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화
해변에 있는 브런치 카페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해변을 조금 산책하다가 정남과 방훈을 마중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우리 사위!”
좀처럼 치장하는 일이 없는 정남이 하얀 꽃무늬가 들어간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수빈아!”
옆에는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방훈도 함께였다.
두 사람은 도착한 이후 내내 들뜬 마음을 감추질 못했다.
예준이 장인, 장모를 위해 준비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고, 소리까지 지르며 좋아했다.
“수빈아! 여기 좀 보卜! 여보, 이것 좀 봐요!” 가게 주위에 둘러진 돌담을 보며 정남이 소리쳤다.
“바다도 보여! 세상에!”
그녀는 가게 주변에 있는 돌멩이나 흔한 잡초조차 마냥 신기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듯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건 방훈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꿈을 꾸는 것만 같다고,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날저녁.
예준은 정남과 방훈이 묵을 호텔의 근처에 있는 흑돼지 집으로 향했다.
“많이 드세요, 장모님.”
먹기 좋게 구운 고기를 손질해 부지런히 옮기던 예준이 말을 이었다.
“장인어른도 많이 드시고요.”
“그래. 고맙다. 우리 사위도 많이 먹어.”
“전 수빈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서.”
그가 농담을 건네며 웃었다.
그러고는 먹음직스러운 고기 한 점을 수빈의 앞 접시 위에 살포시 놓아주고, 다시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나 많이 먹었어 자기 먹어.”
수빈은 굽느라 제대로 못 먹은 예준의 입 속에 기어이 그가 준 고기 한 점을 밀어 넣어주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정남이 입을 열었다.
“지 서방. 혹시 자네 장인이 다리를 왜 다치게 됐는지 아나?”
갑작스러운 물음에 예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잘 모릅니다.”
그에 정남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훈이 다친 건 차 사고 때문이었다.
그때 방훈은 길 건너편에서 정남을 기다리고 있었고, 정남은 방훈을 만나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는데 차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보행자들을 향해 달려왔다.
놀란 행인들이 혼비백산해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방훈이 뛰어들었고, 사고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버렸다.
방훈에게 밀려 넘어진 정남은고작 타박상 정도였지 만, 그녀 대신 차에 치인 방훈은 큰 수술을 받고 몇 년이나 재활을 받은 뒤에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남은 자신 대신 크게 다친 방훈에게 미안해했고, 방훈은 곁에서 몸이 불편한 자신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아내에게 미안해했지만 서로 약속한 게 한 가지 있다고 했다.
“미안해하지 말자고. 그 시간에 더 아끼고 더 사랑해주며 재미있게 살자고.”
이야기를 듣던 방훈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백번이고 천 번이고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도 우리 둘 다 똑같이 행동했을 거니까.”
그건 변치 않는사실이니까, 그 사실만큼 변치 않는 마음으로 짧은 인생 즐겁게 살다 가자고.
창밖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정남이 예준과 수빈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었으면 좋겠어 우리 소중한 사위랑, 딸이.”
예준은 그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사랑이 넘치는 부부 밑에서 온전히 사랑을 받아온 수빈에게 범접할 수 없는 좋은 기운이 흐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감사했다.
그녀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수빈이라는 사실이.
두 사람은 제주도를 떠 나 집으로 돌아왔다. 아쉬운 이틀이었지만, 잎지 못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예준과 수빈이었다.
무더웠던 여름도 물러가고 울긋불긋 물든 낙엽은 하나둘씩 가지를 떠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지 날수록 일상의 향기는 더욱 짙고 그윽해져갔다.
“어머님・저 왔어요.”
“어,그래. 수빈이 왔니?”
시댁 식구들은 여전히 잘 지내고 있었다.
소정은 늘 그랬듯 자신을 꾸미는 일에 제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수빈이 가운데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음에도 섣불리
예준에게 어쭙잖은 친근함을 내비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이 집에서 가장 한결같았던 건 소정이었다.
그랬으니, 이제껏 버텨온 걸 수도 있고.
“예준이랑 주말에 쇼핑 좀 다녀오렴 .
