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93)화 (93/177)
  • #93.

    ‘어딜 넘봐, 넘보길.’

    나는 유유히 사라지는 불여우들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회사에서 무급 야근시키려는 대표를 피하기 위해 아픈 척했던 연기 실력이 여기서도 빛을 발할 줄이야.

    대체 가정 있는 남자한테 왜 추파를 던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간 데미안이 벌인 짓이 있으니 관성처럼 들이댄 거겠지만 그래도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단란한 가정 만들기 더럽게 힘드네.’

    게다가 실수로 침을 잘못 삼켜 사레까지 들어 콜록대느라 정신이 쏙 빠졌다. 덕분에 내가 ‘엿시! 엿시!’ 하는 건 다들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레니아 후작 부인이 나를 빤히 바라보기는 했지만 의심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워 보였다.

    하긴 가족 세 명이 똘똘 뭉쳐 나만 살피는 기이한 현장을 보았으니 놀랄 만도 했다.

    나도 이렇게까지 세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행동할 줄은 몰랐기에 다소 얼떨떨했다.

    가까스로 재채기를 멈춘 내가 물을 꿀꺽꿀꺽 삼키자 아키드가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네에.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향수들은 왜 뿌려선.”

    데미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그런다고 향수 냄새가 사라지지는 않을 텐데 참으로 지극정성이었다.

    ‘이게 다 아버님이 아랫도리 간수를 못 한 탓이잖아요.’

    나는 가정불화의 주범인 데미안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이전처럼 마냥 나쁘게만 보이지 않는 건 그가 바람둥이 행세를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한 탓이었다.

    대공가의 명맥을 이으려면 후계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대공비가 아이를 갖기도 어려울뿐더러, 임신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강요할 수 있을까.

    자파르시아의 제자 가문 중 하나인지라 방계 출신을 후계자로 세울 수도 없었다. 루이스 가문이 그랬다가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던가.

    ‘그래도 방법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잖아.’

    이 부부는 대화를 너무 안 해서 문제였다. 적어도 엘레나와 상의했다면 이렇듯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데미안은 욕을 사서 먹는 타입이었다.

    일부러 미움받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구니 엘레나가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실은 어머님을 누구보다 아끼면서 왜 악역을 자처하는 건지.’

    나는 데미안이 멀미 때문에 일찍 잠든 엘레나의 방에 몰래 약을 가져다 두던 걸 떠올리며 혀를 끌끌 찼다.

    엘레나가 별말 없이 약을 먹던 걸 보면 그가 준 줄도 모르는 듯했다.

    그 밖에도 아닌 척 챙겨 주는 걸 발견한 게 여러 번이었다. 어쩌면 일부러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눈앞에서 벌이는 대공의 행태를 보면 걍 내가 너무 좋게 평가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스럽던 테이블이 조용해진 무렵이었다.

    “대공비 전하.”

    “아니, 이게 누군가?”

    엘레나가 다가온 귀족을 알아보며 알은체를 했다. 데미안이 아닌 엘레나에게 먼저 인사하는 걸 보니 추파를 던지러 온 자는 아닌 것 같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 정말 오랜만이네. 요양을 떠났다더니 이젠 괜찮은 건가?”

    “아뇨. 아직도 좋지는 않습니다. 다만 정기 회의에 맞춰 잠시 올라왔어요. 마침 대공비 전하께서도 오신다는 소식을 들어서.”

    “이런. 무리하지 말고 대리인을 보내도 되었을 텐데. 나탈리 후작은 그게 문제야. 자네는 주변에 일을 분담할 필요가 있어.”

    “이 잔소리도 오랜만이라 듣기 좋네요. 걱정해 주신 건 감사하나 이 정도 외출은 가능하답니다.”

    엘레나의 핀잔에 나탈리 후작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수줍게 말했다.

    그 순간 레이스 장갑 위로 낀 호갑투가 샹들리에 조명에 반짝, 빛이 났다.

    절로 시선이 가는 장신구이건만, 나는 왜 여기서 고깔 모양 과자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쓰읍, 생각하니까 먹고 싶네.’

    괜스레 눈앞의 비스킷을 와그작와그작 씹는데 나탈리 후작의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엘레나가 시선을 느끼고 나와 아키드를 소개했다.

    “아들 내외네. 이쪽은 로에나이고 저쪽은 아키드.”

    “안녕하세요, 후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나와 아키드가 예를 갖춰 인사하자 나탈리 후작이 씨익 웃었다.

    “대공 전하를 닮아 아주 미남이시군요. 대공자비님도 듣던 대로 무척 귀여우신 것 같습니다.”

    그러곤 레티큘에서 장난감을 꺼내 내밀었다. 나무로 만든 조각품이었는데, 옷까지 입혀 놓으니 그럴듯한 나무 인형처럼 보였다.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감사합니다.”

