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64)화 (164/177)

#164.

로에나가 에셀 성에 갔을 때는 이미 나탈리 후작이 물밑 작업을 마친 후였다.

나탈리 후작은 캐서린 에셀과 인형을 수월하게 바꿔치기하는 데 성공했다.

기억이 돌아온 후 공들여 만든 인형이라 들키지 않은 덕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성공이 목전에 있는 것 같구나.”

나탈리 후작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모두 메이벨 덕이었다.

그녀는 첫 번째 예식에 성공한 직후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예견된 일이었다. 애초에 감옥에 갇힌 캐서린에게 금서를 전해 주며 스스로에게 흑마법을 걸었으니까.

물론 예상한 것보다 너무 늦게 기억이 되살아나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나탈리 후작은 메이벨이 저지른 금기가 무엇이고, 그걸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이젠 알았다.

한마디로 메이벨은 이미 회귀 전부터 그녀에게 놀아났다는 뜻이었다.

소환 예식을 위한 준비는 비단 이번 회차만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탈리 후작이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캐서린을 응시했다.

“저 아이가 루이스라는 걸 아무도 몰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알았다면 이렇게 쉽게 빼앗지는 못했을 터였다. 그녀는 캐서린 몰래 시간을 돌리는 금서를 끼워 넣은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 자부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귀한 정보도 없이 맨땅에 헤딩을 했어야 했을 테니까.

나탈리 후작이 제 손가락에 끼워진 호갑투를 혀로 날름거리며 생각했다.

‘그것보다 대공자비가 의외의 변수였어.’

후작은 회귀 전 그녀를 소문으로만 접했었다. 소문에는 대공자비가 무척 응석받이에 어리광쟁이라고 했는데.

‘전혀 아니었잖아. 오히려 대공자비 때문에 일이 다 어그러질 뻔했어.’

역시 소문은 온전히 믿을 게 못 되었다.

나탈리 후작은 빼앗긴 신수가 아까워 입맛을 다셨다.

흰둥이는 사실 회귀 전 그녀가 포획해 길들인 신수였다.

흑마법으로 완전히 종속시켜 강제로 사역마로 부렸던 신수를 눈 뜨고 빼앗겨 배알이 꼴렸다.

‘생각보다 영악한 계집이야. 살릴 생각은 있었지만 이렇듯 성가셔질 줄은 몰랐지.’

후작은 회귀 전부터 로에나 하델루스가 정령사로서의 자질이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었다. 그것도 로에나의 장례식에서.

후작은 로에나의 무덤에 하루 새 델루스 꽃이 잔뜩 핀 것을 보았다.

뒤이어 대공비 소유의 광산에서 벌어졌던 정령의 가호가 끝난 걸 보고는 거의 확신했었다.

죽은 대공자비가 정령사였구나, 하고.

오염에 의한 전염병으로 죽은 걸 보면 계약까지는 성공하지 못한 듯했다.

그때부터 나탈리 후작의 계획이 시작되었다.

시간을 돌려 로에나를 살리고, 정령사와 별의 루이스를 이용해 아델쿠스를 소환하는 큰 그림을 말이다.

‘뭐,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결국 어린애일 뿐이지. 이번에는 절대 못 빠져나갈 거다.’

나탈리 후작은 미리 손써 둔 일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다, 당신이 왜…….”

그때 약속 장소에 도착한 메이벨은 제이드가 아닌 나탈리 후작이 기다리고 있는 것에 흠칫 몸을 떨었다.

놀라서 말까지 더듬자 나탈리 후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서 와요. 마침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탈리 후작이 상념을 흩뜨리고 메이벨에게 성큼 다가갔다. 뒤늦게 쓰러져 있는 캐서린을 본 메이벨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제이드가 있을 줄 알고 온 장소에 나탈리 후작에 이어 캐서린까지 있어 혼란스러웠다.

“놀랄 것 없어요. 아직 안 죽었거든. 아, 당신은 이자가 죽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예요. 이미 한 번 죽이려다 실패한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아마 그때도 독을 사용했었죠? 보기 좋게 실패해서 감옥에 갇혔잖아요.”

“!!”

메이벨은 회귀 전 제 소행을 아는 듯한 후작의 발언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어떻게 그걸…….”

“기억났거든요. 당신이 시간을 돌리기 전의 일을.”

나탈리 후작이 느른히 웃으며 호갑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메이벨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가까스로 버티며 나탈리 후작을 노려보았다.

그 말은 당시 제게 금서에 대한 진실을 숨긴 것을 저쪽도 알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메이벨이 눈을 치켜뜬 채 항변했다.

“역시 나를 속인 거지?”

“속이다뇨?”

“처음부터 이상했어. 분명 몸만 바꾸는 금서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왜 내가 과거로 돌아와서 이 고생을 해야 했던 거지?”

메이벨의 악에 받친 추궁에 나탈리 후작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어그러질 대로 어그러진 판을 보고도 저런 순진한 질문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나탈리 후작이 웃음을 뚝 멈추며 말했다.

“속이지 않았어요. 몸을 바꾸는 금서라는 것만 얘기했을 뿐이죠.”

“그 말이 그 말이잖아!”

