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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37화 (37/63)

37 화

수빈은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예준을 발견했다.

“어?,,

그녀는 아까의 일은 금세 다 잊었다는 듯 반가운 얼굴로 팔을 붕붕 흔들어댔다.

예준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기침하는 척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별것도 아닌데, 어쩐지 민망했다.

산책을 마친 세 사람이 예준과 노 집사가 있는 나무 그늘 아래로 왔다.

“너는 어쩐 일로 왔냐?”

계춘이 먼저 알은체를 해왔지만, 어쩐지 탐탁지 않다는 말투였다.

“저는 별로 안 반가우신 눈치시네요.”

귀신같이 그의 상태를 캐치한 예준이 우스갯소리를 건넸지 만, 계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云”

才.

그러다 뒤늦게 꿍얼거 린다.

“지들이 언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챙겼다고.”

“그래서 챙겨드리는 손자며느리 생겨서 좋으세요?”

“좋다마다. 너희들 한 트럭 가져와도 안 바꾸지.”

“그럼 손자며느리 랑 계속 노세요 저도 할머니 뵈러 온 거지, 할아버지 뵈러 온 거 아니거든요.”

예준의 농담에 발끈한 계춘이 지팡이로 그를 내리치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준은 어떤 농담을 해도 그걸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농담으로 느껴지지 않게 하는 묘한 힘 같은 게 있었다.

그걸 너무나 잘 아는 수빈은 계춘의 옆에 딱 붙어 눈을 홉뜨고 예준을 노려보며, 열심히 계춘의 편을 들어주었다.

“예준이가 할아버지한테 우스갯소리도 건넬 줄 알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지켜보던 애자가 웃으며 하는 말에 노 집사도 거들었다.

4(그러게요 부쩍 친해지신 것 같아 보기 좋네요.”

두 여인의 말에 예준도, 계춘도 다시 어색해진 듯 거리를 두고 웃음기를 거두었다.

크흠.”

그는 괜히 허공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계춘이 훈탁만큼 자신을 대놓고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탐탁지 않아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늘 무관심으로 대하던 그가 어쩌다 한 번 툭툭 던진 말 한마디가 얼마나묵직한지, 어린 마음에 가슴을 흠씬 두드려 맞은 것만 같던 기억이 적잖게 있었다.

예준이 그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게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포기하니 편해서.

의외로 분노에 쏟아붓는 에너지가 너무 컸던 탓에,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 였을 뿐이 다.

다시 말해 계춘에게는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때 였다.

갑작스러운 온기가 손가락 사이사이에

엉켜들어왔다.

고개를 내려 보니 제 손에 깍지를 낀 수빈이 생긋 웃는 낯으로 말한다.

“나는 안보고 싶었어, 여보?”

이게, 아침에 그렇게 당하고도 또 정신 못 차리고…….

아직은 익숙지 않은 접촉에 미간이 구겨지려던 찰나, 손가락 사이에 악력이 느껴졌다.

“미션, 미션이라고.”

고개를 돌린 그녀가 예준만 볼 수 있는 각도에서 작게 복화술을 한다.

아. 미션.

아침에 너무 충격적인 터치가 있었던 탓인지, 괜히 더 날이 서있었다.

예준은 자신과 수빈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애자와 계춘, 그리고 노 집사의 반짝이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겨우 웃어보였다.

“보고 싶었지. 보고 싶으니까 이렇게 집에 한시도 못 있고 뛰어 나왔잖아.”

“어머나, 정말?”

그냥 한말일 텐데.

순간이었지만, 정말 진심으로 느껴질 만큼 다정한 말투였던지라 외려 당황한 수빈이 과장스러운 액션을 취하며 웃었다.

아침에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굴 땐 언제고 “피곤할 거 같아서 일부러 안 깨운 건데.” “알아,,

“내가 그렇게 좋아요? 자긴 날 너무 좋아해서

탈..”

수빈의 폭주에 예준이 그녀의 입을 턱 막으며 웃었다.

웃고는 있는데 이마에 빠직 솟아있는 핏줄이 보인다.

그만해. 넌 어떻게 적당히 라는 걸 몰라?

분명히 온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수빈은 예준의 손바닥에 호떡 눌리듯 눌려버린 입술을 삐죽였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그 간지러운 움직임에 예준은 슬쩍 손가락을 접어 그녀의 입술을 꾹 집어버렸다.

“웁!”

붕어 입이 된 수빈이 버둥거렸다.

점심 내내 햇볕을 쬐며 산책을 즐기던 다섯 사람은 점심때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럼 가볼게요, 할머님 할아버 님.”

