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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29)화 (29/177)
  • #29.

    아키드는 관리소장과 에비스 광산의 안정성 문제로 지지부진한 회의를 잇고 있었다.

    다량의 마석 매립지가 별견되기는 했지만 채석해도 안전한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로에나가 갑자기 실종된 것처럼 눈앞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탓이었다.

    아키드는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했다.

    다행히 그녀를 찾았으나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광부들 쪽의 동요도 심했다. 마석의 양이 매력적이긴 해도 인명 피해가 우려되는 광산에 사람을 투입할 수는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광부들 사이에서 에비스 광산에 귀신이 들렸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기현상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면 운영을 할 수 없는 상황.

    이대로 있다간 마석이 있다 한들 폐광을 면치 못하리라.

    아키드가 힘없이 호텔로 돌아와 곧장 로에나의 방으로 향했다.

    외출하자고 꼬셔 놓고 사건이 터져 로에나를 내내 혼자 두는 게 미안한 탓이었다.

    막 노크를 하려는데 안쪽에서 활기찬 대화 소리가 들렸다. 언뜻 남자의 음성이 들려 아키드가 움찔했다.

    그때 때마침 쟁반을 들고 나오는 슈리가 아키드를 발견했다.

    “어머, 대공자님. 벌써 오셨어요?”

    “응? 아키드 님이 왔어?”

    안쪽에서 로에나의 명랑한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빼꼼 돌려 그와 눈까지 마주친 로에나가 배시시 웃었다.

    “오늘도 고생했어요, 아키드 님!”

    아키드의 시선이 자연히 그녀의 옆에 앉은 웬 수상한 남자에게 옮겨졌다.

    행색이 남루해서 더더욱 경계하는데 그가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코너 남작가의 헨리 코너라고 합니다.”

    헨리 코너? 그게 누군데.

    아키드는 처음 듣는 가문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이곳 토박이가 아닌 것 같았다. 이곳에 사는 가문이었다면 그가 모를 리 없었으니까.

    아키드는 이미 하델루스령에 사는 모든 가문의 인적 사항을 모조리 외운 지 오래였다.

    로르크 남작이 귀족다움을 강조하며 하나도 빠짐없이 외우도록 시킨 탓이었다.

    현실은 대공자가 자잘한 가문의 가계도까지는 알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각 가문의 가계도를 빠삭하게 외운 후였다.

    그게 이런 데에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아키드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여행객인가.”

    “아, 예.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헨리가 아키드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정령 연구소’라는 다소 정직한 회사 이름이 적혀 있는 단출한 명함이었다.

    “정령?”

    “아키드 님, 안 그래도 상의할 게 있었어요.”

    로에나가 아키드에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광산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해결하다니요?”

    “아, 그건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대공자님.”

    헨리가 능숙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키드가 무심히 쳐다보자 헨리가 말했다.

    “광산에서 일어난 현상과 흡사한 현상이 과거에도 기록된 바 있습니다.”

    “기록되었다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뜻인가?”

    “예. 정확히는 고대에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정령들이 흔하던 시기에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적인 현상이었죠.”

    헨리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경량화와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고급 마법 가방인지 작은 가방임에도 꽤 큰 서류가 튀어나왔다.

    헨리가 몇몇 부분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귀신의 짓 같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델루스 가문의 경사가 아닐지 사료됩니다.”

    “경사라고?”

    아키드가 눈썹을 치켜떴다. 지금 이 일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입장에선 그리 달가운 단어가 아닌 탓이었다.

    이에 헨리가 안경을 추키며 말을 이었다.

    “예. 만약 제가 생각한 게 맞는다면 에비스 광산은 정령의 가호를 받은 성지가 될 겁니다.”

    * * *

    [……그래서 곧 조사가 진행될 것 같아요.

    혹시 몰라 아키드 님과는 확실해지고 나서 아버님께 알리기로 했으니 그전에 처리하시면 됩니다. ……(후략)]

    엘레나는 로에나의 서신을 받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하델루스 성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남아 있는 상황.

    본성에 도착할 즈음엔 데미안에게도 이 소식이 들어갈 테니 서둘러 에비스 광산을 인수해야 했다.

    마침 미리 밑밥을 깔아 둔 터라 엘레나는 자연스럽게 에비스 광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을 즈음 슬그머니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번에 말한 건은 생각해 보셨나요?”

    “예. 안 그래도 에비스 광산의 매출이 떨어진 지 오래라 매매를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데미안이 입가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익성 떨어지는 광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사 봤자 활용하기도 애매한 곳일 텐데.”

    “전부터 하고 싶은 사업이 있는데 마침 지리적으로 괜찮아서요.”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정가로 인계하려니 조금 양심이 찔리는군요.”

