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두근두근.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그저 휴대폰만 붙잡은 채 멍하니 바닥을 응시했다.
-한이라? 이라야?
대답 없는 이라를 윤진은 수화기 너머에서 재촉했다. 그러고 보니까 지금 한국이 몇 시더라. 윤진이 늘 바쁜 시간대 아니었나. 이렇게 통화할 정도의 문제인 건가……?
-야, 한이……!
“선배.”
윤진의 재촉이 다시 이어지기 전에 이라가 대답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이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그런 거 부탁할 입장 아니에요.”
-입장이란 게 어디 있어? 너 이거 지금 먹고사는 문제야. 복직 안 할 거야? 그냥 오해만 풀면 뭐 해? 너 당장 들어갈 곳 있어? 또 뺑뺑이 돌래?
“……그래도요.”
-은우 업어주고 너한테 돈 쓸 정도면 당연히 그런 입장 아니야? 그래, 내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거 네가 싫어할 수도 있고, 예의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잘 생각해 봐.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잖아.
알고 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 사람이 다 이라를 손가락질할 때도 홀로 그녀의 편이 되어 준 것도 윤진이었다.
-제이든 리 에반스, 보통 인물 아니야.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들어오는 캐스팅 제의 다 까댄 지가 벌써 5년이야. 그 공백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 거 같아? 그것뿐이겠어? 제이든 리 에반스랑 로레인 왓슨 스캔들까지. 이렇다 할 해명조차 없었잖아.
역시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이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해명을 그가 해야 할 이유 따윈 없는데.
-캐스팅만 성공하면 전 세계 주목이야. 네가 하겠다고 말만 하면 당장 내가 위로 달려가서 편성 짤게. 무조건 통과야. 지금 시기도 딱 적절하잖아. 영화 개봉에 그다음 권 시리즈 런칭까지 한창 뜨거울 때야.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아도 흔들렸다. 휴대폰을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다시 안 올 화려한 복직의 기회라는 것도 알았다.
-어차피 너도 이미 얼굴 다 팔렸고, 쌍방 얼굴 팔린 건 마찬가지잖아. 캐스팅하고, 복직하고, 배소라 그년 떨어뜨리자고! 그리고 오해는 제대로 풀어야 나중에 은우도 커서 엄마 나온 영상 보고 오해 안 하지 않겠어? 흐지부지 풀어봤자, 배소라가 피해자라고 오해할 사람들은 그대로 오해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명하고 오해를 푼다고 해도 배소라에게 가해질 타격은 미미했다. 큰 한 방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은.
-잘 생각해 봐. PD로 제대로 일하면, 은우 양육권 주장할 때도 떳떳하지 않겠어?
결국 자신은 이기적인 하찮은 인간이었다.
“……알았어요.”
이 대답이 얼마나 그에게 큰 상처를 가져다줄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눈앞에 놓인 단단한 미래를 놓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이니까. 그저 홀로 설 수 있어야 할 뿐이니까.
-진짜지?! 너, 진짜야!
“물어는 본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거절하면 어쩔 수 없는 거 알잖아요.”
-그래도 네가 물어보면 확률이 높아지잖아! 그리고 한 번에 오케이할 일은 없으니까, 설득해 보라는 거지. 어떤 방법을 쓰든.
“무슨 방법을 써요. 그 방송 출연 대가로 그 사람에게 얼마나 이득이 있는지나 계산해서 알려줘요.”
-얼마를 받든 만족하겠어? 네가 어떻게 설득하냐에 따라 다 다른 거지. 으으! 한이라, 장하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이라는 씁쓸하게 웃으며 끝까지 흥분에 절어 있는 윤진을 잘 달래 전화를 끊었다.
***
오전 내내 그의 눈치만 살폈다. 아침 일찍부터 시간까지 계산해 전화한 윤진은 여전히 잔뜩 흥분해 말했다.
‘회사에는 내가 말해 뒀어. 당연하겠지만 엄청 긍정적이야! 되면 단독 편성도 짜고, 너 복직도 바로 하라고 할 정도니까, 잘해 봐. 이제 너 하기에 달렸다! 한이라!’
계획해 둔 일정은 기사가 터지는 바람에 무산됐고, 덕분에 바빠진 건지 제이든은 점심도 거르고 일하는 중이었다.
그의 방 앞에서 서성이는데, 그때 문이 달칵 열렸다. 아까 들어갔던 그의 매니저라는 여자가 나왔다. 이름이 제니퍼랬나.
[아, 반갑습니다. 이라. 더 긴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가 급히 회사에 돌아가 봐야 하거든요.]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는 채 악수를 한 제니퍼가 미소 지은 후 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이라는 꿀꺽 침을 삼킨 채 그의 방 앞에 서서 노크했다.
“제이든. 많이 바쁜가요…….”
“들어와.”
짧은 허락에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우선 들어오라고 하니 들어가긴 했는데 미안해서 눈도 못 마주쳤다. 이라는 푹 숙인 고개를 천천히 들며 그를 바라봤다.
제이든은 책상에 앉은 채 안경을 벗고 있었다. 잠깐 눈이 피곤했던 건지 인상을 찡그리던 그는 이라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죄인처럼 서 있어? 나한테 벌 받으러 온 것처럼.”
