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33)화 (33/96)
  • 33. 왜, 하필 저입니까?

    세자의 말에 중전도 대비도 놀라 쳐다봤지만, 궁을 나가는 줄 알고 자한을 무작정 따라나선 두화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어리둥절 바라봤다.

    “세자, 이 할미는 법도를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자의 청이라고는 하나 내명부에도 엄연한 법도가 있습니다. 더욱이 세자의 곁에 있어야 할 여인이라면 그에 걸맞은 신분이어야 하고, 또한 규수다운 면모와 총명한지도 봐야 합니다.”

    “예. 알고 있사옵니다. 하여 청하는 것이옵니다.”

    “그래요?”

    “이 아이에 대한 신분은 차후 올리겠나이다.”

    신분!

    가늘어진 눈빛으로 세자를 본 대비가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우리 세자가 아직은 상대를 대적하기엔 미숙하구려. 이미 저 아이가 천것이라는 것 정도는 이 할미가 다 아는 것을요.’

    이내 대비의 구깃구깃하던 미간이 순간 펴지며 온화한 웃음을 보였다.

    “세자, 내 이 자리에서 저 아이의 신분을 듣고 싶은데 아니 되는 것이오?”

    “이 아이는 변방의 몰락한 귀족으로 할마마마가 들으셔도 모르실 것이옵니다. 하여 그 가문에 대한 것을 적어 올리겠다 한 것이옵니다. 혹 소손을 믿지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이번엔 자한이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대비를 바라봤다. 본래 세자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대비인지라 그 미소 한 번에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세자가 그리한다면 해야죠. 이 할미가 우리 세자를 믿지 누굴 믿습니까?”

    ‘그래요. 한번은 이리 넘어가 줘야죠, 이 할미가. 하나, 뒤에 닥칠 일을 생각하면 우리 세자의 심기가 불편할까 싶어 벌써 이 할미가 걱정이 많습니다, 그려. 분명 나중에 깨달을 것입니다. 세자에게 격 있는 여인이 더 어울린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면 신분은 보장되었고, 지금까지 이 아이의 행실에서 예법에 맞지 않는 것이 보였나이까?”

    “음, 딱히 없군요.”

    두화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부글대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제발 얼른 이곳에서 나가기만을 바라였다.

    ‘언제 예법에 틀리게 말할 틈이나 행동하게끔 시간이나 줬나? 난 또 궁을 나가는 줄 알고 따라나섰건만. 영문도 모른 채 앉아있느라 내내 다리에 쥐가 나 죽겠는데! 그나저나 이 망할 저하 같으니. 내가 무슨 후궁이야, 후궁은!’

    어째 점점 일이 복잡하게 꼬이는 것만 같다.

    더 늦기 전엔 궁을 나가야 할 것 같다. 뭔가 불길한 기분이 전신을 에워쌌다. 하여 대비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제발, 안 된다고! 당장 내보내라고 해주세요. 그리만 해주시면 마마의 은혜 잊지 않고, 궁을 나가면 마마께서 무탈하게 장수하시라 부처님께 기도드릴게요, 네!’

    “세자, 그래도 그 아이에 대한 것은 차후 다시 논하는 것이….”

    옳거니!

    두화는 제 간절한 마음이 대비에게 전해졌다고 생각해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하나, 문제는 아무래도 대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할마마마. 소손, 간밤 이 아이에게 승은을 내렸사옵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대비와 중전의 얼굴은 그야말로 굳어졌다.

    승은을 입었다면 그냥 내치지 못 할 일이다. 혹 왕손을 잉태할 수도 있음이니 기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참으로 못마땅하다.

    대비는 속으로 좌의정을 신랄하게 욕하였다.

    ‘어찌 그리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지 못하는 것인지 원. 간밤 데려온 저 아이가 바로 그동안 세자를 홀린 천것일 터인데. 하이고, 벌써 승은까지 입었다니!’

    그제야 천천히 두화를 훑어보는 대비의 눈빛이 날카롭다.

    ‘비록 천것이나 딱히 천박하거나 요물처럼 보이진 않는데… 아니지. 우리 세자를 홀렸으니 요물이 맞지, 암. 그나저나 저것을 어찌 내쳐야 우리 세자가 이 할미를 원망하지 않으려나.’

    대비가 생각에 잠겨 있자, 중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 저 아이가 세자의 승은을 입었다면 쉬 내칠 수 없음이니, 일단 종5품 소훈으로 봉하여 지켜보심이 어떠하실는지요?”

    “중전, 그래도 우리 세자빈이 놀랄까 걱정이구려. 갑자기 후궁이라니!”

    세자가 세자빈에게 차갑게 대한다는 것을 대비도 모르지 않는다. 하여 제 아비와는 전혀 다른 그 여리고 선한 세자빈이 가슴앓이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 걱정이 된다.

