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24. 카르마의 무게 (24/33)
  • 목차

    24. 카르마의 무게

    25. 개와 늑대의 시간

    26. 힘숨찐물은 힘을 들킬 때가 제일 재미있는 법

    27. 회귀물 1회 차가 피폐물인 건 국룰

    28. 5NN살도 GOLD쪽 같은 내 새끼 신청되나요?

    29. 선택의 무게

    Epilogue. 도박의 결과는?

    24. 카르마의 무게

    [이슈] 게이트에서 나와 도시를 돌아다니는 몬스터(사진) (+989)

    [이슈] 도심 한복판에 던전 브레이크 터져… 시민 6명 사망 (+1,023)

    [이슈] 전 세계에서 일어난 던전 브레이크…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997)

    [이슈] 종교 단체 레벨레이션, 국제적 집회 시작해… 집회 장소는 DMO 본사 앞 (+751)

    [이슈] 몬스터 웨이브 가능성 제기돼… 대피 요령 안내 예정 (+1,127)

    내가 다시 진세빈이 열어 놓은 게이트로 가서 슬쩍 연결을 끊고 온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한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다. 평화로운 헌터 세계관은 이제 완전히 끝났다.

    길드들과 협회는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기 전에 자원 발굴용으로 둔 채 방치되어 있던 게이트들을 부랴부랴 닫았지만 문제는 현재 헌터들의 힘으로 닫을 수 없는 게이트와 사람 눈이 닿지 않는 곳에 터진 게이트였다.

    S급 게이트가 위치해 있는 정선에는 군부대를 주둔시켜야 한다는 의견과 A급 이상 헌터들을 주둔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넷상에서 치열하게 맞서고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는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 터졌다. 내 휴대폰의 호출 문자도 계속 울렸다. 던전 브레이크가 터질 때마다 그 시에 등록된 헌터들에게 문자를 보내기 때문이다.

    아니, 서울이 얼마나 넓은데. 제발 구 단위로 끊어서 보내면 안 될까?

    [김나연 - 기껏 재각성했는데]

    [김나연 - 던브 땜에 묻혔어요ㅠ] 오후 1:30

    [김나연 - 언니 저 그래도 재등록하고 러스터 길드 들어갔어여!] 오후 1:31

    [김나연 - (사진)]

    [김나연 - 헌터 라이선스도 재발급받았어용ㅎ] 오후 1:33

    괜히 재각성시켰나……. 느지막하게 확인한 문자에 볼을 긁적이며 미적지근한 후회를 내뱉었다.

    그냥 E급으로 내버려 뒀으면 스틸 파티의 위험성을 깨닫고 헌터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도 않았을 건데. 하필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을 때 길드에 들어가냐.

    아니, 어차피 몬스터 웨이브 터지면 E급도 강제 소집행일 텐데 차라리 잘됐나?

    [축하해ㅋㅋ] 오후 8:38

    [레이드는 위험하니까 조금만 뛰고] 오후 8:39

    “모르겠다. 얘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일단 그 미친 연쇄살인범 네크로맨서에게서 구한 걸로 내 몫은 끝이다. 배달이나 시켜 먹을까, 하고 배달 앱을 열어 봤더니 어느새 배달비가 2천 원이나 더 올라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로 인한 배달비 상승이란다.

    정말로 배달비 만 원 시대가 도래하려고 하는 건가.

    그나마 통신사 할인이라도 되는 편의점이나 가기 위해 겉옷을 걸치고 문을 열자 앞에 좀비… 아니, 윤세인이 서 있었다.

    마치 회식하고 돌아오는 아빠처럼 한 손에는 치킨 박스가 든 봉지를 든 채였다.

    “…좋아, 지금이 관리국을 때려치울 아주 좋은 기회야.”

    다크서클이 퀭하니 내려온 세인이가 비틀거리며 자취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다급하게 세인이를 흔들며 간절히 외쳤다.

    “센, 죽지 마!”

    “3일 내로 대피소 파악하고 대피 요령 안내서 작성하래. 초, 중, 고등학교 가서 던전 브레이크나 몬스터 웨이브 터졌을 때를 대비한 대피 교육이랑 훈련도 하래, 하하.”

    듣기만 해도 퇴사 욕구가 몰아치는 내용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관리국 안 들어가길 정말 잘했다. 헬조선 공무원은 역시 할 게 못 된다.

    치킨 박스를 앉은뱅이 탁자 위에 놓고 오픈했다. 바삭한 황금빛 프라이드치킨과 새빨간 양념치킨이 나를 맞이했다.

    “대학은 휴교하냐? 아니면 온라인 강의?”

    “놉, 대면 강의. 교수들, 자기들은 교수 아파트에 산다고 등굣길의 위험성을 몰라. 이러다 강의 들으러 학교 오는 학생 하나 죽어야지 정신을 차리지.”

    대학은 휴교는 개뿔, 계속 대면 강의를 고집했다. 던전 브레이크 정도는 국가 비상 상황이 아니다, 이거지? 이쯤 되면 서울사이버대학처럼 온라인을 이용한 비대면 강의로 전환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좀비 사태가 터져도 한국은 출근하고 등교하라고 할 거라고 우스갯소리로 그러더니 정말 던전 브레이크가 터져도 출근하고 등교하네.”

    여전히 아침 버스는 만차였고 도로에 차들은 많았으며 세상은 그냥 몬스터가 밖으로 나다니며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옵션만 붙었을 뿐, 그냥 그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아포칼립스 사회는 도래하지 않았다. 무너진 건물, 황폐화된 도시, 탈탈 털린 마트,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경계하는 사람들과 그 와중에서도 꽃피우는 인류애.

    ‘잠깐, 그냥 마계 대전 2탄이잖아.’

    다른 점이라곤 상대가 너무 약해 빠져서 싸울 맛도 안 난다는 거? 오히려 잘됐지. 왜 이런 세계가 멸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치킨을 뜯으며 리모컨을 꾹 눌렀다.

    요즘은 하도 사건, 사고들이 많이 터져서 텔레비전 예능보다 9시 뉴스가 더 볼만했다.

    - 종교 단체 레벨레이션은 세계의 공식적인 1호 귀환자 사무엘 르웬 헌터가 사무총장으로 있는 DMO 본사 앞에서 귀환자 추방 시위 집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들은 귀환자들이 게이트 사태와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이라며 주장하고 있으며, 현재 지부가 위치한 각 나라의 수도에서도 집회를 열 것이라 밝혀…….

    “저 KKK단 같은 또라이 새끼들은 할 일도 없대?”

    흰 천을 뒤집어쓰고 온갖 악의적인 푯말을 든 채로 시위하는 레벨레이션 신도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뉴스 화면에서 재생되자 닭 날개를 쫙 찢던 세인이가 질색했다.

    한국에서야 74명이 죽은 레벨레이션 참사 사건 때문에 신도가 팍 줄었지,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레벨레이션의 신도 수는 계속하여 늘고 있었다.

    세계가 어지러우면 사이비가 득세한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물론 저들이 주장하는 귀환자 게이트 사태 및 던전 브레이크 원인설은 정답이었지만.

    하지만 우리 죽인다고 게이트 오픈 현상이 끝나진 않는단다, 사이비 광신도 놈들아.

    - 국내 유일한 귀환자인 A씨가 신변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S급에게 무슨 경호가 필요하냐는 세간의 반박에 A씨는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고 지금까지 총 열 번의 습격이 있었다고 밝혀 큰 충격을…….

    공식 1호 귀환자라면 한 명뿐이다. 무림맹주 윤선아 씨. 윤선아 씨 이후로도 귀환자가 한 명도 안 나온 걸 보면 다들 잘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하필 선점되어서 관리 중인 게이트로 돌아와서, 쯧쯧. 심지어 돌아오는 걸 원치도 않았던 사람인데 돌아와서 고생만 하네.

    박복한 인생에 혀를 차 주고는 다시 치킨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윤세인의 앞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닭 뼈와 치킨 박스에 남아 있는 내 몫의 닭 반 마리.

    치킨 몇 조각을 세인이의 앞으로 쓱 밀어 주며 슬쩍 물었다.

    “야, 센. 넌 만약 내가 게이트 사태 원인 겸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이라면 어떨 것 같냐?”

    “X나 팰 거야.”

    “왜?”

    “너 때문에 야근하니까.”

    담백한 답변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게 끝?”

    “그러면 너를 레벨레이션에 가져다 바치기라도 하리?”

    치킨 한 조각을 집어 든 윤세인이 투덜거렸다. 미용실에 갈 시간도 없었는지 언제나 숏컷을 유지하던 머리는 어느새 귀와 목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설마 네가 세계 X되어 보라고 일부러 터트렸겠냐? 너 그럴 깜냥 안 되는 거 내가 잘 아는데.”

