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34)화 (34/96)
  • 34.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세자궁으로 돌아와서도 입 꾹 다물고 저를 노려보는 두화의 시선을 자한도 피하지 않고 받아냈다.

    “계속 그리 있을 테냐?”

    “…하면 방도를 찾아, 내보내 주셔요.”

    “지금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하니, 조금만 기다려 보거라.”

    “기다리면… 뭐가 달라져요? 그 사이 소문은 더 퍼질 테고, 소문은 다른 이야기까지 덧붙여져 퍼질 거라고요. 그걸 어찌 감당하시려 그러시냐고요?”

    “감당이라… 까짓것 감당하면 되지 않겠느냐? 내가 널 연모하는데 뭐가 문제란 말이더냐?”

    세자가 웃는다.

    두화는 심각해 죽겠는데 눈앞의 그는 뭐가 그리 여유로워서 웃느냐 말이다.

    화가 난다.

    저 혼자만 답답해하고, 걱정하고 미칠 노릇이다.

    “저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에요. 저는 저하를!”

    보란 듯이 제 손을 마주쳐대는데, 순간 그가 상체를 쑥 내밀어 다가왔다.

    “그래, 말해 보거라. 너는 나를 어찌 생각한다고?”

    그 바람에 놀라 할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그게.”

    “아, 먼젓번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날 싫어하지 않는다고.”

    “그, 그렇다고 좋아한다고도 안 했거든요!”

    톡 쏘아붙였다.

    “안다. 싫어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날 좋아해 줄 기회가 더 많다는 거겠지.”

    아니, 왜 말이 그렇게 흘러가는데요?

    따지고 싶지만, 어느새 다가와 볼에 닿은 그의 숨결 때문에 자꾸만 전날 그와 입맞춤한 것이 떠오른다. 오히려 제 숨이 더 가빠졌다.

    “얼굴이 빨갛구나.”

    “그, 그야!”

    “두화야, 입 맞추어도 되겠느냐?”

    남녀가 입 맞추는 그런 남사스러운 짓을 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지!

    듣고 있는 두화는 자신이 더 당황스럽고 부끄러워 죽겠다.

    ‘뭐, 언제는 물어보고 입을 맞췄다고… 아, 이게 아니잖아 지금!’

    냉큼 정신을 차려 제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꾹 막았다.

    두 눈 동그래져서는 입술을 꼭꼭 감춘 그녀를 보고 자한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쉬운 대로 콧잔등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젠 동백궁에 가야 할 것이다. 하나, 너무 염려 말아라. 내 믿을 수 있는 궁인을 내어줄 테고, 수시로 네게 가마.”

    “아니요, 오지 않아도 좋으니까 제발 나갈 수 있는 방도만 찾아주세요. 아셨죠?”

    두화의 말은 한 귀로 듣고 이미 한 귀로 흘려버린 자한이다. 현재로는 궁이 제일 안전하기에 내보내 줄 생각 따위 없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세자궁에 연통을 넣거라.”

    “여기서 또 무슨 일이… 생겨요?”

    저도 모르는 사이 궁에 들어와, 난데없이 후궁에 봉해진 이 어이없는 일 말고도 여기서 더 무슨 일이 생길까! 하지만 뭔가를 염려하는 세자의 눈빛에 두화도 조금은 불안하다.

    “별일은 없겠지만… 아니다.”

    자한은 문을 열고 궁녀 맹지를 불렀다.

    “맹지야, 오늘부터 동백궁으로 가 소훈을 잘 보필하거라.”

    “제가 갑니까, 저하?”

    “어째 평소보다 목소리가 큰 것 같구나.”

    “아휴. 제 목소리가 평소와 뭐 다를 것이 있다고 그러시옵니까, 저하.”

    드디어 세자궁을 벗어나는구나!

    속으로 쾌재를 부른 맹지는 티 내지 않으려고 입꼬리를 단속했다.

    “내 널 제일 믿지 않느냐. 하니, 종6품 수규로 내 여인을 지켜다오. 명이다.”

    세자궁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겠거늘, 수규란다.

    “수, 수규요?”

    언감생심 생각도 못 한 큰 상이기에 맹지는 멍하니 세자를 바라봤다.

    “그래. 하니, 누구에게도 내 여인이 다치지 않게 네가 곁에서 보필하며 먼저 내게 알려줘야 하느니. 할 수 있겠느냐?”

    “예. 맡겨주시옵소서.”

    세상에, 세자궁의 궁관 중 제일 높은 수규로 승격되었다.