가을인데 예쁜 옷도 좀 사 입고 그래.” 그녀가 늘 그랬듯 무심한 표정으로 수표 한 장을 꺼내 수빈의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아. 어머님 용돈 너무 자주 주시지 않아도 돼요 저번에 아버님이 주신 것도 있고……
“그건 너희 시아버지가 준 거고.”
“그래도……
“어른이 주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다.”
소정이 거울을 보고 새로 산 액세서리를 이리저리 대보며 말을 이었다.
“참. 예준이는 와인색도 잘 어울리니까, 이번에 쇼핑가면 괜찮은 걸로 네가 좀
골라주렴. 날 추워진다고 맨 거무튀튀한 것만 입게 하지 말고.”
“네.그럴게요, 어머님.”
수빈이 빙긋 웃었다.
그녀는 속으로 다시금 상기한 사실이 있었다.
역시나 소정은 변한 게 없었다.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예준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도 언제나 한결같았을 것이다. 보이려하지 않았고, 보려하지 않아드러나지 않았을 뿐.
“할머님은 어디 계세요?”
“방에 들어가 보렴.”
소정의 말에 수빈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애자가 누워있는 시간이 부쩍 늘어난 뒤로는 2층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했다.
집에서 가장 햇빛이 잘 들고 커다란 창이 나 있는 방이었는데, 그곳을 통해 보는 풍경 이 무척이나 훌륭했기 때문이라고.
똑똑.
“할머님, 저 왔……
수빈은 조용히 문을 열다가 그대로 멈추었다.
침대에 누운 채 수빈을 맞는 날이 잦아진 애자가 웬일로 일어선 채 똑바로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그런 그녀의 곁엔 늘 그랬듯 계춘이 함께였다.
노부부는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꼭 잡고, 함께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빈은 두 사람이 조금 더 오붓한 시간을 보내도록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주방으로 들어가니 웬일로 훈탁과 예나가 마주앉아있었다.
마주앉은 부녀는……, 멸치를 손질하고 있었다. 일명 멸치 똥 따기 작업이라 일컫는 그것을 말이다.
“언니 왔어요?”
별 반응도 없는 훈탁에게 재잘재잘 떠들어대던 예나가 수빈을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 제 옆을 툭툭 때린다.
수빈이 옆자리에 앉자마자 예나는 요즘 한창 관심을 갖게 된 이야기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연예인 얘기부터 시작해서 로드숍에서 건진 인생 파운데이션, S브랜드의 신제품 틴트, 인터넷 채널과 카더라 통신까지
“아빠, 아빠! 아빠 때도 이 런 거 있었어요? 아. 맞다. 아빠는 공부만 하느라 이 런 거 하나도 모르고 사셨겠구나.”
예나는 저가 물어놓고 대답부터 결론까지 혼자 다 내리며 한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방훈도 별다른 대꾸는 없었지 만, 그래도 무뚝뚝한 얼굴로나마 간간히 고개를 끄덕 여주곤 했다.
낯설지만 어쩐지 따듯한 풍경이었다.
같이 멸치 다듬기 작업에 돌입한 수빈이 소정에게 물었다.
“어머님 도련님은요? 어디 가셨어요?”
“응. 내가 깜빡 잎고 간장을 안 사와서 사오라고 보냈어.”
매일 방에만 처박혀있던 예훈은 이제 곧잘 심부름도 다니고, 외출도 나간다고 했다.
미술 학원에 등록하며 본격적으로 진로를 정하고부터라고 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뤄진 결과는 아니었다.
훈탁은 언제든 여차하면 바로 미술 학원을 끊고 입시 학원과 과외를 늘리겠다며 엄포를 놓았고, 때문에 예훈은 더욱 죽자 사자 제 꿈을 위해 정진했다.
식구들이 모두 분주한 오늘은 바로 예준의 생일이었다.
소정은 갈비찜을 했고, 수빈은 다듬던 멸치를 밀어놓고 건져놓은 양지를 가져와 찢었다.
“앗, 뜨거 !”
