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장. 회임
다른 때와 다름이 없었다.
황후의 옷을 대신 입은 연우는 오늘도 얼굴에 너울을 드리우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앉아 황제를 기다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자신의 안에서 일어난 변화는 연우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어떡하지…….’
연우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몸의 변화였다.
달거리가 끊어졌다.
벌써 열흘 전에 시작되었어야 할 달거리가 지금은 없다.
지금까지 연우는 한 번도 달거리를 건너뛴 적이 없다.
항상 날짜는 규칙적이었고 달리 이상이 있었던 적은 없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달거리가 끊어지고 어제부터 속이 메스껍다.
연우도 바보는 아니다.
사내의 정을 받으면 여인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 그런 것 정도는 안다.
그리고 회임한 여인의 징후도 알고 있다.
연우에게는 동생들이 많다.
어머니가 동생들을 가졌을 때 입덧하던 것을 연우는 기억하고 있다.
달거리가 끊어지고 음식을 보면 속이 메스껍고 헛구역질을 하고, 이건 틀림없는 회임의 증상들이다.
다만 진맥을 받아 보지 못했으니 확실한 것은 아니다.
‘만약 정말 회임이라면 어떡하지…….’
지금 연우는 보통 불안한 것이 아니다.
너무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다.
‘회임은 안 돼…….’
자신이 정말 황후였다면,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후 진홍이었다면, 아마 회임한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가짜 황후이고 자신이 입은 것은 대리 승은이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은 진짜가 아니다. 그저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
시간이 되면 사라지는 허깨비다.
만약 정말 자신이 회임한 것이라면 자신에게 찾아온 이 아이가 불쌍할 따름이다.
‘아닐 거야……. 정말 아닐 거야…….’
지금 연우가 붙잡을 수 있는 건 자신의 몸에 일어나고 있는 현저한 증상들을 부인하는 것뿐이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정 상궁의 목소리에 연우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너울 너머에서 침전 안으로 들어서는 황제 욱연의 모습이 보였다.
이 너울을 사이에 두고 황제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은 지 벌써 한 달째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마다 황후는 이 벽 너머의 방에서 황제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린다.
가끔 황후의 심정을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황후가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사정으로 황후의 자리를 자신이 대신하고 있다.
만약 황제가 싫어서가 아니라 불가피한 이유로 자신을 대신 내세운 거라면, 지아비에게 다른 여인이 안기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황후의 심정은 얼마나 처참할까.
그런 황후를 생각해서 연우는 황제에게 안길 때마다 항상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써 꾹 참았지만 결국에는 음란한 교성을 지르고 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는 혼자서 얼마나 후회하는지 모른다.
“어째 손목이 조금 마른 것 같군.”
연우의 앞에 앉은 황제가 그녀의 손목을 쥐고 중얼거렸다.
“왜 살이 빠지는 것이지?”
갑작스런 황제의 물음에 연우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황제와 ‘대화’를 한 적은 없다.
절대로 대답하지 말라고 정 상궁이 위협 어린 목소리로 강조했었기 때문이다.
“벙어리도 아닌 것이 어찌하여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냐. 나만 보면 멀쩡하던 혀가 달라붙어 버리기라도 한다는 것이냐?”
황제가 잡았던 손목을 놓고 그녀의 너울에 손을 올렸다.
‘안 돼……!’
금방이라도 너울을 벗길 것처럼 손을 대는 황제 때문에 놀란 연우가 얼른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싫으냐?”
어쩐지 황제의 목소리가 실망한 것처럼 들렸다.
“이제 슬슬 얼굴을 보고 싶은데 대체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한 달이다.
황제의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극진하게 사랑하는 황후의 얼굴을 한 달째 보지 못하고 목소리도 듣지 못하는 황제의 심정은 얼마나 아플까.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어떤 이유도 말해 주지 않으니 황제의 속은 타들어 갈 것이다.
황제의 심정도, 황후의 심정도 전부 잘 알아서 연우는 더 마음이 답답했다.
“나는 이제 더는 기다리기가 싫구나. 내 인내심이 바닥이 나는 날에 나는 더 이상 참지 않을 생각이다. 어쩌면 내일이라도 당장 말이다.”
연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는 더는 다른 핑계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얼굴에 뭐가 났든, 몸이 어떻든 간에 나는 더는 참지 않을 거다. 그러니 내일 다시 나를 맞이할 때는 이 보기 싫은 너울을 벗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내 손으로 이 너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테니까. 나는 딱 오늘까지만 너를 위해 내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할 생각이니 말이다.”
황제 욱연의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저를 놀리는 것도 아니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도 아니다.
너무 진지해서 무서울 정도였다.
“너울을 걷고 입을 맞추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니, 너는 부디 내 마음을 이해해 주면 좋겠구나.”
조금 전까지 너무 무서웠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다정해졌다.
그만큼 이 사내는 황후에게 진심이라는 뜻이리라.
너무나도 애절하게 황후를 염려하고 사랑하면서도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바보다.
“가만히 있더라. 뒤로 물러나지 말고.”
황제의 얼굴이 너울에 점점 가까워졌다.
숨결이 너울을 통과해서 제 콧날에 닿는 순간 연우의 심장이 덜컥 멎었다.
너울 너머에서 황제가 그녀에게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지금 입술이…….’
너울이 가로막고 있긴 하지만 뜨겁고 촉촉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꾹 눌러 왔다.
‘어쩌면 좋아…….’
잠시 멈췄던 심장이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황제는 겹친 입술을 떼지 않았다.
너울이 연우의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혀가…… 들어왔어…….’
너울만 입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너울은 그저 혀에 떠밀려 안으로 들어온 것뿐이다.
너울과 함께 밀려 들어온 혀가 그녀의 입 안을 천천히 더듬었다.
그리고 황제의 두 손이 너울과 함께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연우의 작은 머리를 커다란 두 손으로 감싸고 황제가 집요하고 뜨겁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의 무게에 눌린 연우의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입술을 뗀 황제가 낮고 조용한 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너를 얼마나 은애하는지 너는 모를 거다. 또 얼마나 네게 미안해하는지도…….”