    기분이 오지게 좋구나!

    에헤야 디야!

    ***

    동백궁 가는 길, 맹지는 밝은 모습으로 두화를 모셨다.

    하나, 어느새 동백궁에 다다른 두 사람 모두, 입구에서 허망한 표정으로 안쪽을 바라만 봐야 했다.

    “저기, 여기가 당분간 내가 지내야 할 곳이 맞나요? 을씨년스러운 것이 꼭 폐가 같은데?”

    “마마, 소인은 마마께옵서 부릴 사람이옵니다. 말씀을 낮추소서.”

    “아, 그래요. 차차 그럴게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예. 근데 여긴… 하이고, 환장하겠네.”

    막막하기만 한 현실에 맹지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비쳤다.

    “죄송하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이해해요.”

    겨우 세자궁을 벗어났는데, 어째 귀신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폐가로 온 것 같다. 동백궁이 폐쇄된 궁이긴 하나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마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소인이 냉큼 저하께 가서 상황을 말씀드리고….”

    “아니, 괜찮아요! 뭐, 비바람만 피해도 사람은 살 수 있다잖아요? 그냥 비와 걸레만 가져다줄래요?”

    그가 알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여길 대대적으로 손보려고 하면 사람이 몰려들 테지. 그럼 나에게 이목이 더 쏠릴 테고! 으윽….’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질거린다.

    ‘차라리 내가 손수 치우고 말지.’

    어차피 당장 나가지 못하면 남는 것이 시간이다. 그리고 막말로 대충 치우더라도 다리 밑 움막에 비하면 무척 훌륭한 곳이다.

    “예? 설마 여길 손수 치우시려고요?”

    “심심한 것보단 치우면서 몸도 움직이니 좋지 않겠어요?”

    “마마….”

    “음, 얼른 비하고 걸레 좀 가져다줄래요? 참, 그쪽 이름은 뭐예요?”

    맹지는 예를 취하며, 제 이름을 말하였다.

    “맹지, 이름이 귀엽네요. 난 두화라고 해요.”

    “마마, 궁에는 예법이 있사옵니다. 웃전 계신 곳에서 지금처럼 소인을 허물없이 대하신다면 웃전에서 경을 칠 것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여기 다 치우고 맹지가 그 예법인지 뭔지 가르쳐 줘요. 내가 배우는 건 또 금방 배우거든요.”

    “예, 마마.”

    비와 걸레를 구하러 가며 맹지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렇게 세자궁을 벗어나고 싶어 하던 제가 한 시진도 안 되어, 그 빌어먹을 세자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잠시 후 맹지는 자신의 예상대로 한없이 순수한 후궁 마마와 함께, 폐가에 가까운 동백궁을 쓸고 닦느라 진땀을 뺐다. 두 시진도 넘게 털고 쓸고, 버릴 것을 치우고 나니 그제야 사람이 살아도 될만한 공간이 되었다.

    “아, 이제 좀 배가 고프네.”

    “마마, 소인이 얼른 낮것을 준비해 올릴게요.”

    “에? 같이 일하느라 힘들었는데, 어디 가서 음식을 해 온다고 그래요?”

    “따로 궁인을 더 배정받은 것이 아니라서 소인이 준비해야 하옵니다.”

    저 때문에 엄한 사람이 괜한 고생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음… 그럼, 같이 할까요?”

    “예?”

    정말이지, 너무 순수하게 웃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후궁 마마 때문에 맹지는 기운이 빠진다.

    “아, 아닙니다. 그리하시면 소인이 벌을 받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혼자 동백궁을 나가는 맹지를 뒤쫓던 두화는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무리의 궁인과 사림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에 맹지도 걸음을 멈추었다.

    사림은 전날과 달리 제게 예를 갖추고는 궁인들을 동백궁에 들게 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동백궁 안을 장악한 궁인들이 뭔가를 하기 시작하였다.

    “저기, 지금 뭐 하시는 건지….”

    “마마, 세자 저하께서 하명하신 일이옵니다. 준비한 것들을 빼 오느라 시간이 걸렸다고 미안하다 전하시라 하셨습니다.”

    안쪽 상황을 살펴보고 나온 맹지가 웃으며 다가와 속닥였다.

    “마마께 필요한 자개장과 일단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의복을 준비했습니다. 차후 마마의 첩지에 맞는 의복이 내려질 것이옵니다. 그동안만 입고 계시라 하셨나이다.”

    “딱히 필요가… 금방 나갈지도 모르는데 저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라고.”