    “소첩 또한 세자빈을 아끼지만, 이번 일은 세자빈도 이해해야지요. 왕가에 후손이 얼마나 중한 일이옵니까? 하오니 지금은 소훈에 봉하시어 첩지를 내리심이 좋을 듯싶사옵니다.”

    중전의 말을 가만히 듣던 대비는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어쩌면 저 천것을 세자의 곁에서 떼어내려 했던 일조차 이미 세자가 알고 있진 않을까? 여기서 괜히 세자의 의견을 누르고, 눈앞의 저 천것을 강압적으로 내치기라도 한다면 세자는 저를 원망하고,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이 작은 일이 훗날 세자를 어찌 변하게 할지 모르기에, 대비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바로 해 세자와 천것을 직시했다.

    “좋습니다. 저 아이를 동백궁으로 보내고, 소훈으로 봉하되!”

    하필이면 동백궁으로 보내다니!

    “할마마마, 동백궁은 폐쇄된 궁인 줄 아옵니다. 다른 궁을….”

    “세자, 후궁의 거처로 쓸 수 있는 궁이 당장 동백궁밖에 없구려. 다른 거처를 마련할 때까진 못마땅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대비의 입술 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을 본 자한의 미간이 잠시 꿈틀댔다.

    “세자빈과 합궁 일을 잘 지키세요. 이 할미는 하루라도 빨리 이 삭막한 궁 안에서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세자. 하니, 혹여라도 저 아이 때문에 지어미인 세자빈을 소홀히 여기지 마세요, 아셨습니까?”

    대비는 차라리 잘 되었다 여겼다.

    그간 합방을 하여도 번번이 세자빈을 내치거나 합궁을 하지 않았다 했다. 세자가 좌의정을 싫어하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총명하고 어여쁜 세자빈이 제 아비 대신 미움을 받는 것은 억울한 처사다.

    하여 할미로서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매번 세자는 논리적인 말로 잘도 빠져나갔다.

    ‘그래,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세자빈과 합궁이 잘 이루어지고, 그간 데면데면했던 부부 사이도 좋아진다면야 저깟 천것 하나 더 궁에 있다고 뭐 대수겠는가.’

    어찌 되었든 세자빈과 합궁만 하면, 금세 왕손이 생길 터이니 조금은 언짢던 심기가 풀렸다.

    “세자, 어찌 답이 없습니까?”

    어서 빨리 답을 내놓으라 재촉한다.

    두화만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한발 물러나는 것쯤이야….

    자한은 이를 악다물고 답하였다.

    “예, 할마마마 말씀대로 하겠나이다.”

    “그래요, 그래. 아, 그리고 거기.”

    이번 화살은 두화를 향했다.

    “예…?”

    두화는 어려서부터 부친이 가져다준 서책 말고도, 시전에서 유행하는 왕실에 관한 연서를 다룬 소설을 꽤 읽었다.

    ‘그래, 소설 속에 뭐 별거 없었잖아. 그냥 하였나이다, 했사옵니다, 하시옵소서, 송구하옵니다, 그리 말만 조금 조심스럽게 하면 되겠지.’

    “아, 송구하옵니다. 하문하시옵소서.”

    소설 속, 어투를 떠올려 냉큼 조신하게 답하였다.

    ‘하문이라… 고운 의복을 걸쳤다고 천것이 잘도 귀족 행세를 하고 있구나.’

    “세자의 총애를 믿고, 언행에 있어 자중하지 못하고 경거망동한다면, 궁의 법도대로 엄히 널 가르칠 것이다. 알겠느냐?”

    “…예.”

    두화는 당장이라도 궁을 나가고 싶은데, 이 방에 들어온 뒤 개벽할 일만 생겨난다. 당장 후궁은 뭣이고, 또 엄히 절 가르친다니 당최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제 앞에 꼿꼿하게 등을 세우고 앉아있는 세자가 미울 뿐이다.

    “또한 웃전에게 아랫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도리를 지켜야 하며, 특히 세자빈을 웃전으로 잘 섬겨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차라리 저하와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 나가게 해달라 청해 볼까?’

    결단을 내리지 못해 주저하는 사이 대비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게냐?”

    벽력같은 호령이 침소를 우렁우렁 울렸다.

    두화는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이럴 땐 무조건 넙죽 엎드리는 것이 상책이다.

    “송구하옵니다. 감히 높으신 어른을 뵈니 몸 둘 바를 몰라 긴장하였나 보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바닥에 정수리만 보일 정도로 납작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모양새가 퍽 나쁘지 않았다. 대비는 제 분수를 알고 알아서 몸을 낮추는 두화가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구나. 그래, 이번엔 너그러이 용서하지만, 차후 웃전을 모실 때는 실수를 반복해서는 아니 될 것이니,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나이다.”

