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63)화 (163/177)

#163.

아키드는 비전이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하델루스의 비전은 암룡 자파르시아의 유지를 담은 책이라고 했다.

그의 지혜가 담긴 지혜서라고도 불리는 유물.

평범한 물건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인장 반지가 아티팩트 그 자체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건 허공에서 갑자기 나오지 않았는가.

그건 어둠 속성으로 공간을 분리해 지켜 왔다는 것과 같았다.

그동안 막연히 비전이 책의 형태를 하고 있을 거라 여겼던 그로선 뜻밖의 형태였다.

아키드가 데미안의 손에 끼워진 가짜 인장 반지를 일별했다. 진짜를 보고 나니 저 인장이 가짜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느껴지는 힘부터가 손 안에 있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으니까.

“갑자기 이걸 제게 주시는 건…… 사용할 때가 오리라고 여기신 겁니까?”

“그래.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네게 이게 필요해 보였거든. 나는 이미 횟수를 다 써 버려서.”

“횟수 제한도 있던 겁니까?”

“제약 없이 쓸 수 있게 했다면 황실은 하델루스의 차지가 됐을 거다. 그건 단순한 책이 아니라 자파르시아의 마나가 담긴 마법서이니까.”

“!!”

아키드가 마법서라는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지혜가 담긴 책이라는 말이 설마 자파르시아의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일 줄은 몰랐던 탓이다.

“세상이 혼란할 때 지혜를 빌려줄 거라고 했지. 아마도 흑마법사들의 미친 짓을 염두에 둔 물건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아버지께선 대체 언제 사용하신 겁니까?”

“나?”

데미안이 히죽 웃으며 뜸을 들였다. 아키드가 웃음기를 싹 뺀 채 바라보자 김빠진 그가 입을 열었다.

“난 대의 따위는 모른다. 그저 필요해서 사용했고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지.”

어쩌면 그때 사용해선 안 되었던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데미안은 엘레나가 없는 세상에선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았다.

명예니, 가문이니 하는 것보다 그녀의 총기 어린 붉은 눈동자를 다시 보고 싶었다.

막 태어난 아이를 두고 죽은 아내를 찾아 회귀할 만큼.

그 결과 사랑하는 아내와는 반목하고 자신의 평판은 엉망이 되었지만 각오한 일이었다.

데미안은 그것이 스스로 대가를 치르는 길이라 여겼다. 그가 아키드를 직시하며 말했다.

“네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순간에 비전을 사용하면 된다. 어차피 들어주지 않을 것은 들어주지 않으니까.”

처음 데미안이 비전을 통해 사용하려던 건 엘레나를 살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법서는 공교롭게도 단 하나의 마법만을 알려 주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

그제야 데미안은 비전을 설명하던 수식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파르시아의 유지가 담긴 지혜서란 건 말 그대로 자파르시아의 의지가 담긴 마법서란 뜻이었다.

그것은 상대가 원하는 대로 아무 마법이나 알려 주는 게 아니란 뜻이었다. 오직 자파르시아가 허락한 마법만이 주어진다.

그러니 이 사태에서도 유용한 마법을 알려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데미안은 망설임 없이 시간을 돌렸다. 차선이 없을뿐더러 적어도 회귀한 그곳엔 엘레나가 있을 테니까.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과연 이 책이 너에겐 무슨 마법을 보여 줄지 모르겠구나.”

“…….”

“형식적인 가주는 여전히 내가 맡겠지만 그걸 위임한 시점부터 실질적인 하델루스의 실세는 네가 되는 거다.”

한마디로 자신은 바지사장이 될 테니, 비전을 사용해 이번 상황을 열심히 타개해 보란 뜻이었다.

뒤이어 데미안이 진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 모습에 아키드의 얼굴에도 바짝 긴장감이 감돌았다.

“잘 들어라. 비전을 열람할 수 있는 기회는 단 두 번이다. 정확히 즉위식 때 열람하는 건 사용법과 주의 사항을 익히게 되는 시간이라 횟수로 칠 수 없어 한 번이나 마찬가지지.”

데미안은 비전을 열람할 수 있는 방법과 비전의 무궁한 힘에 대해 속성으로 알려 주었다.

그제야 아키드는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가주가 아니면 발설해선 안 되는 내용을 읊고 있었으니까.

잠시 후, 설명을 마친 데미안이 그의 손을 도닥였다.

“신중히 결정해서 필요한 때에 지체 말고 사용하도록 해라. 네겐 어떤 마법을 보여 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너에게 가장 필요한 걸 보여 줄 거다.”

“그건 경험에서 우러나온 답입니까?”