    “그렇게 너무 진지하게 대답하지 말아 줄래. 님이 진짜 나를 원인이라고 믿고 있는 거 같잖아.”

    팩트라서 진짜로 찔린단 말이다.

    마침 내일이 주말이니 자고 갈 거라는 세인이에게 윤세인 전용 세면도구와 잠옷용 편한 옷을 꺼내 주고 탁자를 정리했다.

    “그런데 내일도 출근하라고 하면 너 어쩌냐?”

    “아, 제발 재수 없는 소리 자제 좀.”

    질색하는 목소리와 함께 베개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가볍게 낚아채서 다시 윤세인을 향해 휙 던졌다. 베개를 끌어안은 윤세인이 침대에서 뒹굴며 물었다.

    “이채, 너 내일 약속 있어?”

    “있겠니.”

    심드렁하게 답하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귀환자 오픈 채팅방 알림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 사람들은 차원 이동한 세계에서 묵언 수행만 하다 오셨나. 무슨 날마다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Local Channel-ROK

    〉귀환자 단체 채팅방

    〉〉공지 사항: 이름은 차원 이동한 곳에서의 직업, 혹은 세계관으로 부탁드립니다

    무림맹주: 다들 안 들키게 조심하세요

    무림맹주: 하 왜 나는 하필 올 때부터 들켜서

    이단심문관: 무림맹주 님 괜찮아요?

    무림맹주: 지금 월셋집도 쫓겨날 판국입니다

    스팀펑크: 맹주 님 약함? S급이라며 왜 이러심?

    스팀펑크: 그냥 습격하는 놈들 때려잡고 집 앞에 경고 차원으로 매달아 놓지 왜 신변 보호 요청함?

    성녀: 안 그래도 귀환자 여론 지금 최악인데 귀환자에게 사람 다치거나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들려오면 퍽이나 좋겠네용

    암살길드 수장: 그냥 레벨레이션 놈들 랜덤으로 몇 놈 골라서 게이트 연결 끊을 때 안에 처넣자니까요ㅋㅋ

    암살길드 수장: 만약 돌아오면 지들도 귀환자잖아ㅋ

    드래곤 친구: 오, 역지사지 좋네 제일 X같은 차원 ㅇㄷ?

    용사: 평생 못 돌아올 수도 있고 자칫하다간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런 말은 농담으로도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스팀펑크: 으, 진지충

    암살길드 수장: 그러면 저 새끼들이 우리 죽이려고 난리 치는 건 괜찮고?

    드래곤슬레이어: 아 왜 우리끼리 싸우고 그래여 이럴수록 단합해야죠

    천우현 말이 맞았다. 무력으로는 귀환자들이 레벨레이션에게 이길지 몰라도 여론 싸움으로 가면 불리한 건 우리였다. 어쨌든 저쪽에서 주장하는 것 반은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 와중에 사람 하나 차원에 집어 던졌다고 알려져 봐. 바로 귀환자 사형 청원 뜨는 거야.

    그때, 채팅방에 나를 부르는 이가 나타났다.

    마탄의저격수: 저기 마왕 님?

    마탄의저격수: 제가 돌아온 게이트 최대한 빨리 닫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탄의저격수: 당장 내일이라도요

    마탄의저격수 님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차분한 문장 속에 묻어 나오는 다급함에 볼을 긁적이며 세인이를 돌아보았다.

    “센, 미안. 약속 생긴 듯.”

    이 언니가 게이트 수 좀 줄이고 던전 브레이크 좀 막아야 해서.

    마탄의저격수: 제가 돌아온 차원 괴수들이 상대하기 좀 까다로운 놈들이라서요

    마탄의저격수: 던전 브레이크가 터져서 그놈들이 밖으로 나온다면 피해가 클 것 같습니다

    마왕: 그럼 내일 닫죠

    마왕: 내일 시간 되시는 분?

    ="t

    내일까지 과제로 리포트 열다섯 장을 작성하고 모레까지 졸업논문 초안을 교수님께 제출해야 했지만 지금 리포트와 졸업논문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곧 중간고사 기간이었기에 이번 주말이 아니면 시간이 안 났기 때문이다. 시험을 못 보느니 과제를 조지는 게 낫지.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이라는 말에 승부욕에 불이 붙었는지, 아니면 주말이라서 그런지 레이드 신청 인원이 꽤 많았다.

    모임 시간을 정하고 있자 호기심이 생겼는지 윤세인이 불쑥 물어 왔다.

    “누구? 대학 동기들?”

    “아니, 동호회.”

    “오, 이채. 동호회도 들었어? 무슨 동호회?”

    귀환자 동호회라고 있어.

    * * *

    “와, 이렇게 많이 모인 건 처음 아니에요?”

    수능이 한 달 남은 상황에서 학원 째고 온 드래곤슬레이어가 모인 사람들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언제나 열 명 남짓, 혹은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만 모이다가 열다섯 명이 넘게 모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왕, 성녀, 이단심문관, 백마왕, 용사, 소드마스터, 드래곤슬레이어, 천마, 마탄의저격수, 혁명군 수장, 농노1, 마탑주, 추기경. 그리고 뉴페이스인 스팀펑크, 용병왕, 암살길드 수장.

    이 인원으로는 게이트 클리어를 하러 갈 게 아니라 우주 정복을 하러 가야겠는데? 다들 소설 주인공 자리 하나씩은 따 놓은 당상이네.

    무림맹주 윤선아 씨는 오고 싶다는 마음을 표출했지만 아쉽게도 귀환자들의 신상 보호를 위해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스팀펑크가 건들거리며 담배 한 대를 빼 물고는 귀환자 모임을 쭉 훑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인 그가 키득거렸다.

    “친목을 거의 안 하신 듯? 고인물 X망 테크 탈 삘이 없네.”

    “애도 있는데 담배는 끄시죠?”

    “댁 용사죠? 말하는 꼬라지 보니까 딱 알겠네.”

    스팀펑크는 부러 천우현의 얼굴 앞에 담배 연기를 훅 내뱉으며 킬킬거렸다. 천우현의 옆에 있던 드래곤슬레이어가 인상을 찡그리며 기침을 내뱉었다.

    “담배 끕시다.”

    마X석 뺨치는 근육의 헬창, 용병왕이 스팀펑크를 보며 한 소리 하자 구시렁거린 스팀펑크가 순순히 담배를 지져 껐다.

    스팀펑크가 채팅창 안과 밖에서의 모습이 똑같다면 암살길드 수장은 정반대였다. 사교성 좋게 웃으며 말을 걸던 인싸 혁명군 수장이 꾹 입을 다물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그에게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정도였으니.

    휙휙 주변을 돌아보던 백마왕이 마탄의저격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게이트 어디에 있어요?”

    “여기 근처입니다. 조금 더 가야 합니다.”

    마탄의저격수가 제가 귀환한 게이트가 있는 곳이라고 안내한 곳으로 도착하자 말문이 막혔다.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다른 귀환자들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건물을 훑은 소드마스터가 제일 먼저 말문을 뗐다.

    “와, 이런 곳에 있는데도 지금까지 선점이 안 됐다고?”

    “이런 곳에 있어서 선점이 안 되었던 게 아닐까요.”

    간간이 지나가던 사람들이 임대 표시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낡은 노래방 건물 앞에 모인 이들을 힐끔거렸다.

    이 건물 안에 생긴 게이트가 지금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설마 건물 안에 게이트가 터졌겠어?’라는 안일한 생각과 관리하는 사람도 없이 비어 있는 건물, 그리고 좀 외진 위치, 이 정도?

    건물 입구 유리문은 심지어 잠겨 있지도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폐건물 특유의 싸늘한 공기와 으스스한 분위기가 우리를 반겼다.

    마탄의저격수의 뒤를 쫓아 계단을 올라가니 노래방 입구 대신 게이트가 검은 포털을 일렁인 채로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A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어둠이 우리를 반겼다. 사방을 경계하며 인벤토리에서 곧바로 발광 아티팩트를 꺼냈다.

    “어라, 왜 이러지?”

    손에 쥔 발광 아티팩트를 툭툭, 쳤다. 분명히 아티팩트를 켰는데도 눈앞은 여전히 어두웠다. 발광 아티팩트는 눈이 아플 정도로 환하게 던전 안을 밝혀 주던 평소와 달리 흐릿한 빛만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둠에 먹혀서 그래요. 놈들이 뱉는 어둠에 웬만한 빛은 먹혀서 강력한 광원이 필요합니다.”

