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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46)화 (46/177)
  • #46.

    아키드는 그네가 혼자서 흔들리자 내 손을 붙들며 굳은 얼굴을 했다. 그가 나를 보호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하기에 그를 만류했다.

    “괜찮아요.”

    “이게 무슨…….”

    아키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혼란으로 가득했다. 하긴 갑자기 그네가 혼자 움직이니 놀랄 만도 했다.

    나는 아키드를 깜짝 놀라게 한 게 즐거워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나와도 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네를 밀던 정령들이 실체화해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흰나비들이 반짝거리며 주변을 빙빙 돌자 아키드가 어리바리한 표정을 지었다.

    “나비?”

    “인사해요. 정령들이에요.”

    “정령이요?”

    아키드가 놀라 아무 말도 못 하자 정령들이 말했다.

    ― 반가워, 까망아. 넌 왜 머리는 까만데 눈은 잿빛이야?

    ― 너는 로에나가 널 얼마나 덕질하는지 아니? 아, 덕질이라는 단어가 뭐냐면…….

    ― 이봐, 너! 빨간 머리에 푸른 눈의 소녀를 조심해! 곧 널 잡아먹으려 할지도 몰라.

    솔직히 내게만 들리는 말인지라 아키드는 듣지 못했다.

    나는 정령들이 이때다, 싶어 그동안의 내 행동들을 고자질하자 눈을 흘겼다.

    정령들에게만큼은 나의 덕력을 숨기지 않았건만, 감히 날 아웃팅시키려 하다니!

    분한 맘에 정령들을 찰싹찰싹, 때리자 “꺄―”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아키드의 뒤로 피했다.

    내가 아키드를 때리지 못한다는 걸 알고 하는 영악한 몸짓이었다.

    “정령들이 반갑대요.”

    “이 나비들은 그때 그 광산에서 본…….”

    “네. 맞아요.”

    역시 아키드는 눈썰미가 좋았다. 그때 발견했던 나비들을 기억해 내다니.

    하긴 평범한 나비라기에는 영롱한 빛을 띠고 있기는 했다.

    “실은 에비스 광산에서 말하지 못한 게 있어요. 그날 아키드 님 앞에서 사라졌을 때, 사실 정령들을 만났었어요. 그리고 보시다시피 정령들을 부릴 수 있게 되었고요.”

    “……그랬군요.”

    아키드는 그제야 그날의 이상한 일이 이해가 되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시 눈앞에서 사라진 내게 그는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 안도할 뿐이었다.

    그때 아키드의 절박한 눈동자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안 좋았다. 아키드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제 앞에서 사라지는 걸 저는 똑똑히 보았으니까요.”

    “그런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묻지 않았어요?”

    물을 기회는 많이 있던 거 같은데.

    내가 넌지시 묻는 말에 아키드가 대답했다.

    “돌아온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요.”

    “…….”

    “살면서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닌 건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심장이 철렁했거든요.”

    아키드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가 애달프게 나를 찾아다녔을 것을 떠올리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는 그날에 대해 별달리 말이 없으시길래…….”

    “로에나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묻지 않았습니다. 말해 줘서 고마워요. 많이 놀랐겠다.”

    “네. 사실 그때 델루스 꽃밭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이대로 죽는구나 싶…….”

    아키드의 따뜻한 말에 무장해제되어 그날의 당혹스러움을 설명하려는 찰나였다. 돌연 아키드의 눈동자가 커지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 내 뺨을 붙들었다.

    “델루스 꽃이요? 괜찮습니까? 왜 바로 말 안 했어요!”

    그가 나를 다급하게 살피자 내가 그를 빤히 보며 중얼거렸다.

    “아까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묻지 않으셨다 했으면서…….”

    이에 아키드가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로에나의 안위에 관한 건 말해 주십시오.”

    아키드의 작은 타박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변명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그간 보셨으니 잘 아시잖아요. 사실 정령을 만난 이후부터는 델루스 꽃을 만져도 아프지 않게 됐거든요.”

    “정말입니까?”

    “네. 정말로. 그러니 이제 저한테 델루스 꽃 맘껏 선물하셔도 돼요.”

    나는 아키드에게 뺨을 붙잡힌 채 헤실헤실 웃었다. 사실 아키드가 주는 델루스 꽃이라면 알레르기가 있다고 해도 버리지 못할 것 같았다.

    아키드는 내 태평한 반응에 헛웃음을 토했다.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하늘 덕에 아키드의 흑발에 붉은빛이 도는 듯했다.

    청회색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때 아키드가 나직이 물었다.

    “로에나, 델루스 꽃의 꽃말이 뭔지 아십니까?”

    “꽃말이요?”

    “네.”

    나는 가만히 눈을 깜박거렸다.

    델루스 꽃의 꽃말이라면 이미 소설에서 보아 알고 있었다. 아키드가 메이벨에게 고백하며 주었던 꽃이니 당연했다.