아키드의 물음에 데미안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그는 여전히 비전이 자신에게 그 마법을 보여 준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선택지가 그것뿐이라 이해 없이 실행한 일이었다.

“글쎄. 죽기 전에는 이해하지 않을까 싶구나.”

당시 그에겐 엘레나를 살리는 마법이 더 간절했지만 자파르시아의 눈에는 달랐을지 몰랐다.

마법의 시초이자 더 먼 미래까지 내다보는 용이지 않는가.

어느새 아키드의 손바닥에서 인장 반지가 사라졌다. 데미안이 한 방식대로 그것을 숨긴 것이었다.

아키드가 잔뜩 벼른 얼굴로 데미안에게 물었다.

“그럼 저는 코비슈타인에게 가 보겠습니다. 그 일을 시행하려면 상당한 마나가 필요할 테니까요.”

“미안하구나, 내가 이 꼴이 되어 도와주지 못하니.”

데미안이 어울리지 않게 어두운 음성을 내뱉자 아키드가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몸을 보전하는 일만 생각하십시오. 뒷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군.”

어느 틈에 훌쩍 자란 아키드에 데미안은 멋쩍게 뺨을 긁적일 뿐이었다.

투박한 대답이었으나 그 진심은 충분히 전해진 채였다.

* * *

내가 에셀가에 갔을 때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와 다름없었다. 다행히 평소 인연이 있어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쉽게 출입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그간 실종 신고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에드워드는 내가 왔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로비로 달려와 물었다.

“대체 어디 있던 거야?”

동시에 내 곁에 있는 제이드에게 경계의 빛을 띠었다. 혹여 내가 협박당하고 있나,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설명하려면 좀 길어서요. 혹시 캐서린을 만날 수 있을까요?”

내 단도직입적인 말에 에드워드가 곧장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소식 못 들었구나. 캐시는 지금 많이 아파서 면회할 상황이 아니야.”

“아파요?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요?”

“대공자가 쓰러져 있던 캐시를 발견해서 살았어. 물론 이걸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키드가 구해 주었다는 말에 안도하다 뒷말이 찝찝해 되물었다.

“네?”

“지금 계속 의식이 없거든.”

에드워드는 캐서린이 언급되자 급격히 얼굴이 어두워졌다. 반면 나는 안도했다.

이미 제이드를 통해 메이벨이 무슨 독을 사용하려 했는지 아는 탓이었다.

여태 살아 있다는 건 그 독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캐서린이 루이스의 영혼이기 때문에 자체 해독을 한 것이리라.

나는 조금 긴장을 풀며 말했다.

“잘 있는지 얼굴만이라도 볼 수 있을까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에드워드가 힘없이 승낙하며 나를 캐서린의 방으로 안내했다. 제이드는 안으로 오지 못하게 하는 걸 보면 여전히 경계하는 것 같았다.

“캐시, 네가 좋아하는 로에나 왔어.”

에드워드의 애절한 음성에도 캐서린은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손을 다잡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손이 차가웠다. 에드워드가 말했다.

“밤새 열이 끓더니 어제 새벽부터 내렸어.”

“그래요?”

“응. 그 덕에 아버지도 한시름 놓으셨지.”

에드워드의 어깨가 평소보다도 축 처져 보였다. 그나마 캐서린이 보호받고 있어 다행이다 여긴 찰나였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제이드가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에 에드워드가 눈을 부릅뜨며 막아섰다.

“분명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저건 가짜입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는 가짜라는 말에 눈을 홉떴다. 이에 제이드가 에드워드를 밀치고 이불을 젖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곁에 있던 시녀가 비명을 질렀다. 에드워드가 막 제이드의 얼굴에 주먹을 갈기려는 때였다.

“멈춰요!”

나는 냉큼 제이드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에 에드워드의 주먹이 갈 길을 잃고 비껴갔다.

제이드가 속사포처럼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후작에게 인형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힘을 받았으니까요.”

“계속 말해요.”

“바깥에서도 선명한 흑마법이 느껴졌습니다. 아마 여기에 후작의 인형이라는 표식이 있을 겁니다.”

제이드는 캐서린의 배를 가리키며 확신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조심히 윗옷을 걷어 올리니 인형들에게서 보았던 음표 문신이 캐서린의 배에 새겨져 있었다.

‘하아, 어쩐지 아무 갈등도 없다 했어.’

나는 진이 빠진 얼굴로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 어라?”

시녀가 문신을 보고 놀라 나와 제이드를 번갈아 보았다. 에드워드도 뒤늦게 음표 문신을 확인하고 눈을 홉떴다.

이미 그 문신이 흑마법사를 뜻하는 줄을 아는 탓이었다. 에드워드가 파르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우리 캐시는 어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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