    마탄의저격수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어느 정도로요?”

    “우주 군함에서 쏘는 빛 정도면…….”

    말하다가 실행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는지 그는 입을 닫았다. 아이템이 안 되면 스킬을 쓰면 되지.

    『스킬 ‘라이트(C)’를 실행합니다.』

    번쩍, 환한 빛이 터져 나와 던전 안을 밝혔다. 동시에 우리의 앞에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괴생물체를 향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온갖 공격이 쏟아졌다.

    소리도, 기척도 없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실력자일 터인데도 코앞까지 다가와 주둥이를 벌릴 때까지 아무도 몬스터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와, 난이도 돌았네.”

    몬스터의 머리에 깊게 쑤셔 박았던 검을 뽑아낸 드래곤슬레이어가 삐뚜름하게 흘러내린 뿔테안경을 쓱 올렸다.

    몬스터가 쓰러지자 불빛 아래에 드러난 던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던전은 텅 비어 있었다.

    “조심하세요. 놈들의 특기는 은신과 습격입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벽이 꿈틀거리더니 다리가 잔뜩 달린 애벌레처럼 생긴 몬스터가 몸집을 불리며 우리를 향해 덮쳐들었다. 그 애벌레를 시작으로 천장, 벽, 바닥 등 사방에 몸을 숨기고 있던 몬스터가 스르륵 나타났다.

    “무슨 카멜레온이야?”

    누군가가 질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대하기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일격에 끝내지 못하면 은신하여 자취를 감추고 다시 뒤를 습격하는 식으로 공격해 왔으니 말이다.

    마탄의저격수는 침착한 얼굴로 허공을 향해 총을 쐈다. 탕! 탕! 허공에 총알이 날아갈 때마다 멀쩡했던 공간이 꿈틀거리며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래서 밖으로 나오면 피해가 크다고 하셨구나.”

    아마 사람 여럿 잡아먹혔을 게 분명했다. 찾기도 더럽게 까다로워 잡는 데까지 시간도 오래 걸렸겠지.

    “제가 그쪽 군부에 몸담고 있을 때 이것들을 상대할 때는 무조건 좁은 공간에 몰아넣는 게 매뉴얼이었습니다. 넓은 공간에서 맞서는 것과 좁은 공간에서 맞서는 건 난이도가 차원이 다르니까요.”

    내 라이트 스킬로 고정해 놓은 빛이 점점 흐릿해지며 던전이 다시 어두워졌다. 이 몬스터들이 어둠을 내뿜는다고 했던가? 다시 라이트 스킬을 재개하자 밝기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은신하고선 습격하는 1급 몬스터들과 간간이 나오는 2급 몬스터들. 이 게이트가 S급을 받지 못한 건 이 2급 몬스터들 때문이리라. S급 게이트는 게이트 안의 모든 몬스터가 1급이어야 했다.

    이 레이드는 이제까지 모여서 했던 레이드 중 최고로 느린 속도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튀어나오는 몬스터들 때문에 도저히 진도가 팍팍 안 나갔기 때문이다. 빨리빨리의 민족, 성격 급한 한국인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류의 던전이었다.

    『캐스팅이 완료되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드디어 뜬 상태창에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귀환자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물러서세요!”

    하늘만큼 높은 천장에서 운석이 이글거리며 쏟아질 준비를 마쳤다. 안전거리 안으로 모두 들어오자 손가락을 딱 튕겼다.

    『스킬 ‘메테오(L)’를 실행합니다.』

    “뒈지기 싫으면 기어 나오겠지.”

    이게 바로 몬스터 박멸이다. 운석이 쏟아지며 은신하고 있던 몬스터가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그리고 튀어나온 몬스터들을 향해 화려한 일격이 가해졌다. 검사들은 검으로 몬스터들을 신명 나게 베어 나갔고, 법사들은 달려드는 몬스터를 향해 뒤쪽에서 마법과 스킬을 쏟아부었다.

    거너들은 마법에 맞고 꿈틀거리는 놈들을 확인 사살했다. 마탄의저격수 님은 원 샷, 원 킬이었지만.

    “와, 보스룸이다.”

    그렇게 몬스터를 일망타진하고 그 난리에도 몸을 숨긴 놈들을 하나씩 잡으며 계속 걷자 어느새 보스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촉수에 칭칭 감긴 타원형의 무언가들(아마 몬스터의 알일 확률이 높은)이 보스룸에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던전의 핵을 찾아야 한다는 것.

    확률은 78분의 1.

    멀찍이서 총으로 쏴서 다 깨 보자는 스팀펑크의 의견은 핵에 손을 대 차원의 연결을 끊어야 했기에 기각.

    “으으, 닿기도 싫게 생겼어.”

    소드마스터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암살길드 수장이 휙 암기 다섯 개를 한꺼번에 던졌다. 사방으로 날아간 암기는 정확하게 촉수만을 자르는 기행을 보여 주었다.

    스르륵, 촉수가 잘리고 알이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재생되는 촉수에 의해 다시 촉수 안에 숨었다.

    오오, 감탄을 내뱉은 스팀펑크가 머리를 긁적이며 암살길드 수장한테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서커스단 단장이라고 하셨나?”

    “암살길드 수장입니다.”

    찡그린 얼굴로 암기를 더 꺼내어 손가락 사이에 끼며 암살길드 수장이 대꾸했다. 핵의 위치는 암살길드 수장의 활약으로 손 하나 대지 않고 찾아냈다.

    핵을 향해 한 걸음을 떼려는 내 팔을 마탄의저격수가 덥석 잡았다.

    “잠깐.”

    그러고는 라이플을 스나이퍼 라이플로 바꾸어 몬스터 시체 위를 지지대 삼아 허공에 겨눴다.

    총구를 신중하게 겨눈 마탄의저격수가 방아쇠를 당기고 빠르게 날아간 총알이 허공에서 폭발하는 순간,

    크와아아앙―!

    고막을 먹먹하게 만드는 울음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던 보스룸의 공기가 진동하며 은신해 있던 보스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체동물같이 흐느적거리는 몸통에 빼곡하게 붙어 있는 수백 개의 발, 촘촘히 박혀 있는 바늘 같은 송곳니, 길게 찢어지는 주둥이, 보스룸을 꽉 메울 만큼 거대한 크기.

    보호하듯 알을 휘감고 있던 보스 몬스터가 몸을 일으켰다.

    “…둘리 얼음별 대모험.”

    마탑주의 중얼거림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진짜 닮았어.

    * * *

    콰아앙―!

    꼬리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땅이 울리며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났다. 날려 보낸 스킬은 보스 몬스터의 질긴 가죽에 맞고 튕겨 나갔다.

    던전 브레이크 전이었다면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지 않고 연결만 끊었겠지만, 그 5분이라는 시간에 저놈이 밖으로 따라 나올 가능성이 충분했기에 연결을 끊기 전에 무조건 저 보스 몬스터의 숨통을 끊어 놔야 했다.

    아무래도 대규모 스킬을 써야 할 듯한데 문제는 공간이 너무 좁다는 것. 자칫하다간 이 공간 자체가 무너지거나 핵이 박살 날 수도 있었다.

    역시 베테랑에게 물어보는 편이 좋겠지.

    “저거는 어떻게 잡아요?”

    “저거는 우주로 유인시켜서 군함으로……. 하하, 답이 없네요.”

    정신 줄을 놓아 버린 것 같은 마탄의저격수의 헛웃음 섞인 대답에 볼을 긁적이며 다시 물었다.

    “공간을 넓히면 된다는 소리죠?”

    “그러면 타격 입힐 확률이 더 높아지기야 하겠죠.”

    그럼 뭐가 문제야? 넓히면 되지. 발을 가볍게 바닥에 탁 굴렸다.

    『스킬 ‘신의 지각(L)’을 실행합니다.』

    『차원 #SF105-2를 구현화합니다.』

    『영역을 융합&확장합니다.』

    순식간에 광야처럼 넓어진 보스룸. 천장 역시 끝없는 우주의 높이로 늘어나 있었다.

    “우주 군함은 없어도 그만한 위력은 충분히 낼 수 있겠네요.”

    마기로 던전의 핵을 감싸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솔직히 이 구성의 파티면 패배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거의 판소 주인공급들만 모아 놨는데 저 정도는 1 대 1로도 붙어서 이겨야지!

    “나 혼자도 잡겠네.”

    마탑주가 캡모자를 고쳐 쓰며 비죽 웃었다. 그 말에 귀환자들이 일제히 마탑주 뒤로 우르르 몰려갔다.

    “뭐야? 뭐예요?”

    당황한 마탑주가 우리를 돌아보며 묻자 혁명군 수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표로 대답했다.