    내가 가만히 쳐다만 보자 아키드가 돌연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라 현실감이 없었다.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가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말했다.

    “‘눈부신 사람’, ‘당신밖에 보이지 않아요’.”

    “…….”

    “로에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고백처럼 들리는 말에 나도 모르게 얕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그저 꽃말을 들려주었을 뿐인데, 자꾸만 심장이 주체하지 못하고 콩닥거렸다.

    ― 꺄, 쟤 좀 봐. 머리가 까매서 속은 하얄 줄 알았는데!

    ― 로에나 얼굴 빨개졌다. 토마토 같아!

    주변에서 꺄꺄거리는 정령들의 소리가 물에 잠긴 듯이 아득하게 들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아키드와 나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키드가 방금 한 말은 메이벨에게 했던 말과 같았으니까.

    분명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가슴 언저리가 따끔따끔했다. 동시에 나도 모르게 욕심이 들었다.

    아키드가 메이벨에게는 델루스 꽃을 주지 말았으면, 하고.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시한부 인생이라도 아키드의 곁에 있는 것에 만족했었다. 성덕이라며 마음껏 덕질할 생각만 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아키드가 메이벨에게 델루스 꽃을 주게 될 미래를 떠올리니 괜스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여 나는 수줍게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아키드의 손을 붙들며 말했다. 지극히 충동적인 말이었다.

    “아키드 님.”

    “예?”

    “그 꽃, 다른 사람한테는 주지 말아요.”

    특히 메이벨한테는 절대로.

    내가 뒷말을 꾹 삼키며 뚫어져라 쳐다보자 아키드가 눈을 깜박였다. 잠깐의 침묵에도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았다.

    너무 주제넘었나. 그 꽃이 내 것인 것도 아닌데 너무 막무가내였나. 오만 가지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예.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 대신…….”

    아키드가 내 이마에 제 이마를 톡, 가져다 대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깜짝 놀라던 찰나, 그가 말했다.

    “로에나도 그 꽃은 제게만 주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건 싫어요.”

    단호한 음성에 나는 또다시 얼굴이 새빨개질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꼭 나만 바라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내가 아키드를 덕질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망상이란 걸 아주 잘 알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 * *

    하델루스 대공의 서재 안. 엘레나에게 로에나의 비밀을 전해 들은 대공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네. 본인에게 직접 확인했어요.”

    “이거 큰일이군요. 하필 이런 시기에 로에나가 정령사로 각성하다니요.”

    대공은 곤란하게 되었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꾹꾹, 내리눌렀다. 엘레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두 사람 모두 로에나가 정령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어두운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에셀 공작이 황실 파견단으로 온 이유는 에비스 광산 건만의 일이 아니었다.

    황실에서 은밀하게 의논할 일이 있어 대리인 자격으로 온 것이었다.

    데미안이 깍지 낀 손을 이마에 대며 물었다.

    “언제부터라고 하던가요?”

    “에비스 광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라고 하더군요. 시기적으로 비슷하기는 해요. 하지만 스티그 섬 쪽이 더 빨랐던 만큼 상관성은 없다고 생각해요.”

    엘레나가 단호하게 말하자 데미안이 한숨을 푹 쉬었다.

    최근 대륙 내에 있는 스티그 섬에서 오염이 발생했다.

    섬마을인 탓에 오염이 대거 진행된 후에야 발견되어 황실은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 중이었다.

    오염과 함께 발생한 균열로 마수가 출현하기 시작하자 급한 대로 황실은 스티그 섬 주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이후 신관들이 신성력으로 오염이 번지지 않도록 막았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섬 자체를 폐쇄했다 한들 한 번 생긴 오염은 곧 다른 곳까지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는 탓이었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면 삽시간에 대륙이 위기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령사가 필요한 순간에 로에나가 정령사로 발현하다니.

    대공은 이 사실을 황실에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로에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면 황실이 로에나를 데려가려고 할 터.

    데미안은 로에나가 쫄랑쫄랑 돌아다니던 것을 떠올리며 눈을 찌푸렸다.

    하필 유일한 정령사라니. 대변동 이후로 정령이 사라진 이때, 로에나의 존재감은 당연히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힘을 무리하게 소진할 것을 생각하니 대공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러한 일을 감당하기에 로에나의 나이는 너무 어렸다. 그는 우선 엘레나부터 설득하자는 마음에 입을 뗐다.

    “일단 황실에는 비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공비께서는 황실의 사람이니 가급적 보고하고 싶겠지만…….”

    “누가 그래요?”

    엘레나가 다리를 꼬며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데미안이 눈만 끔벅이자 엘레나가 말했다.

    “난 우리 애를 위험한 곳에 보낼 생각이 없어요. 대공도 같은 생각일 거라 여겼는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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