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에비스 광산 인근 호텔 안. 나는 하델루스 대공에게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처음엔 잘못 온 것인가 싶었다. 그만큼 그가 내게 편지를 보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 내게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 게냐.]
게다가 시작이 왜 이렇게 삐딱한 것인가?
설마 하델루스 대공이 무슨 낌새라도 눈치채고 편지를 보낸 건가 싶어 간이 콩알만 해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에는 에비스 광산에 관한 건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부분에서 심사가 꼬인 아버님이었다.
[네가 부쩍 대공비와 친해진 것은 나도 알고 있다만,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내 소식은 궁금하지 않더냐.]
대체 뭐가 너무하다는 거죠, 아버님?
도무지 하델루스 대공이 기분이 상한 지점을 알 수 없었다.
평소 우리가 편지를 나누던 사이도 아닐뿐더러 그리 친하다고도 볼 수 없는 관계라 더욱 그랬다.
대공비와는 그나마 자주 마주쳐서 눈도장을 찍어 왔다지만 대공과는 대화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여 편지의 의도 자체가 의아한 상황이라 머릿속엔 물음표만 가득했다.
[설마 지난번 페트라 내기에서 진 거로 심술이 난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몹시 유감이다.]
아무래도 아버님은 나를 쫌생이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페트라 내기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인지라 더더욱 어이가 없었다.
“대체 내 이미지가 어떻길래.”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잔뜩 적힌 하델루스 대공의 편지를 모두 읽은 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속이 좁은 건 하델루스 대공 같았다. 편지를 안 한다고 이렇게 잔소리를 퍼부을 줄이야.
그래도 일단은 답신을 적기 위해 펜을 들었다. 내 최종 목표는 부모님에게 사랑받는 아키드 만들기이니까.
그래, 우리 아키드를 위해서라면 편지가 뭐야, 책 한 권을 쓰라 해도 기꺼이 쓰겠어.
[아버님, 저는 앞으로 오늘을 기념일로 삼고 싶어요. 아버님께서 친히 편지를 보내 주시다니요.
저는 아버님의 편지를 받고 너무 기뻐서…….]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줄줄 쓰기 시작했다.
물어보지도 않은 근황을 줄줄이 나열하는 것은 물론 은근하게 아키드를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과거 자기소개서를 빙자한 소설을 여러 번 집필한 경험은 이때를 위함이었던가.
나는 막힘없이 일필휘지로 휘갈겨 쓴 후 마침표를 찍었다. 이어서 예쁜 봉투에 편지를 넣어 한나에게 막 전해 줄 때였다.
노크와 함께 헨리가 들어왔다.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보니 좋은 소식인 것 같았다.
“어떻게 됐어?”
“확실합니다. 정령들이 에비스 광산에서 머물렀던 게 분명해요!”
헨리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콧김을 뿜었다. 벌렁거리는 콧구멍이 그의 흥분을 말해 주는 듯했다.
익히 아는 반응이라 속으로 경건하게 손을 모아 중얼거렸다.
‘성지순례를 다녀오셨군요, 형제님.’
본래 덕질하는 그 대상이 머물던 곳에 가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법.
나 역시 아키드가 머문 곳이나 물건에 은근히 집착하고 있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쓸 뿐.
같이 살고 있다고 해서 덕질을 게을리할 리 없었다. 오히려 더더욱 부지런히 덕질해야 했다.
곳곳에 덕질할 게 좀 많아?
나는 헨리에게 왠지 모를 내적 친밀감을 느끼며 푸근히 미소 지었다.
그는 알까. 지금 그의 옆에도 정령이 둥둥 떠다닌다는 사실을.
아마 알게 되면 허공에 대고 눈물을 줄줄 흘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잠자코 듣기만 하자 헨리가 말을 이었다.
“정령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황실의 인증을 받는 것도 금방이겠어요. 곧 황실에서 사람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세상에, 그게 정말인가?”
나는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듯 펄쩍 뛰며 환호성을 내뱉었다. 황실 행정부에서 직접 오겠다고 할 정도면 확실한 대박이었다.
이미 대공비에게 에비스 광산을 인수받았다고 연락이 온 후로 거래는 완벽히 성사된 상황.
내 주머니는 이제 두둑해질 일만 남아서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흐흐.”
이를 한나가 기이하게 쳐다보았지만 아무렴 어때. 내 덕질 생활이 윤택해지고 있는데.
― 얘 또 이상한 표정 지어.
나는 곁에서 종알거리는 정령을 말끔히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헨리를 끌어들이는 일도 해냈으니 이젠 내 본업으로 돌아갈 차례.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아키드 님은 어디 계셔?”
* * *
헨리 코너의 도움으로 에비스 광산의 처리 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아키드는 마지막으로 웜홀 주변을 돌며 관리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헨리가 개발한 발명품은 정령의 흔적을 귀신같이 찾았다. 증거 몇 개를 황실에 보내니 곧장 사람을 보내겠다는 답신이 왔다.