연우는 그 말을 자세히 듣지 못했다.
이미 그 뜨거운 입맞춤으로 머릿속이 달아올라 다른 것에 귀를 기울일 여력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입술의 열기에 취해 있는 사이에 제 몸에서 옷이 벗겨지는 것도 몰랐다.
“하읏……!”
제 입술을 뜨겁게 달궜던 황제의 입술이 제 젖가슴을 삼키는 순간 비로소 정신을 차렸지만, 그때는 이미 황제도 옷을 벗은 후였다.
황제의 뜨거운 살결이 제 살결을 짓눌러 오자 연우가 허리를 휘었다.
꿈틀거리는 단단한 것이 그녀의 살결 위를 문질러 댔다.
크고 두툼한 손이 그녀의 얇은 허리와 등을 어루만졌다.
황제의 크고 넉넉한 품 안에 안겨 연우가 눈을 감았다.
그 손이 닿았다 떨어지는 곳마다 열꽃이 피어올랐다 옆으로 번졌다.
목덜미와 젖무덤에 번지는 숨결, 거친 사내의 숨소리, 저와 비슷하게 뛰는 심장의 박동 그리고 너울 너머로 비치는 저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
그 모든 것을 느끼며 연우는 깨달았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애써 부인하고 있던 것을 끝내 깨달아 버렸다.
자신이 이 사내를, 감히 욕심낼 수 없는 이 사내 황제 욱연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슬프게도 자신은 이 사내를 사랑하고 있다.
황후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는 이 사내를.
깨닫는 순간 밀려 올라오는 서글픔을 감당할 수 없어서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우가 입을 벌려 소리를 질렀다.
“아……!”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였다.
울어 버리면 황제는 내일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제 너울을 벗기고 우는 이유를 물을 것이다.
그래서 울지 않기 위해서 연우가 소리를 질렀다.
지금 지르고 있는 소리에 약간의 울음이 섞여도 황제는 자신이 희열을 이기지 못하고 울고 있다고 여길 것이 분명하다.
“하윽! 아! 아아!”
저를 꽉 끌어안고 있는 황제의 등에 손을 걸며 연우가 매달렸다.
그녀의 몸이 황제의 아래에서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 * *
“어째서……!”
진홍이 화가 잔뜩 나서 소리를 질렀다.
“왜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것이지?! 폐하께서 더는 기다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단 말이다! 더는 하루도 폐하를 속일 수가 없는데 이를 어찌하란 말이냐!”
가랑이에 새겨 놓은 점의 딱지가 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홍은 한 달 전에 가랑이에 침으로 살점을 뚫어 상처를 내고 그 위에 먹물을 씌워 작은 점 세 개를 만들어 냈다.
그 세답방 나인의 가랑이에 있는 점과 똑같은 위치였다.
그런데 스무날이면 떨어질 거라던 상처의 딱지가 한 달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 거의 다 아물었습니다, 마마.”
정 상궁이 진홍의 가랑이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보세요, 마마. 이제 오늘 저녁이면 딱지가 떨어질 겁니다. 거의 다 떨어져서 이제는 달랑달랑거리는 걸요. 오늘 밤에는 폐하를 모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시옵소서.”
“정말, 그럴까?”
정 상궁의 말에 그제야 진홍이 조금 누그러졌다.
“폐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벌써 한 달이 더 지났단 말이다. 얼굴에 화기가 가라앉지 않아서 너울을 쓰고 있다는 핑계를 대는 것도 이제는 민망스러울 정도다. 게다가 내가 왜 매일 밤 그 천한 것의 교성을 듣고 있어야 한단 말이냐.”
황제는 초야 이후 매일 밤 모란궁을 찾아오고 있다.
그건 진홍도 예상 못 했던 일이다.
황제가 누군가.
태자 시절부터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기로 소문이 난 사내가 아닌가.
그래서 태자비도 들이지 않았고 황제가 되고 나서도 후궁 한 명 들이지 않은 사내다.
목석이라고 소문까지 난 사내인데 무슨 심정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 초야 이후로 정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모란궁을 찾아온다.
다만 그 황제를 맞이해서 합방을 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천한 나인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황제가 찾아오는 밤이면 진홍은 천한 나인 따위에게 제 침전을 내어 주고 그 바로 옆 방에서 황제가 돌아갈 때까지 숨죽여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만 한다.
황제의 다정한 속삭임이나 그 나인의 자지러지는 교성, 뜨거운 숨소리까지 전부 그 얇은 벽을 통해서 들어오는 바람에 진홍은 제 허벅지를 꽉 쥐고 있어야만 했다.
교접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어 가랑이 사이가 젖을 정도인데 황제에게 직접 안기면 얼마나 황홀할까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지만, 가랑이의 점이 아물 때까지는 병풍 안의 떡이다.
제가 받아야 하는 것을 대신 받고 있는 저 나인을 찢어 죽이고 싶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그것도 오늘이 끝이다.
어제 황제는 더는 참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오늘 밤에는 너울을 벗고 자신이 직접 황제를 맞이해야만 한다.
마침 오늘 밤에는 점도 완성이 된다 하니 다행이다.
“폐하께서 그리 나를 생각하고 계실지 누가 알았을까.”
진홍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후궁도 들이지 않는다 하시니, 이제 나는 마음을 놓아도 되겠어.”
후궁도 들이지 않고 일생 자신만을 사랑하겠다는 황제의 고백을 들은, 물론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 나인에게 하는 말을 들은 진홍은 지금 무척이나 만족스럽다.
“나는 유일무이한 황후가 될 거야. 황제의 사랑을 독점한 유일무이한 황후 말이야. 모두가 날 부러워하겠지.”
안하무인에 거친 성정을 가진 황제라며 아비 우태사는 진홍을 황궁으로 들여보내며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거친 성정의 황제? 자신에게는 다정하기만 하다.
멋지지 않은가.
모두에게 두려움을 주는 사내가 제게만 다정하다니.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나라의 모든 여인들은 이제 자신을 부러워할 것이다.
비록 진홍이 아닌 연홍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다.
진홍이든 연홍이든, 자신이 모든 것을 가졌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정 상궁이 매섭게 밖으로 향해 소리쳤다.