    두화의 혼잣말에 맹지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마, 그런 말씀 마시어요. 궁에는 듣는 쥐가 많답니다. 행여 그런 말이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나옵니다.”

    “…!”

    “이미 저하의 승은에 동백궁을 하사받으셨고, 웃전에 고하였으니 마마께옵서는 이제 사사로이 궁을 마음대로 나가실 수 없으십니다. 웃전의 허락 없이 출궁하시면 크게 경을 치실 것이옵니다.”

    그게 그렇게 큰일 날 일인가 싶다가도 사색이 되어 말하는 맹지를 보니, 갑자기 얹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사림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지금은 예 계시는 것이 마마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니,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저하께서 말씀은 차갑게 하시나, 백방으로 방도를 찾고 계십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하문하시옵소서.”

    “그날 자객들이 노리던 사람이 혹 저였을까요?”

    “…”

    사림은 말을 아끼었다.

    두화에게 함구하라는 세자의 명이 있었다.

    “말씀이 없으신 걸 보니 맞나보네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긴 궁이니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겁니다. 다만.”

    여기 사람들은 무슨 말만 하면 이리 진지하게 말꼬리를 자르고 주위를 경계하는지 모르겠다.

    “마마의 곁에 있는 수규 말고는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어찌 보면 궁 밖 자객들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이곳 여인들입니다. 드시는 것 또한 맹지 수규가 드리는 것 외엔 드시지 마십시오.”

    “…”

    ‘그러니까 지금 자객을 피하려고 궁으로 데려왔는데, 궁 안 여인들이 더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거잖아.’

    그런데 천한 저를 왜 노리는 걸까?

    보물 같은 귀한 것도 없는 저인데 왜 절 죽이지 못해 안달이지?

    ‘밖은 자객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궁 안에서는 누가 왜 날 노리는 거지? 아, 머리 아파.’

    “매일 같은 시각에 먹거리 재료를 소인이 직접 가져올 것입니다.”

    “예.”

    “소인은 세자익위사의 우익위입니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혹 마마를 노리는 자객이 있다면 이걸 부십시오. 주위에 몸을 숨긴 세자익위사들이 지켜드릴 것입니다.”

    청옥으로 만든 작은 피리였다.

    주는 것이니 받긴 하지만, 방금 들은 것들로 머릿속이 어질거린다.

    반 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모두 돌아갔다.

    “마마, 이제야 제 모습을 갖췄네요. 오르시지요.”

    작은 계단을 올라 아담한 마루에 오르자, 차를 즐길 수 있는 공간에 두화는 냉큼 가 앉아보았다.

    작게 웃는 맹지를 보고 두화도 웃으며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길게 내려진 구슬발을 치우고 안쪽으로 들어선 두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사한 비단으로 둘러싸인 보료와 장침, 그리고 방 구석구석에 놓인 반짝이는 자개장까지 아까 그곳이 맞는지 싶을 정도다.

    하늘거리는 얇은 천을 젖히고 창을 열자, 따사로운 햇살이 고스란히 안으로 들어찼다.

    “그러지 않아도 당장 찢어진 창은 어찌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는데, 죄 발라주고 갔네요. 어머, 꽃잎까지 넣어서 발랐사옵니다.”

    “그러게, 예쁘네요.”

    “아 참, 시장하시다 하였는데 정신없다 보니… 얼른 차려오겠나이다.”

    맹지가 나가고 나자 두화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기품있고 깨끗한 방이지만, 어쨌거나 나갈 때까진 당분간 예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숨이 막히는 것만 같다.

    ‘무영 오라버니한테라도 소식을 전해야 아버지께서 걱정하지 않으실 텐데… 아까 그분이 또 오면 대신 전해달라 청해봐야겠어.’

    마음을 다잡은 두화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당차게 문을 열고 나갔다.

    맹지가 어디 갔나 두리번거리다가 침소 뒤쪽에서 콜록대는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향했다. 연기만 나는 아궁이 앞에서 연신 기침을 하며 불을 피우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보아하니 밥도 처음 지어보는구나, 이 아이.’

    다가가 맹지의 손에서 부채를 가로채며 쭈그리고 앉았다.

    “콜록, 마마. 어찌 나오셨사옵니까?”

    “잠깐만 옆으로 비켜봐요. 내가 해 볼 테니.”

    “아이고, 이런 험한 일을 어찌 마마께옵서 하시옵니까? 소인이… 엄마야!”

    두화는 맹지를 슬쩍 옆으로 밀었다.

    연기 때문에 눈도 못 뜨겠는데, 이 아이 말이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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