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9)화 (9/96)
  • 09. 염병, 또 온 거요?

    부친의 말에 두화는 작은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에? 싫어요. 잠자코 따라다니기만 할 테니까 그 말씀은 넣어두시죠.”

    “뭐라?”

    이제 아비의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까지 하니, 일랑이 기막혀 언성을 높이자, 같이 있던 개방 식구들이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방주님, 이래저래 세상사 나쁜 짓 하지 않고서 좋은 일도 할 수 없는 법입니다. 막말로 우리가 재물이 있어서 나라님도 구제 못 하는 백성을 구제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두화는 영특하니 우리가 하는 일이 도리에 맞지는 않으나, 그것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두화를 내려다보는 일랑의 눈빛엔 수심이 가득하였다.

    “삼촌 말씀대로 전 아버지랑 삼촌들이 하시는 일에 깊게 생각 못 해요. 다만, 백성의 삶은 궁핍한데, 나라를 위해야 하는 자들은 백성의 피와 살로 온갖 사치를 부리며 생활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에요.”

    두화의 똑 부러지는 말에 개방 식구들의 입가엔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일랑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내, 너를 이 일에 끼워 주긴 하였으나, 결코 위험한 순간엔 나서지 말거라. 이 아비와 많은 개방 식구들이 있으니까 굳이 너까지 나서지 않아도 된다. 이 점만 명심한다면 앞으로도 같이 데려가 주마.”

    “예! 명심하겠습니다. 헤헤.”

    일랑의 품에 폭 안겨 웃음 짓는 두화 때문에, 작은 움막에서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

    조정 대신들은 웬일로 등청하지 않은 좌의정의 일로 곳곳에서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딱히 할 일도 없는 인사가 부원군이라 하여, 매일 등청하여 기세등등한 모양새가 늘 눈에 가시거리였다.

    한데, 그런 인사가 정말 몇 년 만에 자리를 비웠으니 놀랄 만도 했다.

    “욕심 많은 좌의정은 고뿔도 피해 간다고 하더니만 정말 고뿔이라도 걸리셨나, 어찌 오지 않는 게요?”

    “글쎄올시다. 이 사람도 좌의정과는 사사로이 만나는 편이 아니라서 으흠.”

    웅성거리는 그때.

    “주상전하 납시오.”

    왕의 등장에 모두 고개를 조아리고 예를 갖추었다.

    왕이 옥좌에 앉고 나서야 대신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을 한번 바라보던 왕도 좌의정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았다. 좌의정의 부재가 조금은 궁금한 듯싶었던 왕이지만, 이내 손을 뻗어 제일 위 상소문을 펼쳤다.

    읽어가던 왕의 입에서 처음 듣는 실소가 찰나 새어 나왔다.

    대신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왕을 바라봤다.

    그들의 시선을 느낀 왕이 헛기침하고는 상소문의 내용을 읽었다.

    -전하, 간곡히 바라고 바라옵니다. 군사의 수를 늘려 도성 수비를 강화하시고, 순라군의 수 또한 늘려주시옵소서.

    “경들은 이 상소문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왕의 하문에 대신들의 의견은 반반이었다.

    “비록 지금은 전하의 은덕에 화월국의 태평성대가 이어가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으나, 호시탐탐 노리는 성라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국경지대와 도성 수비를 강화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사료되옵니다.”

    맞는 말이다. 자유분방하되 성격이 불같은 성라국은 툭하면 화월국을 넘보려고 하고 있다.

    “전하, 이미 국경지대와 도성뿐 아니라 각 고을로 들어서는 성문마다 우리 군사들은 제 할 일을 잘하고 있사옵니다. 군사의 수를 늘리는 일은 군량미와 그들에게 지급되는 녹봉까지도 염려해 계산하여 행해야 하옵니다. 군사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료되옵니다.”

    듣고 있는 왕이 고개를 조금씩 끄덕이고 있다.

    이때 영의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전하 외람되지만, 소신 한 가지 여쭙겠사옵니다.”

    “말하세요, 영의정.”

    “현 화월국은 태평성대라 불리는데, 누가 어이하여 군사를 늘리고 야밤을 순찰하는 순라군까지 늘리라 상소를 올린 것이옵니까? 혹, 첩자라도 적발하였나이까?”

    영의정의 말에 대신들의 눈이 커지며 수런대던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하지만 피식 콧방귀를 뀌는 왕의 모습을 본 영의정만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좁힌 채 왕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지 않아도 몇 년 전부터 각 고을에서 해괴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더이다.”

