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전 양심적으로 마석 안 훔쳤는데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내 인벤토리에는 던전 벽에서 떼 온 마석 다섯 덩어리가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마석 좀 떼어 냈다고 이실직고하기에는 존심이 상하고. 내가 모르쇠 하며 잡아떼자 주태윤이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물었다.
- 그럼 러스터 길드 선점 게이트에는 왜 들어가셨을까?
“친한 동생 보호자 역할도 못 해 줘요?”
- 무릇 연장자라면 친한 동생이 범죄의 길로 들어서려 하면 막아야 하지 않나요? 따라 들어가는 게 아니라.
댁이 뭘 알아. 나는 범죄자 잡으러 들어갔다고.
하지만 내가 이걸 말하는 순간 눈치 빠른 주태윤은 회귀자의 존재를 추측해 낼 게 분명했다. 예지자라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괜한 도박은 딱히 하고 싶지 않았다.
“아, 말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요. 묻어 두는 조건으로 뭐 부탁하려고 이렇게 밑밥 까는 건데요?”
피해보상액 받아 내려 했으면 고소장을 보냈겠지. 이렇게 직접 전화하는 게 아니라. 이 배짱에는 주태윤이 나를 고소할 리 없다는 확신도 들어 있었다.
- 이번에 저희 길드에서 A급 게이트를 공략합니다. 날짜는 3일 후입니다.
“이번 게이트 스틸 건 눈감아줄 테니까 공략대 참가하라고요?”
또 S급 게이트로 바뀔까 봐 무섭기라도 하나. 피식거리다가 퍼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미친놈의 존재에 급히 물었다.
“혹시 공략대에 진세빈도 있어요?”
- …예. 하지만 채현 씨가 불편하시다면 어떻게든 치우겠습니다.
그냥 냅둬. 치워지는 게 댁이 될 수가 있어.
진세빈이 A급 메이지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터라 주태윤은 진세빈의 능력과 등급이 제 아래라고 생각한다.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만만하게 보면 그 앞에서 필연적으로 방심할 수밖에 없다.
‘그럼 그대로 죽는 거지.’
미친놈 하나 치웠어도 최종 보스 미친놈이 남아 있다는 걸 깜빡했다.
하지만 내가 주태윤에게 진세빈이 좀 많이 돌아 있는 EX급 귀환자라고 언질하는 순간 진세빈 역시 주태윤에게 내가 귀환자라고 밝힐 확률이 99.9%.
진세빈은 나와 주태윤을 죽이고 싶어 한다. 분명 주태윤이 나를 공략대에 부를 걸 예상하고 있을 거다. 이번 게이트는 놈에게 절호의 찬스였다.
“그냥 오라고 해요. 어차피 그 사람 주태윤 씨 말도 안 듣잖아요.”
- 그러면 채현 씨 참가 여부는,
주태윤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참가할게요. 그 대신 사람 한 명 데리고 가도 되죠?”
좋아, 이번 기회에 최종 보스 미친놈도 확실히 치워 버려야지.
* * *
A급 게이트 공략 당일.
“하하……. 데려오신다는 분이……?”
내 옆에 서 있는 이의 얼굴을 본 주태윤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나를 돌아보았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뻔뻔한 얼굴로 씩 웃으며 천우현의 팔을 끌어당겼다.
랭킹 1위를 알아본 공략대가 술렁였다. 그 공략대와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있던 진세빈은 비웃음을 만면에 띄우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겨우 그까짓 패로 저를 상대할 수 있겠냐는 도발이었다.
하지만 진세빈이 한껏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내가 천우현을 데려온 이유는 진세빈과 함께 맞서려고가 아니었다.
『A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우현 씨, 만약 게이트가 뒤틀리는 게 느껴지면 바로 주태윤 헌터 옆에 붙어 있어야 해요.”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자 천우현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태윤을 보호하며 진세빈과 맞서는 건 내 몸이 두 개 정도여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난 그냥 경호 외주를 선택했다. 천우현 정도면 내가 신경 쓰지 않고 믿고 맡길 만하지.
공략대 인원은 총 52명. A급 게이트는 보통 공대원 40명이 평균이다. 전에 게이트가 갑자기 S급 게이트로 바뀌는 걸 경험한 주태윤은 공략대 인원을 늘리는 걸 택한 모양이었다.
던전 공기는 묵직하고 축축했다. 기분 나쁠 정도의 찝찝함이 몸 주변을 감싸 왔다. 던전 벽을 감싼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넝쿨과 뜬금없이 서 있는 마른 고목들.
넝쿨이 꿈틀거리며 뻗어 나오더니 공대원 한 명의 발목을 빠르게 잡아챘다. 그가 굵고 질긴 덩굴에 발목이 감겨 속절없이 끌려가자 앞에 있던 나무가 주둥이를 쩍 벌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말로 주둥이였다. 그것도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히 박혀 있는.
천우현의 성검이 깔끔하게 넝쿨을 베어 냈다. 치이익, 타는 소리와 식물 태우는 냄새가 퍼져 나갔다. 성검의 날에 베인 곳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부정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먹잇감을 뺏긴 나무가 먹이의 몸을 꿰뚫기 위해 죽창만큼 날카로운 가지를 힘껏 뻗었지만 그것 역시 성검에 자비 없이 베여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곧이어 성검이 고목 자체를 베어 냈다. 반으로 쩍 갈린 고목에서 붉은 피가 팍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이 엿 같은 식인 나무들도 몬스터라는 거죠?”
하마터면 고목의 아주 좋은 단백질원이 될 뻔했던 공대원이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고목 하나가 죽자 나머지 고목들이 일제히 꿈틀거리며 서서히 움직였다. 던전 벽과 천장을 뒤덮은 넝쿨 역시 마찬가지였다.
넝쿨은 3급, 나무는 2급.
사방에서 뻗어지는 덩굴에 모두 우르르 흩어져 몸을 피했다. 화르르 붉은 화염이 타올랐다. 화염이 덩굴의 몸을 태우자 덩굴이 미친 듯이 꿈틀거리며 사방에 불씨를 튀겨 댔다.
『마왕의 권능 ‘복종’을 발동합니다.』
『이미 타 존재의 지배 아래 놓인 개체입니다.』
『이중 지배로 인하여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없습니다.』
해석해 보자면 타 존재의 지배를 받는 누군가가 이 고목 몬스터를 지배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치르르― 위이이잉.
저 멀리서 소름 끼치는 곤충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백과사전 크기의 거대한 곤충 떼가 몰려오고 있었다. 놈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생김새가 선명하게 보였다.
새의 것만 한 크기의 삼각형 가죽 날개에 열 개의 징그러운 다리와 납작한 얼굴에 큰 눈, 그리고 눈 밑에는 축축한 세 개의 입. 검게 빛나는 털이 온몸을 덮고 있고 정수리에는 촉수 같은 것이 삐져나와 있었다.
차라리 대왕 파리나 대왕 바퀴벌레가 낫지 않을까. 저건 마계 생활과 자취 생활을 하며 온갖 벌레들과의 대면으로 단련된 내가 봐도 징그러운데.
“악! 나 나갈래!”
“전기 모기 채! 전기 모기 채 없어요? 나 저거 닿기도 싫은데!”
“으허헝, 저 진짜 못 있겠어요. 저 진짜 저거 못 잡겠어요! 저 바퀴벌레도 못 잡는단 말이에요.”
사람 잡아먹는 나무보다 아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대 곤충이 더 무서운 사람들이 많았다. 벌레가 오자마자 뒤로 후다닥 물러난 사람이 반절이었다.
벌레 하나하나는 2급이었지만 저렇게 떼로 뭉쳐 다니는 습성 때문에 놈들은 떼로 묶여 1급 선정을 받았다.