    “혼자 잡으신다니까 편하게 솔로 플레이하시라고…….”

    “아니, 그냥 한 말이지…….”

    정교한 마법진이 보스 몬스터의 아래에서 번쩍 빛났다. 마법진에서 빛의 기둥이 올라오고 밧줄처럼 보스 몬스터의 유연한 몸체를 단단히 속박했다.

    제일 먼저 뛰어든 건 류사현이었다. 천마군림보로 몬스터의 시선이 따라잡을 수 없을 속도로 단 몇 걸음 만에 몬스터의 위로 뛰어든 류사현이 검을 힘껏 횡으로 휘둘렀다.

    검격이 질기디질겨 스킬도 튕겨 내던 몬스터의 가죽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분노하며 마구 꿈틀거리던 몬스터의 발이 쭉 늘어나 우리를 향해 뻗어졌다.

    “피하세요! 저기 닿으면 안 됩니다!”

    마탄의저격수가 제게로 뻗어지는 발에 라이플을 휘두르며 외쳤다. 굳이 경고 안 해도 닿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여기 닿았는데요. 으악!”

    스팀펑크가 몬스터의 발에 칭칭 감긴 팔을 들어 보여 주다가 옷을 부식시키고 피부까지 괴사시키려 드는 몬스터의 발에 경악하며 펄쩍 뛰었다.

    맨손으로 덥석 촉수 같은 몬스터의 발을 잡았다가 손바닥까지 독이 올라 난리를 치는 스팀펑크를 구해 준 건 농노1이었다.

    깔끔한 곡괭이질 한 방으로 스팀펑크의 팔을 감고 있던 발을 끊은 농노1은 그를 성녀에게 데려가는 친절까지 선보였다. 성녀의 옆에 있던 추기경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농노1 님이 사람 볼 줄 아시는군.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던 보스 몬스터가 나를 딱 보더니 수백 개의 발을 한꺼번에 나를 향해 뻗었다. 내가 마기를 움직이기도 전에 넓은 등이 내 앞을 막더니 발이 촤악―! 검에 베어 투두둑 떨어졌다.

    툭툭, 천우현의 등을 찌르며 말했다.

    “우현 씨, 앞쪽이 안 보이는데요.”

    천우현이 슬그머니 비킴과 동시에 수십의 마기 다발이 보스 몬스터의 가죽을 뚫고 등에 창처럼 꽂혔다.

    “제가 절대로 채현 씨를 약하게 본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몸이…….”

    자기가 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변명하는 천우현에 볼을 긁적였다. 이게 그 용사의 기사도인가? 그런데 마왕에게 하기는 좀 웃기지 않나……?

    지옥도를 열고 있던 백마왕이 깐족거렸다.

    “연애는 밖에서 합시다.”

    “와, 이게 연애로 보여요? 님, 모쏠이죠? 남자 모쏠 특, 이성끼리 붙어만 있으면 사귄다고 몰아가면서 분위기 갑분싸 만듦.”

    “아니거든요?”

    백마왕이 울컥하여 외치자 반쯤 열렸던 지옥문이 스르륵 닫혔다. 풉 비웃어 주며 빈정거렸다.

    “찔리시나 보네.”

    이번에는 치료를 마치고 다시 터덜터덜 걸어온 스팀펑크가 나와 백마왕을 보며 히죽거렸다.

    “오. 두 분, 혹시 썸?”

    “저는 저보다 400살 연상이랑 썸 타고 싶지 않거든요? 이건 거의 조상님급이잖아요!”

    경악한 백마왕이 삿대질하며 왁왁거렸다. 맞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한국이니까 그냥 한국 나이로 치자, 좀. 아직은 풋풋한 스물셋이라고.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몸은 착실히 보스 몬스터를 공격하고 있었다. 용병왕의 대검이 보스 몬스터의 가죽을 일격에 파고들어 찢어 놓은 것을 보며 감탄했다. 와우, 생존형 근육인가 봐?

    그 상처로 마기가 파고들어 놈의 몸을 헤집어 놨다. 다른 자잘한 상처에는 혁명군 수장과 마탄의저격수, 스팀펑크의 총알이 파고들었다. 마탄의저격수의 총탄은 폭발하기까지 했기에 몬스터에게 타격을 입히기 충분했다.

    그렇게 무기계가 충분히 몬스터의 체력을 빼놓은 후,

    쾅! 콰과가강―!

    법사계가 각자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대규모에 공격성이 강한 스킬들이 한꺼번에 몬스터에게로 쏟아졌다.

    보스 몬스터가 마침내 추욱 늘어졌다. 핵을 보호하고 있던 마기를 치우고 촉수를 찢었다. 물론 손이 아닌 마기로.

    마침내 주황색 핵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원 #SF564-9의 근거지입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차원 #SF564-9와의 연결을 영구히 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발끝에 무언가가 채였다. 무심코 발밑을 내려다보니 은빛 물체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군번줄?”

    내 중얼거림에 다급히 다가온 마탄의저격수가 허리를 숙여 인식표가 달린 군번줄을 주웠다. 불빛 밑에서 인식표를 천천히 살펴보던 그는 떨리는 입꼬리를 겨우 올리고는 인식표를 꽉 쥐었다.

    아무래도 이전 차원에서 인연이 있었던 이의 군번줄인 모양이었다.

    “이제 닫을까요?”

    “예. 미련은 없으니까요.”

    그 말대로 마탄의저격수의 눈빛은 추억을 짚는 듯이 아련했지만 그 눈에는 미련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차원의 연결을 끊어 냈습니다.』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 - 00:05:00』

    연결을 끊고 나가서 게이트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까지 확인하면 마탄의저격수와 그가 있던 세계의 인연은 완전히 끝이었다.

    융합&확장한 공간을 원래대로 되돌리자 모두 보스룸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런데 던전 브레이크 터질 던전이란 건 어떻게 알아요? 이 던전도 게이트 밖으로 몬스터들 나갔을 수도 있잖아요. 막 밖에 은신하고 돌아다니고 있을 수도.”

    듣는 사람까지 불안해지는 말을 쏟아 내는 드래곤슬레이어의 옆에서 걷고 있던 소드마스터가 검을 인벤토리에 수납하며 대꾸했다.

    “상태창 업데이트되어서 이제 던전 브레이크 터질 게이트 들어가면 시간 얼마나 남았다고 상태창으로 띄워 줘요. 여기는 상태창 안 떴으니까 아직 터질 때 안 된 거고.”

    …잠깐, 그럼 굳이 보스 몬스터를 귀찮게 잡을 필요가 없었다는 거잖아.

    그런 건 빨리 말해 줬어야지, 이 양반아!

    * * *

    집으로 돌아와서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았던 군번줄을 꺼낸 마탄의저격수, 유지나는 그것을 꽉 쥐었다.

    “하여간 징한 새끼.”

    낮게 읊조린 그가 쓰게 웃었다.

    그가 떨어진 세계는 우주 전쟁 스케일의 SF 스페이스 오페라 세계관이었고, 특전사 출신을 배경 삼아 먹고살기 위해 입대해 군부에 몸담은 그는 끊임없이 괴수들을 죽이고 침략자들과의 전쟁을 벌였다.

    밑바닥 출신 이방인은 그렇게 장교까지 올라갔다.

    전쟁,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환경. 이등병 시절부터 함께했던 동기들은 다 죽었지만 같은 성별의 후임 하나만은 끝까지 제 옆에 붙어 있었다.

    “이거 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가 내 군번표를 어디에다가 쓰려고.”

    “그냥 가지고 싶습니다. 대신 제 걸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거든?”

    그렇게 만류해도 기어이 제 군번줄을 손에 쥐여 주고는 그의 군번줄을 가져갔던 후임.

    몽실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에 연녹색 눈은 벚꽃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솜사탕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했지만,

    “너 미쳤냐?”

    “유지나 중령님은 너무 착해 빠지셨습니다.”

    무해한 외모와 달리 그 후임은 제대로 미친X이었다.

    이방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야 했던,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독해져야 했던 그와 달리 타고난 미친X이자 세상 제일가는 사이코였던 리시안 페일.

    상등병으로 있었을 때 유지나 그조차도 손을 놓았던 고문관 후임이 리시안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며 각을 잡은 건 유명한 일화였다.

    유지나는 연녹색 눈에 한 번씩 비치는 저를 향한 집착의 빛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에휴, 내가 너를 구하러 가는 게 아니었는데. 렉스에게 맡기고 난 클로이나 구하러 갈걸.”

    “렉스 님이 저를 구하셨어도 저는 유지나 중령님을 좋아했을 겁니다.”