    ‘아휴, 이게 아닌데….’

    “궁 안엔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많다. 하니, 너의 그릇된 말과 행동 하나에도 자칫 목이 달아날 수 있으니, 평온하게 살고 싶다면 항시 분수에 맞게 조심 또 조심하거라. 알겠느냐?”

    “명심하겠사옵니다.”

    대비가 세자빈을 걱정하여, 감히 분수에 어긋나는 행동과 말을 하지 말라고 압박하는 것을 두화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일어난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반박하고 싶지만, 저를 짓누르는 압박감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대비궁을 나와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 두화는 앞서가는 세자의 앞으로 나아가 가로막아 섰다.

    “어찌 그리 씩씩대는 것이냐?”

    “지금 그걸 몰라 물으세요?”

    “아!”

    “아? `아!` 요?”

    정말 화가 난 모양이다.

    “음. 어쩔 수 없었다.”

    ‘나로서는 널 지키려면 이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 또한 널 이리 곁에 두고 싶진 않았다. 제대로 내 옆에 두고 싶었단 말이다.’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하는 제 심정도 알아달라고, 자한은 두화의 귀밑머리를 넘겨주려 손을 뻗었다.

    하나, 두화는 한발 뒤로 물러나서는 도리질 치며 거세게 반박하였다.

    “어쩔 수 없었다니요? 그걸 말이라고! 대비궁에 가기 전에 저를 궁에서 내보내셨어도 되셨을 일이잖아요. 일이 이렇게 커져 버렸으니, 이제 정말 어쩌면 좋아요?”

    원망을 쏟아내는 두화를 가만히 보던 자한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그녀의 눈가를 쓱 문질러 주었다.

    “울지 말아라. 네가 울면 내가 아프다, 두화야.”

    “…하면, 내보내 주셔요. 집에 가고 싶어요, 저하.”

    “…미안하구나.”

    “저하!”

    “이미 웃전에서도 알고, 널 소훈으로 봉해 동백궁까지 하사받았으니 돌이킬 수 없다.”

    뻔뻔하게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두화는 눈가를 훔쳐주는 세자의 손을 툭 쳐냈다.

    “어째서!”

    “…”

    “어째서 하고많은 여인 중에 하필이면 노비들도 쳐다보지 않는 천한 저인데요? 왜요? 왜!”

    분명 조금 전, 궁엔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있으니 행동거지에 조심하라는 대비의 경고에도 두화는 분하고 화가 나 소리를 바락 질렀다.

    ‘날 먼저 잡은 것은 너였느니.’

    “…이젠 돌이킬 수 없으니 받아들여라, 두화야.”

    싫다고, 고개를 가로저은 두화는 감히 세자인 그의 가슴을 때리며 울었다.

    “저하가 미워요, 밉다고요! 왜, 왜 일을 이리 만들어요? 왜….”

    자한에게 실망과 분노를 느낀 두화는 끝도 없이 올라오는 울화를 모두 그의 가슴에 쏟아냈다. 그런 두화를 진정시키느라 자한은 그녀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한편 멀리서 대비궁으로 오던 세자빈이 이 광경을 목격하였다.

    여인의 투기는 금기라 배웠다.

    하나, 저 아닌 다른 여인을 다정하게 품에 안고 있는 지아비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훤한 이 시각에, 감히 세자의 존체에 손을 대는 여인을 세자는 그저 안아주려고만 한다.

    커다란 손과 너른 가슴에 안겨 있는 저 여인이 부럽다.

    제겐 한 번도 보인 모습이 없는 새로운 모습, 그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저였다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할 텐데. 부러움은 이내 분노를 더욱 활활 태워 저를 악독하게 내몰았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던 련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돌아가자꾸나, 초아야.”

    “마노라, 대비궁으로 가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은 다른 걸 먼저 좀 해야겠구나.”

    암울해 보이던 얼굴에 어쩐지 미소까지 지으니, 초아는 윗전의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아 기뻐 물었다.

    “어? 이젠 좀 괜찮으십니까? 아까만 해도 낯빛이 안 좋으셔서 금방이라도 쓰러지실 것 같아서 이년 걱정했사옵니다.”

    윗전의 상처를 알기에 초아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종알댔다.

    “그랬느냐? 역시 내겐 너밖에 없구나. 네가 걱정하지 않게 돌아가면 뭐라도 먹어야겠다. 준비해주련?”

    “예, 알겠사옵니다.”

    “아, 그리고 다른 아이를 시켜 오늘 아침 대비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은밀하게 알아봐다오.”

    “염려 마십시오, 마노라.”

    몸을 돌이키는 련하의 얼굴엔 차가운 미소가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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