    “해괴한 사건이라니요?”

    누군가 놀라 묻자, 조금 전까지 비웃던 왕의 눈동자가 차갑게 바뀌었다.

    “내로라하는 관료나 귀족들을 상대로 괴한들이 아주 싹 털어간다고 하오. 한데!”

    “…!”

    미간을 좁힌 왕이 고개를 앞으로 내밀더니 재미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말을 이어갔다.

    “털린 관료나 귀족들에게 자신들이 백성을 대신해 응징했다는 표식을 남겼다 하오.”

    진즉부터 들어 알고 있던 대신들은 왕의 눈치를 보았고, 처음 듣는 대신들은 혀를 차며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감히 과인도 하지 못하는 것을 한낱 괴한이 처벌하는구려. 털린 관료나 귀족들은 부끄러워 드러내진 못하나, 그들의 가슴에 죄인이라는 글귀를 새겼다 하오.”

    “허! 허허.”

    여기저기서 탄식과 함께 당황한 대신들의 목소리가 커져만 갔다.

    그때였다.

    옥좌를 내려치는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두 놀라 왕을 바라봤다.

    “괴한들은 응당 잡아 그 죄를 물어야 하나, 그들에게 당한 귀족과 관료들 또한 부정한 짓으로 재물을 늘리진 않았는지, 죄 없는 백성의 혈을 빨아 제 뱃속을 채운 것은 아닌지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이오!”

    노한 왕의 심기는 편전 안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또한 왕의 마지막 말에 대신들의 표정이 제각각 변하였으니….

    “그 첫 번째로 좌의정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시오!”

    ***

    그치들이 또 찾아올까 눈뜨면서부터 자기 전까지, 두화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뭐에 쫓기듯 불안해했다. 하지만 이틀 동안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큽. 그래, 딱 봐도 엄청난 귀족 집안 같은데 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이런 지저분한 곳에 두 번은 오긴 싫겠지. 하아, 이제야 살겠네.”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키득거렸다.

    “도성의 중심지를 가로지르는 강가로 주변은 향기 가득한 꽃이 만발하고, 녹음이 푸르른 잎사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가 그 운치를 더해 주는데… 지저분하긴.”

    두 번은 듣기 싫은 목소리가 방금 제 등 뒤로 정확히 들렸다.

    ‘염병, 또 온 거요?’

    찌그러진 표정을 환한 웃음으로 바꾼 두화가 고개를 돌렸다. 이내 냉큼 일어나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오셨어요, 나리?”

    그런 두화의 모습에 자한은 피식 웃으며 부채를 펴 얼굴을 가렸다.

    두화는 힐끔 그를 쳐다봤다. 역시나 한번 본 적 없는 비단 의복을 걸치고 살랑살랑 부채질하는 모습이 한량이 따로 없다.

    ‘저 사람은 전생에 무슨 큰 덕을 쌓았길래 아휴.’

    “한데… 여긴 어쩐 일로….”

    부채를 탁 접은 자한의 얼굴엔 웃음기가 없었다.

    “어쩐 일로? 분명 몸으로 때운다고 하질 않았더냐?”

    정색하며 말하기에 두화는 괜히 움찔하여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그, 그랬죠. 네.”

    “오늘 도성에 풍시전을 갈 것이니라. 앞장서거라.”

    풍시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요즘 젊은이들이 시간 보내는 곳으로 운치 있는 정자에서 차를 마시거나 바로 앞 강에서 뱃놀이도 하고, 때로는 풍물패의 묘기까지 볼 수 있는 현재 화월국에서 뜨겁게 입소문 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 혼자서 간다?

    그것도 비루한 옷차림의 저를 데리고서 말이다.

    “저기….”

    뭔가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의 그녀를 내려다보며 자한은 고개를 살짝 내렸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이냐,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심부름이라면 몰라도 제가 어찌 풍시전에.”

    “음. 그럼 당장 돈을 갚던지.”

    헉.

    이 양반이 진짜!

    돈으로 겁박하시네.

    저를 뭐로 보고!

    “아이고 참. 제가 언제 안 간다고 했어요? 다만….”

    “다만?”

    “한 마리 고고한 학 같은 나리 곁에 꾀죄죄한 소인이 있으면, 그야말로 한 마리 까마귀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드린 말씀이죠.”

    “상관없다.”

    ‘당연히 그쪽은 상관이 없겠지만, 따라다니는 난 상관있다고요!’