내 양쪽에 선 주태윤과 천우현을 힐긋 돌아보았다. 주태윤은 안색이 해쓱해져서 금방이라도 뒤로 물러나고 싶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천우현은 덤덤한 얼굴로 곤충 떼를 보고 있었다.
이게 바로 곱게 자란 재벌 집 막내아들과 온갖 고생 다 하고 큰 청년 가장의 차이인가.
『마왕의 권능 ‘복종’을 발동합니다.』
『이미 타 존재의 지배 아래 놓인 개체입니다.』
이런, 안 먹히네. 페리는 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했으므로 차마 부를 수가 없었다.
분명히 입으로 텁 물어 놓고선 하루 종일 토하고 물을 할짝대면서 입과 혀를 씻고 잘근잘근 씹을 무언가를 찾아다닐 게 분명했다.
지네형 마수를 잡았을 때 보였던 반응이 딱 이 반응이었다.
하지만 스킬을 쓰자니 내가 테이머가 아니란 게 들킬 위험이 크고. 꼭 몬스터 소환이 아니라 몬스터를 내 영향력 아래에 두고 다루는 모습으로도 충분하겠지.
『마왕의 권능 ‘지배’를 발동합니다.』
『지배권 40%를 가져오셨습니다.』
좋아, 이제 열 마리 중에 네 마리는 내 지배하에 있다.
“옆에 있는 놈 죽여.”
내 짧은 명령에 날아오던 충형 몬스터들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동족 간에 일어난 살육에 연신 붉은 피가 주르륵 흐르며 몬스터들이 바닥으로 툭툭 추락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배권이 23%로 하락합니다.』
지배권이 내려가며 다시 승기를 잡은 충형 몬스터들은 내 지배하에 있는 놈들을 합심해 죽이고는 인간들을 덮쳐 왔다.
그래도 시커멓게 몰려온 좀 전보다는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이 정도면 상대할 만했다.
내 옆을 지키듯 서 있는 주태윤과 천우현이 내게 오는 충형 몬스터들을 한발 먼저 죽여서 내가 굳이 그것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으어, 으어어……. 으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에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머리를 감싸 쥔 공대원 한 명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곧 그는 손톱으로 돌바닥을 벅벅벅 긁어 대더니 쥐고 있던 총으로 제 관자놀이를 겨눴다.
“총 뺏어!”
날카로운 지시에 동료들에게 총을 빼앗긴 그는 두어 명의 헌터의 부축을 받아 힐러와 후방으로 빠졌다. 힐이 연신 번쩍여도 비명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총을 뺏으니 이제는 숫제 온몸을 손톱으로 긁어 대며 자해를 하고 있었다. 저를 붙잡은 손을 괴력으로 떼어 낸 그가 힐러의 목을 졸랐다. 옆의 헌터들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모두가 충형 몬스터 때문에 정신없는 틈을 타 날뛰는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무언가가 그의 뇌 안에 들어앉아 그를 조종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마기가 뇌를 훑자 버티지 못한 벌레가 튀어나왔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몬스터인 건지 사람 뇌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도 사람에게는 외상 하나 입히지 않았다.
물론 마기는 충형 몬스터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치기에 환자는 검붉은 코피를 뚝뚝 흘리며 바닥에 구토했다.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 보아하니 벌레가 들어갔다 나온 후유증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공대원들의 합심에 충형 몬스터의 수는 전멸 직전까지 꽤 많이 줄어들었다. 방금의 환자와 똑같은 증세를 보이는 이들에게 똑같은 처치를 해 주고 남은 벌레들을 지배해 완전히 몰살시켰다.
그렇게 불쑥불쑥 덮쳐 오는 고목과 뻗쳐 오는 넝쿨을 죽이며 던전 안쪽으로 들어간 우리를 반긴 건…….
“보스룸 입구가 두 갠데요?”
두 개의 입구였다.
난 이렇게 되어 있는 던전을 본 적 있었다. 직접 들어가서 클리어까지 하고 빠져나왔다. 바로 연수원의 E급 게이트에서.
그때 입구 하나는 B급 게이트였다. 이름하여 이중 던전.
안쪽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입구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선택한 곳이 보스룸일 확률은 2분의 1.
“절반씩 들어가면 되겠네.”
짝짝, 박수를 쳐 시선을 끈 진세빈이 해결책을 던지는 양 말했다. 그 말에 같이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 몇몇 이들이 진세빈에게서 슬그머니 떨어졌다.
나도 절대 진세빈이랑 같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 건 상식이었다.
‘절반씩이면 분명 천우현과 주태윤을 떨어뜨려 놓을 텐데.’
두 S급이 같은 입구로 들어갈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소수 공략도 아닌데.
그때처럼 S급 게이트로 변환시킬 거라 믿은 내 착오였다. 이중 던전을 파 놓을 줄이야.
초조한 얼굴로 어떻게 주태윤과 천우현을 같은 입구로 들어가게 만들 것인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 공대원들은 착착 자신이 들어가고 싶은 입구를 선택해 그 앞에 섰다.
“채현 씨?”
나를 부르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확히 반씩 나뉘어 있는 인원들. 그리고 내 쪽에 있는 진세빈과 주태윤과… 천우현?
내 옆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천우현의 걱정 어린 눈길에 눈썹을 치켰다.
S급 두 명이 여기에 전부 몰려 있는데 아무도 이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옆쪽 입구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내가 서 있는 입구 앞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세빈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히죽 웃었다. 직감이 왔다. 저놈의 짓이라는 직감이.
놈의 힘과 내 힘이 비슷하다고 전제한다면 이 상황이 설명되었다. 내 힘은 이곳에 있는 이들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전멸시킬 수도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정신을 건드리는 건 진세빈의 입장에서 별일도 아니겠지.
역시 위험하다. 저놈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주먹을 꾹 말아쥐며 생각했다.
“그럼 들어가죠. 만약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즉시 도움을 요청해 주십시오.”
다른 입구의 맨 앞에 서 있는 이에게 당부한 주태윤이 먼저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입구 안으로 발을 디디자 이제는 그닥 놀랍지도 않은 상태창이 떴다.
『S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빼곡하게 음각된 벽과 붉은색을 띠는 돌 제단. 둥근 돔 형태의 천장과 짙은 갈색으로 얼룩진 정사각형 바닥. 벽에 걸린 역삼각형의 램프에서 푸른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S급 게이트라는 알림에 나가려고 시도하는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연수원의 B급 게이트와 마찬가지로 클리어를 해야지만 다시 게이트가 열리는 형태인 듯 게이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경계를 한껏 세운 채로 게이트가 있던 곳 앞에 멈춰 선 사람들을 지나쳐 지나치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진세빈이 걸어 나왔다.
“인생은 운이 90%를 결정하지. 사람의 삶에서 노력은 겨우 10%를 차지할 뿐이야.”
제단에 턱 걸터앉은 진세빈이 턱을 괴며 S급 게이트에 들어온 공대원들을 쭉 훑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나 궁금해하는 표정이네. 옆의 입구로 간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 줄까?”
그의 손짓에 흐릿한 영상이 영화 스크린처럼 우리의 앞에 펼쳐졌다.
- 뭐야? 우리 그냥 밖으로 나온 거야?
- 옆쪽이 보스룸이고 우리 쪽이 출구 게이트였나 봐요.
- 다시 들어가서 보스룸에 합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 뭐야, 게이트 안 들어가지잖아?
던전 밖으로 나와 우리가 들어간 A급 게이트 앞에서 웅성거리는 스물여섯 명의 헌터들. 곧 영상은 픽 사라졌다.
“그럼 이곳이…….”
공략대 일행 중 한 명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곳이 보스룸이 아닌 출구 게이트라면 바로 이곳이 보스룸이겠지. 이중 던전이 아니라.
S급 게이트를 보스룸으로 파 놓았다니. 역시 미친놈.
