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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46화 (46/70)

46화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쩐지 구슬펐다.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이, 자신이 속한 상황이, 상황이 벌어지게 된 내 인생이.

이라에게 향하는 녹색 눈동자는 깊고 진지했다. 거절할 수 없게끔, 그는 기회를 잡았다. 흔들리고 흔들리다 결국은 넘어져 품 안에 안길 걸 아는 것처럼.

그래도 될까. 이런 방법으로 내가 이 남자 곁에 서도 될까. 이거야말로 그에게 진짜 상처 주는 방법이 아닐까. 거절해야 하는데, 여태 그랬던 것처럼 두 눈 감고 두 귀 닫고 멀어져야 하는데.

다가오지 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미 그는 봤다. 흔들리는 이라의 눈동자를. 애처롭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가 어렴풋이 미소를 지은 순간, 이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근데 괜찮겠어?”

그의 물음에 이라는 여전히 책상 앞에 선 채 그를 바라봤다.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방송에 나가게 되면 말이야. 당연히 당신도 관심에서 벗어나진 못해.”

각오했던 바다. 어차피 이 기세를 타고 유명세를 얻으면 후일에 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관심의 방향이 어떨지는 몰라도 이라가 전처럼 반짝 유명해지면, 그때 배소라 증거 영상을 터트릴 수 있었다.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배소라와 다시 협상할 수 있겠지.

“괜찮아요. 오히려 그래야 할 수도 있고요.”

그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내가 방송에 나가는 조건으로 당신이 일에 복귀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제이든은 피식 웃었다.

“진짠가 보네.”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내가 당신을 복직시켜줄 수 있는 카드면, 활용해야지. 그편이 나도 기쁘고.”

그가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대놓고 이용하겠다는 건데도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이라는 작은 한숨과 함께 두 손을 맞잡고 꽉 쥐었다.

“여태 제대로 얘기한 적 없는데요, 나 잘렸다고 했잖아요. PD 입봉 직전에 잘렸거든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 들었거든, 어머니한테.”

굳이 듣지 않더라도 검색만 하면 금방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라의 이름까지 자세하게 나오는 건 많지 않았지만, 배소라를 검색하면 바로 연관 검색어에 뜨는 사건이었다.

“그거 오해거든요. 뭐 어쩌다 합의금까지 물어준 상황이 되긴 했는데, 그 오해라는 증거를 확보해서 아마 이 일로 더 유명해지면 그때 바로잡으려고요. 도와준다는 선배가 있거든요.”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방법이네.”

“당신한테는…….”

“슬슬 복귀하려고 생각 중이긴 했어.”

그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 책상을 돌아 그녀 앞으로 온 그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그렇게 죄지은 표정 하지 마. 안 그래도 당신 데리고 이곳저곳 가고 싶었던 계획 다 물거품 돼서 속상한 와중이거든.”

“아. 혹시 밖에 기자나 당신 팬들 있어요?”

“마지막 보고를 받았을 땐 있었어. 많진 않지만.”

“의외네요. 있으면 되게 많을 줄 알았는데.”

이라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자, 잠시 그 표정을 보던 그는 허리를 세우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왜 웃는지 몰라 바라보니, 여전히 웃음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그가 말했다.

“이곳은 아버지가 사는 곳이고, 나는 5년 전부터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살았어. 주로 호텔에 머물거나 다른 나라에 가 있거나를 오래 해서 내 거주지를 잘 모르지. 공식적인 활동도 없었으니까 파악하기도 어려웠을 테고.”

“그럼 내내 호텔 같은 곳에서만 지냈던 거예요?”

“집도 있긴 해. 예전에 살던 몇 곳을 처분하지 않아서 종종 살았지. 아마 그 주위로도 꽤 있지 않을까 싶네.”

아무렇지 않게 집도 여러 개라니. 이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정말 그와 시작해도 되는 걸까. 이라의 표정을 쓱 훑어본 그의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

“뭐, 필요하면 몇 채 줄 수도 있고.”

“에?”

무슨 말인지 몰라 멍청하게 소리를 냈다. 그런 이라의 반응에 제이든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다가 허리를 훅 굽혔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라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

놀란 이라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자, 그는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씨익 웃었다.

“이 정도는 되지?”

“무, 무, 무슨.”

“할 거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건들지 말라고 말한다면야, 말은 잘 듣겠지만.”

그가 앙큼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 꽤 상심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으럼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자, 제이든은 여전히 잘난 얼굴로 씩 웃었다.

“스킨십은 허락해줘. 애태워 죽일 작정이 아니면.”

삐용삐용. 이라의 머리에서 새빨간 경고음이 울렸다. 아, 이거 정말 잘못 걸린 것 같은데.

***

“너무 걱정하지 마. 제이디가 잘 해결한다고 했으니까.”

