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84)화 (84/96)

84. 추국

추국장에서 새어나가는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벌써 사흘째 끊기지 않고 있다.

왕과 세자가 함께 추국하자, 그것을 지켜보는 대신들은 진땀을 흘렸다.

“으악! 아아악!”

혹독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설변도가 또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평소 권세를 앞세워, 그가 저지른 악행을 어림짐작 알고만 있던 이들은 그저 눈감아, 그의 비명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만큼 설변도의 모습은 처참하기만 했다.

문드러진 허벅지 사이를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로 주리를 틀던 형리가 왕의 손짓에 멈추었다.

“이제 너의 죄를 이실직고하겠더냐?”

근엄한 왕의 목소리가 비명만 가득 채우던 추국장에 울렸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힘겹게 고개를 든 설변도의 입에서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어이 네놈의 뼈를 드러내고, 육신이 갈가리 찢겨야 바른대로 고할 것이냐?”

왕의 서릿발 같은 호통에, 설변도는 피를 쿨럭 토하면서도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그 긴 시간 주상의 비위를 맞추며, 하지 못하는 일들 내가 모두 다 처리했소. 어디 한번 말해 보시오. 내가 아니었으면 작금에 이르러 조정과 나라가 이리 평안하겠소이까? 한데도 날 이리 취급해?”

듣다 못한 세자가 냉소를 지으며, 왕의 곁에서 물러나 죄인 가까이 다가왔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나라와 백성을 판 작자가 할 말은 아니군.”

“이보게, 사위….”

“닥쳐라, 뉘가 사위더냐?”

이를 갈며 더없이 차갑고 매몰차게 말하는 세자 때문에, 설변도는 힘겹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멍한 눈빛으로 세자를 바라보고 있는 여식의 눈빛에, 분노가 끓어오른다.

“싹수없는 놈.”

설변도의 막말에 고신을 가하던 형리가 몽둥이로 배를 가격했다.

“감히, 뉘게 망발이더냐!”

“으읏!”

고통스러워하는 설변도를 차갑게 내려다본 자한이 혀를 찼다.

“한심하군. 백성들의 고혈을 짜낼 땐 거침없던 자가, 왜 자신의 죄는 인정하지 못하고 내빼려는 건지.”

“난 죄가 없대도!”

“죄가 없긴! 그간 죄 없는 백성의 고혈을 빨아 사람 장사까지 하며 하다못해 나라까지 팔아 전쟁을 일으킨 죄! 양원을 화살로 쏘고, 또 독살로 해 하려 한 세자빈의 죄를 감추기 위해 감히 궁에 자객을 보내 양원을 죽이려 한 죄. 또한 감히 주상전하를 능멸하고 반란을 꾀한 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결국 같은 말만 또 되풀이하게 된다.

“증인이 있더냐? 증좌가 있더냐?”

“이미 세자빈이 양원을 해하려 했던 찻잔에 무색무취의 독을 어의가 찾아내었다. 또한 다른 죄에 따른 증인도 넘쳐나지.”

“헛소리 마라. 없는 것으로 음해하지 말거라!”

자한은 더는 시간을 끄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죄가 없는 자치고 증좌가 넘쳐나서 문제지. 여봐라, 증인을 데려와라.”

세자의 명에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금군을 보고, 설변도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증인은 무슨. 분명 깔끔하게 자결을 했… 저, 저놈이 왜!’

동백궁을 기습하라 명을 내렸을 때, 보낸 자객 중 하나가 포박당한 채 금군의 손에 이끌려 왔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객은 왕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떨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들어오니, 설변도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전하, 이자는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회임한 양원을 해하려 감히 궁에 침입한 자객이옵니다.”

세자의 말에 왕은 계속 말하라고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렸다.

“동백궁을 호위하던 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침입한 자객은 총 23명, 개중 산자는 모두 전하의 명에 하옥되었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그랬지. 하여 그때 궁 안 수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궁궐 수궁 대장에게 벌을 내리고 교체시켰느니라.”

“예. 하오나 망극하옵게도 배후를 알지 못하는 이상 자신들이 호위하는 양원이 잘못될까 싶은 생각에, 익위사가 이자 하나를 빼돌려 따로 가둬 두었다고 하옵니다.”

“뭐라?”

어찌 보면 죄인을 빼돌린 것에 오해를 살 수 있기에, 세자는 왕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 나갔다.

“소신이 알아본바, 하옥된 자들 중 일부는 자결하고, 개중 두 명이 탈옥했다고 들었나이다.”

“음….”

왕도 알고 있었던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빼돌려 감금했던 이자를 심문한 결과 배후는 좌의정이었나이다. 좌의정은 세자빈과 함께 회임한 양원을 해하려 한 것도 모자라, 능윤군을 겁박하여 반정을 도모했나이다.”

