정말 많이 좋아하셨어요. 이 백야마을을.”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유감입니다.”

    아까와는 느낌이 확연히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요원의 귓전에 부드럽게 스며들었고.

    “유감이네요.”

    남자의 그 말만큼은 적어도 진심으로 느껴졌다.

    “유감이에요, 채요원 순경.”

    무엇이 그렇게까지 유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