어제부터 뒤숭숭한 마음을 달랠 겸 정원으로 산책을 나온 수연은 제 뒤를 졸졸 쫓아오는 로버트를 바라봤다. 정말 오랜만이긴 하지만 이 상황은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둘 다 걱정인 거죠. 한국에 돌아가서 괜히 이라 씨한테 피해가 더 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당신 아들 성격 알잖아.”

“그래도요.”

한숨과 함께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니까 약 30년도 더 된 일이었다. 수연은 낯선 땅에 와 이곳을 자주 홀로 걸었다. 함께일 로버트는 일 때문에 너무 바빴고, 제이든 역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바빴으니까.

문득 이 전경에 홀려 걷다가 해가 질 때도 있었다. 너무 넓은 탓에 길을 잃었던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항상 그녀의 뒤에는 그가 서 있었다. 오늘처럼, 이렇게.

“수연.”

그녀를 따라오던 로버트는 이제는 익숙한 한국말로 그녀를 불렀다. 대답은 없었지만, 걸음 속도가 늦춰진 걸로 의사 표현은 충분했다.

“곧 한국으로 갈 거야.”

그의 말에 앞만 보며 걷던 수연의 걸음이 그제야 멈췄다. 천천히 멈춘 그녀는 그만큼 더 천천히 그를 돌아봤다. 여전히 그녀보다는 한참이나 더 큰 그를 올려다봤다. 햇빛에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저 녹색 눈동자가 언제나 올곧게 그녀를 향했다.

처음 만난 이후로 계속, 변함없이.

“무슨 소리예요?”

“이제 나도 할 만큼 했지.”

로버트는 익숙한 듯 수연의 얇은 손목을 잡아 제 큰 손안에 넣었다. 조물조물 만지면서 어느새 손과 손이 맞잡혀 있었다.

“제이디가 회사를 물려받지 않는다는 건 속상하지만, 처음 본 이후로 삼십일 년을 졸랐으면 포기할 때도 됐지.”

처음 제이든의 존재를 알고 난 후 로버트는 제 모든 걸 수연과 제이든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당연히 제가 물려받고 일군 회사 역시 당연히 제이든이 이어갈 줄 알았다.

중학교를 들어간 그가 제 진로를 찾고, 그 어린 나이에 성공함으로써 로버트의 바람은 와장창 깨졌다. 그럼에도 꾸준히 그가 경영권을 승계받길 원했다. 그라면 자신보다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겠다 확신했다.

“어쩌겠어. 하고자 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잖아.”

로버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성인이 된 후에도 제이든은 딱 잘라 거절했다. 처음에는 재산이 비교 불가였지만, 해가 지날수록 제이든 역시 무시 못 할 자수성가로 무섭도록 성공하기 시작했다.

“제이디 뜻은 확실히 알겠고, 당신 뜻도 여전히 존중해. 그러니까 이제 회사는 전문 경영인한테 맡기고, 한국에서 당신과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싶어.”

“……진심이에요?”

“나도 은퇴할 때가 됐어. 남편 자격 없었겠지만, 지금부터라도 곁에서 할 수 있게 해줘. 그렇다면 나는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할 거야. 물론 당신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고.”

로버트의 다정한 미소에 수연은 놀라 입술이 벌어졌다. 물론 제이든 만큼은 아니더라도 로버트 역시 시간이 나면 무조건 수연을 보러 한국으로 왔다. 휴가든 휴일이든 어떤 방법을 동원해 시간만 낼 수 있다면 그녀에게 직진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죄책감도 들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에는 다시 둘이 있는 미국으로 갈까 생각도 했었다. 그 지독하게 외로웠던 4년을 다시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잠들고 하루가 지나면 다시 꾹 눌러 참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다시 그를 만난 이후 수연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에는 바랄 수조차 없던 생활 수준을 갖추게 됐고, 잠을 쪼개가며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늘 경제적으로 여유롭다 못해 풍족했다. 점점 힘들었던 어릴 때는 잊게 되고, 미소는 더욱 늘어갔다.

그래서 또 어느 날에는 그가 무척이나 그립기도 했고, 그리운 만큼 미안해서 다가갈 수도 없었다. 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환히 대답해 주지 못하는 자신이 밉고 어색해졌다.

그래선지 완전히 함께하겠다는 그의 말에 수연은 전에 느껴볼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올랐다.

“당신…… 울어?”

로버트가 당황해 허리를 숙여 수연을 살폈다. 괜히 창피해서 휙 몸을 돌리며 차오른 눈물을 닦아내던 수연은 저 멀리서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에 우뚝 행동을 멈췄다.

“수연?”

로버트가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볼 때, 수연은 말도 안 된다는 듯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로레인?”

그녀의 말에 로버트 역시 의아함에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확신했다. 성큼성큼 저택으로 향하는 저 모습은 로레인이 확실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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