    “뭐? 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 이유가 꼭 필요합니까? 혹시 제가 멋있게 등장해서 저를 구해 주신 유지나 중령님의 모습에 반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솔직히 그때 유지나 중령님 얼굴 웃겼습니다.”

    “뭐, 인마?”

    사실 리시안의 마음이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는 유지나도 몰랐다. 끝까지 묻지 못했고 듣지 못했다.

    “왜, 왜 전역하셨습니까?”

    “나 떠난다.”

    “…따라가도 됩니까?”

    “아니, 따라오긴 뭘 따라와. 그냥 네 세계에서 살아, 인마. 연고 없는 이방인이 얼마나 힘든지 네가 아냐?”

    지구로 귀환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사옥의 개인 물품과 함께 남겨 두고 왔던 리시안의 군번줄. 애써 떨쳐 두고 왔던 그 세계의 미련의 상징들.

    그 군번줄이 지금 지구로 돌아온 그의 손에 쥐여 있었다.

    넘어오지 말라고 확실히 박살 내고 왔는데 그 통로는 또 어떻게 찾았대? 하여간 대단한 녀석이다.

    제가 했던 말에 차마 차원을 넘지 못한 채로 군번줄만 밀어 넣었을 리시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부대의 미친개 리시안은 언제나 유지나의 말만은 잘 들었으니.

    유지나는 결국 다시 제게로 돌아온 군번줄에 대고 속삭였다.

    “부디 잘 살아라. 미친 짓은 적당히 하고.”

    아마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제 오랜 후임을 향해.

    * * *

    난 왜 그랬을까. 왜 리포트와 논문 초안을 던지고 굳이 던전 브레이크 예고조차 뜨지 않은 게이트에 들어갔을까.

    왜 과제를 안 하고 지쳤다는 걸 핑계로 집에 오자마자 곧바로 잠들었을까.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준 엿에 이를 갈며 미친 듯이 리포트를 타이핑했다. 리포트 열다섯 장이라니. 워드를 켜고 글자를 함초롬바탕으로 바꾸고 자간과 여백을 티 나지 않게 늘렸지만 열다섯 장의 길은 멀고도 요원했다.

    이것 말고도 졸업논문 초안까지 작성해야 했다. 왜 던전 브레이크는 졸업 학기에 터지고 난리지.

    저주할 거다, 망할 새끼. 3개월만 더 늦게 터트릴 것이지, 왜 굳이 제일 바쁠 때 이러는 건데.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중간 보스 흑막 놈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밤을 샐 각오로 냉장고에 쌓아 놓았던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방 안에 마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마법진의 작동이었다.

    당연히 애쉬겠지. 내가 바쁘면 알아서 눈치껏 돌아가거나 얌전히 나를 기다리는 녀석이었으니 굳이 내쫓을 생각은 없었다.

    “폐하, 폐하!”

    소리 높여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땀에 흠뻑 젖은 체이스터가 마법진 앞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왜 여기로 넘어오냐……?”

    “저 진짜 목숨 걸고 왔슴다!”

    몸을 숙여 한참을 헐떡거리던 체이스터는 불안감이 담긴 눈으로 자꾸만 마법진을 힐끔거리더니 빠르게 보고했다.

    “이곳과 차원을 연결한 최초 던전에 누군가가 침입했습니다!”

    “최초 던전?”

    “모르세요? 타 차원에 게이트 생성 및 관리가 가능한 던전인데요, 그곳으로 이 차원으로 넘어올 수 있슴다.”

    마계에 있지 않았으니 내가 알 턱이 있나. 아무튼 그곳에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건 이 차원으로 넘어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

    “침입은 언제 일어났지?”

    “이틀 전이요.”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내가 있는 차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의 보고가 지금까지 안 들어왔다고?

    “애쉬가 요즘 바쁘나?”

    내 중얼거림에 체이스터가 눈을 빛내며 말을 쏟아 냈다.

    “제가 그것 때문에 온 거예요, 폐하! 제가 폐하께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으니까 제게 만약 폐하가 저를 소환해도 그 앞에서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했어여!”

    직접 전하고 싶기라도 했나? 저 마법진은 애쉬의 저택에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마족들은 내가 소환하지 않는 한 나와 접촉하지 못했다.

    안드라스를 일주일에 한 번씩 소환하고 있긴 하지만 일은 이렇게 그 일주일 새에 일어날 수도 있는 법.

    그러니 이런 긴급 사항은 애쉬를 통해 듣는 수밖에 없…….

    ‘…정보의 불균형.’

    애쉬는 너무 많은 권한을 쥐고 있었다. 그것도 내 눈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사건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내 차원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일이라면 말이 달랐다.

    “침입 사건은 얼마나 알고 있지?”

    “저까지 알 정도면 웬만한 중앙 고위급은 다 알져.”

    “네가 애쉬의 저택에 잠입한 건?”

    “아무도 모름다! 제가 누군데요. 폐하의 후견인이자 은신의 대가, 체이스터 아닙니까?”

    믿음이 안 가, 믿음이.

    “나 만났다는 말은 어디 가서 하지 말고, 내게 사건 전달했다는 말도 하지 마라. 알겠지?”

    “당연하져.”

    신신당부하고 체이스터를 다시 역소환시켰다.

    책상을 돌아보자 크라토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쌓여 있었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세 권 정도 남아 있었다. 그 세 권을 따로 빼놓고 안드라스를 소환했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부를 때가 아닌데도 갑자기 소환된 영문을 모르겠는지 멀뚱히 눈을 깜빡이던 안드라스가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책을 다 읽어서. 좀 일찍 읽게 되더라고?”

    책 더미를 안드라스의 품에 턱 안겨 주며 지나가듯 물었다.

    “마계에는 별일 없지?”

    “예,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안드라스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의도로 나를 속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측근 놈들에게 뒤통수를 맞는 건 상당히 불쾌했다.

    “아, 그래? 그럼 가 봐. 참, 최초 던전 관리는 똑바로 하고.”

    『스킬 ‘소환(L)’을 해제합니다.』

    내 말에 창백하게 질린 안드라스가 변명하기도 전에 그를 역소환시켰다.

    어디, 이다음에는 어떻게 대처할지 지켜보자고.

    * * *

    쿵쿵거리는 심장께를 꾹 누른 안드라스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설마.”

    들킨 건가? 굳이 최초의 던전을 콕 집어 언급한 이유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하나밖에 없었다.

    하긴, 마왕이 제 눈 역할로 꽂아 넣은 존재가 안드라스 자신 하나뿐일 리가 없지.

    빌어먹을, 그 실버 드래곤 놈에게 휩쓸리는 게 아니었는데. 그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헤집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같다니까? 안드라스 너도 …걸 원하잖아.”

    “하지만 이건……!”

    “그러니 순순히 협조하라고. 이 방법 말고는 없다는 걸 너 역시도 잘 알잖아?”

    뻔뻔하게 손을 내밀며 웃던 드래곤 놈의 얼굴을 떠올리며 안드라스가 이를 갈았다.

    “다 마계를 위해서야.”

    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마왕의 최측근인 책사로서 생각해 보아도 방법은 정말 그것 하나뿐.

    “일단 연락을 넣고 어디에서 정보가 유출되었는지를 찾아내야겠군.”

    한숨을 쉰 안드라스는 유능한 책사답게 곧바로 해결책 몇 가지를 생각해 냈다. 좋든 싫든, 그와 애쉬는 일단 한배를 탄 것이나 진배없었다.

    모든 건 마계를 위해서.

    어두운 마계의 하늘을 창밖으로 올려다보며 그가 입속으로 읊조렸다.

    * * *

    교수님께 첨삭된 졸업논문 파일을 받고 나니 깊은 한숨밖에 안 나왔다. 아무래도 박사까지 따신 교수님은 고졸의 논문 수준이 경악스러우신 모양이었다.

    중간고사가 코앞인데 이걸 언제 다 수정하냐. 아예 뒤집어엎으라는 수준인데.

    왜 마계 놈들은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겠는 사람한테 고민거리를 안겨 주냐고. 아직 수정 기간은 남았기에 일단 당장 날짜가 내일인 시험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좋아, 오늘은 꼭 밤을 새겠어. 굳은 다짐을 하고 필기 노트를 열었다. 옆에서 열심히 필기하는 사람(주희 선배)이 있다 보니 나도 절로 따라서 열심히 필기하게 되더라고.

    잠깐만 눈 붙일까? 딱 10분만 눈 붙이고 다시 공부해야지. 딱 10분…….

    “폐하, 폐하?”

    나를 흔드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떴다. 밝은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졌다. 음, 밝은 햇살……?