“마마님! 크, 큰일이 났사옵니다!”
나인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 상궁이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별채를 지키고 있어야 할 나인이 허둥지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마마님, 황후 마마, 큰일이 났사옵니다.”
나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슨 큰일?”
“그, 별채의 그 나인이…….”
“죽기라도 한 것이냐?”
진홍이 싸늘한 눈으로 물었다.
안 그래도 오늘 안으로 점이 아물면 오늘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죽은 걸까?
점만 아물면 그 나인은 더는 필요 없다.
“그것이 아니라, 그 나인이 아무래도 회임을 한 것 같사옵니다.”
“뭐?!”
진홍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놀란 것은 정 상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회임이라니?”
“그것이 그 나인의 달거리가 없고, 엊그제부터 통 먹지 못하고 먹는 족족 토해 내고, 먹지 않아도 헛구역질을 하여 의술을 아는 나인을 데려다가 맥을 짚어 보라 하였더니 회임을 한 것이 분명하다 하였습니다.”
“어떻게 한 달 만에 아이가 들어선단 말이냐?”
진홍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럴 수 있다.
진홍 자신도 이전 정혼자와 정을 통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회임을 한 것을 알아차렸었다.
늘 있던 달거리가 끊어지는 것이 가장 큰 징조다.
그리고 헛구역질까지.
“그 발칙한 것이 감히…….”
진홍이 주먹을 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회임을 했든, 하지 않았든 어차피 죽을 년이옵니다.”
“그년이 발칙한 마음을 먹고 폐하께 제가 회임하였다는 걸 알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년이 설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목숨이 달아날 텐데요.”
“제 뱃속에 폐하의 용종이 들어 있다는 걸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면?”
“그러면 마마, 오늘이라도 그년을 죽일까요?”
“그래야겠다. 하루도 더는 못 봐주겠다.”
진홍이 제 가랑이를 들여다봤다.
“오늘 안으로는 딱지가 떨어지겠지. 아니라도 달거리 핑계를 대면 그만이니 그년은 오늘 죽이거라.”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마.”
정 상궁이 나간 직후 진홍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사람은 누구나 욕심을 품으면 미친 짓을 하기 마련이다.
‘그년이 사고를 치기 전에 빨리 죽여야지.’
그 천한 것이 언감생심 분에 넘치는 욕심을 품고 황제에게 회임 사실과 초야의 대역을 치렀다는 사실을 알리는 날에는 진홍 자신이 죽게 된다.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가문 전체가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다.
그건 황제를 기만한 죄다.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화근을 만들기 전에 그 천한 나인을 죽이는 것이 우선이다.
“회임이라니. 분수도 모르는 것이 감히.”
이를 갈며 진홍이 섬뜩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 천한 것들은…….”
중얼거리던 진홍이 거울을 가까이 끌어당겨 제 얼굴을 비췄다.
“오늘 밤에는 내가 직접 폐하를 모셔야지. 이 아름다운 얼굴을 한시라도 빨리 보여 드리고 그 정을 받아 회임해야지.”
이제 얼굴에 화기가 돋아났다는 핑곗거리는 끝이다.
한껏 분단장을 한 아름다운 얼굴을 직접 보면 황제는 더더욱 제게 빠져들 것이라고 진홍이 확신했다.
“오늘 밤에는…….”
진홍이 제 가랑이 사이에 손을 넣었다.
황제의 거친 숨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랑이 사이가 축축하게 젖었다.
정혼자가 죽은 후로는 사내와 잠자리를 가지지 못했다.
죽은 정혼자는 무척이나 색을 탐하는 사내였던지라 진홍은 그와 살을 붙이며 사내의 맛을 알게 되었다.
한번 알아 버린 그 맛을 참는다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오죽하면 황제와 그 나인이 교접하는 소리를 들으며 제 손으로 자위를 했을까.
“오늘은 폐하의 옥경을 이 몸에…….”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 손이 제 젖가슴을 주무르고 제 다리를 벌리고 얼굴을 처박는다는 생각만으로 숨이 차올랐다.
* * *
“미안하다. 미안하다, 연우야. 이 오라비가 잘못했다. 내가 병신이지, 내가 병신이야…….”
형우의 우는 소리를 들으며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어찌 오라버니 잘못이어요.”
“내가 그 일만 하라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 내가 욕심에 눈이 멀어서, 내가 병신이다. 나 때문에 너만 죽게 생겼으니…….”
“저 때문에 오라버니께서 화를 당하시는 걸요. 제가 회임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 연우와 형우는 같은 방에 갇혀 있다.
연우는 조금 전에 오늘까지 머물던 작은 별채에서 끌려 나왔다.
해가 질 때를 기다려 모란궁의 나인들이 연우를 끌어내어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오라비 형우도 이곳으로 끌려왔다.
창문 하나 없이 어두운 곳이라 여기가 어딘지는 연우도 모른다.
하지만 연우는 자신이 왜 끌려왔는지 그 이유를 안다.
그건 바로 자신이 회임했기 때문이다.
한 달이 지나도 달거리가 없어 이상하다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한 번도 달거리를 건너뛴 적이 없는데, 예정일이 되어도 달거리가 시작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의심은 헛구역질을 하며 확신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한 나인이 와서 제 손목을 잡고 진맥을 했다.
진맥을 본 나인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며 연우는 자신이 황제의 자식을 회임했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다.
회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연우도 모르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황후의 대역에 불과한 자신이 회임을 하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자신이 황제의 아이를 낳도록 황후가 가만 내버려 두겠는가.
“저는…… 죽어도 되지만 오라버니는…….”
연우가 끝내 말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죽어도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살고 싶다.
간절히, 살고 싶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
아이도 살리고 싶다.
제 속의 아이는 황제 욱연의 아이다.
아이도 살리고, 오라비도 살리고 자신도 살고 싶다.
만약 오늘 이렇게 죽게 될 줄 알았더라면 어제 황제에게 진실을 말했을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죽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황제에게 그가 한 달 동안 품었던 것은 황후가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죽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자신이 황제의 아이를 품었다는 것도 함께 자백했을 것이다.