“보스룸 ■■■■의 사원에 온 걸 환영해.”
팔을 넓게 벌린 진세빈이 나른한 목소리로 환영사를 내뱉었다. 동시에 허공을 찢고 나온 촉수가 사람들을 향해 뻗어졌다.
레벨레이션 한국 지부에서 메모리테이크를 통해 보았던 바로 그 촉수였다.
『스킬 ‘대규모 순간 이동(SS)’을 발동합니다.』
촉수가 공대원들의 몸에 닿기 전에 대규모 순간 이동을 발동한 순간.
『스킬 ‘대규모 순간 이동(SS)’이 무효화되었습니다.』
컥! 마력이 역류했다. 내상에 울컥 올라오는 피를 뱉어 내자 진세빈이 소리 내어 웃으며 지휘하듯 손을 휘저었다.
“멍청이 아니야? 여기는 내 공간이라고!”
진세빈의 손짓에 따라 움직인 촉수가 공대원들의 몸을 찢어발겼다. 천우현이 뛰어들어 촉수를 도륙 냈지만 빌어먹을 촉수는 하나를 죽이면 두 개가 공간을 찢고 나왔다.
‘젠장, 마기를 못 쓰게 제약을 걸어 놨어.’
외신 ■■■■의 사원. ■■■■의 힘을 쓰는 진세빈.
저 빌어먹을 놈은 나와 저가 같은 급인 걸 이용해 내게 영역 침범의 페널티를 적용했다.
이를 악문 주태윤이 진세빈에게로 달려들었다. 진세빈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챈 주태윤은 처절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당장 그만둬, 이 미친 새끼야!”
“왜, 저들이 불쌍해?”
진세빈이 팔을 들어 올려 주태윤의 볼을 툭툭, 쳤다.
“불쌍해하지 마. 형은 저것보다 더 끔찍하게 죽을 텐데 누가 누굴 동정해.”
촤악, 공간이 찢어졌다. 심연이 유일한 생존자인 나와 천우현, 그리고 주태윤을 끌어들였다.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다가 진세빈이랑 눈이 마주하자 혀로 할짝 입술을 훑은 그가 눈을 휘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부디 그곳에서 끔찍한 절망과 비탄과 고통과 공포를 느끼기 바라.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절은 제물이 제일 맛있거든.”
엿이나 먹어. 양손의 중지를 곱게 치켜드는 걸 마지막으로 난 심연 안에 빨려 들어갔다.
* * *
천우현은 가만히 제 앞에 펼쳐진 풍경을 응시했다.
그들이 도달해야 하는 마왕성은 몇 걸음만 더 가면 닿을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많고 많은 회귀를 거쳐 드디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 조금만 더 가면 다다를 수 있는데…….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마수들. 필사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옛 동료들. 제 손에 들린 성검은 원래 색깔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마수의 피에 푹 절어 있었다.
“용사, 우리가 시간을 끌 테니 어서 마왕성으로 들어가라!”
활시위를 당긴 하이엘프, 이르킨이 외쳤다. 아마 고향에 두고 온 서로의 여동생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던가.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그러니 우현 님은 천신께서 내려 주신 임무를 완수하세요.”
파티의 유일한 여성이자 천신을 모시는 성녀, 세레나가 그를 향해 각오가 서린 눈으로 웃었다. 수많은 회귀의 나날에서도 꾸준히 그에게 마음을 고백해 온 여자가.
“이 정도쯤이야 당연히 막을 수 있죠. 이 정도도 못 막으면 6서클의 이름이 울죠.”
파티의 마법사, 엔리카가 애써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마법사 부심이 유난히 강해 자주 으스댔지만 밉지는 않았던 녀석이었다.
“이런, 유언이라도 남겨야 하나?”
사건이 벌어진 마을에서 만나 재미있겠다며 용사 파티에 제멋대로 합류한 암살자, 류인이 피식 웃으며 단검을 고쳐 쥐었다.
“멍청하게 서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가라고!”
언제나 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시비를 걸어오던 검사, 레이먼드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는 그저 회귀라는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권능 하나만을 받고 용사 파티에 내던져진 저의 자발적 검술 스승이기도 했다.
등을 믿고 맡겼던 동료들을 뒤로한 채 천우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달렸다. 그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천신이 내린 위대하고 신성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마왕을 죽이고 이 빌어먹을 회귀의 저주에서 벗어나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게 달려드는 마수와 마족들을 성검으로 베어 나가며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마왕성의 성문 앞에 다다른 그의 머리 위를 새까만 까마귀가 빙빙 맴돌았다. 쩍 벌린 부리에서 까악거리는 새 울음소리 대신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왕을 죽이러 왔구나. 그런데 어쩌나.”
날개로 그의 얼굴을 툭툭, 치던 까마귀가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기억났다. 몇 회차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은,
“마왕은 지금 성에 없단다, 천신의 종아. 7마계와의 전쟁을 마무리 지으러 7마계로 떠났지.”
천우현이 처음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회귀를 선택한 회차였다. 그가 파티가 아닌 단독 여정을 고집하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무한 회귀라는 권능을 받았을 때 그가 다짐했던 건 ‘절대로 자살하지 말자.’였다. 자살이 익숙해지면 계속해서 게임을 리셋하듯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걸 알기에.
그러면 회귀의 권능이 사라지고 지구로 돌아갔을 때 습관이 남아 삶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번 회차는 그 결심마저 무너뜨릴 정도로 끔찍했다. 까마귀를 털어 낸 그는 몸을 돌려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이미 결과를 알았지만 그쪽으로 향하는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동료들. 수습하기도 힘들 정도로 처참하고 너덜너덜한 시체들. 머리를 박고 시체를 뜯어먹고 있던 마물은 천우현의 검에 두 동강 나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성검을 피에 젖은 흙바닥 깊숙이 박아 넣은 천우현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마왕은 죽이지 못했습니다. 같은 고향 사람에 제가 죽이기에는 너무 강한 사람이었거든요.”
동료들의 시체 앞에서 그는 고해성사하듯 가슴속의 말을 털어놓았다. 이다음 회차부터는 그가 단독 여정을 고집한 터라 그들과 동료로 맺어진 인연은 이번 회차가 마지막이었다.
회귀 3N회차의 그들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걸 알지만 그들의 희생까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좋아하게 되어 버려서…….”
중얼거리던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동료들의 시체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 진세빈이 언급했던 절망과 비탄, 고통과 공포. 그런 감정보다는…….
“제대로 된 작별 인사 하나 하지 못한 미련이겠죠.”
어떻게 이곳을 벗어나야 할지는 그도 몰랐다. 길고 긴 3N번의 회귀를 모두 겪어야 할 수도 있고, 제가 제 손으로 버린 이 회차의 끝을 봐야 할 수도 있겠지.
채 감지 못한 동료들의 눈을 감겨준 그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고마웠습니다, 다들. 그러니 이제는 행복하게 살아 주세요.”
하지만 그 방법이 무엇이든 천우현은 두렵지 않았다. 마침내 오랜 미련과 후회를 털어 냈으니.
* * *
까악, 까악―!
까마귀가 울었다.
“야, 지겹다, 지겨워. 좀 색다른 것 좀 가져와 봐라.”
내 밑에 깔린 전대 마왕 이포스를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피, 땀, 눈물도 아닌 절망, 비탄, 고통, 공포 이 지랄을 하기에 얼마나 끔찍한 기억을 가져올까 했더니 마계 입갤 첫날?
이 장면은 최근에 질리도록 꿈으로 꿔서 이제 별 감흥도 없었다. 크라토스 받을 때의 고통도 이제 따끔할 정도?
태평하게 하품까지 하니 공기가 부르르 떨리더니 배경이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컥! 커헉!”