몇백 년 만의 정령의 흔적이라 다소 흥분한 상태인 것 같았다.
웜홀에는 마석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도 더 많은 양이었다.
가히 마석 양식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니 기이한 일이었다.
‘정령의 가호는 대단하구나.’
아키드가 정령 탐지기를 만지작거리며 웜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광산의 입구에 다다를 즈음, 미처 끄지 못한 탐지기가 돌연 따르릉, 울리며 신호를 보냈다.
웜홀 바깥을 가리키는 시침에 아키드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 입구 근처에서 해맑게 웃는 로에나를 발견했다.
“아키드 님!”
로에나가 아키드에게 손을 붕붕 흔들며 다가왔다. 시침이 정확히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키드는 로에나 주변으로 뭔가 이질적인 힘이 흐르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러나 인지하기도 전에 이질감이 사라져 버렸다.
아키드가 탐지기와 로에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탐지기가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금이 갔다.
‘고장인가?’
아키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로에나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 * *
‘휴, 들키는 줄 알았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키드를 살폈다. 아키드는 부서진 정령 탐지기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까지 시끄럽게 울던 탐지기가 돌연 뽀각, 하고 금이 갔으니 놀랄 법했다.
그리고 탐지기를 부순 범인은 아키드의 손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유독 혈기왕성한 정령들을 힐끗거렸다.
정령들은 탐지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심지어 아키드의 팔에서 미끄럼까지 타는 정령도 있었다.
방금 보인 흉포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
하지만 나는 보고야 말았다. 저 단단한 탐지기를 한 번에 부수었던 야성미 넘치는 정령의 몸짓을.
‘정령은 힘이 세구나.’
새롭게 안 사실에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평소 귀찮은 애들을 돌보는 기분이었는데 순간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이처럼 재잘거리던 애들이 탐지기를 보자마자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었으니까.
일전에 회중시계, 그러니까 정령 탐지기가 울린 사건 이후로 정령들은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정령사라는 게 발각될까 봐 노심초사한다고 할까.
나는 순간적으로 정령들이 아키드에게 해코지하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었다.
뒤늦게 탐지기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
‘개기지 말아야겠다.’
아군은 아군인데 조금 독특한 아군이었다. 그래서 어쩐지 더 무서운 건 기분 탓인가.
나는 정령들에게 주었던 시선을 떨쳐 내고 아키드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 붙잡는 척하며 그에게 달라붙은 정령들을 떼어 내었다.
― 아야!
정령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스스 흩어졌다. 아키드가 잡힌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를 마중 온 건가요?”
나직이 묻는 말에는 수줍음이 깃들어 있었다. 숙인 고개 아래 꼼질거리는 입술이 너무 귀여웠다.
“네. 마침 나올 시간인 거 같아서 왔는데 딱 마주쳤네요.”
“날도 추운데 호텔에서 기다리시지.”
아키드가 내 뺨을 톡, 건드리는가 싶더니 제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내게 둘둘 휘감았다. 아마도 볼이 차가웠던 모양이다.
나는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목도리에 얼굴을 푹 눌러썼다. 은은한 체향이 목도리에 가득해서 꼭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기분이었다.
‘와, 최고다.’
나도 모르게 입가가 흐물거리자 정령들이 딴죽을 걸었다.
― 또다! 얘 또 변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로맨틱한 분위기에 초를 치는 정령이 얄미워 ‘아니, 웬 벌레가!’ 하는 고전적 방법을 사용해 정령을 멀리 쫓아내었다.
― 꺄, 정령사가 정령을 때린다!
정령들은 부산스럽게 흩어지면서도 입을 쉬지 않았다. 고귀한 정령이라기엔 경박한 반응들이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키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손도 조금 시린 거 같아요.”
시답잖은 수작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최고급 장갑을 끼고 있었으니까.
이 장갑을 끼고 손이 시리다는 건 사실 개수작이었다.
‘그래도 이왕 마중 온 거, 다정하게 손잡고 돌아가고 싶단 말이야.’
나는 억지인 줄 알면서도 손을 흔들어 재촉했다.
아키드가 그 모습을 빤히 보는가 싶더니 손을 가만히 붙들었다.
그리고.
“헉.”
“날이 춥기는 하죠.”
“…….”
“이러면 좀 더 따뜻할 거예요.”
아키드가 제 안주머니에 내 손을 쏙 넣고는 씨익 웃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온 그의 적극적인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목도리에 이어 주머니에 손까지 넣어 주다니.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두근대 들킬까 봐 겁나는 상황이었다.
아키드는 얼빠진 나를 보며 태연히 입을 열었다.
“갈까요?”
아무래도 아키드는 선수인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