메이벨이 새된 음성을 토하며 씩씩거렸다. 결국 저 몰래 시간을 돌리는 금서까지 섞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예전엔 나와 대화 나누고 싶어 안달이었으면서!’

메이벨은 회귀 전 제게 살랑대던 후작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과거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놀아났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죽여 버리겠어!”

메이벨이 감정에 치우쳐 나탈리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확 퍼진 오염에 곁에 있던 흑마법사들이 거꾸러졌다.

하지만 나탈리 후작은 메이벨의 발악을 예상했다는 듯이 호갑투를 낀 손을 튕겼다.

그러자 바닥에서 거대한 나무뿌리가 솟구치더니 메이벨의 양팔과 다리를 붙들어 맸다.

“이거 놔아악!”

메이벨이 바르작거릴수록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나탈리 후작이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며 나직이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저항하면 팔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주저앉힐 생각이니까.”

살벌한 경고에 메이벨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냥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녀가 저항을 멈추자 나탈리 후작이 웃음을 띠며 호갑투를 튕기었다.

다음 순간 나무뿌리가 길게 뻗으며 혼절한 캐서린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메이벨과 캐서린의 몸이 점점 아래로 끌려갔다.

발이 땅에 잠기자 기겁한 메이벨이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무서워하지 말아요. 안전한 곳으로 가서 예식을 치를 예정이니까.”

“이것부터 풀고 말해!”

“풀어 주면 도망칠 게 뻔한데 할 리가 있나.”

나탈리 후작이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쪽이 원하는 걸 이뤄 줄게요. 아델쿠스 님이 소환된다면 다시 몸을 바꾸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니까.”

“뭐?”

메이벨은 아델쿠스라는 말에 입술을 헤벌렸다. 불쑥 세체르가 했던 말이 떠오른 메이벨이 또다시 저항하기 시작했다.

“미쳤어?! 이거 놔! 놓으라고!”

사역마를 소환해 발버둥 쳤으나 미리 마법진까지 그려 둔 나탈리 후작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얌전히 가자니까.”

“꺄악!”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메이벨이 저항을 멈추었다. 뒤틀린 다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일어 혼절한 것이었다.

“이제야 조금 조용해졌네요.”

나탈리 후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래로 사라졌다. 본격적인 2차 예식의 시작이었다.

* * *

캐서린이 인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에셀 성은 발칵 뒤집혔다.

제이드가 인형에 깃든 힘을 거두자 캐서린으로 위장했던 인형이 목각 인형으로 변한 탓이었다.

정교하게 캐서린을 모방한 인형은 이전에 후작에게 선물 받은 인형을 떠올리게 했다.

방을 드나든 명단을 살피니 누군가가 사용인으로 위장해 출입한 정황이 확인되었다.

나는 어수선해진 상황 속에서 침대 밑에 떨어진 구슬을 발견했다. 이전에 내가 캐서린에게 준 것이었다.

‘납치되는 과정에서 떨어졌나 보네.’

나는 구슬을 몰래 주머니에 넣고 성을 빠져나왔다. 나탈리 후작이 캐서린을 납치했다면 다음 행선지는 뻔한 탓이었다.

나와 제이드는 곧장 메이벨의 흔적을 추적했다. 제이드는 그녀와 내통하고 있던 터라 찾는 건 빨랐다. 문제는 나탈리 후작도 만만치 않았다는 것.

“한발 늦었군요. 전투 흔적이 있습니다.”

“그런 것 같네요.”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며 짧게 평했다. 오염에 당했는지 피부가 검게 썩어 있었다.

“후작은 카타콤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제단이 거기에 있으니까요.”

제이드가 후작을 거론하며 바짝 말라 버린 나무를 툭, 건드렸다. 흑마법에 이용당해 생기를 잃은 나무는 파삭, 하는 소리를 내며 쉽게 부서졌다.

“끌고 내려간 지는 얼마나 된 것 같나요?”

“적어도 한 시간은 된 것 같군요.”

“미리 제단에 손을 써 두길 잘했네요.”

지상에 올라오기 전 혹시 몰라 제단에 장난질을 쳐 두었었다. 정화의 힘을 담은 아티팩트로 제단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 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임시방편이었다. 서둘러 내려가 막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내가 직접 나서야 했다.

‘유일한 정령사로 살기 너무 힘드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 도망가고 싶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더는 로에나로서의 삶이 남의 일이 아니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이 세계가 내게 너무도 소중해졌으니까.

‘그리고 아직 아키에게 제대로 용서를 구하지도 못했는걸.’

나는 굳게 다짐하며 흙에 손을 대 흰둥이를 호출했다. 카타콤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상 그가 필요했다.

잠시 후 진동과 함께 땅에서 솟아오른 흰둥이가 내게 와락 안겨 들었다.

야아옹.

애처로운 울음을 내뱉으며 혀로 뺨을 핥아 대는 걸 보면 나를 제법 걱정한 것 같았다.

나는 흰둥이를 쓰다듬어 준 후 그가 챙겨 온 가방을 열었다.

잡다한 아티팩트가 담긴 휴대용 가방에서 원하던 것을 찾아낸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걸 쓸 때가 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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