기르카스가 보낸 암살자가 나를 습격했을 때였다. 목을 조르는 손에 숨통이 막혀 컥컥대며 몸부림치자 암살자가 내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머리에 가해지는 고통에 잠시 눈앞이 멍해졌다. 유유히 단도를 꺼낸 놈이 내 가슴팍에 검을 얕게 찔러 넣고는 검끝으로 쭉 그었다. 검끝이 파고든 곳이 미친 듯이 욱신거렸다.
그러니까 이 암살자 놈은 내 몸을 (이하 생략)해서 심장을, 정확히는 크라토스를 꺼내려는 거였다.
산 채로 살가죽이 (이하 생략)되는 건 유쾌한 기분은 아니지. 정확히는…….
“이 미친놈이!”
기분 더럽지. 목을 조르는 손의 손목뼈를 으스러뜨리고는 머리로 놈의 얼굴을 힘껏 박았다.
코뼈가 뭉개진 놈이 코피가 뚝뚝 흐르는 코를 손으로 막은 채 뒤로 물러나고, 나는 검이 꽂힌 상처를 꾹 지혈하며 몸을 일으켰다.
소란스러움에 기절해 있던 세이블과 애쉬가 느릿하게 깨어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마족에게만 드는 수면초를 태웠단다. 그래서 내가 기척에 바로 깨어날 수 있었던 거고.
그래 봤자 이 당시는 쪼랩이라 깨어나도 별 대응을 못 했지만. 세이블의 손아귀에 잡힌 암살자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바로 내 눈앞에서.
눈앞에서 펼쳐진 고어에 큰 충격을 받고 며칠간 밥도 제대로 못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했다. 지금이야 이 광경을 보면서 치킨도 뜯겠지만 마계로 떨어진 초반의 나는 비위도 약하고 멘탈도 약했다.
“폐하, 괜찮으세요?”
후다닥 달려온 애쉬가 나를 살폈다. 칼에 찔리고 베인 건 난데 제가 베인 것마냥 허둥지둥했다.
“난 안 죽어. 집으로 돌아가야 하거든.”
입버릇이 되어버린 문장을 중얼거리며 픽 웃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 허리춤밖에 오지 않아서 귀여웠는데 지금은 너무 커 버린 거 아니야?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피에 흠뻑 젖은 손에 슬그머니 손을 거뒀다.
신음 소리 한 번 안 내는 내 모습에 다시 공간이 일렁이며 전환되었다.
“어른들이 여기는 위험하니까 오면 안 되는 곳이랬어요! 얼른 같이 나가요.”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헛웃음을 지었다. 맞아, 이 기억도 있었지. 며칠을 앓게 만든 기억이.
“꼬마 너, 길 잃었지?”
“아니거든요? 저 혼자 갈 수 있거든요? 이씨, 생각해서 말해 주니까!”
그때와 똑같은 질문, 똑같은 대답. 아마 이틀 후, 마계 경계의 숲을 헤매다가 시체가 된 아이를 발견했었지.
내가 만약 이번에 이 인간 아이를 숲 바깥까지 데려다준다면 결말이 바뀔까? 내 죄책감을 덜 수 있을까?
씩씩대더니 몸을 돌려 쏜살같이 뛰어가는 아이의 뒤를 쫓았다. 갑자기 불쑥 나타난 마수가 아이의 머리를 덥석 물었지만 능력은 제약이라도 걸린 듯 나오지를 않았다.
나는 그대로 서서 아이가 마수의 이빨에 갈기갈기 찢기는 광경을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죄책감을 던답시고 따라갔지만 우습게도 당시 시체를 보자 가슴을 후벼팠던 죄책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난 대체 무엇이 된 걸까.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숲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어느 기억을 들이밀든 내 반응이 지나치게 덤덤해서인지 배경은 계속해서 바뀌고 바뀌었다.
절벽 아래로 추락하였지만 마수 시체 위에 떨어져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일, 믿었던 측근에게 배신당하고 사지에서 겨우 살아남아 돌아온 일, 전쟁에서 습격당해 막사에 남은 최측근 열 명으로 2천 병력을 돌파한 일.
다시 마주하고 겪으니 빌어먹게도 엿 같았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질지언정 공포와 비탄, 절망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내 인생의 마지막 시련이었던 마계 대전의 끝.
단검 손잡이를 단단히 잡으며 저주와도 같은 예언을 쏟아부은 7마계 마왕을 향해 몸을 굽혔다.
심장에 막 단검을 박으려는 순간, 7마계 마왕이 내 귀에 속삭였다.
“떠나 봤자 넌 반드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거다.”
이놈이 이런 말을 했던가……? 내가 기억에서 지운 건지, 아니면 진세빈의 장난질인지 모를 마지막 말에 혼란을 느끼며 심장에 단도를 푹 꽂아 넣었다.
쩌적, 동시에 공간에 금이 갔다.
“끔찍한 기억에 가둬 놓으려고 한 모양인데 순순히 갇혀 주기엔 내 레벨이 너무 높아서.”
빈정거림을 끝으로 챙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공간이 조각조각 터져 나갔다. 유리처럼 산산조각 난 공간의 뒤에 또 공간이 있었다.
평생 벌어도 못 살 것 같은 넓고 화려한 대저택이었다. 꼭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집 저택 같았다.
내가 깨진 공간을 벗어나자 지우개로 지워지듯 마계의 배경이 스르륵 지워지고는 대저택이 새로운 공간으로 덧씌워졌다.
휙휙 저택을 구경하기도 잠시, 저택의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의 이름을 의문을 담아 중얼거렸다.
“…주태윤?”
* * *
주태윤은 제 앞에 서 있는 이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인사하렴, 오늘부터 같이 지낼 너희 이종사촌 동생이란다. 세빈아, 너도 형들에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진세빈.
옆에 서 있는 그의 형들 역시 중학생, 많아 봤자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분명 저는 스물일곱이고 형들은 서른을 훌쩍 넘겼을 텐데. 혼란스러움에 그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게 무슨……?’
어린 진세빈이 저를 보며 씩 웃었다. 그 웃음에 그는 깨달았다.
제 앞에 있는 저 소년이 바로 제 악몽의 시작이자 근원임을.
동시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넌 형이 되어서 어쩜 이렇게 이기적이니! 동생을 잘 챙겨 주라는 말이 그렇게 어렵니?”
점차 초점이 돌아오는 눈으로 앞을 보자 날카로운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어머니와 어머니가 보호하듯 끌어안은 진세빈이 눈에 들어왔다.
저를 보며 실실 웃던 진세빈이 애교 있는 목소리로 어머니를 달랬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모.”
익숙했다. 분명 진세빈이 제 험담을 했거나 그의 잘못을 교묘하게 저에게 덮어씌웠겠지.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현실의 자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묵묵히 어머니의 독설을 감내했지만 환상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모가 아니라 어머니겠지.”
충동적으로 뱉은 빈정거림에 짜악―! 큰 소리와 함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맞은 뺨이 얼얼했다.
“네가 기어이 이 어미의 치부를 들춰? 하여간 네 아비를 똑 닮았구나!”
이건 언제 들은 말이더라?
“네 어머니가 불륜으로 낳아 놓고는 내 죽은 전 부인, 그러니까 네 이모에게 떠넘긴 그 악마 새끼 말이다.”
맞다, 진세빈의 양부가 제게 접근하여 돈을 요구하며 했던 말을 전하자 어머니가…….
이곳은 환상이다. 제 끔찍한 기억들만 모아 놓은 환상 속이라고. 속으로 되뇌며 화끈거리는 볼을 꾹 누른 주태윤은 짓씹듯이 항상 하고 싶던 말을 내뱉었다.
“사생아 새끼 주제에.”
“그래, 난 사생아가 맞아. 하지만 어머니가 미안해하고 사랑하는 건 나지. 정식 혼인 관계로 태어난 형이 아닌 어머니의 불륜으로 태어난 나.”
