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85)화 (85/96)
  • 85. 마지막 계략

    옥사의 나무 창살에 매달려있던 병조판서 김윤석의 낯빛에 화색이 돌았다.

    “오, 호판!”

    “쉿! 어찌 그리 방정이오? 지금도 몇 푼 넣어 주고 몰래 들어온 것인데, 그리 소리를 지르면 어쩌자는 것이오?”

    “아! 미안하이, 미안해. 호판, 우리 좀 살려주게 응?”

    사람이 어찌 저리 한결같은지.

    고개를 가로저은 호조판서는 설변도를 찾아 기웃거렸다. 옥사 맨 끝에 있던 설변도를 발견하고는 몸을 낮추었다.

    “흠, 거… 괜찮으십니까, 대감?”

    “아직까진 견딜 만하네.”

    그제야 설변도는 눈을 뜨고 상대를 바라봤다.

    “세자의 약점이라도 찾았는가?”

    여전히 눈빛만큼은 살아있는 설변도를 보고 호조판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모진 고신에도 기세만큼은 꺾이질 않는군.’

    “글쎄, 이것도 도움이 될까 싶습니다마는….”

    “뜸 들이지 말고 말하게.”

    “전날 내가 좀 이상한 걸 봐서 말입니다.”

    혹 옥사를 지키는 병사가 내려올까 싶어, 호조판서가 주위를 경계하며 말을 이어갔다.

    “세자와 그 후궁이 동백궁으로 향하는데, 그걸 영의정의 자제인 백 장군이 지켜보고 있더란 말입니다. 한데, 지켜보는 그 눈빛이 어딘가 좀 이상해서….”

    “어떻게 이상하던가?”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이었지요. 별것 아닌 듯싶은데, 다른 건 아직 알아낸 것이 없어서….”

    “울 것 같다?”

    하얘진 눈썹이 꿈틀 치켜 올라갔다.

    “아, 그건 아십니까?”

    “…!”

    “세자의 후궁 부친이 개방 방주랍니다. 한데 또 20여 년 전 전하께서 극형에 처했던 천씨 가문의….”

    설변도가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낮은 음성으로 불렀다.

    “천일랑.”

    “오, 맞습니다.”

    이미 그것은 알고 있다. 그날 밤, 어이없게도 한 나라의 왕이란 작자가 일랑 그 작자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다. 비록 먼 거리였으나, 자신 또한 일랑의 얼굴을 보고 단박에 알아차렸다.

    반란을 일으켰던 당시엔, 극형에 처해졌던 그가 어찌 살아있는지 어리둥절하면서도 꽤 당혹스러웠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설변도가 나무 창살까지 절뚝대며 다가왔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우리 모두 살 수 있네. 할 수 있겠는가?”

    “무, 무슨 일인데요?”

    이 상황에 세자나 왕을 저보고 죽이라고 할까 봐, 호조판서는 미리 짐작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동백궁!”

    “예? 동백궁이요?”

    “세자의 후궁을 납치하게. 잘만하면 그것이 우리의 구명줄이 되어 줄 테니.”

    도통 모를 소리에 호조판서가 인상을 찌푸렸다.

    “회임까지 한 후궁이네. 그것과 우리의 목숨을 맞바꿔야지. 하나, 우리가 풀려난 순간 그 후궁을 죽이게. 하면 그 뒤는 아주 볼만 할 것이야.”

    “그런 겁박이 먹히겠습니까?”

    “왕실엔 지금 그것이 잉태한 아이가 유일한 후손이지. 그만큼 손이 귀한 왕실이 아이만이라도 살리려 발악할 것이야. 다행히 배 속에 있으니 둘 다 처리하면 크크크.”

    다 죽어가는 낯빛인데도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회임한 여인을 죽이는 건 좀.”

    영 찜찜하고 불안한 마음에 호조판서가 말끝을 흐리자, 노기 띤 눈으로 나무 철창에 매달린 설변도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깟 계집의 목숨보다 나와 우리 여식의 목숨이 더 값어치 있다는 걸 잊지 말게. 내가 무너지면 죽어 나갈 인사가 어디 한 둘이냔 말이지. 거기에 호판도 예외는 아니다, 이 말일세.”