    다급히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10시 37분.

    시험 시간은 11시.

    “아아아악! X됐다아아아!”

    알람이라도 맞춰 놓을걸! 왜 나는 나 자신을 믿은 거지?

    내 뒤에 서 있던 애쉬를 밀치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미친 듯이 세수하고 대충 입만 헹구는 수준으로 양치를 마친 후 손에 잡히는 아무 옷이나 침대로 휙휙 던졌다.

    바지는 현재 트레이닝복이니까 그대로 입고 그냥 위에 티만 갈아입고 위에 과잠이나 걸치자.

    “폐하, 제가―”

    “일단 나 좀 다녀와서 이야기하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백팩에 필기 노트와 필기구를 쑤셔 넣으며 애쉬의 말을 잘랐다.

    애쉬가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계획했든 내 눈을 가리고 비선 실세가 되려고 계획했든, 지금 내게 당장 중요한 건 21분 뒤에 있을 중간고사 시험이었다.

    그 강의는 과제도 조졌기에 시험에서 점수를 만회해야 했는데 시험을 못 보면 그냥 F 확정이었기에.

    늦잠 자서 시험을 치지 못해 F 학점을 받아서 한 학기 등록금을 더 내고 하계졸업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마계 쿠데타로 죽기 전에 엄마가 먼저 날 죽일 게 확실했다.

    정신이 없어 뒤돌아 있으라고 애쉬에게 말하는 것도 잊고 윗옷을 훌렁 벗었더니 애쉬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었다.

    이러다가 시험 못 치는 거 아니야? 남은 시간은 20분. 택시를 타도 시험 장소까지 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답은 순간 이동뿐이다. 좌표 저장이 되어 있는 자연대와 시험 장소인 사회과학대까지는 걸어서 18분. 미친 듯이 뛰는 것밖에 답이 없다.

    『순간 이동(S) - 저장된 좌표』

    - 자취방

    - 본가

    - 자연대 건물…….

    『스킬 ‘순간 이동(S)’을 실행합니다. 규모: 1인』

    강의에 지각한 적은 있어도 시험 보는 날에 지각한 건 처음이다. 4학년 막학기를 아주 스펙터클하게 보내는구먼.

    손을 씻고 있던 여자분이 화장실 칸에서 뛰쳐나온 나를 보며 화들짝 놀랐지만 그걸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무조건 20분 전에 도착해야 한다.

    미친 듯이 달려 15분 만에 사회과학대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무사히 도착한 강의실 문을 열고 비틀비틀 주희 선배의 옆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늦잠 잤냐?”

    “말도 마세요. 하마터면 시험도 못 볼 뻔했어요.”

    선배와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마지막 한 글자라도 더 보기 위해 노트 필기를 꺼내 훑어보고 있자 조교가 들어왔다.

    마침내 시험 시간이 되자 조교가 안내했다.

    “휴대폰 끄거나 무음으로 돌려놓으시고요,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시험지를 받아 곧바로 학번과 학과, 이름을 적고 문제를 쓱쓱 풀어 나갔다. 문제는 대부분 서술형이었다.

    한참 펜으로 답을 휘갈겨 적어 나가고 있는데 누군가의 휴대폰이 긴 진동 소리를 내며 울렸다.

    집중이 깨진 사람들이 시험지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고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앞쪽에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던 조교 한 명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급히 감독하던 조교에게로 다가가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휴대폰을 확인한 조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탕탕, 다급한 손길로 책상을 친 조교가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잠깐 주목! 주목해 주세요!”

    웨에에에에엥―!

    조교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이렌이 울렸다. 강의실 문 너머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 화재경보기 오작동으로 치기에는 조교의 반응과 쾅쾅,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걸렸다.

    목소리가 사이렌 소리에 파묻히자 마이크를 켠 조교가 외쳤다.

    “지금 각자 휴대폰 켜서 확인해 주세요! 현재 몬스터 웨이브가 터졌다고 합니다! 다들 시험지 두고 짐 챙겨서 일어나 주세요!”

    그 말에 곧바로 꺼 놓았던 휴대폰을 켜 확인했다.

    긴급재난문자

    [서울특별시청] 10월 25일 11:27

    서울특별시 상공에 몬스터 웨이브 발생. 즉시 민방위 대피소로 대피 요망

    가까운 대피소 찾기: http://safezone.kr/XSO7

    [Web 발신] 각성자 관리국

    10월 25일 11:27

    등록번호 356178-013745 이채 헌터(Rank A)

    소집 장소 확인 후 본인 근처 소집 장소로 긴급히 소집 요망

    소집 위치 확인하기: http://location.kr/XUN1

    대피하라는 긴급재난문자와 처음으로 보내진 비상소집령이 도착해 있었다. 닫혀 있던 강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문을 연 사람이 밖에서 소리쳤다.

    “지금 건물에 몬스터 들어왔대요! 빨리 나오세요!”

    그 말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앞다투어 강의실 문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적당히 뒤쪽에 앉아 있었던 나는 사람들에게 휩쓸려 어느새 강의실 밖으로 나와 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민방위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다급한 외침을 들으며 소집 위치를 확인했다.

    현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소집 위치는 한국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앞. 가까운 대피소 역시 농업생명과학대학 지하 주차장.

    시험 장소는 2층이었고, 유독 3층에서 비명이 크게 울렸다. 계단에서 사람들이 눈물범벅이 되어 서로를 밀치며 내려왔다. 피비린내가 미약하게 바람을 타고 끼쳐 왔다.

    “선배!”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보이는 장면에 주희 선배를 다급히 끌어당겼다. 날개 달린 파충류처럼 생긴 몬스터가 허공을 텁, 물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대피하는 이 상황에서 페리를 부르기는 쉽지 않은 상태. 진짜 돌겠네. 혼잡스러운 상황을 둘러보다가 다시 다음 사냥감을 노리고 날아드는 몬스터를 향해 스킬을 시전했다.

    『스킬 ‘염력(SS)’을 실행합니다.』

    다들 정신없는 상황이니 내가 쓴 스킬이라고 들키지는 않겠지. 빠른 속도로 뒤쪽으로 끌려간 몬스터는 머리가 벽에 찧어서 피를 흘리며 그대로 축 늘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주희 선배를 부축하고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오니 상공에 시커멓게 열려 있는 게이트들과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닫을 수는 있나?”

    뭐 전투기나 헬기라도 타고 들어가야 해? 내 질린 듯한 혼잣말에 관리자1이 답변했다.

    『제 계약자에게도 말해 주긴 했지만 저건 못 닫아요. (˵ˊᯅˋ˵)』

    『카르마로 배리어가 깨지고 제약이 눌리며 최소한의 규제인 핵이 없이 침략한 게이트니까요. (〉д<)』

    『저기서 쏟아지는 몬스터 다 잡아야지 닫힌답니다. (;´・`)〉』

    『어쨌든 저기도 보낼 수 있는 수는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ƪ( ˘⌣˘ )ʃ』

    “미치겠네. 혹시 지방에도 게이트 열린 건 아니겠죠? 지방 헌터 인력 부족하다고 맨날 뉴스 뜨던데…….”

    부모님에게 전화라도 해 봐야겠다. 휴대폰 화면을 켜자 주희 선배가 내 손을 잡고 끌었다.

    “연락은 나중에 하고 일단 빨리 농대까지 가자. 여기에 계속 서 있으면 위험하잖아.”

    “선배, 제가 저 몬스터들에게 당할 것처럼 보여요?”

    “힘숨찐 생활 끝내고 싶다고?”

    그 말에 입을 다물고 순순히 주희 선배를 따라 농대까지 뛰었다. 비행형 몬스터들은 계속해서 상공의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왔고 우리의 머리 위에서 저공 비행하며 자꾸만 사람들을 노렸다.

    쏟아지는 수에 비해 한국대학교를 습격한 몬스터 수는 적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위협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저 정도면 서울 전역, 아니 경기도까지 난리겠는데.”

    숨을 헐떡이던 주희 선배가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고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우리의 위로 비행하던 몬스터 하나가 주희 선배를 낚아채려고 시도했다.

    『스킬 ‘로기의 화염(AAA)’을 실행합니다.』

    그 몬스터는 곧장 화염에 휘감겨 고소한 탄내를 풍기며 바닥에 굴렀다. 주희 선배가 걱정스럽다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다른 헌터가 스킬 쓴 건가 생각하겠죠. 사람들 대피하느라 정신도 없고요.”

    “그래도 조심해. 하아, 내가 정령의 힘만 쓸 수 있었어도…….”

    뜀박질하는 우리의 옆으로 자동차가 휭하니 지나갔다. 이래서 차가 있어야 하나 벼.