앳된 얼굴을 하고는 어깨를 으쓱한 진세빈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런데 친모에게도 친부에게도, 심지어 친형제들에게까지도 외면받는 형 인생은 사생아보다 더 형편없는 거 아니야?”
두 동복형제가 주고받는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있음에도 주태윤을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진세빈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자 진세빈의 얼굴이 오래전 절연한 친구의 얼굴로 변했다.
“좀 실망이다, 태윤아. 너 이런 놈인 줄 몰랐는데. 네 사촌 동생이 다 말해 줬으니까 모른 척하지 말고.”
“선배, 세빈이에게 왜 그래요? 애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미안, 헤어지자. 나 다른 사람 생겼어.”
“와, 주태윤 그 자식, 그렇게 안 봤는데. 야, 세빈이가 보살이네, 보살.”
저를 잘 따르던 후배, 전 여자 친구, 또 다른 친구, 학교 동창…….
휙휙 계속해서 바뀌는 얼굴과 배경.
울렁거리는 속에 입을 틀어막은 주태윤은 멱살을 쥔 손을 놓고 비척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건 환상이야. 빌어먹을 환상 속이라고.”
“불쌍한 태윤 형.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
진세빈이 속살거렸다. 어느새 다시 배경은 대저택 안이었다. 안쓰럽다는 얼굴을 하고는 주태윤의 어깨를 토닥거린 진세빈이 속삭였다.
“정신 차려, 형. 여긴 현실이야. 현실을 마주해.”
웃기지 마. 현실일 리가 없잖아.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는 고개를 들자 방으로 들어가던 큰형이 그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 하다 하다 이제 정신병까지 왔나.”
“내버려 둬, 형. 괜히 가족들 관심 끌려고 저러는 거잖아. 우리가 막내라고 너무 오냐오냐 키웠지.”
옆에서 계단을 올라가던 작은형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형들 동생은 나잖아. 왜 믿어 주지도 않고 외면하는 건데.
정말 이곳이 현실인가?
“맞아, 현실은 현실이지.”
우습게도 지금까지 제가 이 환상에 휘말려 들은 말과 본 장면 중 허상은 단 하나도 없었다. 허탈하게 웃은 주태윤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주태윤?”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는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평소보다 커진 검은색 눈동자가 온전히 저를 담고 있었다.
이채현의 눈동자에 담긴 걱정의 빛에 주태윤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저를 걱정해 주는 이가 하나는 있구나.
* * *
완전히 무너져 내린 주태윤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글렀다, 글렀어.
여기에서 빠져나가려면 과거를 극복하거나 무시하는 게 조건 같은데, 저 얼굴은 아무리 봐도 멘탈이 완전히 나간 표정이다.
에휴, 걱정이다. 저걸 어떻게 정신 차리게 만들어서 빠져나가냐.
이제까지 보아 왔던 가성비 구원 서사 로판들을 떠올렸다. 휴대폰을 꺼내 그대로 e북 속 여주의 대사를 읊어 주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그럴 분위기가 아니기에 그 마음은 곱게 접었다.
그러니까… 일단 남주가 고해성사를 하게 만들었지. 자기 배경이든 출생의 비밀이든 자기 잘못이든.
아무튼 묻지도 않은 TMI를 줄줄 내뱉는 남주의 앞에서 여주는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해 줄 법한 따스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남주는 여주의 그 한 마디에 큰 감동을 받는다.
그러면 이렇게 가성비 구원 서사 완성!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씁쓸하게 웃은 주태윤이 물었다.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듣긴 뭘 들어요. 방금 왔는데.”
“…다행이네요.”
첫 번째부터 문제가 생겼다. 주태윤이 입을 안 열었다. 속사정 좔좔 읊으면 고개 끄덕이면서 다정하게 많이 힘들었겠다~ 한마디 해 주려던 내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얼른 말하라고!
입을 꾹 다물고 다시 고개를 숙인 주태윤을 발끝으로 툭툭, 친 진세빈이 히죽거렸다.
“왜, 형. 어서 말해야지. 어머니가 불륜으로 낳은 사생아 괴롭히다가 형 입지가 엄청 좁아진 거.”
주태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막장 아침 드라마급 내용에 입을 떡 벌렸다. 재벌가 클래스 보소. 그런데 아무리 곱씹어 봐도 이상한데.
“주태윤 씨가 그쪽을 괴롭혔다고요? 반대가 아니고?”
“음, 설마 이채현 씨는 태윤 형이 착하고 무결한 피해자라고 생각해요?”
“그건 아니지만 일단 댁이 순순히 괴롭힘당하고 있었을 리가 없잖아. 구라 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건 알죠? 메모리테이크로 기억 한번 털어 줘?”
건들거리며 말하자 눈가를 꿈틀한 진세빈이 순순히 손을 들었다.
“난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태윤 형에게 직접 들어요. 물론 형이 말할지는 모르겠지마안.”
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인 진세빈이 키득거렸다. 그러고는 스르륵 자취를 감췄다. 남은 건 오직 나와 주태윤, 단둘뿐이었다.
가성비 구원은 아무래도 그른 거 같다. 이 공간에서 벗어날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더 빠를 듯.
천우현을 불러올까. 다정한 미소 앞에 무장해제되어 망할 500년 마계 일대기를 줄줄 털어놓았던 내 과거가 떠올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천우현도 지금 이런 공간에 갇혀서 PTSD 체험하고 있는 거 아니야? 3N번 회귀는 좀 위험한데.
“안 물어보십니까?”
대저택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공간의 틈을 찾다가 주태윤의 물음에 볼을 긁적이며 솔직하게 대꾸했다.
“굳이 듣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은데요.”
남의 집안 사정 들어 봤자 어디에다가 써. 그리고 만약 주태윤이 진세빈을 괴롭혔다고 해도 내 알 바? 나는 주태윤보다 진세빈이 더 싫거든.
“제가 열두 살 때였으니 15년 전의 이야기―”
“찾았다!”
드디어 공간의 틈을 발견한 나는 곧바로 전격을 날렸다. 금이 간 공간이 우수수 무너져 내리며 다시 제단이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차게 식은 시체들을 둘러보다가 주태윤이 무어라 말 한 걸 들은 것 같아 슬쩍 물었다.
“그런데 방금 무슨 말 했어요?”
“…아닙니다.”
주태윤이 왜인지 허탈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진세빈은 제단 위에 걸터앉아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용케 빠져나왔네요? 그런데 아쉽지만 한 명은―”
바로 그 순간 쨍그랑, 유리 깨지는 듯한 파열음이 들리며 허공이 무너져 내리더니 땀에 젖은 천우현이 등장했다. 진세빈의 얼굴에서 미소가 싸악 사라졌다.
나이스 타이밍.
나와 천우현을 가로막듯 그 앞에 선 주태윤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 둘은 보내 줘.”
하, 진세빈이 날카로운 헛웃음을 내뱉었다. 턱을 괴느라 굽히고 있던 허리를 천천히 편 진세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라는 거야, 형. 내가 왜 굳이 귀찮게 사원까지 지구에 불러냈는데.”
놈의 홍채에 잠시간 붉은 기가 스쳐 지나갔다.
“형을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마왕님을 죽이는 건 좀 힘들거든. 공평한 조건으로 붙었다고 가정했을 때 잘하면 동귀어진?”
“마왕님……?”
저 망할 새끼가 뭐라 했냐. 주태윤이 중얼거린 호칭에 입꼬리를 찢어 웃은 진세빈이 아주 친절하게도 설명을 덧붙였다.
“형이 호감 가진 이채현 씨가 귀환자라고. 나와 똑같은 귀환자.”
“야, 이 개X끼야!”