자신이 입을 다물고 비밀을 지키면 저도 오라비도 출궁해서 약속했던 금은보화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리 서글퍼도 비밀을 지켰지만, 오늘 이렇게 죽는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너울 따위 벗어던지고 다 말했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가는 황제를 능멸한 죄로 자신은 죽겠지만 어쩌면 황제는 뱃속의 아이는 살려 줄지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려 아이를 낳고 난 후, 아이라도 살리고 자신이 죽는다면 이보다는 덜 서러울 것이다.
적어도 제게 이런 짓을 시킨 황후에게도 조금이라도 벌이 내린다면 오라비의 죽음도 조금은 덜 서러울 것 같은데, 이제는 모든 기회를 다 놓쳤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하다.
‘오늘 밤에는 황후마마께서 폐하를 맞이하시겠지.’
연우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한 달 동안 황후의 대역으로 황제의 승은을 입었다.
일방적으로 말하는 건 황제였고 자신은 듣기만 했지만 매일 밤 황제는 다정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 줬었다.
저를 만지는 손길도 부드러웠고, 제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달콤했었다.
처음에는 무서웠고, 긴장했고, 언제 들킬지 몰라 겁을 먹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깊은 정만 뿌리를 내렸다.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다정함이 자신의 것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 품과 그 온기와 그 모든 것이 마치 제 것이라도 된 것처럼 아늑하게 몸을 맡겼었다.
그 시간은 착각의 시간이었고, 꿈결 같았던 시간이었다.
꿈이라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긴 꿈이었다.
타인이 되어, 다른 사람의 대리가 되어 황제의 품에 안기는 꿈.
자신을 상처 입혔던 황제 대신, 그 이전에 한낱 나인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간식을 내어 주며 가볍게 웃어 주던 태자였던 그를 기억해 낼 수 있는 시간이었고, 바랄 수 없지만 감히 바라 보는 꿈을 꾸는 시간이기도 했었다.
끝이 있다는 걸 알았고 대역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도 알았지만 꿈은 아름다울수록 깨는 것이 괴롭고 아프지 않던가.
그리고 이제 그 꿈은 죽음으로 끝난다.
‘한 번만, 목소리라도 들려 드릴걸…….’
이제 와서는 모든 것이 후회가 된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 목소리로 대답 한마디 할 것을.
제게 물어오던 그 무수한 질문에 단 한 번이라도 대답해 줄 것을.
하지만 이제 늦었다.
‘내가 욕심을 부려서, 감히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어서 하늘이 벌을 내리는 걸까.’
주제도 모르고 자신이 감히 황제를 마음에 품어서 하늘이 벌을 내리는 것이라면, 저 때문에 함께 죽어야 하는 오라비가 너무 가엾다.
오라비는 그저 동생을 도우려 했을 뿐이다.
동생이 잘 되기를 바라며 그랬을 뿐인데 저 때문에 오라비까지 죽게 되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내가 죄인이다, 내가 죄인이야.”
가슴을 치며 우는 형우를 보며 연우도 눈물을 흘렸다.
벌써 어둠이 내렸을 것이다.
이제 시간은 점점 밤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이고, 자신들의 죽음도 멀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내내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끌어내라.”
매서운 얼굴을 한 정 상궁이 젊은 환관 몇 명과 나인들에게 명을 내렸다.
* * *
형우와 연우를 끌어낸 정 상궁이 그들을 끌고 간 곳은 모란궁 뒤쪽의 대나무 숲이었다.
모란궁의 뒤로 넓은 대나무 숲이 있다.
그리고 그 대나무 숲을 지나면 냉궁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냉궁은 예전에는 역대 황후들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황제에게 죄를 지은 후궁들이 죽을 때까지 갇혀 있던 곳이다.
한번 냉궁에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냉궁 안에서 얼어 죽든가, 굶어 죽든가. 두 가지 중 한 가지의 방법으로 반드시 죽었다.
그래서 들어간 자는 있어도 나온 자는 없다는 곳이 냉궁이었다.
그곳에는 죽은 자들의 뼈가 굴러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이면 냉궁에서 한이 맺혀 죽은 후궁들의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도 있었고, 귀신들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섬뜩한 냉궁이 보기 싫다 하여 이전의 황후, 즉 선황의 황후가 모란궁과 냉궁 사이에 대나무를 심어 지금은 이렇게 넓은 대나무 숲이 되었다.
“너희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할 것이다. 알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무슨 소리를 질러도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오누이가 사이좋게 굶어 죽거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이 엄동설한에 하루 반나절이면 얼어 죽겠지.”
형우와 연우를 냉궁 안으로 밀어 넣으며 정 상궁이 싸늘하게 웃었다.
쾅-!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더니 이내 쾅- 쾅- 문에 못질하는 소리가 울렸다.
창문 하나 없는 서늘한 냉궁 안에서 문에 못을 박는 망치 소리를 들으며 연우와 형우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정 상궁의 말이 맞다.
냉궁은 뼈가 시리고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칠 정도로 추웠다.
그리고 형우와 연우는 겨우 한 겹의 옷만 입은 채였다.
냉기를 막은 솜 넣은 옷도 없이 발에는 버선도, 신도 신지 않았다.
굶어 죽는 것이 아니라 얼어 죽을 것이다.
하루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반나절 만에 얼어 죽을 수도 있다.
벌써 해가 졌다.
밤보다는 새벽이 더 추운 법이다.
지금도 이렇게 추운데 새벽이 되면 감당할 수 없는 추위가 몰아닥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신을 잃고 얼어 죽을 것이다.
황후가 자신들에게 내린 벌이 끔찍하고 잔인해서 연우가 몸서리를 쳤다.
더군다나 자신들만 죽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잉태된 아이도 함께 죽게 된다.
‘이 아이는 무슨 죄라고…….’
하필이면 자신의 몸에 찾아와서, 제 안에 둥지를 틀어서 이 아이는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었다.
그것이 또 서러워서 연우가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연우야, 이걸 입거라.”
형우가 한 겹밖에 없는 제 옷을 벗어서 연우의 몸에 걸쳐 줬다.
