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정기 회의 마지막 날. 연회가 시작되자 황궁에는 각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마차들이 줄줄이 행렬을 이었다.
화려한 마차 하나가 황궁 연회장 입구에 정차했다. 흰색 눈송이와 월계수 잎 날개는 하델루스 대공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휘황찬란한 견장을 줄줄이 단 데미안이 제일 먼저 마차에서 나왔다
뒤이어 엘레나가 그의 손을 잡고 나오자 신입 기사들이 얼굴을 붉혔다.
하인트의 미친개라는 악명과는 다르게 대공비가 청초한 미인인 탓이었다.
물론 몇 번 당해 본 기사들은 경직된 얼굴로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고 그들에게 눈짓을 보낼 뿐이었다.
뒤이어 맞춘 것처럼 앙증맞은 예복을 입은 대공자 부부가 마차에서 내렸다. 이에 입장하던 귀족들이 얕은 탄성을 내뱉었다.
특히 붉은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둥글게 돌돌 말아 올린 대공비는 인형처럼 귀여웠다.
그 옆에 데미안과 판박이인 대공자까지 더해지자 그림이 따로 없는 완벽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대공가 일가가 홀에 입장하자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귀족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세상에, 지금 둘이 같이 온 건가?”
사교계의 마당발인 레니아 후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대공 부부를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두 사람의 동시 입장은 보기 드문 진귀한 장면이었다.
결혼 이후로 서로 닿는 것도 싫어하던 부부가 아니던가.
늘 밖으로만 도는 남편과 그 남편의 첩을 응징하는 재미로 사는 대공 부부의 일화는 수도에서도 꽤 유명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마저 늘 따로 입장하거나 대공이 애인을 대동하곤 했던지라 다들 얼떨떨해했다.
대공의 첩 사랑은 유명해서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젊은 영애들이 대놓고 추파를 던지는 건 연회에서 자주 보이는 모습이었다.
엘레나 역시 제 눈에 직접적으로 띄거나 도발을 해 오는 첩이 아닌 한 관심을 끊었었다.
‘작년에 사생아까지 들였다고 해서 이혼 이야기가 오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이가 좋아 보이네?’
레니아 후작 부인은 엘레나와 데미안이 손을 마주 잡고 입장한 것도 모자라 대화까지 하는 것에 거듭 감탄했다.
저 부부가 정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니. 그동안 대체 대공가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대공자 부부도 함께 있었다. 겉보기에 무척이나 단란해 보일 정도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대공자는 데미안을 쏙 빼닮아 무척 눈에 띄는 외모였다. 크면 데미안만큼이나 인기가 많겠구나 싶은 얼굴.
사생아만 아니었다면 단연코 사교계의 1등 신랑감이었을 터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한편 곳곳에서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엘레나가 대공에게 가식적으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까 일부러 보란 듯이 손등에 입 맞추며 입장한 거죠?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려고?”
“그럴 리가요. 파트너를 향한 제 애정을 그리 곡해하시지 마시죠.”
“그냥 평소처럼 따로 오자니까. 안 하던 짓을 해선 애들 부담스럽게.”
엘레나는 따가운 시선들이 대공자 부부에게까지 닿는 게 불쾌한 듯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며 힐난했다. 그러자 데미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반박했다.
“따로 오면 그것대로 문제가 아닙니까. 가뜩이나 아들 내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많은데. 우리가 홀대한다고 여기면 더 함부로 하려 들걸요?”
“흥! 감히 대공자 부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자들은 모두 꿇려 버리면 될 일이에요. 몇 가문 본보기 삼아 응징하면 조용해질 거라 장담하죠.”
“그럼 그 분야 전문가이신 대공비께서 시범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대공, 어디 그 전문가한테 본보기로 무릎꿇림당하고 싶으세요? 당신이 시범 대상이 되어 준다면 정말 최선을 다할 수 있겠는데.”
엘레나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살벌한 말을 중얼거렸다. 데미안은 살인 예고를 받았으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부인이 원하신다면 기꺼이 할 수야 있겠지만 별로 도움 되는 시범이 아닐 것 같으니 사양하겠습니다.”
“왜요? 적어도 제 기분 개선에는 충분한 도움이 될 텐데.”
“그렇다면 더더욱 사양하지요.”
데미안이 눈웃음까지 지으며 살살 약을 올리자 엘레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곤 지나가던 웨이터에게서 체리 주스를 받아 로에나와 아키드 앞에 놓아 주었다.
“이번에 체리 농사가 무척 잘 되었다는구나.”
“저도 입이 있습니다만.”
“알아서 드실 손도 있으신 것 같은데.”
엘레나의 퉁명스러운 말에 데미안이 기대도 안 했다는 얼굴로 손수 주스를 받아 마셨다.
하지만 로에나는 대공 부부가 티격태격하는 것엔 딱히 관심이 없었다.
연회장에는 향기로운 꽃향기와 맛좋은 음식이 즐비해 코와 입을 절로 즐겁게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로에나를 즐겁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세상에, 슈트 차림이 너무 멋있잖아.’
로에나는 대놓고 아키드를 훔쳐보며 헤실거렸다.
