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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25화 (25/63)
  • 2 5화

    “칙!,,

    벨소리에 놀란 수빈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발신자는 정남이었다.

    큰일이다.

    그녀가 급히 방을 둘러봤다. 혼자 있다는 게 티 나면 곤란한데.

    무료로 영상통화가 가능한 앱을

    설치해드렸더니, 이렇게 또 요긴하게 써먹어주실 줄이야.

    수빈은 아무렇게나 방치해둔 캐리어를 급히 침대 아래로 숨기고, 옷가지도 대충 옷장에 밀어 넣었다. 동시에 헝클어진 머리까지 정돈하느라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이 정도면 됐겠지? 티 나지 않겠지?”

    흐I 흐1 0• D •

    목소리를 가다듬던 그녀가 정 남의 전화를 받아들었다.

    [딸! 잘 도착했어기

    “엄,엄마! 하하! 잘 도착했지, 그럼! 지 서방은 씨, 씻고 있어 !”

    묻지도 않았는데 제 발이 저려 먼저 뱉어버리고 말았다.

    [아, 그렇구나. 엄마가 너무 일찍 전화해버렸네. 밥은 아직 안 먹었지? 뭐 먹으러 갈 거니? 사진 좀 찍어서 보내주고 그래」

    하와이에 와있는 건 자신인데, 들뜬 건 정 남이 더 들뜬듯한 목소리였다.

    수빈은 허공에 고개를 마구 끄덕이 며 대꾸했다.

    “어? 알았어 ! 안 그래도 여기 유명한 맛집 많다고 해서 신랑이랑 가기로 약속했거든.

    이따가 식당에서 영상통화 걸게!”

    ……아, 제길.

    그냥 사진이나 보내겠다고 할 걸.

    왜 영상통화라는 단어가 튀어나와버렸을까.

    [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우리 딸, 좋은 시간 보내다 와」

    “어. 알았어, 엄마.”

    정남과 통화를 끝낸 수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그런데 전화를 끊기 무섭게 다시 진동이 울렸다.

    부르르. 부르르.

    이번엔 시어머니인 소정이었다. 수빈이 정신없이 전화를 받아들었다.

    “아, 네! 어머니!”

    [잘도착했니?]

    “그럼요 잘 도착했어요. 이제 막

    전화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올 때 나 가방 하나만 사다굴래기

    “네?”

    [C사 걸로』

    아, 가방…….

    [예준이한테 부탁 좀 할까 했더 니만, 얘가 전화를 통 안 받아서 말이야」

    “그게, 예준 씨가 지금 샤워 중이라 그래요, 어머님.”

    [그래? 어머나, 내가 괜히 방해한 건 아닌가 모르겠구나.]

    “어,어머니 ! 아니에요, 그런 거 !”

    [얘는, 결혼까지 한 애가 뭘 그렇게 부끄러움을 타고 그래? 아무튼 좋은 시간 보내고, 이따 할머님께 사진이라도 좀 보내드리렴 영상통화 걸어드리면 더 좋고.]

    “네. 알겠습니다.”

    겨우 통화를 마무리 짓자, 뒤늦게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이제야 겨우 자유라고 생각했는데 자유가, 자유가 아닌 것이다.

    본의 아니게 괴롭힘 당하고 있던 건 예준 쪽도 예외가 아니었던 듯, 그는 피곤함이 가득 묻은 얼굴로 먼저 수빈을 찾아왔다.

    “안 되겠다. 오늘만 나가서 밥이라도 같이 먹자.”

    “……동감이야.”

    두 사람은 나란히 호텔을 나섰다.

    그러고는 유명한 햄버거 집을 찾아 맥주와 함께 햄버거를 시켰다.

    예준은 음식이 나오기 무섭게 카메라를 켰다.

    “이리 와.”

    그에 수빈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자 예준이 다시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웃어。

    결국 로봇처럼 웃고 있는 사진이 한 장 찍혔다.

    “야! 나 눈 감았잖아.”

    “괜찮아. 내가 잘 나왔으니까.”