    넙죽 받자 나탈리 후작이 이것저것 물어보며 친한 체했다.

    다른 이들이 데미안과 엘레나에게만 관심 갖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장난감까지 준비해 온 것을 보면 나와 아키드가 올 줄도 미리 안 것 같았다. 엘레나가 말했다.

    “여전히 조각을 손에 안 놓았나 보군.”

    “취미 삼아 시작했더니 성에 쌓여만 가서 문제입니다. 그래도 조각하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져서 포기가 안 되네요.”

    “나에겐 활쏘기가 그러하지.”

    엘레나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깨 부상을 당하고도 놓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게 몹시 불만인 것 같았다.

    “대공비 전하께서도 여전히 운동을 즐기시는군요. 대공 전하와도 종종 겨루시더니 요즘도 하시나요?”

    나탈리 후작의 물음에 대공이 어깨를 으쓱였다.

    “상대가 시시해져서 안 한 지 꽤 되었죠.”

    “피차일반이네요.”

    “한번 겨뤄 볼까요? 나중에 지고 나서 울지 않겠다고 하면 해 드리죠.”

    “필요 없어요.”

    “여전하시네요, 두 분은.”

    데미안의 도발에 엘레나가 심드렁하게 반응하자 나탈리 후작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근황을 이야기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침 담요를 가지러 마차에 다녀온 메이벨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로에나 님, 여기.”

    “고마워, 메이벨.”

    그녀가 자연스럽게 담요를 건네고 테이블에 있던 내 레티큘을 챙겼다. 그녀가 이번 연회에서 내 레티큘을 챙기는 역할을 맡은 탓이었다.

    그때 나탈리 후작의 시선이 메이벨에게 향했다. 시선을 느낀 메이벨도 고개를 돌렸다. 나탈리 후작이 말했다.

    “이분은?”

    “아, 제 곁붙이로 온 아이예요. 메이벨, 인사해. 이분은 나탈리 후작님이셔.”

    “아, 안녕하세요, 나탈리 후작님. 메이벨 해링턴입니다.”

    “반가워요.”

    나탈리 후작이 미소를 띤 채 메이벨의 뺨에 가볍게 친애의 인사를 내비쳤다.

    “아.”

    메이벨은 낯선 사람이 불편한지 연신 표정을 풀지 못했다. 나는 뒤늦게 그녀에게 불안 증세가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나직이 물었다.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그냥 이런 인사는 익숙하질 않아서.”

    메이벨이 어색하게 웃었으나 표정에선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나탈리 후작은 대공 부부와 몇 마디 더 나눈 후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벨도 속이 좋지 않다며 자리를 떠났다.

    아키드가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는가 싶더니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저 아이 말입니다.”

    “누구요? 메이벨이요?”

    내 물음에 아키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고아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아라기엔 이런 연회에 제법 익숙한 듯이 자연스럽게 구는 것도 그렇고, 특히 예법을 배운 흔적이 간혹 보입니다.”

    “그래요?”

    전혀 인식하지 못한 부분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니 아키드가 설명을 이었다.

    “근데 조금 이상합니다. 뭔가 일부러 어기는 듯한 느낌이라.”

    “일부러 어기다뇨?”

    메이벨이 고아인 건 내가 원작에서 보고 안 내용이었다.

    물론 여기선 메이벨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탓에 증명이 안 되었지만.

    “제가 뒤늦게 예법을 익혀서 더 눈에 잘 보이는 걸 수도 있지만, 어기는 패턴이 제법 규칙적이라서요. 원래 알던 예법에서 살짝만 변칙을 주는 것 같았거든요.”

    아키드는 본인이 뒤늦게 예법을 익힌 것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했다.

    이전이었다면 감추려 들었을 텐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가 편한 모양이었다.

    아키드의 말은 이랬다. 메이벨이 예법을 익히지 않았으면 보일 수 없는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13년 동안 뒷골목의 평민으로 살아왔기에 뒤늦게 귀족들의 예법을 익히는 게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자꾸만 옛 습관이 튀어나와서 흐트러졌었다고.

    한데 메이벨은 반대라고 했다.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행동에서 예법을 익힌 태가 난다고.

    가령 아까 나탈리 후작의 갑작스러운 뺨 인사에서 보인 행동이 그러했다.

    예법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나탈리 후작이 다가오면 목을 움츠리기 마련인데 메이벨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목을 앞으로 내밀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메이벨은 일부러 평민인 척 행세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기억상실도 거짓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왜? 무엇을 숨기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그녀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원작에서 그녀는 고아였고, 부모에 관해서는 나온 바가 없었으니까.

    ‘아냐. 내가 너무 원작에 파고들어서 뭔가 놓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애초에 메이벨이 이스터스 고아원이 아니라 스티그 섬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부터가 원작과 달랐다.

    그러니 그녀가 내가 아는 여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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