그때 설변도가 악을 쓰고 소리쳤다.

“저놈은 내가 보낸 것이 아니다. 난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어!”

아니라고, 자신은 아니라고 악을 쓰는 설변도를, 바닥에서 어이없게 바라보던 자객의 눈빛이 이내 원망스레 바뀌었다.

“소인이 비록 죄인이나, 검을 쓰는 자로서 거짓은 하지 않습니다.”

“좌의정은 네 주인이 아니라 하는데도 넌 할 말이 있더냐?”

세자의 말에 자객은 팔을 비틀며 뭔가를 하려고 하였다.

“저자의 팔을 잠시 풀어주어라.”

“하오나, 저하. 위험하옵니다.”

“예 있는 익위사와 금군 그리고 나도 있느니라. 팔을 잠시 풀어주어라.”

병사는 찜찜한 마음으로 자객의 팔에 묶인 포승줄을 풀었다.

한데 난데없이 자객이 본인의 팔뚝을 잡아 뜯는 것이 아닌가! 옷감이 뜯어지는 소리가 일순 들리고는 이내 고요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자객에게 집중되었다.

자객은 드러난 자신의 팔뚝을 들어 올리고 소리쳤다.

“이것이 좌의정 대감의 사람이라는 증좌입니다.”

가까이 다가간 자한이 그의 팔을 유심히 바라봤다.

팔뚝엔 교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모른다. 어디서 거짓을 말하느냐!”

끝까지 아니라고 소리치는 설변도를 향해 자객이 조소를 지었다.

“동백궁에 침입한 자객과 이번 반란에 함께하던 자들의 팔을 보면, 모두 나와 같은 표식이 있을 겁니다. 이 표식은 좌의정 대감을 따르는 순간부터 새겨져, 족쇄처럼 좌의정에게 충성을 바치는 의미로 새겨지는 거니까요.”

“좌익위는 당장 가서 반란군 중 어떠한 표식이라도 있는지 살펴보고 똑같이 그려오라.”

“예, 저하.”

잠시 후 돌아온 좌익위는 자객의 말이 맞는다며, 그려온 표식을 바쳤다.

“이리 증좌가 나오는 데도 아니라고 할 것인가?”

“그게 어째서 내 사람이라는 증좌인가? 날 음해하는 놈이 그리 몰 수도 있는 것을.”

설변도의 뻔뻔함에 자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좋다. 하면 능윤군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그 또한 나는 모른다.”

“하면, 능윤군이 말해 보시오. 좌상과 어떤 사이요?”

평정을 유지한 채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세자의 모습에, 능윤군이 예를 갖춰 겨우 입을 열었다.

“신, 능윤군. 주상전하와 세자 저하를 뵙사옵니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이리 얼굴을 보여드리매, 송구하옵니다.”

“오래간만이구나, 능윤군. 과인도 궁금하구나. 어찌 이번 일의 핵심에 네가 끼었는지 말이다.”

왕의 하문에 능윤군은 더욱 바닥에 고개를 내리고 답하였다.

“신은 그저 유약한 몸으로 왕족이라 누리는 것들에, 주상전하께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 뿐이옵니다. 하온데 최근 저자를 따르는 무리가 신을 찾아왔었나이다.”

설변도를 가리키며 능윤군은 말을 이어갔다.

“이 나라는 이제 곧 무너질 거라고, 하여 새로운 왕이 나라를 재건하여야 한다고 말이옵니다.”

“뭐라!”

격분한 왕이 소리치자 지켜보던 대신들은 움찔 놀라, 왕의 눈치를 살폈다.

“소신은 듣자마자 그들을 제집에서 내쫓았나이다. 전하께 불충한 마음이 아니고서야 그런 망극한 말을 더는 듣고 있을 수 없었나이다.”

능윤군의 말에 대신들은 웅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온데 그걸로 끝인 줄 알았더니, 그 뒤 검을 들고 찾아온 저자가 겁박하더이다. 반정을 도모할 것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이옵니다.”

“흠!”

왕의 탄식에 능윤군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더는 허튼소리로 들리지 않아, 고변하려고 하였나이다. 하나, 저자의 사병이 집 주위는 물론 제 침소까지 지키고 있어,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나이다. 미리 아뢰지 못한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주상전하.”

정녕 설변도의 제안에 아무런 사심이 없었을까?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능윤군을 바라보는 왕의 눈빛이 가늘어진다.

“소신, 이날 이때 그 어떤 가문과도 교류가 없었으며, 그저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은 보살핌에 만족하며 살고 있나이다. 또 앞으로도 그리 살고 싶은 생각뿐이옵니다.”

고개도 들지 못한 능윤군이 읍소하였다.

몸이 유약하니 마음이라도 편히 살고 싶은 것이라고, 대신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하지만 왕은 일말의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능윤군을 꿰뚫어 보듯 바라봤다.

