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화
수빈은 너무 놀라 거실 바닥에 풀썩 주저 앉아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임신 테스트기를 다시 주워 몇 번을 확인해봐도 붉게 그어진 선명한 줄은 분명 임신을 나타내는 두 줄이었다.
“임신이라니…….”
수빈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다시 휴대폰을 켜고 달력을 확인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예준과 관계를 할 때는 언제나 피임했었다.
게다가 그나마도 전부 기억할 정도로 손에 꼽았었다.
마음을 확인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날짜를 확인해보니 하루 차이로 가임기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날이 있었다.
“설마,,
……이 날 아침?
문득수빈의 뇌리에 유난히 파이팅 넘치던 아침 풍경이 떠올랐다.
딱 한 번, 피임구가 떨어져 자연피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날 실수를 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모든 정황상 임신할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하기만 한데, 이게 무슨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예준의 건강한 신체가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신이 내린 자신의 자궁과 만나 탄생시킨 결과물이라고 밖에 여길 수 없었다.
그러니까지금…….
단 한 번의 파이팅 넘치는 하루로 인해…….
덜컥 임신이 됐다는 얘기다.
수빈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스른 채, 침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예준에게 전화하기 위해 몇 번이나 휴대폰을 껐다 켰지만, 일단 병원에 가서 조금 더 확실히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수빈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두I, 다음 날 산부인과를 찾았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콩알만 한 아기집의 점박이는 벌써 6주차나 되 었다고 했다.
“다음에 오시면 심장 소리 들으실 수 있을 거예요.”
……심장 소리. 그 한 마디에 어쩐지 마음이 울컥해진다.
돌아오는 길, 수빈은 생각이 많아졌다.
예준의 마음을 확인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불과 얼마 전이었고 아직 구체적으로 이렇다 할 이야기는 오간 게 없었다.
두 사람이 작성한 계약서는 버젓이 서랍에서 존재감을 뽐냈고,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예준.'
’……사랑해.'
수빈은 얼마 전 그녀가 스스로 예준에게 건넸던 말을 떠올렸다.
그에게 같은 말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같은 마음이라고 여겼던 그 믿음이 왜 이렇게 갑자기 불안해져오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마음을 먼저 확실히 하고, 예준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수빈은 병원에서 받아온 흑백의 초음파사진을 바라보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작디작은 아기집이 너무나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수빈의 입술이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안녕, 아가.”
조용히 인사를 건네본다.
뛸 듯이 기뻐해도 부족할 마당에 엄마가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수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밖에 펼쳐진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마음은 이미 확고했다.
얼마 전 스스로 고백했고, 그게 진심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 * *
그날 저녁.
샤워를 마치고 나온 수빈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소파에 앉았다.
예전 같았으면 털썩털썩 앉았을 텐데, 자신의 몸 안에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발걸음 하나, 몸짓 하나에 신중을 기하게 됐다.
젖은 머 리를 수건으로 꾹꾹 누르던 수빈은 휴대폰에 찍힌 예준의 부재중 전화 한 통을 확인했다.
“어?”
저도 모르게 살며시 미소 짓던 그녀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었는데.”
오늘은 꼭 임신 소식을 전해야겠다고 내내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결혼에 대해 워낙부정적이던 예준이었던지라, 이 사실을 전하는 게 썩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혹시나 우려하던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을까 싶어 걱정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뚜르르…… 뚜르르…….
수화기의 신호음이 울릴 때마다 수빈의 심장도 덩달아 둥둥둥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호가 채 몇 번 안 갔을 때, 현관문 도어록이 해지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삑삐비빅
그러더니 잠시 후.
눈앞에 거짓말처럼 예준이 나타났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소파에 앉아있던 수빈은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뭐야?”
“짠,,
싱거운 한마디와 함께 그가 웃었다.
“어떻게 벌써 왔어? 주말 지나야 온다고 했잖아.”
놀란 마음에 다다다 질문 공세를 이었더 니, 예준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섰다.
“그래서 반갑지는 않고?”
“아니! 당연히 반가운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해시……
“후우.”
수빈의 물음에 예준이 머뭇거리 다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그게……
“왜 그러는데. 무슨 일 있어?”
망설이는 예준을 바라보던 수빈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는 입술이 버석하게 마르는 듯, 혀로 마른 입술을 한 번 훑고는 아주 어렵게 입을 떼기 시작했다.
“……싶어서.”
두 번 뱉을 자신은 없는데.
“뭐라고? 잘 안들려.”
수빈은 기어이 같은 대답을 반복하게 만들어버렸다.
잠시 고민하던 예준은 곧 체념하듯, 사정을 털어놓았다.
“보고싶어서, 일찍 왔다고.”
다 기어들어가는 듯한 예준의 대답을 끝으로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내가지금 뭘들은 거지?
수빈이 눈을 깜박거렸다.
예준도 뱉어놓고 민망했는지 피식 웃는다.
“나좀 미친거 같지.”
“。” o-.
묻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는 수빈의 반응에 예준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응, 이라고 했냐? 이게 다누구 때문인데.” 무섭게 다가온 그가 수빈의 양 뺨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감싸더 니 그대로 입술을 쪽 붙였다 떼었다.