“아뇨…….”
굳이 따지자면 죄인에 가깝지 않을까. 속으로 생각을 삼킨 이라는 본론을 말하기 위해 꿀꺽 침을 삼켰다. 다가오지 말라고 못을 박은 건 자신인데, 그가 다시 필요하니 이렇게 오는 꼴이란. 자신에게 정이 떨어졌다.
“부……, 탁이 있어서요.”
“부탁이란 단어에 굉장히 자괴감이 느껴지네.”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해.”
“공적인 이야기예요.”
“그래.”
“하지만 사적인…… 부탁일 수도 있어요.”
자신 없는 말에 그는 여전히 같은 태도로 이라를 바라봤다. 무엇이든 간에 들어줄 사람처럼. 잠시 우물쭈물하던 이라는 용기를 내 말을 꺼냈다.
“당신을 캐스팅하고 싶어요. 섭외요.”
그는 반응이 없었다. 이라는 에라 모르겠다며 말을 이었다.
“단독 편성이에요. 특별편이나 번외같이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건데요, 아주 유명한 사람을 위한 특집이랄까. 요즘 화제…… 잖아요.”
말을 꺼내면서도 점점 그의 시선을 피하게 됐다. 현재 겪는 화제성을 그가 싫어하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꺼내니 죄스러웠다. 내 밥줄 하나 건져보자고, 이 남자 상처를 건들고 있으니.
“화제의 중심인 당신을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이에요. 개인적인, 그러니까…….”
“방송에 나오라는 거군.”
그의 말에 이라가 시선을 휙 들었다. 그는 담담했다. 분명 그가 이라에게 왜 방송에 나오지 않는지 얘기했음에도, 이러는 이라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울고 싶어졌다. 그에게 미안해서.
“미안해요.”
당신 인터뷰 하나로 내가 복직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화려하게. 그래서 더 미안했다. 남의 아픔을 팔아먹는 것 같아서, 아니 그래서.
고개를 숙인 이라를 빤히 보던 제이든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숨에도 움찔거릴 정도로 온몸으로 미안함을 표현하는 여자였다.
알고 있었다.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으며,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죄책감과 자괴감을 가지고 있을지.
확실히 어느 나라든 그의 인터뷰를 내보낼 수 있다는 것에 더 큰 화제를 불러오리란 건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래서 곧 죽어도 안 하겠다고 한 건 그 이유에서였다. 암묵적으로 연예계를 은퇴한 이유 역시도. 연기 활동을 중단한 것도.
이라는 그 앞에서 정말 죄인처럼 두 손을 꼭 붙잡았다. 당장에라도 괜찮다고, 내가 잠깐 미친 거라고 미안하다 하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그의 대답을 꼭 들어야 하는 제 현실적인 입장에 괴로웠다.
“하아.”
그때 그의 한숨 소리가 다시 들렸다. 잔뜩 긴장한 이라가 눈을 들어 보자, 제이든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순간 이라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했었나 보다. 그라면 내 부탁은 들어주지 않을까……. 그래서 들어줄 걸 알아서 더 미안했던 것처럼. 그런 착각을 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 그의 표정에 너무 아팠다.
한 번도 자존심 상할 텐데, 이미 여러 번 거절 당한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당연히 질렸겠지. 어이없겠지. 이젠 아예 날 정리했을지도 몰라.
이라의 낯빛이 점점 파리해졌다. 그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그의 입술이 열렸다.
“알고 있지.”
“네?”
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약한 거.”
그녀의 눈이 더욱 크게 확장됐다. 생각도 못 한 대답이라는 듯한 표정에, 제이든은 사실상 더 어이가 없어졌다.
“무조건 한이라 당신 부탁이면 들어줄 거 알고 말한 거잖아.”
“그…….”
“아니라고 하지 마, 젠장. 방송에 나가게 생겼네.”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였다. 짜증 난 표정이면서도 너한테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부드러운 눈빛. 이라의 놀랐던 심장이 다시금 두근댔다.
반응을 봤을 땐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 아니면 화를 낸다든가.
“정말요?”
“조건이 있어.”
자세를 바로 한 제이든은 찌푸린 미간을 풀며 앉은 채 이라를 올려다봤다. 이라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해요. 출연료든 장소든 그 무엇이든 당신 원하는 대로 다 맞출게요. 최대한 회사에 어필할 테니까…….”
“그런 건 됐고.”
그의 녹색 눈동자가 이라의 놀란 눈을 사로잡았다.
“그 말 취소해.”
“……네?”
이해하지 못해 되묻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이며 더 친절하게 말했다.
“다가오지 말라는 말, 취소하라고.”
“…….”
“내가 당신한테 다가갈 수 있게 해줘.”
속사포로 내뱉으면서도 더 좋은 조건을 떠올리던 이라는 그대로 멈췄다. 지금, 그러니까…….
‘다가오지 마세요.’
그때 했던 이라의 말. 굵게 그었던 그와 나 사이의 선.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자, 제이든은 부드럽게 그리고 언뜻 긴장한 듯 이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 내 마음 받아달라고도 안 해. 그냥 다가가게만 해줘. 당신한테 잘할 수 있게만 해줘.”
“…….”
“내가 당신 옆에 설 기회를 줘. 그럼 난 최선을 다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