“채현 씨, 참아요! 도발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진세빈에게로 튀어 나가려는 내 허리를 붙잡은 천우현이 나를 만류했다. 씩씩거리며 온갖 욕설을 쏟아부었다. 네가 뭔데 귀밍아웃에 마밍아웃까지 일타이피로 하는데?
“그렇게 됐네요. 혹시 서운한 건 아니죠? 막말로 우리가 제일 민감한 비밀 나눌 만한 사이도 아니고.”
“귀환자란 걸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마왕…….”
추측하고 있었다니. 역시 그때 바실리스크에게 메테오를 날리면 안 됐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주태윤을 보며 한숨 놓았다. 그래도 내가 귀환자인 건 스무스하게 받아들인 모양이군.
“어떻게 돌아온 거지?”
예의상 해 주던 존대도 집어치우고 진세빈에게 질문하자 돔 모양의 천장을 올려다본 진세빈이 팔을 넓게 벌리며 낄낄거렸다.
“뭐, 죽기 전에 궁금증 해소하고 가라고 말해 줄게요. 제물로 나 자신을 바쳤죠. 난 어떻게든 주태윤을 죽이러 지구로 돌아와야 했거든.”
그러니까 외신에게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 돌아왔다는 소리지? 별 미친놈 다 봤네. 물음표로 떡칠된 상태창도 신과 융합한 상태라 초월자의 격으로 읽지 못했기에 그런 상태로 뜬 건가.
“하나만 묻자.”
주태윤의 딱딱한 말에 진세빈이 고개를 까딱했다.
“왜 그렇게 나를 싫어했어? 왜 그렇게 나를 고립시키려고 안달이었는데?”
역시 자기가 쓰레기 짓 해 놓고 주태윤에게 덮어씌운 거 맞잖아. 말하다 보니 울컥한 듯 감정이 담긴 주태윤의 물음에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한 진세빈이 태평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이모에게 떠넘겨져서 X같이 살았는데 나랑 비슷한 나이인 형은 본남편 자식으로 태어나서 다 가졌잖아.”
“그러니까 왜 나냐고.”
“그럼 내가 나랑 열 살 차이 나는 태경 형을 건드리고 고립시켜, 일곱 살 차이 나는 태성 형을 고립시켜?”
설마 그게 이유의 전부야? 그냥 제일 만만해서? 그 대답에 주태윤의 얼굴 역시 일그러졌다.
“와, 전형적인 강약약강 쓰레기.”
“확실히 정당한 이유는 아니군요.”
우리의 수군거림에 눈살을 찌푸린 진세빈이 아우터 갓의 진명을 발음했다.
“아자토스.”
공허이자 태초의 혼돈이자 모든 것의 기원이자 우주 그 자체. 크툴루의 아우터 갓이 부름에 공간을 찢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사다 흐글라께서 제물을 받기 위해 나오셨네. 자발적으로 제물이 되면 자비를 베푸셔서 덜 고통스러울 거라고 충고하지.”
“아자토스라며. 뭔 놈의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여러 개냐?”
“여전히 입을 나불거리는 걸 보면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어.”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위압감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치 밀려오는 해일 앞의 개미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 천우현과 주태윤은 해일 앞의 모래알이 된 기분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사다 흐글라와 사원을 메우는 촉수에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천우현에게 지시했다.
“우현 씨, 주태윤 씨 데리고 휘말리지 않게 뒤로 물러나 있어요.”
“채현 씨 홀로 싸우게 둘 수는 없습니다.”
“저거랑 어떻게 붙어요.”
퍼존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곳은 곧 신의 영역. 아직 신에 도달하려면 한참 모자란 초월자의 격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나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에 도박을 걸 생각이 없었다.
확실한 루트가 있는데 왜 도박을 걸어?
승리를 확신한 듯 오만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진세빈을 향해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격투기도 같은 체급끼리 붙는 거 몰라?”
“착각하는 것 같은데 이건 스포츠가 아니야.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지.”
“쌈박질도 스포츠라고 치자고.”
나는 쓸 일이 없을 거라고 확신했던 카드 패를 뽑아 들었다.
『칭호 ‘아이루스의 대리자’의 권한을 발동합니다.』
『마신을 소환합니다. (2/3)』
검붉은 빛이 뭉치며 서서히 인영을 만들어 갔다. 마침내 완전히 소환된 마신 아이루스가 흘러내린 긴 백금발을 정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전에는 좁은 창고, 이번에는 타 신의 사원. 장소 선정을 잘 해 보는 게 어떤가, 마계의 대군주?”
“그렇게 부르지 좀 마쇼.”
질색하며 대꾸하니 불경하다고 혀를 찬 마신은 사원을 쭉 둘러보더니 반쯤 모습을 드러낸 사다 흐글라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굳이 내가 신을 상대할 필요는 없지. 신은 신끼리, EX급은 EX급끼리.
“명색이 초월자 배출한 차원의 신인데 이길 수 있죠?”
“당연한 소리를.”
피식 웃은 마신이 사다 흐글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휘둘리는 촉수에 빗맞은 벽이 소멸하는 걸 보자 걱정이 들었다.
마신 걱정은 아니고 우리가 휘말리면 저렇게 소멸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기왕이면 안 휘말리게 저쪽으로 가서 싸워 주시죠.”
“신에게 시키는 것도 많군. 불경한 놈 같으니.”
투덜거린 마신이 손을 휘젓자 공간이 분리되었다. 신들의 전쟁터와 초월자들의 전쟁터 필드로. 휘말리면 소멸 확정인 신들의 살 떨리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초월자들의 전투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신의 대리자와 신의 제물, 이 두 초월자의 전투가.
그럼 나는 필드 좀 넓혀 볼까?
『스킬 ‘신의 지각(L)’을 실행합니다.』
『차원 #SF105-2를 구현화합니다.』
『영역을 융합&확장합니다.』
구현화된 마계가 진세빈이 불러낸 크툴루 행성의 땅과 융합되어 넓게 펼쳐졌다.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온전한 진세빈의 영역에서 나와 진세빈의 지분이 반반씩 들어간 영역으로 바뀌었다.
숨을 들이마시니 익숙한 마계의 공기가 느껴졌다. 가볍게 불어온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지나갔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진세빈을 향해 씩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이래야지 페어플레이지.”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게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진세빈이 발을 쾅, 굴렸다.
『영역 침범 시도가 감지되었습니다.』
『지분이 47%로 감소됩니다.』
『지분이 51%로 증가합니다.』
영역 지분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물밑 싸움에서 밀려난 건 진세빈이었다.
“신의 힘은 너만 끌어 쓸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내 비웃음에 진세빈이 까득, 이를 갈았다. 진세빈 등 뒤의 공간이 일렁이며 사원까지 오는 길에 상대했던 충형류 몬스터 떼가 차원의 구멍에서 쏟아져 나왔다.
시커멓게 몰려나온 그 징그러운 벌레 떼는 나를 그대로 지나쳐 천우현과 주태윤에게로 덮쳐들었다.
몸을 돌리려는 순간, 걸터앉아 있던 제단에서 몸을 일으킨 진세빈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넌 무슨 대가를 치렀어?”
“뭐?”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자 공간을 찢고 나온 촉수들이 바닥을 뒤덮으며 몸집을 키워 가더니 일제히 나를 향해 몸체를 세웠다.
“나는 신의 힘을 쓰기 위해 내 존재를 걸었는데, 너는 뭘 걸었냐고.”
새카만 홍채가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눈에서 나는 의도치 않게 과거의 기억을 읽었다.
샤가이의 곤충들에게 고문받으며 노예로 전락한 진세빈, 아자토스의 진명을 손에 넣은 진세빈, 스스로 제단에 올라간 진세빈.
그렇게 신의 제물이 되어 껍데기와 겨우 남긴 자아로 초월자에 등극한 진세빈.