    두화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기차게 속으로 외쳐댔다. 물론 눈앞의 사내를 눈치 없는 자라 욕하면서 말이다.

    풍시전에 다다를 때까지도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던 두화는 그제야 그의 뒤를 따르던 호위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혹 귀족 나리가 봉변이라도 당할까 봐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물론 풍시전 입구에서 호패를 보이고 드나들긴 하지만, 시전과 달리 자유분방한 곳이라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른다.

    “나리, 호위해주시는 분은 오늘 안 보이시네요?”

    “그것은 왜 묻지?”

    걸음을 멈춘 자한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는 두화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니 뭐… 흐음. 듣기론 저 안이 무척 자유롭고 좋아 보여도 그만큼 위험도 도사리는데 혹시 몰라서 여쭌 겁니다.”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작은 얼굴로 정말 저를 걱정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조금 전 사림이 함께하지 않는 것에 궁금해하는 그녀 때문에 뭔가 기분이 불편했는데, 저를 걱정하는 얼굴에 기분이 조금 풀렸다.

    그의 확확 달라지는 표정에 두화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양반, 좀 무서운데!’

    “어찌 뒤로 도망가느냐?”

    “도망은 무슨, 아닙니다. 가시죠, 나리.”

    풍시전 입구에 있던 말단 관리는 반복적으로 하는 일이 지겨웠는지, 정작 호패는 건성으로 살펴보고, 드나드는 자들의 의복만 한번 훑어보고는 사람들을 들여보냈다.

    두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자한의 뒤를 따르려 했다.

    “네 이놈. 예가 어디라고 천한 것이 발을 들이는 것이냐?”

    건성건성 호패를 보던 관리가 두화를 향해 소리쳤다.

    “나리, 소인은 저기 저 귀족 나리를 따라….”

    “보는 것만으로도 눈 버리는 것 같네. 저놈을 당장 끌어내라.”

    관리는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옆에 서 있던 병사에게 명령했다.

    창을 든 병사가 두화에게 가까이 가 끌어내려고 하자, 느닷없는 부채에 팔을 맞은 병사가 작은 신음을 내며 뒤로 물러났다.

    “이 아이는 내 시종이다. 그럼 들어가도 되겠지?”

    그냥 그대로 들어가려는 자한과 두화를 관리가 불러 세웠다.

    “잠깐!”

    관리는 뒷짐을 지고 자한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들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풍시전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 이곳에 온 지 벌써 3년째다. 그가 걸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최상품이란 것은 힐끗 보고도 알아챘다.

    ‘대관절 어느 댁 자제야? 영의정 댁인가? 아닌데, 그자는 아까 들어갔잖아. 그럼 이자는 뭐야?’

    웬만한 귀족 자제들이 입는 의복과는 차원이 다른 비단에, 번지르르한 물소 가죽 신만 봐도 범상치 않은 자다. 한데 이 거지가 그런 자가 데리고 다니는 시종이라고?

    ‘수상해!’

    “어느 가문의 자제십니까?”

    설렁설렁 일하던 자가 무슨 바람이 불어 호구조사까지 하려는 걸까?

    자한은 피식 코웃음을 짓고는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감히 날 심문하는 것이냐?”

    “예? 아니 난 어느 댁 자제인지 궁금하여….”

    순간 고개를 내린 자한이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여태 내 신분을 알고 그자를 살려둔 적이 없는데, 어찌… 그래도 알려주랴?”

    자신보다도 한참이나 어린놈의 목소리에서 이토록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지, 순간 오줌을 지릴 뻔한 관리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아닙니다. 그저 궁금하여 그런 것이지, 호패 확인하였으니 들어가십시오.”

    냉랭함을 풍기던 자한의 눈빛에 관리는 냉큼 자신의 자리로 가 괜히 장부를 보는 척했다. 홱 하니 몸을 돌린 자한을 따라 두화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휴, 정말 눈빛 하나는 무섭다니까.’

    입구에서 풍시전 거리를 잇는 작은 구름다리를 지나자 딴 세상이 펼쳐졌다. 밖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에 두화의 동공이 커졌다. 나무 그늘에 혹은 강가에 띄워진 배 안에서 선남선녀가 바짝 붙어 무슨 이야기를 속삭이는지 붙어 있는 모습만 봐도 몸이 간질거린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거리를 걷던 자한이 갑자기 멈춰 섰다.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셔요?”

    “여기.”

    “여기는… 포목점 아닙니까? 예까지 와서 겨우 옷감이나 사시려고요?”

    물어도 답하지 않고 그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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