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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24화 (24/63)

24 화

“신랑 입장.”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함께 예준이 먼저 버진로드를 우아하게 걸어갔다.

저 멀리 당도한 예준이 감흥 없는 눈빛으로 수빈을 바라보았고, 수빈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신부 입장이 외쳐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희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흠칫 어깨를 떤 수빈이 고개를 돌리자, 어금니를 꾹 문 채 아래턱을 덜덜 떨고 있는 방훈의 모습이 보였다.

딸을 시집보내는 마지막 길까지 다리를 절고 싶지는 않다며, 며칠 내내 절지 않고 걷는

연습을 하던 방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긴장을 풀어주려 수빈이 작게 속삭였다.

“아빠. 긴장 풀어요.”

수빈의 격려에 슬쩍 고개를 돌린 방훈이 떨리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친 채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애정이 듬뿍 담긴 주름진 눈가가 습윤했다.

아. 안되겠다.

더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수빈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방훈의 입술이 열렸다.

“수빈아,,

방훈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해져 슬쩍 시선을 내리고 고집스럽게 아래만 쳐다보았다.

보이는 건 새하얀웨딩드레스

치맛자락뿐이었는데, 방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너무나도 눈에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진 방훈의 목소리에는 분명.

“잘 살아, 우리 딸.”

떨림이 선연했다.

그 한마디에 의도치 않게 눈물이 왈칵 고여버렸匚上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엉켜들었다.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선택한 일인데, 왜 그 한마디에 죄책감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신부 입장!”

때맞춰 신호가 떨어졌다.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문 수빈이 고개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방훈의 걸음에 맞춰 아주 느리게 걸었지만, 버진로드는 한없이 짧게만 느껴졌다.

두어 걸음 마중을 나온 예준이 방훈에게 인사를 하고는 수빈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머뭇거 리던 수빈의 손이 방훈을 떠나 예준의 팔을 잡는 순간.

“우리 딸 잘 부탁하네.”

나지막이 들려온 방훈의 마지막 발언이 기어이 눈물방울을 툭 떨구게 만들어버렸다.

수빈은 울음을 참느라 오만상을 쓰고 단상 위에 올랐다.

그렇게 주례가 시작되고, 수빈의 머릿속은 주례사를 열심히 들을 만큼 여유가 없었다.

어느덧 서약의 순서가 돌아왔다.

“신랑 지예준 군은 신부 신수빈 양을 아내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생 아끼고 배려하며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약간의 표정 변화도 없이 예준이 곧장 대답을 했고, 수빈에게도 곧 차례가 돌아왔다.

“신부 신수빈 양은 신랑 지예준 군을 남편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생 아끼고 배려하며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희미한 그녀의 목소리가 끝내 말꼬리를 흐렸다.

주례가 모두 끝나고, 예준의 사돈의 팔촌의 아는 형의 또 아시는 분이라는 성악가가 나와 식장이 떠나가라오 솔레미오(9 Sole Mio)를 열창했다.

요즘 신부들은 케이팝에 맞춰서 직접 춤도 추고 그런다던데, 신랑들도 아이돌 저리가라하게 골반을 흔들고 엉덩이를 흔든다던데

나도 지수랑 토끼 귀때기 달고 깜찍이 춤이라도 추고 싶었는데. 아니면 지수한테 축가라도 부탁하고 싶었다고. 우리 지수 노래는 진짜 기가 막히게 부르니까.

수빈이 꿈꿔왔던 조금은 막 나가는 젊은 감성의 흥 넘치고 재미난 결혼식은 오 솔레미오(0 Sole Mio)에 떠밀려 물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또 서러워진다.

훌쩍이는 수빈의 콧소리를 들은 예준이 시선을 내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울어?”

“안 울어,,

수빈이 오기로 대답하자, 예준이 곧 상체를 약간 숙이더 니 손가락으로 수빈의 눈가를 대신 훔쳐주었다.

“울지 마.”

“넌 원래 못생겼지만, 우는 얼굴은 특히 더 못생겼거든.”

눈 뜨고 못 봐줄 만큼.

“진심이야.”

그가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백 프로 진심인 게 느껴져서 더 그랬다.

쓸데없이 넘쳐흐르던 감수성이 녀석의 한마디에 산통이 깨져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결혼식은 성황리에 마무리되 었다.

* * *

곧장 신혼 여행길에 오른 두 사람은 하와이행 비행기 안에 몸을 실었다.

이륙 준비를 하기 위해 천천히 움직이던 비행기가 방향을 틀어 활주로로 진입했다.

약속꼭지켜, 너.”

한동안 창밖만 멍하니 응시하던 그녀가 거듭 당부했다.

“나랑 결혼 생활하는 동안은 최고의 사위가 되어주겠다고 한 거.”

난 좋은 남편은 필요 없지만, 이 결혼으로 부모님의 꿈까지 깨부수고 싶지는 않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에 잠시 침묵하던 예준은.

“내가 말했잖아.”

“이 결혼으로 인해서 불행해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 라고.”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단언했다.

“저희 비행기는 곧 이륙하겠습니다.”

승무원의 안내와 함께 이륙 준비를 마친 비행기가 활주로 끝에 멈춰 섰다.

그 순간 수빈은 눈을 꾹 감더 니, 좌석의 손잡이를 세게 움켜잡았匚匕 손끝이 하얘지도록 힘을 준 그녀의 얼굴은 긴장감이 역력했다.

