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10)화 (10/96)
  • 10. 그 녀석이 여인이었다고?

    풍시전 안을 둘러보려면 하루가 모자랄 판국에 시전에도 널린 포목점을 예서 왜 찾는 거야?

    하여간 이상한 사내다.

    두화는 고개를 절레거리며 구슬발을 헤치고 들어갔다. 화려하고 예쁜 색감의 비단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고, 군데군데 이미 만들어진 의복도 걸려 있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찾는 옷감이라도 있으십니까?”

    자한의 의복을 한 번에 훑어내린 주인장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띠었다. 주인장이 물어도 대꾸하지 않은 자한의 눈길은 포목점 안 걸려 있는 여인의 의복에 가 있었다.

    “아, 혹 정인 되시는 분께 선물하시려고요? 그럼 잘 오셨습니다. 저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만들어진 의복이 더 있습니다.”

    정인이라는 말에 자한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하지만, 귀태가 흐르는 자한의 모습을 본 주인장은 봉 잡았다는 생각에, 그런 그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안쪽으로 이끌기 바빴다.

    얼떨결에 끌려들어 간 공간엔 좀 전에 봤던 의복과는 다른 고급스럽고 기품있는 색감의 의복이 걸려 있었다.

    “여기 있는 10벌은 정말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궁에서도 못 구합니다.”

    “저거.”

    부채가 가리킨 것을 본 주인장의 입술이 헤벌쭉 늘어졌다.

    “아이고,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여기에서 최고로 비싼 것입니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 놓은 것들이 살아 살랑거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공간에 발 들일 때부터 눈에 딱 들어온 의복이다.

    살굿빛이 감도는 저고리와 연한 초록색의 치마는 딱 두화와 어울렸다. 더구나 저고리 끝동을 잇는 다른 색감의 천위에서부터 치마 아랫단에 퍼진 작고 수수한 흰 꽃 수가 마치 그녀가 사는 개울가에 핀 꽃 같았다. 그래서 더 이 옷이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서 갈아입어도 되겠지?”

    “그럼 물론입니다. 한데 입으실 분이 좀 늦게 오십니까?”

    자한의 뒤로 고개를 쭉 빼고 봐도 같이 온 허름한 차림의 종 말고는 없었다.

    “그 의복은 예 놓고, 계산할 터이니 나가세.”

    “…!”

    주인장은 영문을 모르니 그저 따라 나갔다. 나가는 중간 제 뒤를 따라 나오는 두화를 향해 몸을 홱 돌이킨 자한이 눈빛을 내리깔았다.

    “넌 왜 따라와?”

    “예? 왜긴 왭니까? 저 끌고 오신 분은 나리신데, 벌써 잊으셨어요?”

    “넌 도로 들어가서 아까 그 옷이나 입고 나와.”

    “예?”

    도로 물어도 얼른 들어가라는 고갯짓만 한다.

    설마!

    “…저리 귀한 옷을 제가 어찌 입어요? 나리도 참.”

    “정 그리 뻗대면 내 직접 입혀주랴?”

    그의 말에 두화가 놀라 손사래를 쳤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냉큼, 방금 나왔던 공간으로 달려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런 두화의 행동에 자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다 내려왔다.

    잠시 후 쭈뼛거리며 나오는 두화를 본 주인장의 눈이 놀라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아이고, 세상에. 아까 그 지저분한 거지 녀석이… 계집이었습니까? 옷이 날개라지만 날개에도 가려지질 않는 미색을 그동안 어찌 그리 숨기고 다녔을까?”

    주인장의 말대로 새 의복을 입은 두화의 모습은 천상 귀족 집 여인이었다. 적당하게 그을린 피부는 오히려 건강해 보였고, 대충 빗어 반묶음 한 긴 머리카락이 등 뒤로 찰랑거리니 그녀와 닮은 듯한 초록빛 의복하고 너무 잘 어울렸다.

    “가자.”

    뒤돌아 나가는 자한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뒤를 따르는 두화는 고운 의복이 행여 망가질까 봐 치맛자락을 잡고 조심조심 걸었다.

    한편 사헌부 관리와 함께 부정부패한 관리들을 철저히 조사하라는 왕명을 받든 영의정 부친의 일을 돕기 위해, 도헌은 풍시전에 왔다.

    부친은 관리들의 가택을 조사하고, 도헌은 그 자제들이 흥청망청 풍시전에서 풍류를 즐기는 것을 직접 조사하러 온 것이다.

    관리들의 재산과 가택을 조사하다 보면 청렴결백한 자들도 있다. 하나, 그런 관리의 자식 중에도 풍시전에서 도박과 여인을 즐기는 무리가 있다. 그런 자들의 돈 출처가 의심스럽기에 조사할 필요가 있다.