    희번덕거리는 눈빛을 보고는 소름이 돋아 호조판서는 얼결에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성라국으로 피신하면 곧 이 나라도 무너질 것이야.”

    “그건 어찌 장담합니까?”

    “세자와 살인귀라 불리는 백 장군이 동시에 한 여인을 연모한다? 한데 그 여인이 세자의 곁에 있으면서도 납치되어 죽었다. 그것도 회임한 몸으로 처참히!”

    무얼 상상하는지 히죽 웃는 모습이 괴이하기까지 보였다.

    “백 장군이 살인귀라 불릴 정도로 전쟁과 검밖에 모르는 인사라지. 하여 영상 또한 자식 장가보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을 내 들은 적이 있지.”

    “하면 대감의 생각은, 백 장군이 연모하는 여인의 죽음으로 정신이 돌아 감히 세자와 맞서겠다는 겁니까?”

    “확실해. 그자 같은 외골수들은 여인에 관해서도 똑같지. 전쟁만 파고들던 자가 여인에게 푹 빠졌는데, 아무리 세자가 곁에 있다 한들 몰래 엿볼 정도면, 아직 잊지 못했다는 것이지. 연모하는 여인의 죽음은 그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일 터.”

    “오오!”

    이미 머릿속에서 모든 상황을 끝마친 설변도가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기 시작했다.

    “죽자고 덤벼들겠지, 한데 안타깝군. 그 재미난 구경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말이야.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성라국에 내 말 한마디면 화월국은 단박에 짓밟힐 테니, 호판은 걱정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게.”

    ‘그깟 거짓 전쟁 이긴 것으로 오만방자하긴. 내 말 한마디면 진짜 전쟁이 일어날 것이거늘. 이참에 싹 짓밟아 주겠어!’

    그때 옥사 입구에서 문을 여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호조판서가 일어서 가려 하자, 설변도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날랜 자로 한둘만 보내서 세자가 없는 틈에 납치해야 할 게야. 그렇지 않으면 자네도 이 꼴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흠! 흠!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합니까? 알겠으니 좀 놓으세요. 이제 가 봐야겠습니다.”

    “살고 싶으면 성공시키게. 꼭!”

    “거참, 알았다 하지 않습니까!”

    ‘젠장, 치부책만 아니어도 예 오지 않았을 터인데… 그러잖아도 아들놈 때문에 몸 사리고 있었거늘… 내 줄을 잘못 잡은 게야.’

    더는 듣기 싫어 호조판서는 서둘러 옥사를 벗어났다.

    ***

    벌써 엿새 동안 자한을 보지 못한 두화는 조금씩 기분이 우울해졌다. 같은 궁에 있어도 얼굴 한번 보기 힘드니 쓸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저 나뭇잎 다 떨어지면 오시려나?”

    “예? 누가요?”

    “아니면 나뭇가지 위에 눈이 쌓일 때나 오시려나?”

    “마마, 누구 기다리십니까?”

    “…그도 아니면 아이가 태어날 때는 오시려나?”

    “아, 세자 저하 말씀이시옵니까?”

    울먹거리는 두화를 빤히 보던 맹지가 낮은 숨을 내쉬더니, 부엌으로 가 홍시를 가지고 나왔다.

    “마마, 이거 드시고 기분 좀 푸시옵소서.”

    “생각 없어.”

    “아휴, 전쟁터에 계실 땐 잘도 기다리시더니, 겨우 며칠 못 보셨다고 이리 기운 없는 얼굴이시면 어쩌십니까?”

    맹지의 말에 두화가 고개를 홱 돌려, 눈을 가늘게 떴다.

    “며칠이 아니니라.”

    손가락을 열심히 세던 맹지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겨우 엿새 되었나이다.”