    “원래 양심이 있던 사람도 아니면서 별말을 다 하시네요.”

    물론 이 대화에서 제일 양심이 없는 이는 엘레나였다. 그 땅이 노다지가 될 걸 다 알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었으니까.

    데미안이 엘레나의 시비에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길 잠시, 그가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값은 필요 없습니다.”

    “네?”

    엘레나가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값을 치르지 않고 매입하는 건 훗날 분쟁의 소지가 있는 탓이었다.

    엘레나가 이를 어찌할까, 머리를 굴리는데 데미안이 작게 말했다.

    “어차피 전부터 그 땅에 관심을 두던 거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그랬죠.”

    그의 말이 맞았다. 이미 전부터 대공에게 빼앗을 궁리를 하던 곳이기는 했다.

    그게 정령의 가호가 깃든 땅인 걸 알게 된 지금은 더더욱 탐나는 부지였고.

    “그래도 값을 치를게요. 당신한테 거저 받는 건 제 쪽에서 달갑지 않아서.”

    “그냥 받으세요. 지난번의 망언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시고.”

    “…….”

    “일전엔 제가 경솔했습니다. 부인께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어요.”

    데미안이 평소답지 않게 저자세로 사죄했다.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바를 엘레나는 아주 잘 알았다.

    엘레나의 아버지인 선대 황제는 난봉꾼이었다.

    정치적인 목적뿐 아니라 개인의 욕망을 위해 숱한 후궁을 만들어 하렘을 이루었던 희대의 바람둥이.

    아버지의 바람기를 보고 자란 엘레나는 첩 제도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오죽하면 현 황제인 자카리에게도 첩을 두면 의절할 거라며 협박했겠는가.

    엘레나는 데미안이 어울리지 않게 사과하는 것에 콧방귀를 뀌었다.

    “아신다니 다행이네요.”

    “예. 그러니 그 땅은 부인께서 가지십시오. 서류도 금방 처리해서 드리겠습니다.”

    “이왕이면 오늘 안에 처리해 주세요.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곤란하니까.”

    “제가 이런 쪽으로 부인을 속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자부합니다만.”

    “그건 서로 신뢰 관계가 있을 때 가능한 공치사죠. 저는 말보단 글을 더 신뢰합니다.”

    “정말 당해 낼 수 없군요.”

    데미안이 피식 웃으며 비서에게 종이와 펜을 들고 오라 지시했다.

    잠시 후 비서가 쟁반에 담아 오자 데미안이 즉석에서 광산의 권리가 엘레나 하델루스에게 위임되었음을 증명하는 문서를 적었다.

    인장까지 찍어 내미니 엘레나가 순순히 서류를 받았다.

    이것만 있으면 훗날 분쟁이 일어나도 데미안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을 터. 엘레나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나는 분명 값을 치르려 했어요. 거저 준 건 당신이니 나중에 딴말하지 마세요.”

    “그럴 일 없습니다. 절대.”

    “절대라는 말이 붙으면 꼭 번복될 만한 사건을 많이 봐서.”

    엘레나는 끝까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쉽게 얻어 낼 줄은 몰랐기에 아주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해서 선심 쓰듯 중얼거렸다.

    “그 편지, 새아가에게서 온 거예요. 남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대답하자 데미안이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본인이 어떤 오해를 했는지 새삼 느꼈는지 시선을 돌려 입가를 가렸다.

    언뜻 귀가 붉어진 게 창피하긴 한 모양이다. 엘레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죠. 이제 오해는 풀리셨을까요?”

    “예. 아, 네. 완전히…….”

    데미안이 마른세수를 하며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그게 퍽 우스워 엘레나가 피식 웃었다.

    로에나가 편지에 무얼 썼는지 훗날 알게 되면 지금과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어질 테지.

    데미안의 속을 뒤집는 일은 엘레나의 기쁨인지라 엘레나는 그날을 고대하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엘레나가 사라지고 난 만찬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하지만 데미안의 속은 시끌시끌했다.

    ‘설마 그게 새아가의 편지였을 줄이야.’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제 발언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하도 편지를 보며 웃음꽃이 피었기에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다.

    설마 사이 나쁜 며느리의 편지에 그리 반응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나 잠시 후 이성을 되찾은 데미안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엘레나와 로에나가 언제부터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졌는가.

    아니, 그것보다 왜 저에게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다.

    데미안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서에게 물었다.

    “아키드나 새아가에게 별다른 소식은 없었나. 편지라든가.”

    하지만 혹시는 혹시에서 끝이 났다.

    “없습니다.”

    비서의 단호한 말에 데미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소외당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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