    오늘따라 유독 거리가 멀게 느껴졌던 농대에 도착하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삑삑, 호루라기 소리가 멀리서부터 울렸다.

    “민간인 분들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시고 헌터는 이쪽으로!”

    붉은색 LED 봉을 흔들며 지시하는 안내원의 말에 따라 주희 선배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는 헌터들이 모인 쪽으로 향했다.

    라이선스를 꺼내 내밀자 훑듯이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인 관리국 요원이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생산계 전 등급 및 전투계 D급까지는 민간인 안내 및 생필품 전달을 맡아 주실 거고요, C급 이상부터는 몬스터 레이드에 투입되실 겁니다.”

    “뭐야, 내가 왜 레이드에 투입되어야 해?”

    “싫으면 징역 사시면 됩니다.”

    약간의 반발이 있었지만 혼란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만큼 긴급상황이자 전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통솔 중인 상황이었기에 그때를 틈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엄마, 거긴 괜찮아? 게이트 안 열렸어?”

    - 하나 열렸는데 금방 진압될 거라더라. 너는? 지금 집이지? 밖 아니지, 채현아?

    불안으로 떨려 오는 엄마의 목소리. 그 부름에 삑삑,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괴물들의 울음소리, 사람들의 고함 소리를 뒤로한 채 여상히 대답했다.

    “나 지금 대피소 앞이야. 나 걱정하지 말고 엄마도 위험하면 바로 아빠한테 전화하고 대피소로 가. 알았지?”

    대피소 앞은 맞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몬스터가 물밀 듯이 밀려 나오는 상공을 올려다보았다. 만족하냐, 진세빈 이 개X끼야.

    “인터넷 아직 안 끊겼네? 대박, 수방부(수도방위사령부)에 데프콘 2 발령됐다는데?”

    “내가 봤을 땐 화스트페이스에서 안 끝나. 칵크트 피스톨 발령될 듯.”

    옆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군부대까지 투입될 정도면 이거 상황이 보통 아닌데? 하필 시험 기간이라 학교에 나온 사람들은 많았고 사람들은 점점 농대에 몰려들고 있었다.

    그때, 몬스터 한 무리가 빠른 속도로 농대, 정확히는 헌터들이 서 있는 쪽을 향해 날아왔다.

    “미친!”

    “도망가지 말고 잡아! 몬스터 막으라고!”

    “S급도 하나 없는데 X발, 다 개죽음당하라는 거야, 뭐야?”

    여기에서 레이드를 직접 뛰어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허둥지둥하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헌터들을 보며 혀를 차다가 페리를 소환했다.

    『스킬 ‘소환(L)’을 실행합니다.』

    고양이 모습으로 폴짝 뛰어나온 페리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펄쩍 점프하여 몬스터 한 마리의 목을 물어뜯었다.

    으이구, 이 마수만도 못한 인간들아. 오합지졸들이 따로 없네. 체험판 기간을 겪었어도 이 모양인데 그냥 바로 몬스터 웨이브 앞에 던져졌으면 진짜 세계 망했을 뻔.

    그나마 레이드 경험이 있는 베테랑 헌터들이 페리의 등장에 정신을 차리고 몬스터와 맞섰다.

    “어어, 안 돼!”

    누군가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몬스터 한 마리가 빠른 속도로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필 지하 주차장 앞에 서 있던 헌터는 D급.

    그 D급은 온몸으로 막아서기보다 자기 한 몸 대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누군가가 양심 없는 새끼라고 날카롭게 외쳤지만 죽기 싫은 건 본능이지, 뭐.

    ‘페리,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

    내 명령을 들은 페리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커다란 실드가 대피소인 지하 주차장 입구를 가로막았다.

    “허억, 허억. 다행…….”

    허리를 숙이고 숨을 헐떡이던 유선한이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몸을 폈다.

    몬스터가 실드에 몸을 박아 대는 탓에 기침을 내뱉었지만 페리가 몬스터를 물어뜯고는 내 앞으로 질질 끌고 오자 유선한은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와, A급으로 안 올렸으면 어쩔 뻔했어. 내 안목에 감탄하며 페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곧이어 사람들이 많은 곳을 발견하고는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공격이 쏟아졌다. 아마 이곳뿐 아니라 서울 전역에서 비슷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겠지.

    몬스터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모를 피 냄새가 진동했다. 한 마리를 죽이면 두 마리가 날아들었고 게이트 안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끝이 없었다.

    “빌어먹을, 이 몬스터 웨이브는 대체 언제 끝나!”

    『이제 곧 끝나요! 힘내세요! ٩( °ꇴ °)۶』

    “너 같으면 힘이 나게 생겼냐?”

    몬스터에게 쫓기며 죽을힘을 다해 대피소로 뛰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비상 상황에서 살아남는 건 오직 개인의 몫이었다.

    국가가 도움을 주긴 하지만 도움을 주는 이곳까지 오는 건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

    『마왕의 권능 ‘지배’를 실행합니다.』

    『마왕의 권능 ‘복종’을 실행합니다.』

    내 명령에 지배와 복종에 걸려든 몬스터들이 자기편을 향해 덤벼들었다.

    “와, 진짜 몬스터 조종이 가능하잖아?”

    “능력 잘 타고나서 혼자 꿀 빠네. 가만히 서서 몬스터 부려먹는 거 X나 꼴받아, X발.”

    니가 뭘 알아, 새꺄. 내가 꿀 빨고 있는 걸로 보이냐? 안 그래도 지금 죽을 맛이구먼.

    테이머인 척하느라 남발해 댄 권능은 점차 몸에 무리를 주고 있었다. 권능이 왜 있겠어. 위급 상황에 한 번씩만 딱 꺼내어 쓰라고 있는 거지. 이렇게 전방위에 뿌리는 게 아니라.

    아, 그냥 마기랑 스킬 쓰고 싶다. 이 정도는 진짜 10분 컷인데. 코피가 주르륵 흐르는 코를 틀어막고 고개를 숙인 채로 이를 갈았다.

    어설픈 힘숨찐은 나 자신한테 피해를 줍니다, 반드시.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페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몬스터를 물어뜯고 나 역시 보이는 몬스터마다 닥치는 대로 내 권능을 덧씌우며 팀킬을 명령하고 있었다.

    날이 환한 오전이었던 시간은 어느새 해가 지며 어둑해지는 오후로 바뀌어 있었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몬스터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내가 이렇게 지칠 정도이니 다른 헌터들은 어떻겠어. 주저앉은 이들만 여럿이었다.

    “게이트 닫힌다!”

    그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의 더욱 시커먼 구멍이었던 게이트의 크기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관리자의 말대로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의 수는 점점 줄더니 단 한 마리도 나오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게이트는 비로소 소멸했다.

    하지만 게이트가 소멸한 것과 별개로 이 세계에 쏟아진 몬스터들은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오늘 안에 집으로 들어가긴 글렀네.”

    옆에 있던 사람이 투덜거리며 몬스터 시체를 툭, 찼다. 원룸 빌라는 무사할까. 여기저기 박살 난 유리창과 깨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엉망이 된 건물 내부를 보며 걱정했다.

    잠깐, 그런데 집이 박살 나면 마계 통로 마법진은 어떻게 되는 거지? 당장이라도 확인을 위해 집으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한국대학교 밖으로의 이탈은 허가되지 않았다.

    순간 이동으로 슬쩍 다녀올까도 했지만 건물이 박살 났으면 수습하는 사람들에게 순간 이동을 들킬 위험성도 있으므로 기각.

    아마도 민서 언니는 집에 있었겠지? 그러면 소집 장소가 원룸 빌라 근처였을 거고. 당장 민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민서 언니, 저희 자취방 빌라 멀쩡해요?”

    - 완전 멀쩡해. 옆 빌라는 2층 창문 뚫리고 박살 났던데 우리 빌라는 무슨 운인지 몬스터들이 다 비껴갔더라.

    설마 마법진 때문은 아니겠지.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겁도 없이 내게 달려드는 몬스터를 향해 전격을 날려 주어 전기 구이로 만들어 준 후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 그런데 너 어디냐?

    “저 한국대요. 시험 보는 도중에 몬웨 터졌어요.”

    - 거기도 아직 몬스터 남아 있냐?

    “안 그래도 지금 잡고 있네요.”

    - 그래, 수고해라.

    나와 마찬가지로 묘하게 지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민서 언니가 미련 없이 통화를 끊었다. 어두워진 공간을 자신들의 세계인 마냥 활보하고 다니는 놈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 부지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몬스터와 건물을 박살 내고 안으로 들어가는 몬스터,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는 몬스터.