바지 하나만 입은 형우가 덜덜 떠는 것을 보며 연우가 눈물을 흘렸다.
“오라버니…….”
“나는 괜찮으니까 그걸 입고 있거라. 덜 추울 거다.”
형우가 연우를 끌어안았다.
“걱정 마라. 내가 얼어 죽더라도 너는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다.”
저를 꼭 끌어안고 온기를 나눠 주는 오라비가 불쌍해서 연우의 눈물이 또 멈추지 않았다.
“나갈 길이 있을 거다. 그래, 조금만 이러고 있다가 내가 나갈 길을 한번 찾아 보마. 아무리 냉궁이라고 해도 나갈 길이 없겠느냐.”
오라비 형우는 아직까지 희망을 놓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연우의 눈에는 절망만 보였다.
더는 희망이, 살아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 * *
“자, 너 보기에는 어떠하냐?”
“고우십니다, 마마.”
분단장을 화사하게 한 진홍이 화려하게 머리 장식을 꾸미고 몇 번이나 거울을 들여다봤다.
“연지가 너무 붉지 않느냐?”
“잘 어울리십니다.”
“그래?”
“네, 마마.”
“가랑이의 점을 다시 봐 주겠느냐?”
“마마, 방이 어두워 점이 그리 자세히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환한 대낮에 보지 않는 이상 점을 들키는 일은 없을 것이니 염려 마시옵소서.”
“그래. 그런데 폐하는 어디까지 오셨다더냐?”
“지금 이곳으로 행차하시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가슴이 왜 이렇게 두근거리는 걸까.”
진홍이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마치 처녀가 된 기분이야.”
“마마, 부디 왕자 전하를 생산하시옵소서.”
“그래야지. 그런 천한 것도 회임을 하는 마당에 내가 회임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그런데 그것들은 어찌 처리했느냐.”
“냉궁에 가뒀으니 얼어 죽을 것이옵니다.”
“그래? 보기 좋겠구나. 얼어 죽다니.”
“독을 먹여 빨리 죽이는 것보다는 서서히 얼어 죽게 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아 그리하였습니다.”
“그렇지. 둘이 사이좋게 빨리 죽는 것보다는 서서히 죽는 것이 더 낫지. 몸이 얼어붙어 가는 것을 느끼며 괴로워하며 제가 저지른 짓을 후회해야지. 문을 열어 달라고 얼어붙은 문을 박박 긁으며 소리를 지르다 그렇게 얼어 죽어 가겠지? 죽어 가면서 반성이라는 것을 하겠지. 제가 얼마나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는지 말이야. 주제넘은 것. 천한 것이 감히…….”
“나중에 그 뼈를 추려 대나무 숲에 묻어 버리겠습니다.”
“그러거라.”
그때, 밖에서 황제의 행차를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오셨구나.”
진홍이 너울을 쓰고 다소곳하게 앉았다.
곧 문이 열리고 침전 안으로 황제가 들어섰다.
들어서는 황제를 너울 너머로 바라보며 진홍이 숨을 삼켰다.
‘책봉식 때 뵌 것보다 훨씬…….’
책봉식 때는 서로의 얼굴을 붉은 너울로 가려 황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건 황제 역시 마찬가지다.
진홍이 정식으로 황제의 얼굴을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체격도 장대하시고, 얼굴도 늠름하시고…….’
이제야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다.
이 자리는 원래 자신의 것이었다. 그 천한 나인의 것이 아니라.
“아직도 얼굴에 화기가 덜 가라앉았느냐? 오늘도 너울을 쓰고 있으면, 그 너울을 내가 어찌한다고 했었지?”
“아니옵니다, 폐하.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너울은…… 폐하께서 직접 벗겨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직까지 쓰고 있는 것뿐이옵니다.”
“오늘은 어쩌려고 대답을 다 하지? 항상 벙어리처럼 굴더니.”
“그동안 목이 좋지 않아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이 안 좋다면서 소리는 잘도 지르더군. 교성을 지르는 목과 말을 하는 목이 서로 다른 목이냐?”
황제의 말에 진홍이 당황했다.
“그것이 아니오라…….”
“그러면 오늘은 너울을 벗을 수 있겠군.”
“네, 폐하.”
이제 너울을 벗기면 황제는 자신의 미모에 감탄할 것이다.
‘이제 내게 더 빠져들겠지?’
진홍은 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있다.
쌍둥이였지만 연홍보다 자신이 더 색기가 넘쳐 흘렀다.
“한 달 만에 벗기는군.”
황제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진홍의 얼굴에 드리워진 너울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너울이 머리 위로 걷히자 진홍이 눈을 내리깔며 수줍게 웃었다.
“과연 고운 얼굴이군.”
수줍게 웃는 진홍을 바라보며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운 얼굴이야.”
“과찬이십니다, 폐하.”
“그런데 내가 기대하던 얼굴은 아니군.”
“네?”
뜻밖의 말에 진홍이 얼굴을 들었다.
지금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기대하는 얼굴이라니?
“그게 무슨…….”
“이 너울을 벗기면 다른 얼굴이 있을 줄 알았지. 예를 들면 화상의 흉터가 있는 얼굴이라던가.”
‘헉!’
진홍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는 얼굴이라면…….’
그건 연우다.
그 세답방의 나인이 얼굴에 화상의 흉터가 있었다.
‘어, 언제 얼굴을 본 거지? 설마 들킨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초야를 치른 상대는 얼굴에 화상의 흔적이 있는 여인인데, 너는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내 황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일까. 답을 해 보거라.”
“폐, 폐하. 저, 저는 폐하의 황후이옵니다. 우태사의 딸 우연홍이옵니다.”
진홍이 서둘러 제 언니의 이름을 둘러댔다.
원래 간택을 받은 것은 언니 연홍이다.
그래서 황궁의 모두가 진홍을 연홍이라고 알고 있다.
정 상궁만 빼고 말이다.
그런데 황제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우연홍? 우진홍이 아니라? 언제 우연홍이 살아서 돌아왔지? 진작 죽어 차디찬 땅속에 묻힌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어, 어떻게 그걸…….’
