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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62화 (62/63)
  • 62 화

    수빈의 말에 예준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

    심지어 놀란 표정조차 짓지 못했다.

    임신이라니…….

    이건 놀라운 일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상상도 못한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공간을 가득 메운 건 무거운 적막뿐이었다.

    수빈은 생각보다 불편한 분위기에 난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 얘길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침묵이 길어질수록 밀려드는 초조함에 눈물이 차올랐다.

    예준에게 어떤 대답이 돌아오더라도 절대 울고 싶지 않았는데.

    그가 입도 열기 전에, 눈물이 터져버리다니.

    정말 최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수빈의 눈물에 적잖이 당황한 예준은 그제야 그녀를 끌어안고 급히 달래기 시작했다.

    “야,잠깐만. 왜 울어. 울지 마.”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내가 너무 놀라서, 그래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 건지 바로 떠오르질 않아서 그랬다고.

    하려던 말이 므f 입 밖으로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예준의 가슴을 밀어낸 수빈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 이제 어떡해?”

    “어떡하냐니?”

    수빈의 반응을 본 예준도 머리도 새하얘지 긴 마찬가지였다.

    “뭘……, 어떡해?”

    “O 岂흐 " ----1 •

    “이 애는 무슨 죄냐고.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그게……무슨 뜻인데?” 되물어봐도 수빈은 울기 만 했다.

    “울지만 말고 대답을 해.”

    그녀의 속내를 알 수가 없어, 예준 역시 답답하고 불안했다.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에 당황스러웠던 건 피차일반이었지만, 두 사람의 시작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맞게 된 소식이었다.

    변화된 마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던 상황.

    나 하나 책임지기 버거운 세상이라는 게 서로의 생각이라는 걸, 예준도 수빈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서로의 반응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예준은 그래서 그만 수빈을 채근하고 말았다.

    “대답을 하라고! 어떻게 하냐는 말이 왜 나오는데 ! 안 낳을 거 야?”

    “왜 네가 소리를 질러! 애는 혼자 키우니기” 마음이 조급해진 수빈도 덩달아 언성을 높이며 말을 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를 혼자 키우다니.

    “그건 또 무슨……

    “너 호주가서 살 거잖아!”

    난데없는 소리에 예준도 황당하다는 듯 항변했다.

    “무슨 소리야. 살긴 누가 살아!”

    “메시지 온 거 봤어 !”

    “너 휴대폰 놓고 간 거, 주려다가 다 봤다고. 나 미혼모 만들고 외국으로 날아가 버릴 거잖아, 너!”

    수빈의 외침에 예준은 놀라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얼굴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는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야, 신수빈.”

    하아

    “……넌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너무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리던 예준이 팔을 뻗어 수빈을 제 품으로 와락 끌어 안았다.

    “내가 미쳤어? 그럴 리 없잖아. 왜 그런

    생각을 해?”

    예준은 잔뜩 흥분한 수빈을 꽉 안아

    진정시켰다.

    “그럼……그 문자는 뭔데.”

    “호주 간다고 연락했던 건 맞아. 그런데 여행 차 가려고 했던 거라고 살긴 누가 살아.”

    수빈에게 이야기했듯 원래 계획대로라면 내년 쯤 시드니로 가 정착을 하려던 게 원래의 계획이긴 했다.

    이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 므f 연락이 닿은 친구는 예준의 변경된 계획 따위 알 리 없으니, 당연히 그가 예고했던 대로 정착하기 위해 아예 온다는 생각으로 문자를 보낸 거였다.

    쿵쿵쿵…….

    그의 말에 빠르게 뛰 어대던 수빈의 심장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정말 여행 가려던 거야? 진짜 아예 가버리는 거 아니고?”

    “그래. 너랑 같이 가려고 했어. 하와이에서 보냈던 신혼여행, 아쉬웠던 게 너무 많아서.”

    결혼기념일이 되면 이별 대신, 그녀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얘기가 이런 상황에서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 게 될 거라고는 예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속이 상했지 만 한편으로는 아직 믿음을 주지 못해, 본의 아니게 수빈을 상처 입혔다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네가여기 있는데, 내가가긴 어딜가.” 희미하게 떨리던 그의 음성이 기어이 젖어들고 말았다.

    “아까는 너무 갑작스럽고 경황이 없어서 얘기를 못했어. 너도 알겠지만 내가

    표현하는데 많이 인색해. 잘못하는 일이고

    여전히 어려운 일이야, 나한테는.”

    고해성사와 같은 고백이 줄줄이 이어졌다.

    수빈이 더 불안해하거나 상처입기 전에 어떻게든 자신의 입장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솔직히 좋은 아빠 되는 법 같은 것도 몰라.”

    “하지만 노력할 거야. 나는 그런 사랑 받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모르면 배워人1……, 공부해서 라도 꼭 좋은 아빠 될 거야.”

    일찍 확신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

    얼마나 불안했을까.

    언젠가 수빈이 했던 말처럼 기뻐하기만도 턱없이 부족한 삶이었다.

    행복하기 만도 짧은 인생에 과연 내가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란 바보 같은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예준은 지금 자신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그녀가 자신을 변화시 켰다고 느꼈다.

    오래전 그녀가 심어놓았던 씨앗이 이제야 싹을 틔우고,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노력해보겠다는 말 대신, 잘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먼저 해주고 싶었다.

    널 우I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노력하다보면 분명 잘하게 될 거라고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건네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았지만, 그 모든 말을 함축한 한마디를 조금은 늦게, 하지만 가장 적절한 때라고 생각한 지금.

    예준은 진심을 담아 고백했다.

    “……수빈아.”

    고마웠다. 진심으로.

    그 모든 마음이 부디 닿기를 바라며.

    “사랑해.”

