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 안 돼!
― 맙소사!
정령들이 절규하며 파르라니 떨다가 테이블 위로 투둑, 떨어졌다. 물론 내 눈에만 보이는 하찮은 반응이었다.
그렇게 헨리를 정령들에게서 지켜 낸 내가 뿌듯하게 미소 지으니 대공비가 물었다.
“정령을 만났다고?”
네가? 같은 표정의 대공비를 보니 약간 억울했지만 그녀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무려 정령이었다. 고대 이후로는 흔적도 찾기 어렵다는 존재를 만났다고 하니 믿기 어려울 터였다.
“오오, 신이시여.”
헨리는 신을 찾으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울망울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으니 꼭 내가 아키드를 처음 봤을 때의 표정과 흡사했다.
덕후는 계를 못 탄다고 하지만 헨리는 그냥 덕후가 아니었다. 무려 정령사인 나를 만났으니까.
성공한 덕후의 삶은 일반 덕후와는 차원이 다른 법.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에요. 축하합니다! 당신은 성덕이 되실 운명입니다.’
내가 속으로 헨리에게 짧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데 대공비가 말했다.
“그럼 정말 정령과 계약이라도 했다는 말이니?”
직설적인 물음에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워낙 경황이 없었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어물거렸다. 그러자 대공비가 한층 누그러진 반응을 보였다.
“괜찮으니 자세히 말해 보렴.”
하지만 적잖이 놀랐는지 찻잔을 집으려던 대공비가 허공에 헛손질을 해 댔다.
‘많이 놀라셨구나. 하긴 놀랄 만도 하지.’
나는 대공비의 손을 꼬옥 잡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웜홀에 들어갔을 때, 갑자기 공간이 뒤틀리며 어디론가 빨려들어 갔었어요.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정령들을 만났고요.”
차근히 상황을 설명하자 대공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귀담아들어 주었다.
나는 내가 특이체질인 것을 제외하고 그날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델피나라든가, 내 체질이라든가, 정령이 사라진 이유라든가, 정령에게 들었던 정령사에 관한 정보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은 내가 정령사라는 것만 해도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어차피 아직은 땅이 오염되는 현상도 없으니 당장 정령사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그래서 정령과 계약한 뒤로는 델루스 꽃 알레르기가 사라졌어요. 왜인지는 저도 모르겠고요.”
“그랬구나.”
대공비는 짧게 대답하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한 번에 충격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일까,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헨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럼 지금도 이곳에 정령이 있습니까?” 같은 말을 지껄이는 것도 제지하지 않았다.
잠시 후, 대공비가 말했다.
“혹시 대공께선 이 사실을 알고 있니?”
“아뇨. 아직은 어머님과 헨리밖에 몰라요. 말할 기회가 마땅치 않았거든요.”
“그래. 혼자 고민하느라 고생했겠네.”
대공비가 내 손을 도닥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얼굴빛이 좋지 못했다.
며느리가 정령사라고 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빤히 올려다보니 그녀가 말했다.
“일단 대공과 이야기를 해 봐야겠구나. 내가 언질하기 전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면 안 된다.”
“아키드 님은요?”
“아키드는 괜찮아. 하지만 시녀들은 안 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공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대공에게 갈 모양이었다.
대공비가 떠나자 응접실에 헨리와 나만이 남게 되었다. 내가 팔짱을 낀 채 낮게 뇌까렸다.
“실망이야, 헨리.”
“네?”
“어머님께 말하기 전에 나랑 상의할 수도 있었잖아.”
“죄송합니다, 대공비님께서 워낙 집요하게 추궁하셔서.”
헨리가 손수건으로 이마의 비지땀을 닦아 내었다.
“정황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에비스 광산의 총책임자셔서 숨기기 더더욱 어려웠고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헨리가 내 산하에 있다고 해도 현재 에비스 광산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자였다.
어린 나보다는 대공비에게 이 상황을 먼저 보고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겠지. 나는 노기를 풀며 거듭 강조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내게 먼저 알려 줘. 널 고용한 건 어머님이 아니라 나니까.”
다음에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
내가 으름장을 놓자 헨리가 군기가 바짝 든 표정으로 대답했다.
“주의하겠습니다, 대공자비님.”
그러곤 애원이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빤히 알기에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싫어.”
“대공자비니임.”
“이번에 날 놀라게 했으니까 당장은 보여 주지 않을 거야.”
“제바알.”
헨리가 말꼬리를 늘이며 두 손을 싹싹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하다. 내 눈에는 저리도 잘 보이는 정령이 다른 이들에겐 보이지 않다니.
지금 헨리가 보고 싶어 하는 정령이 바로 그의 머리 위에 내려앉아 그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고 하면 아마도 기겁하겠지.