진홍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황제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쥐도 새도 모르는 비밀인데, 누가 황제에게 그걸 고한 걸까.
“폐, 폐하……,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이…….”
“나는 네가 우진홍이라는 것도 알고, 네가 간택 받은 황후의 동생이라는 것도 알고, 우연홍이 죽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그런데 내가 초야를 치른 여인은 네가 아니지 않느냐?”
황제 욱연이 진홍을 바라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진홍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황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연홍이 아닌 것도, 자신이 대역을 내세워 승은을 받은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초야를 치러야 내 여인이지. 그런데 초야도 치르지 않은 네가 어찌 내 여인이라 칭한단 말이냐, 발칙하게.”
“페, 폐하, 저는 정식으로 책봉식을 치르고…….”
“간택 받은 것은 우연홍이지, 우진홍이 아니라.”
“폐하……!”
“너는 내가 그런 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인 줄 알았더냐? 우태사가 나를 속이고 딸을 바꿔치기했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줄 알았더냐?”
“어, 어찌…… 다 알고 계셨다면, 어찌…….”
진홍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너무 겁먹은 나머지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우태사가 어찌하는지 보려고 했지. 간택도 제 마음대로 밀어붙이더니 제 딸을 떡 하니 간택에 통과시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죽은 딸과 산 딸을 바꿔치기하고, 이제는 그 딸이 나를 속이고 능멸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지. 아비와 딸이 사이좋게 나를 능멸하니 그것도 부전여전이라는 것이야?”
“폐, 폐하, 저는 폐하를 능멸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저, 정말 몸이 좋지 못하여…….”
“몸이 좋지 못하여 나를 모시지 못한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다 알고 있다. 그 마음은 갸륵하지. 하지만 말이다. 황궁에는 법도가 있어서 초야를 치르지 않은 너를 어찌 황후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 책봉이 중요하겠느냐, 초야가 중요하겠느냐. 네가 나와 초야를 치렀다면, 나도 우태사의 농간을 눈감아 주고 너를 황후로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그 초야를 거부하고 다른 여인을 들여보낸 것이 네 선택이었으니, 이제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지. 안 그러냐?”
“폐하…….”
책임을 지라니.
무슨 책임을 지라는 것일까.
어떻게 책임을 지라는 것일까.
‘설마 황후의 자리를 내놓으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건 아닐 거야. 이 자리를 어떻게 얻어냈는데…….’
“초야를 치르지 않은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으니, 지금 당장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거라.”
“폐하……!”
사가로 돌아가라는 말에 진홍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분단장을 한 그녀의 고운 얼굴이 식은땀과 눈물로 엉망이 되어 짓뭉개졌다.
“폐하!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제게도 초야를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를 줬는데 그걸 걷어찬 것이 네가 아니냐. 한 번 걷어찬 것을 어찌 다시 달라고 해. 나와의 초야가 얼마나 값어치가 없었으면 그걸 남에게 줬을까.”
욱연이 혀를 차며 일어섰다.
“폐하!”
돌아서서 나가려는 욱연의 옷자락을 진홍이 와락 붙잡았다.
“손목을 자르기 전에 놓아라.”
섬뜩한 경고에 진홍이 얼른 손을 놓았다.
“역시, 청소는 한 번에 해야 제맛이지. 여러 번 수고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욱연이 침전을 나서자 혼자 남겨진 진홍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폐하! 폐하! 이러실 수는 없으십니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으십니다!”
“마마! 마마!”
뒤늦게 뛰어 들어온 정 상궁이 통곡하는 진홍을 일으켜 앉히려 했지만, 진홍은 일어날 생각을 앉고 꺼이꺼이 통곡했다.
“마마, 마……. 아악!”
정 상궁이 비명을 질렀다.
침전 안으로 들어온 병사들이 정 상궁의 어깨를 잡아 강제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것 놔라! 내가 누군 줄 알고! 놔라! 마마! 마마! 마마! 살려 주시옵소서!”
끌려가는 정 상궁의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도 진홍은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것을 그녀도 깨달았다.
서러운 통곡 소리가 모란궁 밖으로 흘러나와 어둠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 * *
냉궁에 갇힌 채로 몸이 얼어붙어 가던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일어나세요. 밖에 누가 왔어요…….”
제게 옷을 벗어 준 오라비 형우는 지금 꽁꽁 얼어 정신마저 혼미해 쓰러져 있었다.
“오라버니, 일어나세요.”
그런 형우를 흔들던 연우가 열리는 문을 보며 바짝 겁을 먹었다.
어쩌면 정 상궁의 마음이 변해 자신들의 목을 치러 온 것일 수도 있다.
“밖으로 데리고 나오거라.”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다름 아닌 대전 태감의 목소리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정신을 잃은 채로 환관들에 의해 질질 끌려 나가는 형우를 보며 연우가 울부짖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대전 태감이 여기에 왔다는 것은 황제가 모든 사실을 다 알아차렸다는 뜻이다.
황제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저와 오라비를 직접 벌하기 위해 여기까지 대전 태감을 보낸 것일 수도 있다.
목이 잘릴 것이다.
그게 아니면 기름이 끓는 가마솥 안에 들어갈 수도 있다.
“제발 오라버니만은 살려 주세요! 오라버니는 죄가 없습니다! 이 모든 건 저 혼자 저지른 짓입니다!”
끌려 나가는 형우를 쫓아 나온 연우가 울부짖으며 애원했다.
“살려 주시어요! 제발 오라비를 살려 주시어요! 제가 모든 벌을 달게 받겠으니 제발 오라버니만은 살려 주시어요!”
냉궁 밖까지 뛰어나온 연우가 환관의 등에 업혀 형우가 사라지는 것을 봤다.
“오라버니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 제발 오라버니를 돌려주세요!”
저대로 형우를 데려가서 죽일 것만 같아서 겁을 먹고 연우가 소리쳤다.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형우를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제발! 제발이요! 오라버니를 데려가지 마세요! 죄인은 저예요!”
그때였다.
“죄인은 따로 있는데, 어찌 스스로에게 죄가 있다 하느냐.”
뜻밖의 목소리에 연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목소리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자 그녀의 눈 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황제 욱연이었다.