딱히 동정은 가지 않았다. 내가 겪은 고난의 10분의 1도 채 겪지 않은 채 진명을 손에 넣고 제물이 되어 아자토스를 받아들이고는 샤가이의 곤충들을 짓밟는 모습은 우습기까지 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다. 너는 신의 진명을 손에 넣고 판도를 뒤집었는데, 왜 나는 처음부터 크라토스를 받고도 길고 긴 고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는지.
나를 향해 고개를 꼿꼿이 세운 촉수들이 한꺼번에 나를 덮쳐 왔다.
“뭘 걸었긴.”
발밑에서 그림자처럼 맴돌다가 확 일어난 마기에 촉수들이 모조리 터져 나갔다. 진세빈이 불러낸 요충 떼는 내게 닿기도 전에 블랙홀에 모조리 흡수되어 사라졌다.
내가 불러낸 그 블랙홀이 꿈틀거리며 어둠으로 화해 내 쪽으로 뻗어 오자 콰앙―! 진세빈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진 벼락이 바닥을 태웠다.
“내 인생을 걸었지.”
귀농한 선대 마왕의 경우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선택지가 존재했었다. 하지만 난 귀환을 위해 그 선택지를 외면하고 마신을 불러내는 것에 내 인생을 바쳤다.
“그리고 뭘 착각하는 거 같은데, 나는 신의 힘을 바란 적도 없었어. 그냥 집으로 돌아오는 걸 바랐을 뿐이지.”
그 말이 대체 무슨 스위치를 건드린 건지 진세빈이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이제까지 해 왔던 건 어린애 장난으로 느껴질 정도의 공격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내 뒤의 두 남자는 샤가이의 곤충들을 상대하느라 바빴고, 마신은 사다 흐글라를 상대하느라 바빴다.
능력을 최대치까지 끌어 쓰는 건 7마계와의 전쟁 이후로 처음이었다. 만약 이곳이 온전한 진세빈의 영역이었다면 밀리는 건 나였으리라.
촉수와 마기가 치열하게 맞붙고 온갖 스킬이 서로를 향해 쏟아지며 서로의 스킬을 밀어냈다. 주변 공기가 묵직해졌다.
콰앙―!
내 스킬을 정면으로 맞고는 벽으로 날아간 진세빈의 몸 앞으로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시야가 가려진 그 순간, 언제 다가온 건지 코앞까지 달려온 진세빈이 내 멱살을 잡고 벽에 힘껏 던졌다. 단단한 벽에 등이 세차게 부딪혔다. 벽의 일부가 박살 나며 돌 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욱신거리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몸을 일으키자 저벅, 진세빈이 내게로 다가왔다.
“재미있는 거 하나 말해 줄까요?”
질 나쁜 미소를 얼굴에 걸친 놈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원래는 귀환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싹 죽이려 했어요.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채팅방을 파서 내 수고를 덜어 주신 마왕님에게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래서 귀환자 오픈 채팅방에 들어앉아 있었던 건가. 내가 했던 짓이 자칫하면 귀환자 연쇄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왜요, 설마 귀환자는 세상에 그쪽 하나여야 해서?”
“아니요, 카르마가 많이 쌓였을 테니까. 돌아오려고 발버둥 친 인간들이 선하게만 살았을 리가 없잖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천우현에게로 시선을 한 번 준 진세빈이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빛났다.
“그런데 태윤 형이 데려온 당신을 만났어.”
목을 긁는 속삭임이 고막에 꽂혔다.
“귀환자 수백 명이 쌓았을 카르마를 홀로 짊어진 당신을.”
진세빈의 눈이 샐쭉 휘었다. 주태윤과 똑 닮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황홀경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생각했지. 우리 태윤 형은 마지막까지 나를 즐겁게 해 주는구나.”
“별 미친 새끼 다 봤네.”
질색하며 명치를 힘껏 걷어차자 그대로 벽을 향해 밀려난 진세빈의 몸을 촉수가 휘감아 벽에 부딪히는 걸 막아 주었다.
동시에 메테오를 캐스팅하던 내게 사정없이 공격이 몰아쳤다. 내 발목을 감고 나를 들어 바닥으로 내던진 촉수에 속수무책으로 바닥에 나뒹굴며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스킬 ‘수르트의 화염(L)’을 실행합니다.』
급한 대로 캐스팅이 짧은 수르트의 화염을 불러일으키자 화르륵 일어난 불의 장벽이 촉수를 불태웠다. 화마의 한가운데에서 몸을 일으키며 여전히 촉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진세빈을 노려보았다.
카르마를 언급한 순간 놈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진세빈은 다른 차원의 침입자들을 게이트 바깥으로 나올 수 있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 X발. 던전 브레이크. 놈은 그나마 평화로웠던 순한 맛 헌터물을 끝내러 온 흑막이었다.
마침내 샤가이의 곤충 떼를 모두 해치운 천우현과 주태윤이 내게로 달려왔다. 몸을 감싼 촉수가 스르륵 풀리자 비틀거리며 몸을 바로 한 진세빈이 히죽 웃었다.
땅이 우르릉, 흔들렸다. 비등한 두 외신의 전투는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그걸 끝낼 수 있는 이는 오직 진세빈과 나, 둘 중 하나였다.
“아자토스는 공양의 대가를 주지 않아요. 지나간 자리는 오직 멸망과 파괴뿐이죠. 그런데 내가 어떻게 아자토스의 제물이 되고도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 알려 줄까요?”
팔을 넓게 벌린 진세빈은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혼자 킬킬거리며 답했다.
“이곳, 지구의 멸망을 약속했거든. 외신은 타 차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니 오직 그건 매개체인 나를 통해서만 가능하지.”
진세빈의 손짓에 주태윤이 멍한 눈을 한 채로 그에게로 걸어갔다. 꼭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마냥.
주태윤의 어깨에 손을 턱 얹은 진세빈이 그의 귀에 다 들리도록 속삭였다.
“형 앞에 있는 여자를 죽여.”
초점 없는 눈이 나를 향했다. 날카롭고도 화려하여 정신없는 공격이 쏟아졌다. 그리고 뒤를 덮쳐 오는 은밀한 공격 스킬.
주태윤의 전투 방식은 따지자면 화려함으로 시선을 뺏는 순간 이루어지는 음습한 기습이었다.
한마디로 사방을 경계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미간을 찡그리자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박장대소를 터트린 진세빈이 말했다.
“형이 그쪽을 죽이든 그쪽이 형을 죽이든, 어쨌든 한 명은 죽어야지 형에게 걸린 세뇌가 풀릴 거예요.”
“왜 굳이 주태윤을 내 손으로 죽이려고 하는지 모르겠네.”
쏟아지는 SS급 이상 스킬들을 실드로 막으며 투덜거렸다. 확실히 주태윤은 적으로 마주하니 성가셨다.
“보통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손으로 죽이려고 하지 않나?”
“저는 한 번도 제 손을 직접 더럽힌 적이 없어요. 먹잇감만 던져 주면 알아서 물어뜯어 줬지.”
옆에 있던 천우현과 눈을 마주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천우현이 주태윤을 막는 틈을 타 곧장 진세빈에게로 달려들었다.
진세빈을 죽이면 내가 쌓은 카르마를 버티지 못한 세상은 타 차원의 침략을 막지 못할 것이며…….
“당신은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이 되겠지.”
바로 제 코앞까지 온 내게 진세빈이 히죽 웃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관리자1의 말처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고,
“왜 내 탓이야. 세계를 망하게 만들겠다고 기어이 이 판을 짠 네 탓이지.”
악의는 내가 막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죄인이 되지 않겠다고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잖아?