    “그래, 엿새씩이나 되었거늘… 오지 않으신다.”

    한숨을 폭 내쉰다.

    “하아, 마마. 소인은 이런 마마가 너무 낯섭니다.”

    “됐고, 한데 무슨 추국을 이리 오래 해?”

    “당연히 죄인을 다루는 일인데 쉬운 것이 있으려고요? 저하께서도 지금 마마를 엄청나게 그리워하실 것이옵니다.”

    애써 위로하는 맹지는 자꾸만 제 팔을 긁적거렸다. 세자와 붙어 있는 두화의 모습을 볼 때는 더없이 팔에 닭살이 돋아나는데, 혼자 있는 시간에도 어째 이 닭살은 없어지지도 않는다.

    팔을 긁적이는데, 두화가 벌떡 일어섰다.

    “어디 가려 하시옵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추국장 근처라도 가서 얼굴이라도 몰래 보고 와야지.”

    “아이고, 마마. 아니 되옵니다.”

    “어허, 아니 된다는 말은 불허하느니.”

    두화는 냉큼 그가 제게 했던 말을 흉내 내고는 웃어 보였다.

    더구나 두화가 이리 막무가내이니 맹지도 웃전을 막을 도리가 없다.

    웃전의 명을 어찌 거부할까.

    맹지는 급기야 생각을 달리해 자신의 기준에 맞추기로 하였다.

    “예, 뭐. 회임하셨으니 너무 침소에만 있는 것도 좋지 못하다고 하옵니다. 가볍게 산보 정도는 하셔도 되옵니다.”

    “그럼, 얼른 가자. 추국장이 어디야?”

    “하면 소인이 앞서겠나이다.”

    잠시 뒤, 두 사람은 동백궁을 나왔다.

    이제는 동백궁 입구를 지키는 익위사 둘과 랑과 성무만 남고, 호위하던 모든 자가 본연의 자리인 세자익위사로 돌아갔다.

    “어디 가시옵니까?”

    침소를 나온 두 사람을 본 랑이 물었다.

    “산보를 다녀오려고 하네.”

    “소인이 모시겠나이다.”

    두화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괜찮네. 맹지도 있고, 이젠 궁도 안전하지 않은가?”

    “하오나.”

    “자네들이 곁에 있으면 든든해서 좋긴 하나, 아직도 반란군이 있어서 이러는가 싶어 불안도 하네. 그냥 가볍게 가는 산보이거늘….”

    침울한 두화의 표정에 랑은 안절부절못하다가 길을 텄다.

    싱긋 웃은 두화는 맹지의 팔을 끌어 서둘러 추국장으로 향하였다.

    하나, 가는 도중 맹지는 부러 길을 틀어 반대 방향으로 안내했다.

    ‘설마하니, 소인이 그 끔찍한 곳으로 마마를 모시겠사옵니까? 이년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아니 되옵니다. 암요.’

    아무것도 모르고 웃으며 따라오는 두화와 눈이 마주쳤다.

    맹지도 활짝 웃어주었다.

    ‘조금 힘들면 돌아가자고 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이리 산보 겸 천천히 돌자고요, 마마!’

    앞을 바라보는 맹지의 입이 다부지게 앙다물었다.

    모퉁이를 돌면 아름답게 꾸며진 못이 있는데, 그곳에서 잠시 쉬어갈 참이다.

    ‘소맷자락에 숨겨오느라 힘들었는데… 잠시 쉬면서 마마 드시게 해야지.’

    혹시나 하여 챙겨온 주전부리를 생각하며 모퉁이를 돌았다. 한데 모퉁이 반대쪽에서 긴 행렬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마마, 누가 오십니다.”

    “누군데? 중전마마신가?”

    “음… 아! 대비마마이시옵니다.”

    고개를 앞으로 내빼고 바라보던 맹지가 냉큼 두화의 뒤로 가 고개를 숙였다.

    두화도 대비마마라는 소리에 황급히 예를 갖추고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대비가 두화를 바라봤다.