“폐, 폐하……!”
놀란 연우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왜 이곳까지 직접 오셨지?’
얼굴을 바짝 숙인 채로 연우가 덜덜 떨었다.
어찌하여 황제가 저를 친히 벌하러 온 걸까.
대전 태감을 보내 벌하는 것으로는 화가 가라앉지 않은 걸까.
그럴 수도 있다.
그만큼 큰 죄를 지었다.
황제를 기만하고 속이고 능욕했다.
그래서 대전 태감으로 하여금 저를 벌하라 하는 것으로는 모자라 황제가 친히 온 것일 수도 있다.
‘나를 몰라보시겠지.’
황제는 제가 누군지 모를 것이다.
6년 전에 잠시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그저 죄인으로 기억되겠지…….’
연우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살려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라버니만큼은…….’
각오를 하고 연우가 황제를 올려다보려고 할 때였다.
“아직도 얼굴에 흉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구나.”
엎드린 연우를 향해 손을 뻗은 황제 욱연이 그녀의 흉이 진 뺨을 어루만진 것이다.
‘지금 무슨 말씀을……. 흉에 대해 알고 계셨어. 설마, 나를 기억하고 계신 걸까…….’
황제는 자신에게 숯을 던진 것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얼굴의 이 흉터를 보고 지금 기억해 낸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겠지.’
그러나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연우의 예상을 빗나갔다.
“미안하다는 말을 지금까지 하지 못했구나.”
“폐……하?”
지금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왜 제게 화를 내지 않는 걸까.
왜 제게 미안하다고 하는 걸까.
죄를 지은 것은 자신인데 왜 황제가 제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건지 연수는 알지 못했다.
“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단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서, 네게 미안한 짓을 했다. 그 죄는 내가 평생을 살며 갚으마.”
“폐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저는…….”
“네 얼굴을 이렇게 만든 것을 나는 6년 동안 계속 후회해 왔단다.”
“아…….”
그제야 연우는 지금 황제가 6년 전의 그 일을 거론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황제는 6년 전의 일을 사과하는 것이다.
다정한 목소리로, 다정한 눈빛으로 제게 사과하고 있다.
“아…….”
제 뺨을 만지고 떨어지는 황제의 손에 연우의 시선이 멎었다.
연우는 지금까지 황제의 손을 본 적이 없다.
너울 너머로 얼핏 봤지만, 지금처럼 자세하게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크고 단단한 손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너울이 없는 맑은 시야로 처음으로 황제의 손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커다란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건 화상의 흉터였다.
제 뺨에 있는 화상의 흉터가 황제의 손바닥에도 남아 있었다.
‘손이, 손이…….’
자신은 바보였다.
정말 엄청난 바보였다.
그날 화로의 숯을 던질 때 황제는, 아니 태자는 맨손이었다.
그 뜨거운 숯을 맨손으로 집어 들어 제게 던진 것이었다.
제 뺨에 닿았다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흉터가 생겼다.
그러나 황제는 그 숯을 꽉 잡고 던졌다.
저보다 더 오래 그 숯을 만지고 있었다.
얼마나 뜨거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제 뺨의 상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손바닥과 손가락 전부를 뒤덮은 흉터를 보며 연우는 그제야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고통스러웠던 것보다 황제가 더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말이다. 적어도 6년 전 그 날에.
“폐하……, 손이…….”
“네 뺨이 차갑구나. 몸이 이리 꽁꽁 얼어붙어서야 복중의 아이에게도 해로우니 어서 몸을 따뜻하게 해야지.”
황제가 그의 겉옷을 벗어 연우의 몸을 덮어 줬다.
그제야 연우가 형우를 퍼뜩 기억해 냈다.
“폐, 폐하, 제 오라버니는…….”
“걱정 말거라. 네 오라비를 따뜻한 방으로 옮기고 정신이 드는 약을 먹이라 일러뒀다. 그러니 더는 오라비 걱정은 말고 네 걱정이나 하거라.”
황제가 겉옷으로 감싼 연우를 두 팔로 번쩍 안아 들었다.
“폐하!”
당황한 연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상궁, 궁녀, 환관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황제가 저를 품에 안은 것이다.
황제의 체신이 떨어지는 일이다.
“이러면 덜 춥지? 그렇지?”
연우가 대답을 못 했다.
지금 연우는 제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엇 하나 알 수 없었다.
꼼짝없이 얼어 죽는 줄 알았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갑자기 천지개벽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했다.
“몸부터 녹인 다음에 천천히 다 말해 주마.”
황제가 그녀를 안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 *
“폐하……, 이젠 춥지 않사옵니다…….”
연우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지금 연우는 욱연의 품에 안긴 채로 그의 침전 안에 있다.
침전 안에는 화로 네 개가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욱연은 연우를 제 품에 안고 연신 그녀의 발을 주무르고 있었다.
발도 다 녹았고, 몸도 다 녹았다.
그런데도 황제는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지 않고 있다.
“더 녹여야지. 많이 추웠을 텐데.”
“이제 다 녹았습니다…….”
“아직도 내 원망을 하고 있느냐?”
“그, 그건…….”
“원망을 해도 당연하지. 내가 그런 짓을 했는데…….”
제 발을 주무르는 욱연의 손을 연우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폐하의 손은…….”
묻고 싶다.
그때 왜 그랬는지 묻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우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황제가 먼저 그녀가 6년 동안 궁금해한 것을 말해줬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았단다.”
“네?”
이건 무슨 말일까.
“그날 내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너를 영영 잃었겠지. 네가 아바마마의 승은을 받고 후궁이 되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겠지.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
그제야 비로소 연우도 짐작이 갔다.
자신은 그날 황제와 태자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아마 황제가, 그러니까 선황이 저를 눈여겨본 것이 분명했다.
“나는 힘없는 태자에 불과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부황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부황의 여인이 되었겠지. 그게 네게 더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내 편협한 욕심이 그걸 용납을 않더구나. 그래서 그 순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너를 상처 입혀서라도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았다. 네게 묻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해 버렸다.”
연우가 제 발을 주무르는 욱연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몰랐어요. 그래서 원망도 많이 했었는데…….”