    예준이 조용히 속삭였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마음은 이제껏 꽤 오랫동안이 나 방황했었다. 대한민국 땅 어디에도 마음 붙이고 살 곳이 없다고만 생각했었다. 식구들을 보면 괴로웠고, 애자까지 떠나고 나면 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믿었었다.

    그랬는데…….

    이제는 머물고 싶어졌다. 너와 함께, 진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삶

    갈 곳 없다 여기던 이 땅 위에 정착이라는 게 하고 싶어졌다고.

    수빈은 숨을 죽인 채 한참을 그렇게 예준에게 안겨있었다.

    옷자락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갈 때쯤,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사실……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무서운 마음보다, 기쁜 마음이 더 컸어.” 그런데 이렇게 기뻐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기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서글퍼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기뻐. 무척이나.”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실감이 라고는 전혀 나질 않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다.

    묘한 기대감과 설렘과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이 기분은 분명 기쁨일 거라고

    예준은 수빈의 어깨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진심으로 말을 이었다.

    “기뻐해야 할일이야.”

    당연히 그래야 했다.

    우리는 왜 그동안 당연히 기뻐 마땅해야 할 일들에 대해 참으로 엄격하고 이상한 잣대를 들이밀며 살아왔을까.

    살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세상의 모든 기쁜 일들은 오직 기쁨으로 누릴 때 진짜 그 진가를 발휘한다는 걸…….

    나는 이제야 깨달아버렸다.

    한편 수빈의 임신 소식을 접한 양가 집안은 한바탕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

    [헐!]

    학교에서 전화로 소식을 접한 예나는 제일 격한 반응을 보였다.

    [나 이제 고모되는 거야??? 웬일이야, 세상에!!!]

    수빈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귀에 인이 박히도록 하던 예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기용품점으로 달려가 빨간 방울이 달린 귀여운 보행기화를 선물로 사왔다.

    “언니. 아기 신발보면서 태교하면 예쁜 아기 나온대요. 하긴 뭐, 언니랑오빠 닮으면 엄청 예쁘긴 하것[다. 연예인 시켜요 연예인!”

    집에 와서도 어찌나 정신없이 구는지, 들뜬 그녀의 모습에 예준도 그제야 아빠가 됐다는 게 실감이 날 정도였다.

    옆에서 신기한 듯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던 예훈은 예나에게 생전 없던 타박을 건넸다.

    “야, 네 목소리 때문에 태교가 되겠냐?

    조용히 좀 얘기해. 형수님 스트레스

    받으시 겠다.”

    평소였으면 물어뜯을 것처 럼 달려들었을 텐데.

    예나는 깜짝 놀라 어깨를 옹송그리고 검지를 제 입술에 톡톡 두드려대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수빈의 배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속삭이듯 말한다.

    “이모가 시끄럽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조용조용 예쁘게 말할게.”

    뭐가 좋은지 자꾸만 쿡쿡 웃어댄다.

    “형수님. 이 점이 아기예요?”

    초음파 사진이라는 걸 태어나 처음 본 예훈은 그 작은 점이 아기라는 게 영 신기했는지 자꾸만 이것저것 물어왔다.

    “네, 도련님아기집이에요 요기가

    자궁이고요.”

    “아……. 신기하네요.”

    “2주 뒤에 가면 심장 뛰는 소리도 들을 수 있대요.”

    “정말요?,,

    예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평소에 말이 잘 없던 그였지만, 조카가 생긴다는 게 그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긴 했던 모양이다.

    외출을 나갔다가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온 소정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세상에. 수빈아……:

    그러 더 니 그녀를 끌어 안고 울먹 였다.

    “고생했다.정말수고 많았어.”

    그러더니 두 손을 맞잡고 묻는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힘든 일은 전부 나한테 말하거나, 예준이한테 바로바로 얘기하고.”

    소정이 그렇게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며 격하게 표현을 한 건 정말 처음이었다.

    그녀는 또한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웃고 있는데, 우는 것 같기도 한 묘한 얼굴의 그녀는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눌러 담아 조용히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넸다.

    “아빠 된 거 축하해, 아들.”

    예준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요, 엄마.”

    “할머니 되신 거 축하드려요.”

    아직은 낯선 호칭에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수빈이 거들었다.

    “어머님 너무 젊어보이셔서 손주 안고 나가셔도, 다들 늦둥이 정도로 보겠는데요?”

    “그치? 내가 그래도 내 나이로 보이진 않지?”

    “그럼요,,

    “빈말이라도 고맙다, 얘.”

    고부는 마주보며 한참을 웃었다.

    계춘은 신이 나서 동네에 떡을 돌렸다.

    막걸리를 얼마나 마셔댔는지, 해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했다.

    계춘은 노 집사와 훈탁에게 부축을 받아 방에 돌아가면서도 내내 노래를 부르고 덩실덩실 춤을 춰댔다.

    예준은 그 모습이 너무나 의외였다.

    친손자도 아닌 자신을 결혼시키려고 애쓸 때만 해도 그저 남들 보는 눈 때문에, 혹은

    애자 때문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증손주 소식을 저렇게 기뻐할 줄이야.

    가족 모두에게 진심으로 축하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 만 웃음이 가득했던 다른 식구들과는 달리 훈탁은 짐짓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조용히 불렀다.

    “너희 둘, 나좀 보자.”

    계춘을 부축하고 돌아온 훈탁이 무거운 표정으로 먼저 서재로 향했다.

    예준은 긴장감이 역력한 수빈의 손을 꼭 잡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괜찮아. 걱정 마.”

    수빈은 뒤늦게 굳은 표정을 풀며 생긋 웃어보였다.

    “응.걱정 안해.”

    두 사람은 단단히 깍지를 낀 채 훈탁의 서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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