    곁에 있던 한 상궁이 조용히 아뢰었다.

    “대비마마, 동백궁 양원 마마이시옵니다.”

    한 상궁은 빠르고 간결하게 그동안 두화의 공적에 대해 조용히 아뢰었다. 조금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던 대비가 덥석 두화의 손을 잡았다.

    “어, 어찌 이러시는지요?”

    “네가… 천 가문의 여식이라고?”

    “…예.”

    잡은 손을 다독거리는 대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하는 말에 모든 이들이 놀라 당황하였다.

    “너와 너의 가문에… 미안하구나. 늙은 것을 용서해 주겠니?”

    당최 갑자기 이러는 저의를 몰라 두화는 당황스러웠다. 하나,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가문의 몰락에 대비마마 또한 연루되었었구나!

    “혹 저의 가문을 몰락시키신 분이 대비마마세요?”

    싸늘한 두화의 말에 대비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구나. 그저 내 아드님, 주상의 앞날에 도움이 될 자들과 손을 잡았던 늙은 것의 우매함 탓이겠지. 네 아비는 무척 강직하고 곧은 자였다.”

    “한데 어찌하여?”

    “그래서 문제였다. 너무 강직하고 곧기만 하면 부러진단다. 정치란 설령 가는 길이 달라도 안면을 바꿔서라도 백성과 주상을 위해 충심으로 행해야 하는 것을. 네 아비는 곧기만 하여 불손한 자들의 표적이 되었지.”

    부친의 곧은 성정은 익히 아는지라 두화도 수긍했다.

    “왕실의 어른으로서 당시엔 그들이 주상을 위한답시고 한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보며 함구했느니. 결국 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단다.”

    가만히 듣던 두화는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 후회한들 또한 용서한들 지난 과거가 그리고 당사자들이 저질렀던 모든 과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신다고 지난 것들이 달라지진 않지요.”

    “…!”

    제가 잡은 손을 놓고, 자신을 책망하는 듯 말을 하는 두화를 보며, 대비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흔들렸다.

    “하오나 소인은 이제 어엿한 왕실 사람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나날에 지난 과오를 반복하지 않아,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이들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 소인의 바람입니다. 하여 저하 곁에서 잘 보필하여 다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게 할 것이옵니다.”

    “암요, 암. 이 할미도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양원.”

    대비의 공대에 두화는 일순 당황하였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이제야 저를 왕실의 사람으로서 인정해 주신 것이다.

    “그래, 이번 불미스러운 사태 때문에 놀라진 않았습니까? 배 속 아이는 괜찮은 겁니까?”

    “예. 무사합니다.”

    “그래요. 다행입니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대비지만, 두화는 불편하기만 했다. 아직은 온전히 제 가문의 몰락과 연관된 자들을 용서한 것이 아니니까.

    잠시의 정적 끝에 두화는 먼저 자리를 벗어나려 예를 올렸다.

    “하면 살펴 가시옵소서.”

    “양원이 우리 왕실과 이 화월국을 살렸습니다. 주상과 중전을 지켜주어 고맙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요, 회임한 양원을 내 너무 붙든 것 같습니다.”

    “…살펴 가시옵소서.”

    대비마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두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곁에 있던 맹지가 궁금하여 물었다.

    “대비마마께서 변하신 것 같사옵니다.”

    “나도 그게 좀 이상해서… 반란군 대부분 대전과 편전, 그리고 중궁전에 몰려 있었을 텐데.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거지?”

    “어휴,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습니까? 대비마마가 이젠 우리 마마를 인정하시는데요.”

    손잡았던 좌의정 사람들의 대세가 기우니 제게 이러는 걸까?

    조금 전 분명 이젠 다 내려놓고 사신다고 했단 말이지.

    머릿속이 번잡해진다.

    ‘무슨 꿍꿍이 실까? 아니면 정말 마음을 바꿔 잡수신 건가?’

    도리질 치며 번잡한 생각을 떨친 두화는 몇 걸음 가지 못해, 또 걸음을 멈추어 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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