    풍시전에 들어와 벌써 세 가문의 자제를 조사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렴결백해 보이는 관리를 부친으로 둔 자제는 전쟁터에서 살인귀라 불리는 도헌의 조그만 겁박에도 제 아비의 잘못을 술술 불었다.

    방향을 바꿔 강가 근처로 향하려던 그때 어딘지 부조화를 이룬 두 사람이 제 시선을 잡았다.

    귀티 나 보이는 사내 뒤를 따르는 자는 호위도 종도 아닌 거지였다. 한데 자그마한 체구를 자세히 보니 낯이 익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하더니, 또 남의 것에 손을 댄 것이로군.’

    앞서가는 사내의 표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도헌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을 단정해 버렸다.

    끌고 관아로 향하는 줄 알았는데, 풍시전 제일가는 포목점 안으로 들어간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관아도 아니고 포목점이라니, 무뚝뚝하던 도헌의 호기심을 건드렸다.

    나무 아래서 차 한잔 마실 시간 정도 기다리니 들어갔던 사내가 나온다. 들어갈 때와는 달리 기분 좋은 그의 표정에 의구심을 가질 찰나, 뒤따라 나오는 고운 여인의 모습에 의구심은 풀렸다.

    건강한 피부와 초록의 의복이 마치 절경에 핀 작은 나무 같다. 여인을 보며 꽃도 아닌 나무를 떠올리다니 저도 한심스러워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렸다. 한데….

    ‘아까 같이 들어갔던 거지는?’

    제 주머니를 슬쩍 했던 것처럼, 저 귀족의 주머니를 털려다 걸려서 혹!

    ‘설마!’

    높은 귀족이면 천하디천한 거지쯤이야, 심심풀이 재미로 남몰래 죽여 묻어도 찾는 이도 없다. 만약 들켜도 신분을 이용해 귀족을 능멸한 죄를 물어 죽였다 하면 그저 벌금으로 끝이 난다.

    가늘어진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더니 이내 그 발걸음은 포목점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따라 귀티 나는 손님만 오는구나!

    포목점 주인의 입꼬리가 마냥 올라간다.

    “방금 나갔던 사내와 같이 들어왔던 거지는 어디 있는가?”

    “아, 그게!”

    뭔가 말하려는 포목점 주인의 말을 끊은 도헌이 무서운 얼굴로 엄포를 놓았다.

    “본대로 사실만을 말하거라. 만약 뒷돈을 받고 거짓을 말한다면 살인을 저지른 자와 똑같은 형벌을 받을 것이다.”

    “예? 살인이라니요? 그리고 누가 뒷돈을 받았다고… 잠깐! 나리는 누구십니까?”

    도헌은 자신의 호패를 꺼내 보여주었다.

    “백 가문의 소가주다.”

    “…!”

    백 가문의 소가주라 하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지략과 용맹함으로 숱한 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린 화월국의 영웅이다. 하나, 적에겐 무시무시한 검술로 자비는 찾아볼 수 없는 살인귀로 알려져 있다.

    주인장은 냉큼 허리를 굽혀 조아렸다.

    “하이고, 장군님!”

    “좀 전에 나간 사내가 이곳에서 거지를 죽였느냐?”

    벌어지지도 않은 살인을 마치 벌어진 것처럼 확신에 차서 말하고 있으니, 주인장은 어리둥절하여 감히 되물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살인이라니요?”

    “…예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럼 아까 그 사내와 같이 이곳에 들어왔던 거지는 왜 나갈 땐 함께 나가지 않은 것이지?”

    그제야 포목점 주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껄껄 웃기 시작했다.

    “아아, 그 계집 말입니까? 소인도 깜빡 속았지 뭡니까? 그저 거지 녀석인 줄 알았더니 옷이 날개더군요. 하긴 미색이 보통이 아니니, 천것이 살기 위해서는 거지처럼 하고 다녀야 무탈하게 세상 살았겠지요.”

    “…계집이었다고?”

    “예. 그것도 무척이나 어여뻤습니다.”

    포목점 주인의 말을 들은 도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진 믿을 수 없다. 분명 지척에서 녀석을 본 적이 있다.

    한데 그 녀석이 여인이었다고?

    정말 별것 아닌 일인데도 도헌은 녀석의 정체를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마도 전쟁터에서 적을 끝까지 쫓아 섬멸하는 성격 탓이겠지.

    도헌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

    몸에 걸친 것이 달라지니 자연스럽게 두화의 행동거지가 조신해졌다. 끌리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조심해서 그의 뒤를 따랐다.