    이 망할 자식!

    휴대폰을 빼앗아보려 했지만, 예준은 손을 높이 뻗어 사진을 그대로 소정에게 전송해버렸다.

    - 저희 신혼여행 온 겁니다. 관심은 이쯤에서 거둬주세요.

    짤막한 메시지도 덧붙인 채.

    무뚝뚝한 얼굴로 문자 전송을 마친 예준은 곧바로 누군가에게 영상통화를 걸기 시작했匚匕

    “누구한테 전화해? 할머 니 ?”

    그녀가 묻기가 무섭게 액정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어머! 지 서방!]

    수신인은 애자가 아닌 정남이었다.

    “어머니.”

    살갑게 웃는 그의 얼굴에 순간 소름이 다 돋을 뻔했다.

    “저희 밥 먹으러 나왔어요. 식사하셨어요?” [어 .우리는 아까 먹었지.시차 때문에 힘들지기

    “괜찮습니다. 다음엔 두 분 모시고 올게요.” [우리 지 서방은 어쩜, 예쁜 입술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말이라도 고맙네.]

    “빈말아니에요. 어머니.”

    [어머나, 그래? 나도 빈말 아닌데. 호호호.]

    때 맞춰 날려주는 사위의 백만 불짜리 미소에 정남은 얼굴에 꽃이 만발했다.

    그리고 수빈은 눈앞의 상황을 오묘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장 씨 나도 우리 딸이랑 사위 얼굴 좀 봅세」

    요리조리 고개를 빼며 등장할 타이밍을 노리던 방훈이 답답했는지, 정남과 카메라 사이로 마구 얼굴을 들이밀었다.

    커다랗고 까만 동굴 두 개가 삽시간에 화면을 가득 채웠다.

    “하하, 아빠 콧구멍 좀……

    예준에게 만큼은 아빠의 신비주의를 좀 지켜주고 싶어서 수빈은 황급히 액정을 가리며 외쳤다.

    [아이고! 콧구멍이 보였어? 아빠가 우리 딸래미 얼굴 좀 보려다가 사위 재미있는 구경만시켜줬네』

    껄껄 웃는 그를 보며, 수빈도 따라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통화가 마무리되고, 수빈은 예준을 향해 말했다.

    “할머님이랑 할아버님한테는 내가 아까 전화 드렸어. 시차 때문에 너무 늦게 전화하면 혹시라도 주무시고 계실까 봐.”

    “잘했어,,

    예준이 감자칩 하나를 집어 먹으며 대꾸했다.

    정적이 흘렀다.

    딱히 더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접점을 찾지 못해, 두 사람은 밥 먹는 일에만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곧 예준은 얼마 손대지도 않은 햄버거를 그대로 둔 채 일어섰다.

    “그럼 먹고 와.”

    “왜 일어나?”

    “밥이라도 좀 편하게 먹자고.”

    그 한마디를 남겨둔 채 예준은 먼저 자리를 떴다.

    그녀는 입 안에 든 햄버거를 오물거리며 유리창 너머로 멀어져가는 예준을 응시했匚卜.

    “배려해준건가?”

    불편한 두 사람이 만나서 밥을 먹는 것만큼 어색하고 힘든 일도 없었다.

    예준 역시 그걸 잘 아는 듯했고

    하지만 수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아는 예준은 불편한 상황에서 밥까지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질색할 만큼 싫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배려는 무슨. 지가 불편하니까 일어선 거지.”

    수빈은 시선을 거두고는 다시 열심히 식사하기 시작했다.

    햄버거 가게를 빠져나온 예준도 호텔 앞에 있는 한 음식 점에서 도시 락을 사서 곧장 숙소로 향했다.

    발코니에 맥주까지 완벽한 한 끼 세팅을 마친 그가 그림처 럼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식사를 시작했다.

    “휴우.”

    긴 날숨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이제좀 편하네.”

    역시 밥은 혼자 먹는 게 최고라는 혼잣말도 함께.

    그렇게 신혼여행의 첫날이 저물어갔다.