이 품이 따뜻해서일까, 아니면 진실을 알았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지금까지 한 달 내내 황후에게 속삭이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 모든 사랑이 실은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걸 깨달아서일까.
연우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프거나 슬프거나 무서워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지금 꽁꽁 언 몸이 녹듯이 오랫동안 제 안에 응어리져 있던 오해와 원망이 녹아내리는 눈물이었다.
“그러지 말 것을 그랬나 보다.”
“아니요……. 아니어요, 폐하…….”
만약 그때 황제가 그렇게 막아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선황의 승은을 받고 후궁이 되어 행복하게 살아왔을까.
아닐 것이다.
그런 삶을 바란 것이 아니다.
6년 전 그때부터 바란 사내는 오직 한 명이다.
오직 한 명의 시선을 바랐고, 오직 한 명의 사내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지금 저를 안고 있는 이 사내 욱연에게만 마음이 설렜었다.
“저는 이 손 때문에 마음이 아플 뿐이에요…….”
“이제는 아프지 않단다. 너는 어떠하냐.”
“저도 이제는 아프지 않습니다, 폐하.”
“나는 이제 네게 그동안 못 해 준 것들을 해 줄 작정이다. 그동안 해 주고 싶었지만 때를 기다리느라 꾹꾹 참고 있었던 것을 네게 전부 해 줄 작정이다. 그러니까 너는 거절하지 말거라.”
대체 제게 무엇을 해 준다는 걸까.
“너를 황후로 책봉할 것이다.”
“폐하, 그건 안 될 말이옵니다! 저는 신분이 미천하여…….”
황후라니.
자신이 어떻게 황후가 된단 말인가.
자신은 귀족도 아니고 그저 천한 신분일 뿐이다.
후궁이라도 감지덕지인데 황후라니. 말도 안 된다.
“반대할 대신들은 없을 것이다. 반대할 자라면 우태사 밖에 없는데 그자는 이제 곧 처리될 거니까 걱정할 것이 없지. 나는 내가 원하면 밀어붙이는 성격이라는 걸 아직 모르는구나. 네가 기억해야 하는 건 이제 더는 내가 힘없는 태자가 아니라 무엇이든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황제라는 것이다. 내가 누굴 황후로 책봉하든 그건 내 마음이지.”
“폐하…….”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었다.
승은도 감격인데 황후라니.
이건 꿈이 아닐까.
꿈이라면 깨어나기 싫다.
“그런데 여기에 내 아이가 있다고?”
욱연이 연우의 아랫배를 슬슬 만졌다.
“네……, 폐하…….”
“기특하구나. 황후가 되기 전에 황손부터 품다니. 과연 내 황후다.”
“폐하…….”
연우의 귀가 붉어지고 뺨에 달아올랐다.
“폐하, 이제 덥습니다. 놓아주시옵소서…….”
“더워? 더우면 벗어야 하지 않겠느냐.”
“폐하?”
저를 놓아주는 대신에 제 옷을 벗기는 욱연의 손길에 연우가 당황했다.
“매일 밤 했는데, 이제 와서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하, 하오나 폐하…….”
“오늘은 내가 참지 않는다고 말했었지? 내 인내심은 바닥났다고 말이야.”
어제 그 말은 이런 뜻이었을까.
“나는 더는 참지 않을 거다. 그동안 너울을 쓰고 벙어리인 것처럼 입을 다물었던 죄로 오늘 밤은 내 품에서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말거라.”
“폐하…….”
몸에서 흘러내리는 옷을 붙잡지도 못하고 연우가 욱연의 품에 와락 안겼다.
연우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 앉힌 욱연이 허리를 꽉 끌어안아 제게로 바짝 당기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미끄러뜨려 그녀의 콧날과 입술에 그의 입술을 내렸다.
“너울이 없으니 이리 좋구나.”
속삭임에 연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벌려야지?”
착한 아이처럼 작게 입을 벌리자 그 안으로 욱연의 숨결이 흘러들어왔다.
입술이 맞물리며 제 혀를 휘감는 욱연의 혀에 모든 것을 맡기며 연우가 눈을 감았다.
비로소 아늑함이 그녀에게 찾아들고 있었다.
* * *
황제를 기만한 죄로 우태사의 일가에게 벌이 내려졌다.
간택에 오른 딸 연홍이 죽은 것을 고하지 않고 다른 딸 진홍으로 죽은 딸을 대신하여 입궁시킨 우태사는 황제를 기만한 죄를 받아 유배형에 처해졌다.
우진홍은 제 아비의 잘못된 방식을 알면서도 죽은 자매의 이름으로 황후 책봉을 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황제의 용종을 잉태한 여인을 죽이려 한 죄로 황후 책봉이 무효화되었고, 아비와 다른 곳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 부녀에게 참형을 내리지 않은 것은 새로이 황후가 된 연우가 극구 참형만은 면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이다.
새로 황후로 책봉된 연우는 원래 시골 평민 출신으로, 황궁에 생각시로 입궁하여 세답방 나인으로 황실을 섬겼지만, 황제의 승은을 받아 회임을 하여 황후에 책봉되었다.
조정의 누구도 평민 출신이자 세답방 나인 출신의 그녀가 황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 대신들이 없었다.
강경하게 대신들의 여론을 주도하던 우태사가 사라진 조정은 황제의 전권 아래 들어왔기 때문이다.
황후에 책봉된 연우는 산달이 되어 왕자 아기를 낳으니, 그 아이가 황제 욱연의 장자였다.
연우의 오라비인 환관 형우는 대전의 환관으로 승직을 했고, 그 후에는 태감의 자리를 이어받아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게 되었다.
황후가 된 후 연우는 바닷가 고향 집의 친정 식구들을 전부 도성으로 데려와 도성에 아름다운 집을 주고, 그들이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도록 넓은 토지까지 하사했다.
황제는 연우의 양친을 친부모 대하듯이 깍듯하게 공경했고, 연우의 동생들에게 황궁 출입을 자유롭게 허락하고 황실의 자제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그렇게 얼굴에 흉터가 있는 세답방 나인 연우가 황제 욱연의 반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