자한은 왕을 향해 공손히 말을 했다.

“전하, 이번 일은 능윤군과는 관련이 없는 듯 보이옵니다.”

“확실치 않다. 철저하게 조사한 후 그때도 관련이 없다면 보내주거라.”

“예, 전하.”

좌익위에 이끌려 능윤군은 추국장을 나갔다.

자한은 다시 설변도 앞에 섰다.

“증좌는 넘치도록 있는데도 아직도 인정을 못 하는 것이냐?”

“…”

‘저 자리에 내가 앉아있어야 하거늘!’

벌써 며칠이나 혹독한 고문을 받아서 몸이 쇠약해졌다. 그저 왕이 있는 곳을 노려보던 설변도는 안타깝게 놓친 왕의 자리에 몹시도 분하고 억울할 뿐이다.

“세자의 후궁을 해하려 했고, 능윤군을 앞세워 반정을 도모하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홀로 반란을 일으켰지. 또한 자신의 이득을 위해 성라국과 손잡고 나라와 백성을 팔아버렸다. 그 덕에 수많은 화월국 병사와 백성들과 개방 사람들이 죽었다.”

냉랭한 세자의 말에 설변도는 피식 웃으며, 입 안에 고인 핏물을 세자에게 뱉어버렸다.

-퉤!

아청색 곤룡포에 검붉은 핏물이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형리가 몽둥이로 설변도를 때리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다.

그저 련하만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리며 맞고 있는 부친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저러다 죽을까 싶어, 세자에게 애원했다.

“저하, 아버지를 살려 주시옵소서. 저러다 돌아가십니다.”

핏기없는 야윈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더없이 안쓰럽다. 하나, 자한은 그 모습이 더 거슬리고 마땅찮았다.

“하면, 감히 이 나라 국본인 내 의복에 한낱 죄인이 이런 짓을 하고도 살길 바란단 말인가?”

핏물이 얼룩얼룩 생긴 곤룡포 자락을 들어 보여줬다.

‘참으로 냉랭한 분이구나. 끝까지 내게만 차가운 분….’

그의 매몰찬 모습에 련하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전하, 죄인이 자복하지 않사오니, 오늘은 이만하심이 어떠시옵니까?”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하였다.

“죄인들을 옥에 가두어라. 누구도 함부로 죄인을 만날 수 없게 하고, 철저하게 감시하라.”

“예, 전하.”

쿨럭 피를 토한 설변도가 쉰 소리로 힘겹게 말하였다.

“그리 죄인이라고 떠드니, 차라리 그냥 죽여라.”

그 말에 피식 조소를 지은 자한이 설변도만 들을 수 있게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누구 좋으라고? 당신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죄 없는 수많은 백성이 그 끔찍한 전쟁터에서 죽어 나갔어.”

“그러니 당장 죽이라고!”

“아니! 죽은 백성의 원혼 하나하나 그 한이 풀릴 때까지, 그대의 목숨이 살아 있는 그 날까지, 매일 그리 고통스럽게 비루한 목숨을 연명해 봐, 어디.”

“국본이라는 놈이 이리 잔인… 윽!”

나불거리는 그 턱을 세게 움켜쥔 자한은 금방이라도 죽일 듯 설변도를 내려다봤다.

“그러게 왜 날 건드려? 여식이 있으면서 어찌 회임한 내 후궁을 해할 생각을 했지?”

“우리 세자빈 마노라에게 걸림돌이 되니까.”

“걸림돌이라. 애초 그대의 여식과는 합방도 치르지 않은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이다. 내 여인은 오로지 양원뿐이다.”

혼인한 지가 언제인데 여태 합방도 치르지 않았다니!

괘씸하고 분하고, 여식을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진다.

“이이!”

“그대가 저지른 짓, 그 어느 것 하나 가벼운 죄가 없더군. 그것에 대해 다 속죄하고 죽으려면 각오해야 할 거야. 아, 자결은 생각도 하지 마라. 자결하는 순간 그대의 여식이 모든 죄를 뒤집어쓸 테니까. 하물며 오명까지도 말이지.”

“…!”

흔들리는 설변도의 눈빛을 보고 나서야, 자한은 그를 거칠게 놓고는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마치 더러운 것을 박박 닦듯 설변도 앞에서 손을 닦아냈다.

“여봐라, 혹여 자결할지도 모르니 죄인의 입에 자갈을 물리고, 철저히 감시하거라.”

“예, 저하.”

***

잠시 뒤 옥에 하옥된 설변도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어 겨우 벽에 기대어 앉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병조판서 김윤석이 앓는 소리로 말을 걸었다.

“대감, 역시나 우린 끝난 겁니까? 다른 방도는 없습니까?”

그의 말에도 설변도는 함구한 채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옥사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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