    * * *

    다음날.

    조식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은 예준이 막 샐러드 한입을 먹었을 때였다.

    접시에 음식을 수북하게 담은 수빈이 보란 듯이 예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굿모닝.”

    그녀가 시크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예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겁박했다.

    “저리 안 가?”

    “내가 똥파리야? 왜사람을 벌레 좆듯

    쫒아내려고 그러냐?”

    “자리도 많은데 왜 하필 여기야. 먹다 체할 거 같으니까 당장 사라져.”

    “왜 먹다 체해? 내가 너한테 그렇게 대단한 존재야? 천하의 지예준을 체하게 할 만큼?”

    빙글빙글 웃는 수빈을 보며 예준이 포크를 접시 위에 탁 내려놓았다.

    “용건이 뭐야.”

    그의 물음에 수빈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너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인사 못했잖아. 엄청 기다리고 계신단 말이야.”

    그녀가 휴대폰 액정 안에 예준과 자신의 얼굴이 잘 들어오도록 조절하며 말했다.

    “앗! 연결됐匚卜. 야, 웃어 웃어 !”

    수빈이 복화술을 하며 예준의 팔을 쿡쿡 찔렀다.

    [아이고오! 이게 누구여 !]

    “할머4 할아버님 !”

    계춘과 애자의 등장에 수빈이 살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저희 아침밥 먹으러 왔어요. 어? 산책 나오셨어요? 꽃 예쁘게 피었네요.”

    휠체어에 탄 애자의 뒤로 알록달록한 꽃밭이 펼쳐져있는 걸 보니, 밖으로 잠시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다.

    [예준이는 왜 접시가 죄다풀때기야? 그런 거 먹고 밤에 힘쓰겠어 기

    “아, 할머니.”

    예준이 정색하며 대꾸했지만, 수빈은 박장대소를 하며 깔깔 웃었다.

    [걱정 마세요 안 그래도 제가 이렇게 고기랑 밥 잔뜩 담아왔어요. 예준 씨 주려고요』

    얼굴 하나 안 변하고 너스레를 떠는 수빈과 기분 좋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는 애자와 계춘의 모습을 예준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제 저녁. 수빈이 자신의 친정 식구들과 통화를 하던 예준을 바라보던 것과 같은 모호한 표정으로.

    “한국 가면 바로 찾아뵐게요. 치료 잘 받고 계세요.”

    열심히 손을 흔들며 통화를 마무리 지은 수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입꼬리를 내리며 포크를 들었다.

    예준은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포크를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접시 위에 있던 달걀말이 하나를 집으려했다.

    번개같이 접시를 당긴 수빈이 정색하며 예준을 노려봤다.

    “뭐하는 짓이야?”

    “나 먹이려고 떠온 거라며.”

    “내가 언제?”

    그녀가 뻔뻔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고 반문하더니, 곧장 타박까지 연이어 건넸다.

    “먹고 싶으면 네가 직접 떠다 먹어. 손이 없어, 발이 없어.”

    그 말을끝으로수빈은혀를한번 쭉 내빼더니, 자리에서 냉큼 일어섰다.

    “그럼 난 이만.”

    그러더니 접시를 들고 이내 다른 자리로 총총 사라져 버 렸다.

    “……하!”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는 세상 살갑게 굴더니, 냉혈한도 저런 냉혈한이 없다.

    일 처리 하나는 끝내주게 잘 해내줘서 고맙긴 고마운데,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나는 예준이었다.

    “죽어도 못한다던 사람은 어디로 사라져 버 렸나 몰라.”

    혼잣말하던 예준이 수빈의 뒷모습을 가만히 시선으로 쫓았다.

    그녀는 한 손에 수북하게 음식을 뜬 접시를 든 채, 접시 하나를 또 꺼내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더 니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거의 1 인 뷔페식으로 식탁을 가득 채운 뒤에야 식사를 시작했다.

    아침부터 수빈의 대식가다운 면모를 관찰하던 예준이 작게 실소하며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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