아키드는 황궁의 공식 연회인 만큼 조끼와 재킷, 흰색 크라바트와 붉은 행커치프까지 완벽히 갖춰 입은 상태였다.
특히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반만 깐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이미 마차 안에서도 실컷 보았지만 다시 봐도 빛이 나는 현장에 로에나는 눈이 부신 것처럼 눈을 찌푸렸다.
도저히 빛이 나서 똑바로 뜨고 못 쳐다보겠어서 하는 행동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아키드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싶어 괜히 주변을 힐끗거리기도 했다.
‘역시 영상석을 들고 오길 잘했어.’
로에나는 테이블에 올려 둔 레티큘을 힐끔거렸다. 레티큘에는 영상석이 꽂혀 있었다. 아키드가 잘 보이도록 각도를 조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북부에 돌아가면 영상을 확인하고, 마음에 드는 장면을 꼽아 서재에 있는 시크릿 존에 전시해 둘 생각이었다.
이곳엔 컴퓨터는 없지만 그만큼 유능한 코비슈타인이 있었다. 그에게 부탁하면 영상을 잘라 내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나중에 홀로그램처럼 영상을 무한 재생할 수 있는 아티팩트도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유능한 노예……가 아니라 심복을 두어서 오늘도 덕질이 아늑하고 행복했다.
그렇게 아키드의 멋진 모습을 전시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 방긋 미소 짓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이편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사교계의 마당발인 레니아 후작 부인이란다. 얼굴을 알아 두면 훗날 데뷔탕트에 도움이 될 거야.”
엘레나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레니아 후작 부인이 곁에 다가와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올해 득남했다는 소식 들었네. 수도와 멀어 소식이 늦게 닿아서 축하도 제대로 못 했군.”
“아닙니다, 대공비 전하. 보내 주신 선물로도 충분한 축하를 받았는걸요. 호호호. 그나저나 이분들은…….”
레니아 후작 부인의 시선이 로에나와 아키드에게로 향했다. 엘레나가 두 사람을 앞세우며 말했다.
“아들 내외네.”
“처음 뵙겠습니다. 로에나 하델루스라고 합니다.”
“아키드 하델루스입니다.”
“어머, 예의 바르기도 하시지요. 저는 레니아 가문의 소피 레니아라고 합니다.”
눈치껏 인사하자 소피 레니아가 씨익 웃으며 저를 소개했다.
그 곁으로도 다른 귀부인들이 더러 섞여 있었다. 그중 하나가 대공에게 말했다.
“수도에 오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어찌 화원에 방문하지 않으셨나요? 수도에 오시면 꼭 방문하시더니 섭섭해요.”
그녀가 말하는 화원이란 건 귀부인과 영애들이 즐기는 티파티를 의미했다.
데미안이 수도로 올 적마다 청일점이 되어 화원을 자주 들른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라 대놓고 말을 한 것 같았다.
소피가 슬쩍 엘레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딱히 관심 없다는 듯이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함께 입장했기에 뭔가 변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다른 영애 하나가 말을 얹었다.
“그러지 마시고 북부로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 화원에도 한번 들러 주세요. 대공께서 오신다면 무척 기쁠 거예요.”
“글쎄요. 곁에 꽃이 많아서 굳이 화원까지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데미안이 너스레를 떨며 엘레나와 로에나를 눈짓했다. 엘레나가 이에 질색하며 도끼눈을 뜨자 데미안이 피식 웃었다.
“요즘 아들 내외랑 노느라 시간이 없어서.”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영애가 아양을 떨며 대공의 팔에 매달리려는데 돌연 대공자비가 재채기를 크게 했다.
“에엣취! 엿시! 에취!”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재채기를 하자 그녀 주변에 있던 세 사람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그중 대공자가 제일 먼저 부축하며 물었다.
“로에나, 괜찮아요?”
“아무래도 향수 냄새를 너무 맡았나 봐요. 머리도 아프고, 코도 간질간질하고, 목도 칼칼하고…….”
대공자비가 머리와 코, 목을 한 번씩 매만지자 대공자가 안절부절못하며 손수건을 내밀어 코를 막아 주었다.
뒤이어 대공이 영애들에게 멀찍이 떨어져 달라 청하고 시녀에게 물을 가져오라 명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공비가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직접 환기를 시키러 창문으로 가다가 시녀에게 제지를 받았다.
단지 대공자비가 재채기를 했을 뿐인데, 과한 반응이었다. 착착착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에 레니아 후작 부인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아까 여시라고 한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
하지만 얼굴까지 새빨개진 채 콜록대는 대공자비를 보니 꾸며 낸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대공자비가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현장에 대공가 분위기가 변한 것이 단번에 이해되었다.
‘대공자비가 저 망나니 부부를 이어 주고 있나 보네.’
노련한 사교계의 마당발인 소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따로따로 데면데면한 세 사람이 대공자비를 중심으로 단합하는 모습은 무척 진귀했다.
특히 데미안이 여인들보다 제 며느리를 더 감싸고도는 게 몹시 의외였다.
곁에서 추파를 던지던 이들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둘 멀어져 갔다.
어느새 레니아 후작 부인만이 곁에 남았다.
이 모든 과정을 관망한 소피 레니아는 사교계 희대의 카사노바인 하델루스 대공이 은퇴할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