수빈이 예준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점심 먹고 가지.”

“밥은 매일 같이 먹잖아요. 저희 신혼이니까 이해 좀 해주세요 간만에 둘이 시간 좀 보내고 싶어요.”

예준이 칼같이 자르자 계춘이 눈을 흘겼다.

“주책이오, 영감.”

애자도 그를 타박하고는 얼른 손을 흔들었다.

“그래, 조심히 가거라. 가는 길에 데이트도 좀 하고 맛있는 것도 좀 사먹고 그래.”

“네. 저희 다음번엔예준 씨한테 운전 부탁해서 멀리 바람 쐬러 가요”

“그러자꾸나.”

애자와 계춘이 손을 흔들며 흐뭇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게 손자며느리가 예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예준이 조금 웃었다.

분명 웃어야 할 일인데, 한편으로는 약간의 허무함과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오만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엉켜 날숨과 함께 쏟아졌다.

예준은 계춘과 애자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수빈의 팔을 홱 패대기쳤다.

“왜 이렇게 오버야? 적당히 해.”

“치.”

안 그래도 빼려고 했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매번 패대기칠 건 또 뭐람.

“같이 가!”

수빈이 입술을 실룩이며 예준을 쫓았다.

“여기 근처에 맛있는 샌드위치 가게 있는데

같이 갈래?”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아주 자연스러웠는데, 예준은 그걸 또 칼같이 쳐 냈다.

“싫어。

“왜? 메뉴가 맘에 안들어? 그럼 삼겹살에 소주 한잔…….”

“신수빈.”

웃음기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마른 음성으로 예준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

“하지 마, 이런거.굉장히 불편해.”

“아니, 난그냥……

“그리고 나약속 있어. 먼저들어가.”

제대로 대답할 틈도 주지 않는 입과 무감한 시선이 화살처럼 수빈에게 박혀들었다.

예준은 그렇게 있지도 않은 약속 핑계를 대며 수빈을 길거리에 세워둔 채 발걸음을 돌려버렸다.

“어디 가는데? 차안가지고가?”

“신경 꺼. 그런 거 너한테 일일이 보고하고 싶지 않으니까.”

“몰래 연애라도 하러 가냐? 예의 차려서 바람피우러 가는 길이야?”

그녀의 우스갯소리에도 예준은 웃음 한 조각조차 흘려주질 않았다.

“하여간, 재미없어.”

괜히 멋쩍어진 수빈이 혼잣말을 하며 바닥에 있던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물론 예준도 알고 있었다.

앞으로 함께 살날이 수두룩이 남았는데 매번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걸.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불편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녀와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냥 회사 일처럼 치부해버리면 그만인데, 어쩐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지는 그녀와의 사적인 거리가 부담스러웠다.

예상을 못했던 건 아니지만, 사람 일이 늘 예상 범위 내에서 움직여주는 건 아니라는 걸.

그는 또 한 번 깨달았다.

* * *

예준은 간만에 번화가에 있는 극장을 찾았다.

사람 많은 곳을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은 이렇게 북적북적한 곳에 나와 혼자 영화를 보거나 공연 보는 걸 즐겼다.

뭐든 둘보다는 혼자 하는 게 편하고 좋았다. 자기만의 시간은온전히 자기만의 것으로 즐기는 게 익숙했다.

그런데…….

이상한일이다.

수빈의 얼굴이 자꾸 어른거린다.

“친정이라도 다녀오지.”

영화에는 전혀 집중을 못한 채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녁까지 혼자 먹게 하는 건 너무한가 싶으면서도, 이내 고개를 젓는다.

무슨 상관인가 싶다가도, 또 생각이 바뀌고.

그걸 영화 보는 내내 했다.

“하아.”

어쩐지 자꾸 바보가 되는 느낌.

“나도미쳤지.”

예준은 결국 영화 한 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극장을 벗어났다.

예상했던 것보다 이른 귀가였다.

“나 왔어.”

혹시 몰라 인기척을 내고 들어갔는데, 집 안이 조용하다.

“뭐야? 어디 갔나?”

거실도 조용하고, 주방으로 가보니 먹다 만 밥공기가 그대로 있었다.

미간에 주름이 졌다.

“먹은건 바로바로 치우라니…….”

그러다 문득 식탁 위에 놓인 반찬들에 눈이 갔다.

달걀프라이 랑 김 하나가 전부.

얼마 뜨지도 않은 것 같은 밥은 거의 건드리지도 않은 듯 그대로다.