    ‘더러워지면 어떻게 물어내라고, 이런 비싼 걸 입힌 거야?’

    ‘만약 이 의복까지 갚으라 하면 이번엔 제대로 따져서 의복값은 제해야지.’

    홀로 생각에 빠져 걷다가 발끝에 뭔가가 걸렸다.

    “어!”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질 찰나!

    허리를 감싼 강인한 힘에 두 눈을 꼭 감고 그 힘에 이끌려갔다.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단단한 품에 갇혔다.

    ‘…!’

    그리고 이내 들리는 시끄러운 심장 울림에, 두화는 고개를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차가워 보이는 눈빛은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호색한 같고, 장난스럽고 때론 차갑고 두려운 마음마저 드는 사내인데, 지금은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그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다.

    순간 얼굴로 열이 화륵 올랐다. 뭐라 말로 표현하지 못할 뭔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다. 고뿔도 걸리지 않았는데, 얼굴로 그리고 그의 손이 닿은 허리로 열감이 확 피어올랐다.

    “저, 소… 손 좀.”

    “…”

    정확히 다섯 번의 눈깜박임이 있고 나서야 허리에 닿았던 손의 힘이 풀렸다. 괜히 멋쩍어 한발 물러난 두화가 열이 오른 얼굴에 손부채를 해댔다.

    “한데 지금 어디 가셔요?”

    “저기.”

    그의 고갯짓을 따라 시선을 돌린 두화도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시원하게 위로 뻗은 나무 사이로 멋스러운 정자가 있었다.

    ‘아휴, 그러잖아도 비싼 치맛자락 더러워질까 봐, 신경 써 걸었더니 다리가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는데 잘됐다.’

    원래 제 체력이 보통이 아닌데, 겨우 차 한 잔도 못 마실 시간을 걸었다고 이렇게 피곤하다니, 도통 모를 일이다.

    정자 근처엔 차를 주문받는 곳이 있었다. 자한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차를 파는 주인에게 몇 마디 하자 처음엔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리 아픈데 저기 아니면 다른 데 가서라도 좀 앉았으면 좋겠다.’

    지쳐갈 때쯤 그곳을 관리하는 주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사람이 순식간에 확 바뀌어서는 바로 정자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곧이어 손님들이 투덜대며 내려왔다. 잠시 뒤 주인은 조금 전 손님들이 마시던 찻상을 켜켜이 쌓아서 내려왔다.

    “올라가서 기다리시면 금방 차를 올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자한이 정자로 올라섰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

    조금 전까지도 차를 마시던 손님들은 왜 그냥 가고, 인상 팍 쓰던 주인은 금세 표정이 쓸개까지 꺼내줄 것 같은 표정이지?

    두화는 가늘어진 눈으로 주인을 바라봤다.

    “안 올라오느냐?”

    “예? 아, 지금 올라가요.”

    정자에 오른 두화는 조금 전까지도 품었던 의문을 잊어버릴 만큼 멋들어진 절경에 저도 모르게 난간으로 달려가 매달렸다.

    “우와!”

    천천히 다가온 자한이 부채를 펴 살랑살랑 바람을 일으켰다.

    “좋으냐?”

    그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예. 이토록 근사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우와.”

    두화에겐 매일 보는 움막 근처 강가의 풍경 또한 귀족들에겐 먼 곳에 있는 절경에 비할 바 없는 둘도 없을 그림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이곳은 잔잔하게 흐르는 강 위로 드문드문 뱃놀이하는 배가 물살 따라 흘러가고, 강 주위엔 인위적으로 만들어 매단 크고 작은 꽃과 새들 때문에, 연신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오게 된다.

    “고작 이것 가지고 그리 감탄하면 여태 무얼 보고 산 게냐?”

    ‘치, 자기 잘사는 귀족이라고 또 무시하네. 그래도 이 사내가 아니었으면 내 평생 이런 곳을

    볼 수 있었을까?’

    잠시 미웠던 감정도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그림 같은 풍경에 싹 녹아버린다. 웃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부채질할 때마다 작은 바람이 살랑살랑 제 잔머리를 간지럽히고는 본연의 자연으로 돌아간다. 채 돌아가지 못한 바람이 있었나?

    그를 보고 있자니 괜히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무얼 그리 빤히 보느냐?”

    “예? 아… 그, 그러니까 뭐가 묻은 거 같아서.”

    민망하여 괜히 둘러대고 본다.

    “그래?”

    순간이었다.

    자한이 고개를 쑥 내려 두화의 눈앞까지 내려왔다.

    “헉!”

    “떼거라, 그 묻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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