정령을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헨리의 심정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원래였다면 같은 덕후의 심정으로 선뜻 보여 주었겠지만 나를 감쪽같이 따돌렸다는 점에서 괘씸죄가 작용했다.
“헨리, 원래 덕후는 계를 못 탄다고 했어.”
“예? 덕후요?”
헨리가 처음 듣는 단어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를 뜨며 말했다.
“헨리, 성덕이 되고 싶어?”
“예?”
“성덕이 되고 싶었으면 내게 먼저 연락했어야지.”
“대공자비님, 그건……!”
“그럼 난 아키드 님을 보러 가야 해서. 안녕!”
나는 그에게 쾌활하게 인사를 고하고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응접실에서 훌쩍이는 소리는 무시한 채 곧장 아키드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 * *
아키드가 있는 곳은 연무장이었다. 이제 훈련이 끝날 즈음이니 마중 가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내가 연무장에 막 들어서는데 여전히 기합 소리가 들렸다.
아직 훈련이 끝나지 않은 건가 싶어 슬쩍 연무장 내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키드의 모습에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오오.’
마침 대련을 진행 중인지 아키드와 에단이 서로 검을 겨누고 있었다.
연무복을 입은 모습이 어찌나 멋있는지.
검을 다룰 때의 몸 선이 무척이나 예뻐서 검을 놀리는 건지, 검무를 추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나는 본래의 목적도 잊고 관람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아키드가 나를 발견하고 삐끗하자 에단이 빈틈을 노렸다.
“앗! 에단 경!”
내가 다급하게 외치는 음성에 에단이 뒤를 돌았다. 그가 놀라 중얼거렸다.
“대공자비님?”
그리고 그 틈에 아키드가 자세를 정비해 역으로 에단을 공격했다.
“억.”
에단의 검이 챙그랑, 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에단이 반칙이란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슬그머니 피해 쭈뼛쭈뼛 아키드에게 다가갔다.
아키드는 흠칫하며 제 몸을 킁킁거렸다. 내가 연무장에 직접 찾아온 것은 처음이라 다소 당황한 것 같았다.
평소엔 방해하지 않으려 바깥에서 기다린 탓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한시라도 빨리 소식을 전하고 싶어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로에나, 여긴 어쩐 일이에요?”
“마중 왔어요! 매번 로비 근처에서 기다리는 것도 조금 지루해서, 연습 잘하나 감시 차원으로!”
실은 훈련하는 아키드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 싶었던 거지만 그건 차치하고.
내가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자 아키드가 볼을 붉히며 이마의 땀을 닦아 내었다. 그때 에단이 내게 와 인사했다.
“대공자비님을 뵙습니다. 하델루스 제1 기사단 소속 부단장 에단 그레이브입니다.”
에단은 원작에서도 아키드의 든든한 우방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검술 스승에서 시작해 보좌관까지 되었던 걸 생각하면 내게도 고마운 사람이었다.
“반가워요, 에단 경. 대련을 방해해서 어쩌죠?”
“안 그래도 마지막 합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스승님.”
“예. 살펴 가십시오.”
에단이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우리를 배웅했다. 나는 자꾸만 거리를 벌려 걸으려는 아키드의 옆을 졸졸졸 따라가며 말했다.
“성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산책하지 않을래요?”
“너무 가까이 붙지 마십시오. 땀을 많이 흘려서…….”
아키드는 내 물음에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슬금슬금 나를 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되레 그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냄새 안 나요.”
“예?”
“자꾸 피하면 상처받을지도 몰라요.”
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아키드가 움찔하는가 싶더니 내 옆에 착 붙었다. 그러곤 나를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상처받지 마세요.”
윽, 심장이.
나는 아키드의 표정에 아랫입술을 꾹 내밀어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언제 슬퍼했냐는 양 그를 마주 보며 헤실거리자 아키드가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산책 어디로 갈까요?”
“저만 따라오세요.”
내가 싱긋 웃으며 손을 끌자 아키드가 머뭇머뭇 뒤따라왔다. 나는 그를 널따란 잔디밭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에 그네가 있는 곳이었는데, 내가 하델루스 성에서 유독 좋아하는 장소였다. 아키드가 그네를 발견하고 물었다.
“그네가 타고 싶으셨습니까?”
“네!”
방긋 웃으며 대답한 나는 그네에 앉아 그에게 옆에 앉을 것을 제안했다.
둘이 앉을 수 있을 만한 크기라 비좁지는 않았다. 그가 앉으며 물었다.
“둘 다 앉으면 그네는 누가 밀어요?”
“제 친구들이요.”
“네?”
아키드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찰나, 그네가 천천히 밀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