“비행기 처음 타? 왜 이래?”

“그래 처음 탄다, 어쩔래. 택시비 아까워서 버스끊기면 걸어 다니던 때도 있었는데, 내가 비행기 같은 걸 타봤겠냐?”

엄마 말로는 네 살 땐가 제주도에 가본 적이 있다는데 아쉽게도 자신의 기억 속엔 없는 추억이었다.

수빈이 툭 내뱉은 대꾸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예준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섰다.

“버스 끊길 때까지 뭐 했어? 일찍 좀 다니지, 겁도 없어?”

……왜 대화의 포인트가 그쪽으로 향하는 건데.

수빈이 황당하다는 듯 예준을 쳐다보았고, 그 순간 비행기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엄마악!”

놀란 수빈이 눈을 도로 질끈 감았다.

으. 무, 무서워.

생각보다 엄청난 스피드에 당황해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비행기가 허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동체가 안정적인 고도에 접어들자, 땀까지 삐질삐질 흘리며 떨던 수빈이 슬쩍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았다.

“……와.”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인 채, 작게 감탄하던 수빈이 끊임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너무 예쁘다.”

새까만 지면 위로 눈부신 조명들이 별을 부숴 뿌려놓은 듯 반짝였다.

하늘에서 보는 한국의 야경은 수빈에게는 난생 처음 접하는 장관이었다.

“와아’‘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그녀를 물끄러미 관망하던 예준은 승무원에게 부탁한 맥주 한 캔을 수빈에게 내밀었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마시고 자, 그냥.”

“오오!”

눈이 동그래진 수빈은 신이 나서 캔 맥주를 받아들었다.

계획에도 없던 신혼여행을 떠나게 됐지만, 어쨌든 여행은 여행인 건가. 누르려고 해도 스멀스멀 피어 나는 설렘과 두근거 림을 숨길 방법이 없었다.

배불리 기내식을 먹은 뒤 맥주를 마시고 영화 한 편을 보고나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예준은 목에 쿠션을 두른 채 팔짱을 끼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맥주를 너무 마셨나.”

긴장도 풀린 상태에서 높은 고도에서 술을 마시니 온몸이 노곤해진다. 꾸벅꾸벅 졸던 수빈의 머리가 한쪽으로 슥 기울더니 창문에 콩 하고 부딮쳤다.

“……아.”

슬쩍 눈을 떴던 그녀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하다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휙. 휘익.

큰 원을 그리며 이리저리 흔들리던 그녀의 머리가 예준의 어깨에 툭 하고 떨어졌다.

고요했던 예준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조용히 눈을 뜬 예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든 수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커다란 손바닥으로 수빈의 머리를 감쌌다.

그러고는, 홰

“아!”

인정사정없이 밀어버렸다.

깜짝 놀라 일어난 수빈은 잠이 덜 깬 듯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다시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했다.

멱살잡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만,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

가만히 수빈을 응시하던 예준은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목 쿠션을 주워 적선이라도 하는 양 대충 끼워주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 * *

길고 긴 비행시간 끝에 비행기는 드디어 호놀룰루 공항에 착륙했다.

숙소는 와이키키 해변의 끝내주는 뷰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한 호텔이었다.

프런트에서 두 개의 룸 키를 받아든 예준이 하나를 수빈에게 건네주었고, 방금 전 그에게 키를 건네준 호텔 직원은 의아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알로하.”

키를 받아든 수빈이 씨익 웃으며 예준에게 말했다.

“5일 동안 즐겁게 보내고.”

그녀의 첫 마디가 끝나는 동시에 이번엔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마주치지 말자.”

“웬만하면 마주치지 말자.”

앞으로 지겹게 붙어있을 테니, 하와이에서 만큼은 자유를 만끽하자는 염원이 담긴 외침을 끝으로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같은 층에서 내린 두 사람은 그렇게 각각 왼족과 오른쪽으로 서로 등을 진 채 각자의

룸을 찾아 걸어갔다.

카드키를 넣고 룸에 입실한 수빈은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곧장 발코니로 향했다. 커튼을 열고 창문까지 여 니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날아들었다.

“세상에.”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와이키키 해변이 호텔 앞에 장관처럼 펼쳐져있었다.

“하와이라니. 내가 지금 하와이에 있다니!” 그녀는 감격에 젖어 한동안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넓은 침대 위에 그대로 몸을 던져 낙하했다.

푹신한 이불이 온몸을 감쌌고, 그녀는 곧 침대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버 렸다.

하와이도 좋고, 와이키키도 좋지만, 한동안 결혼을 준비하며 꽉 막혔던 숨이 드디어 좀 트이는 것 같다는 기분이 가장 그녀를 들뜨게 했다.

일단은 좀 쉬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서핑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었지만, 혼자가 되면 가장 하고 싶었던 건 역시 다 잎고 잠이라도 푹 자는 거였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너무 좋아

날씨는 더할 나위 없었고, 포근한 이불의 촉감도, 열린 창문 사이로 사분히 불어오는 바람도, 적당한 높이의 푹신한 베개도.

모든 게 완벽한 하와이였다.

그렇게 머리를 댄 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수빈은 깊은 잠에 빠져버 렸다.

다시 잠에서 깬 건 그로부터 으F 2시간 후.

그녀의 달콤한 잠을 깨운 건 휴대폰 벨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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