    “페리, 힘들어?”

    낑낑거리며 혀를 내밀고 숨을 헐떡이는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묻자 페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오늘 페리의 활약은 동물 보호 단체에서 동물 학대라고 나를 신고해도 뭐라 말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두어 번 더 쓰다듬어 주고는 페리를 역소환시켰다. 우리 페리 고생시키느니 내가 권능 남발해서 내상 좀 더 입고 말지.

    계속 일반인 코스프레를 유지했으면 나는 지금쯤 저 대피소에서 담요라도 덮고 누워 구호식품을 먹고 있었을 텐데. 쌀쌀해진 공기에 과잠을 여미며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래, 다 페리 버리고 온 내 업보다.’

    『마왕의 권능 ‘복종’을 실행합니다.』

    내 앞쪽에 쓰러져 있던 헌터를 공격하려다가 복종에 걸려들어 얌전히 바닥에 내려앉은 몬스터는 근처에 있던 헌터의 검에 의해 축 늘어졌다.

    “수고하십니다.”

    “그쪽도요.”

    퀭한 얼굴로 그 헌터와 인사를 나누고는 쓰러진 헌터가 숨을 쉬는 걸 확인하고 부축했다. 대피소 앞까지 끌어다 놓으니 힐러가 달려왔다.

    힐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몬스터를 찾아 쓸데없이 넓기만 한 학교 부지로 걸음을 옮겼다. 이 사태가 내 카르마 때문에 일어난 일만 아니었어도 어디 숨어서 농땡이 부리고 있었을 텐데.

    숨 돌릴 틈이라도 생긴 건 일단 눈에 보이는 몬스터들을 다 처리하고 난 이후였다. 나머지 몬스터들이 건물 내부에 숨었든, 뒤의 관악산에 숨었든 일단은 다 처리했다고 치자.

    던전은 몬스터가 남았더라도 핵만 박살 내면 레이드가 끝났는데 몬스터 웨이브는 모든 몬스터들을 죽여야지 비로소 레이드가 끝났다. 말 그대로 노가다 헬 모드였다.

    휴대폰 시계를 확인해 보니 시간은 오후 10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전 11시 반쯤에 몬스터 웨이브가 터졌으니 대략 열 시간 반 정도를 휴식 시간도 없이 레이드를 뛴 거다.

    잠시 눈이라도 붙일 겸 비틀거리며 대피소인 지하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려 시도하자 앞을 지키고 있던 관리국 요원이 나를 막아섰다. 절로 정색이 나왔다.

    “왜 못 들어가게 해요? 나 분명 여기 최대 수용 인원 8천 명 이상이라는 거 봤는데.”

    “아직 몬스터 웨이브 마무리가 덜 되어서 불침번 서셔야 합니다. 세 시간 후에 교대 가능합니다.”

    마왕에게 불침번을 시키다니……! 마계에서는 전쟁 중에도 부하 놈들이 알아서 불침번 서고 난 막사에서 잤는데! 물론 믿음이 안 가서 푹 자지는 못했지만.

    하지만 이곳에서의 나는 마왕이 아니라 좀 비중 있는 엑스트라 헌터 1이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볼을 긁적였다.

    세 시간 정도 버티는 건 일도 아니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자 구호 물품이라도 받고 가라고 나를 잡았다.

    대피소에서 나온 사람에게서 담요랑 물티슈, 생수, 시리얼바와 초코파이 하나씩을 건네받고 앉을 곳을 찾아 엉망이 된 대피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몬스터 사체 위에 털썩 걸터앉아 담요를 어깨에 두른 후 물티슈로 얼굴을 쓱쓱 닦았다. 말라붙은 내 피와 몬스터의 피가 고스란히 물티슈에 묻어 나왔다. 다 닦은 물티슈를 뭉쳐 바닥에 휙 던졌다.

    마계 대전은 더 험하고 힘들었는데 거의 2년 가까운 세월을 편하게 살았다고 죽을 맛이네. 시리얼바를 까서 기계적으로 씹어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앞으로 몇 번의 몬스터 웨이브가 더 일어날까. 하루빨리 이 빌어먹을 크라토스를 넘기는 수밖에 답이 없었다.

    카르마는 크라토스 자체에도 쌓여 있었으니 크라토스를 넘기면 자동적으로 내 카르마도 덜어진다는 말씀.

    허기진 배는 시리얼바 하나로 차지 않았다. 초코파이의 포장을 까 입에 막 밀어 넣은 순간 관리국 요원이 목소리를 살짝 키워 물었다.

    “현재 상태 괜찮은 헌터들 계십니까?”

    여기서 손들면 100% 귀찮은 일에 동원될 게 뻔한데 어떤 바보가 자기 입으로 자기 상태 괜찮다고 이실직고하겠어?

    모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질문한 관리국 요원을 향해 경계심 가득한 눈빛들이 쏟아졌다.

    눈 마주치면 끌려갈라. 슬그머니 휴대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다행히 아직 터지는 인터넷은 전국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해 주고 있었다.

    휙휙 손가락으로 화면을 내리던 도중 뉴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속보] 정선 S급 게이트에서 던전 브레이크 터져

    뭐……? 정선 S급 게이트면 마계 게이트잖아? 거기에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다고? 어떤 미친놈이 내 명령에 항명하고 밖으로 마수들을 내보냈다는 소리야?

    당황하고 있는 사이 쾅쾅 못을 박듯 던져진 한마디.

    “지금 정선 S급 게이트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터져서 지원이 필요하답니다. 지원자 정말 없습니까?”

    반사적으로 몬스터 사체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깨에 걸쳤던 담요가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지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심지어 알아서 기어 나온 몬스터의 시선마저.

    “저요.”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저 상태 괜찮아요.”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내 지원에 관리국 요원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전화로 다급히 말을 전한 관리국 요원이 내게 말했다.

    “곧 순간 이동 능력 보유 헌터가 온다고 합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머리가 복잡해서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괜찮을 리가 있겠냐고. 지금 반란에 준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곧이어 나타난 ‘순간 이동 능력 보유 헌터’의 얼굴은 익숙했다.

    “채현 씨? 지원자가 채현 씨였습―”

    “거기 아현이 있어요?”

    주태윤의 말을 자르고 다급하게 물었다. 생각해 보니 정선 S급 게이트는 마계 게이트이기 이전에 협회가 관리하는 게이트였고 백아현은 협회 소속의 유일 S급 힐러였다.

    최전선으로 몰리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백야 헌터를 말하는 거라면 있습니다. 현재 무사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주태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내가 거기 난이도를 X나게 잘 아는데 지금 걱정 안 하게 생겼냐?

    대답 대신 빨리 가자는 재촉의 뜻으로 주태윤의 소매를 슬쩍 당기니 푸스스 웃은 그가 곧바로 동반 순간 이동을 실행했다.

    한 번 와 봤다고 눈에 익은 게이트 앞에 발을 디디자마자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게이트에서 어슬렁어슬렁 나오는 마수들과 그에 맞서는 헌터들. 몬스터 웨이브 때 게이트에서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를 보다가 이 모습을 보니 정말 수가 적어 보였지만 문제는 저것들이 모두 1급이라는 사실이었다.

    후방에서 힐러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다가 나를 발견한 백아현이 버럭 소리 질렀다.

    “야, 이채!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와?”

    어디긴, 내 부하 놈들이 만들어 놓은 게이트 앞이지. 쟤는 내가 아직도 보호받아야 하는 민간인인 줄 아나. 이래 봬도 가짜 신분도 A급인데 말이야.

    “너 때문에 온 거 아니거든?”

    마찬가지로 목소리 높여 맞받아치며 게이트 안에서 줄줄이 나오는 마수를 날카로운 눈으로 훑었다.

    마계는 1마계부터 7마계까지 각 마계마다 환경이 다른 터라 건물과 생활방식은 물론이요, 그 땅에서 나고 자라는 마수들의 특징과 외양 역시 많이 달랐다.

    1마계가 사시사철 우중충한 하늘과 서늘한 기온 때문에 털 달린 마수들이 대부분이라면, 작열이 내리쬐는 사막이나 다름없는 환경인 5마계는 지구의 사막 생물과 비슷한 마수들이, 그리고 늪지대가 많은 7마계는…….

    ‘내가 이래서 7마계 놈들이 참 싫었지.’

    피부가 끈적거리고 미끌거리는 양서류를 닮은 마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 내 앞에서 입을 쩍 벌리는 저 마수처럼. 양서류는 딱 질색이라고.

    나를 집어삼키기 일보 직전인 마수의 숨통을 틀어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7마계 잔당 놈들이 내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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