예나는 고기가 뜨겁다는 핑계로 찢는 일보다 주워 먹는 게 더 많았다.
“언니, 제가 요즘 1 인 방송에 관심이 좀 생겼는데요.”
“어떤거요? 먹방? 먹방은 나도 자주 보는데.”
“아니요. 뷰티랑 여행 쪽이요.”
그녀는 상이 차려지는 내내 수빈의 옆에 코알라처럼 붙어 쉴 새 없이 입을 놀렸고, 바쁜 와중에도 수빈은 열심히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해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당연히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노력한 부분도 있었지만, 없던 관심도 생길 만큼 예나는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했다.
퇴근한 예준이 본가를 찾았다.
“저 왔어요.”
그의 말에 모두가 돌아가며 어서 오라고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별거 아니지만, 참 따듯한 인사였다.
예나가 직접 만들어왔다는 케이크에 모두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먹어도 죽는거 아니지?”
“먹고 죽기 전에 맞아 죽는 수가 있다.”
예훈의 옆구리를 꽉 꼬집은 예나가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옆구리를 꼬집힌 예훈이 죽는다고 악을 쓰는 사이 모든 초에 불이 붙었다.
“불 끌게요!”
탁
어둠이 찾아오자 촛불은 더욱 빛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자, 시작.”
빙긋 웃던 수빈의 신호를 시작으로 모두가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예준이으 I, 여보의, 형으 I, 오빠의…….”
그를 지칭하는 호칭은 각기 다른 형태로
쏟아져 나왔지만
“생일 축하합니다.”
자리에 모인 식구들은 진심으로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예준은 노래를 부르고, 초를 끄고, 박수를 받는 이런 생일은 처음이 었다.
이 집에 온 이후, 첫 생일날 애자와 노 집사가 케이크를 마련해주긴 했지만 그때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웃음도 없었고, 분위기는 우중충하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는 생일이 돌아오는 게 은근히 신경 쓰이고, 불편할 정도였으니 차라리 생일이 없어졌으면 했던 적도 있었다.
오늘 예준은 자신이 어릴 적 꿈꾸던 그 어떤 즐겁고 성대한 파티보다 기억에 남을 하루를 선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보. 생일 축하해.”
수빈이 있었다.
“우리 손주, 다음에도 꼭 내 손주로 태어나거라. 알았지?”
“장가 하나는 기똥차게 가서 장남 노릇 톡톡히 하는구나.”
애자의 덕담 뒤로 계춘이 말했다.
“뭐, 비슷한 아이들끼리 만난 거죠.”
훈탁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슬쩍 말을 보탠다.
“생일축하해, 오빠. 케이크가 제일 감동이지?”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예훈은 예준과 수빈을 그린 팝아트를 선물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질 만큼 훌륭한 선물이었다.
“갈비찜 입에 맞을지 모르것!다. 네가 좋아하는 거라 여러 번 연습하긴 했는데…
소정의 말은 그게 다였다. 그것도 냄비를 뒤적이며, 들릴 듯 말 듯한목소리로.
그에 대꾸라는 걸 모르던 예준도 흘리듯 화답했다.
“음식 솜씨 많이 좋아지셨네요, 어머니.
맛있어요.”
시선은 고집스럽게 식탁에 꽂혀있었지만 말이다.
늘 차갑고 딱딱하기 만 했던 식 탁은 조금씩 훈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계절에 상관없이 따듯한 공기가 가득했다.
그 누구도 불편하지 않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예준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수빈은 찬장에 넣어둔 뭔가를 꺼내들었다
“뭐야, 이게?”
“네 생일 선물. 우리 매장 사람들이 주는
거야.”
그녀가 꺼내 든 건 와인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건데, 한정판이래. 엄청 비싼 거야.”
와인병을 소주 광고 모델처럼 상큼하게 흔들던 수빈이 한쪽 눈을 찡긋 거리며 발랄하게 외쳤다.
“먹고죽는 거다, 오늘?”
여러모로 궁금증을 일으키는 그녀의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둘만의 생일파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