마음이 괜히 불편해져온다.

현관으로 다시 가보니 신발도 그대로.

“신수빈,,

욕실 앞에서 수빈을 불러봤지만, 역시나 비어있었다.

예준은 그녀의 방으로 갔다.

남은 곳은 이곳뿐이 었다.

노크를 하려고 들었던 손이 문에 닿기 직전 멈추었고, 그는 망설였다.

피곤해서 일찍 잠든 걸 수도 있는데,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는 거다.

“돗*다. 관두자.”

결국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그 순간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예준이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초췌한 얼굴의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언제 왔어?”

“방금・밥 먹다 잔거야?”

“아. 그게, 입맛도 없고 속도 영 메스꺼운 게 피곤해서 잠깐 누웠는데 깜빡 잠들었나 보卜.”

그녀가 터덜터덜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먹다 만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신경 쓰였던 예준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놔둬. 내가치울 테니까.”

“괜찮아. 내가 먹은 거니까, 내가……

“내가 한다고.”

수빈의 손에 들린 밥공기를 빼앗으려고 손등이 살짝 부딪쳤는데 예준이 순간 멈칫했다.

순간이었지만 확실한 열기가 느껴진 것이다. 그가 황급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뭐야, 너.”

예준이 손을 들어 수빈의 이마를 덮었다.

“어디 아파?”

수빈은 그의 손을 쳐 낼 기운도 없는지, 그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종이 인형마냥 비척댈 뿐이었다.

“점심에 샌드위치 먹고 들어왔는데, 너무 급히 먹었나 보卜. 체한 거 같아.”

“어디서 뭘 먹은건데. 상한 거 먹은 거 아니야?”

“몰라,,

“그 샌드위치가게 어디야.”

자기도 모르게 살짝 언성이 높아졌다. 수빈도 놀랐는지 그런 그를 한참이 나 관망하다가 뒤늦게 피식 웃었다.

“웬 오버? 어디인 거 알면 뭐하게?”

그러더니 예준의 손을 가볍게 거두어내며 걸음을 돌렸다.

“나 먼저 씻는다. 뒤 좀 부탁할게.”

축 쳐진 어깨로 비틀거리던 그녀가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입꼬리를 당겼다.

“고마워, 지예준.”

짓궂은 표정은 여전한데, 어딘가 힘이 없어 보이는 웃음이었다.

욕실로 향한 수빈은 고민하다가 따듯한 물을 가득 받았다.

열이 좀 나는 것 같아 미지근한 물로 몸을 좀 식힐까 하다가, 어쩐지 오한이 느껴지는 것 같아 수도꼭지를 돌려 뜨끈하게 물을 받은 것이다.

수빈은 몽롱한 정신으로 꾸벅꾸벅 졸며 한참이나 욕실에 머물러 있다가 나왔다.

기운이 없어서 빨리 자고 싶었지만, 움직일 힘도 없어 그냥저냥 욕조에 앉아 시간을 때웠던 거다.

“아.안되겠다.”

더 있다가는 몸이 물에 불은 어묵마냥 탱탱 불어터질 것 같았다.

욕조에 손을 짚고 일어서려는데, 순식간에 시야가 엉망으로 비틀렸다.

“어어……!”

우당탕!

엄청난 굉음 뒤로 첨벙,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욕조로 미끄러진 수빈은 물에 빠진 채 축 늘어졌다.

“아……

아이고, 삭신이야.

아이고, 머리야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서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렇게 욕조에 두 팔을 걸친 채 반쯤 몸을 뺀 상태로 엎어져있는데, 소리를 듣고 온 예준이 문을 두드렸다.

“신수빈! 괜찮아?”

“어,괜찮아.”

모기만 한 목소리로 겨우 꺼낸 대답이 들리지 않았는지 예준이 더 크게 노크를 했다.

“야! 괜찮냐고!”

……괜찮다고, 이 자식아. 가뜩이나 머리 울려죽겠는데 소리 좀 지르지 마.

목소리가 나오다 말고 목구멍을 턱 하고 막아버렸다.

“신수빈!!!”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던 예준도 적잖이 놀란 듯 냉정하고 차분한 모습은 오간데 없이 문이 부서져라 두드려댔다.

“괜찮다고!”

겨우겨우 쥐어짜낸 목소리로 소리 쳤는데, 그러고도 한참을 나가질 못하고 있으니 예준은 기어이 열쇠를 들고 왔다.

“나, 들어간다.”

……뭐?

철컥철컥.

믿고 싶지 않은 소리가 빠르게 그녀의 심장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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