멀쩡해보이 던 그녀의 얼굴은 예준이 슬쩍 섭섭함을 느낄 때쯤 뒤늦게 불타올랐다.
그 표정에 예준은 만족스럽 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왜, 왜 웃냐!”
“귀여워서.”
예준의 대답에 부끄러워진 수빈은 하나도 도도하지 않은 표정으로 도도하게 대꾸했다.
“하! 하여간 이놈의 매력은 진짜.”
그만 좀 빨개져라. 어떻게 날이 갈수록 더해?
한번 짓궂게 놀려줄까 하다가 못이긴 척 수긍해주는 예준이 었다.
“그래. 그놈의 매력 때문에 부스터 달고
돌아다녔다, 내가.”
넘치는 매력을 인정받은 수빈이 뿌듯한 듯 웃으며 예준의 얼굴을 가볍게 매만졌다.
“안 피곤해?”
“피곤해도 세 번은 할 수 있어.”
적나라한그의 말에 수빈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지만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의 눈빛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하하. 이, 일단 좀 씻고 와. 나 안 그래도 할 말 있었는데 잘 됐다.”
“무슨 할 말?”
“나와서 얘기해.”
“중요한 얘기야?”
“응. 엄청.”
그가 나오면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며 임신 사실을 알릴 계획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예준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곧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딱기다리고 있어.”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는지, 넥타이를 풀어헤치 며 방으로 들어가는 모양새가 날쌘 치타 같았다.
그는 나날이 진화하는 짐승이 되어갔다.
예준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수빈이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어?”
테이블 위에 예준의 휴대폰이 놓인 걸 발견하고 막 집어 들려고 했을 때였다.
부르르. 휴대폰이 울리더니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보려고 봤던 건 아닌데.
- 지예준! 진짜 내년에 호주 오는 거야?
한 줄씩 떴다가 사라지는 글자들이 너무나도 명확히 시선을 잡아끌었다.
- 다들 너 오는 날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 준비도 착착 잘 되어가고 있다니 다행이다.
“뭐야, 이게?”
놀란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또 하나의 메시지가 연달아 온다.
- 정착은 시드니에 할 거지?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자리에 못 박힌 채 멍하니 앉아있던 수빈은 테이블 위에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은 두I,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옥죄 며 위협해왔다.
내년에 호주를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
“……정착할 생각까지 하고?”
모르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건 결혼 전부터 몇 번이나 예준을 통해 직접 들었던 그의 계획이기도 했으니까.
문제는 그게 계약 종료 후의, 정확히 말하자면 실질적으로는 이혼 후의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수빈은 굳게 닫힌 예준의 방문을 잠시 응시하다가 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화장대로 걸어가 서랍에 넣어둔 초음파 사진을 꺼내들었다.
아직 그에게 직접 들은 얘기는 아무것도 없는데.
미리 단정 짓고 겁먹을 일이 아닌데.
끊임없이 상황을 바로 보려는 이성의 노력이 무색해질 만큼, 사진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시울은 금세 촉촉하게 젖어들고 말았다.
“이제…… 어쩌지?”
불안감에 목구멍에서만 맴돌던 말들이 기어이 쏟아져나왔다.
당장이라도 욕실의 문을 벌컥 열고 예준에게 묻고 싶었지만, 혹시나 그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 돌아올까 봐 더럭 겁이 났다.
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자신의 모습이 순간 너무 비참하게 떠올랐던 건 왜일까.
이러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바보 같았다.
잠시 후.
똑똑.
“나 들어간다?”
예준의 인기척에 수빈은 들고 있던 사진을 황급히 서랍 안에 도로 집어넣었다.
젖은 눈가를 급히 훔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을 가다듬었다.
당장 따져 물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상황인데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 왔어?,,
“뭐 하고 있었어? 불도 안 켜고.”
성큼성큼 다가온 예준은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풀어 화장대 의자 위에 걸치며 수빈의 얼굴을 만졌다.
“아니야, 아무것도.”
입을 열기가 무섭게 예준은 그대로 제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로 포갰다.
“얘기는 나중에 하자.”
살짝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끈적하게 맞붙었다.
두 사람은 침대 위에 하나가 되어 넘어졌다.
그런데 떨어지면서 느껴지는 충격이 좀 강하게 느껴졌는지 수빈이 예준의 어깨를 밀어냈다.
“아! 안 돼!”
덩달아 놀란 예준이 그대로 동작을 멈추며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니. 그냥.”
수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피곤하니까 오늘은 그냥자.”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심리 상태는 고스란히 밖으로 드러 나고 있었다.
“보고 싶어서 달려온 사람한테, 이렇게 나올 거야?”
예준이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수빈은 받아쳐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나도 몸이 좀 안 좋아서.”
예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왜? 어디가 안 좋은데.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다녀왔어.”
다녀왔다는 말에 예준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뭐? 혼자? 왜 말 안했어. 어디가 안 좋은데.”
“몸살감기인 줄 알았는데……
설마 했었다.
잠시 침묵하던 수빈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예준의 말이 맞았다.
뜸 들일 일이 아니었匚上 피할 일은 더더욱
아니고
마음을 가다듬은 끝에 생각을 정리한 수빈이 예준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나…… 임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