내 말에 진세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세뇌를 푸는 법은 간단하다. 세뇌한 놈을 죽이면 된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먼저 손을 뻗는 자가 승자인 치킨 게임. 한 번의 망설임이 목숨을 결정짓는 순간에 진세빈의 말은 꽤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물론 그게 안 통하는 놈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는 게 놈의 유일한 패착이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땅굴 파고 들어가는 성격은 아니라서.
푸욱, 촉수가 내 심장이 있는 곳을 파고들었지만 날카로운 마기가 진세빈의 심장을 꿰뚫는 게 한 발 먼저였다.
심장 바로 앞에서 멈춘 촉수에 심장 옆에 있던 크라토스가 미친 듯이 박동했다. 무심한 손길로 살을 파고든 촉수를 떼어 내고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나와 다르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진세빈을 바라보았다.
진세빈의 몸은 마치 바닥에 떨어진 도자기 인형처럼 금이 가고 있었다. 뒤에서 들리던 시끄러운 소리가 뚝 멈췄다.
“이게 무슨……?”
당황한 주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뇌가 풀려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채현 씨!”
곧바로 내게로 달려온 천우현이 나를 부축하고는 상처 부위를 손으로 꾹 눌러 지혈했다. 다급한 손길로 S급 포션을 꺼내는 주태윤에게로 진세빈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흉측하게 금이 가 갈라진 몸을 보고 흠칫한 주태윤을 광기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진세빈이 그의 어깨를 잡고 세뇌하듯이 악에 받쳐 중얼거렸다.
“형은 나를 잊으면 안 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형은. 절대 날 잊으면 안 된다고. 알았어?”
그 모습은 필사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냥 내 손으로 죽일걸. 마지막으로 직접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진세빈의 몸이 산산조각 났다.
파스스, 그가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제물이 완전히 소멸하자 이 차원과의 연결고리가 사라진 사다 흐글라, 아니 아자토스 역시 자신의 우주로 자취를 감췄다.
세계의 실낱같은 평화에 종지점을 찍은 흑막치고는 허무한 최후였다.
* * *
한때 진세빈이었던 먼지가 바람을 타고 흩날려 사라지고, 방금까지 진세빈에게 어깨를 잡혀 있었던 주태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짚은 주태윤이 앓는 소리를 냈다.
잠시 뒤 고개를 든 그는 천우현에게 부축받고 있는 나와 천우현의 손 틈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내 피를 발견하고 경악하며 달려왔다.
손에 들린 S급 포션을 내민 그가 나를 살피며 다급히 물었다.
“채현 씨, 괜찮으십니까?”
포션을 원샷 하니 욱신거리던 상처가 아물어 가는 게 느껴졌다. 역시 S급 포션은 달라도 달랐다.
“사촌, 아니, 동복동생? 죽었는데 괜찮아요?”
“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주태윤이 되물었다.
“진세빈 죽었잖아요.”
“진세빈……? 그게 누구죠?”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에 확 소름이 끼쳐 왔다. 천우현의 표정 역시 심각한 게 아니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우현 씨도 기억 안 나요?”
“진세빈이라……. 역시 모르겠네요.”
나만 기억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나 역시 머리가 지끈거리며 두통이 일기 시작하더니 방금까지만 해도 선명했던 진세빈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그런 내 앞으로 마신이 다가왔다.
“소멸이지. 세계에서 존재가 지워진 거다. 존재를 건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거지.”
마신이 마계와의 융합을 거두자 공간이 다시 신이 없는 사원으로 변했다. 진세빈이 걸터앉아 있던 제단이 반으로 쩌억 갈라지더니 던전의 핵이 존재를 드러냈다.
“카르마는 온전히 그대에게로 옮겨졌군. 안타깝게도 그대의 세계가 버틸 수 있는 정도를 넘었어.”
혀를 찬 마신은 그 말을 끝으로 인사도 없이 휙 사라졌다. 이제 헌터 세계 체험판이 끝나고 헬 모드가 시작되겠구나. 입 안이 썼다.
여전히 미간을 문지르며 혼란스러워하는 눈으로 주변을 휙휙 돌아보고 있는 주태윤에게 물었다.
“그럼 여기서 무슨 일 있었는지는 기억나요?”
“정체 모를 촉수가 저희를 덮친 건 기억납니다.”
“우현 씨도요?”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눈살을 찡그리며 천우현이 답했다. 확실히 주태윤보다는 더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존재의 기록이 지워지는 속도는 각자 다른 모양이었다.
진세빈은 결국 주태윤을 죽이지도 못하고, 그렇게 바라던 것처럼 주태윤의 기억에 남지도 못했다.
오랜 방해물이 사라졌으니 주태윤의 삶은 한결 나아지겠지. 그토록 망치고 싶어 했던 진세빈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저 세상만 헬 모드로 바꾼 채로 사라져 버린 진세빈을 향해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탁한 회색빛 핵에 손을 올렸다.
『차원 #SF131377-0의 근거지입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차원 #SF131377-0과의 연결을 영구히 끊으시겠습니까?』
“시신 수습할 거예요?”
“물론이죠.”
스물세 구의 시체를 씁쓸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주태윤이 대답했다. 그럼 아직은 닫으면 안 되겠군. 망설임 없이 핵에서 손을 뗐다.
웅성웅성, 시끄러운 대화 소리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S급 두 명 들어갔으면 지금쯤 클리어하고도 남았을 거 같은데요? 그냥 길드장님이 연락 안 받으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전화하자마자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안내 음성만 계속 나왔다니까. 던전 안에 있으면 그러잖아.”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입구를 통해 들어온 러스터 길드원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은 운 좋게 옆쪽 입구를 선택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이게 뭐야? 길드장님, 괜찮으세요?”
“괜찮으니까 일단 시신 수습부터 하자.”
“저희가 이제까지 놀았던 게 아니고, 들어간 그 입구가 바깥이랑 연결되어 있어서 밖으로 나갔다가 게이트가 출입 허가를 안 해 줘서 바로 못 들어왔습니다.”
“그래, 알아.”
툭 대답을 던진 주태윤이 움찔했다. 진세빈이 보여 주어서 알고 있었으나 진세빈의 존재가 기억에서 통째로 도려졌으니 어째서 자신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하겠지.
존재가 지워져도 기시감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어쩌면 진세빈의 바람은 희미하게나마 이루어질지도 몰랐다. 원치 않았어도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이가 한순간에 사라졌으니, 주태윤의 남은 삶에는 가끔씩 문득 기시감이 찾아오겠지.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한 명이 죽었고, 한 명이 생겼다.
시체를 수습하는 이들을 보다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주태윤에게 인사하는 거야 나중에 돈 받으면서 하면 되고. 어느새 옆에 따라붙은 천우현이 나와 나란히 걸음을 맞춰 걸었다.
“동생에게 뭐 들은 거 없어요?”
내 물음에 천우현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곱슬거리는 앞머리가 눈썹께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절대로 나서지 말라더군요. 무슨 소리인지는 도통 말을 안 해 줬지만. 후에 다시 말해 준다는 말밖에 안 해서 저도 언젠간 말해 주겠지, 하며 기다리는 중입니다.”
던전 브레이크 때 나서지 말라는 소리야, 아니면 귀환자인 걸 밝히지 말라는 소리야?
전자면 상관없지만 후자라면 큰 문제였다. 귀환자 죽여야 한다는 사이비 종교 단체도 생긴 차에 귀환자인 걸 직접 밝힐 만한 사건이 대체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에.
“동생 말 들을 거예요?”
“들을 수 있는 상황이면요.”
가만히 미소 지은 천우현이 답했다. 나서야 할 상황이라면 나설 것이라는 각오가 담긴 말에 피식 웃었다. 역시 전직 용사다운 대답이었다.
홀로 괴로웠던 기억을 이겨 내고 심연을 빠져나올 정도로 올곧고 단단한 사람. 이래서 나는 이 남자가 좋았다.
아, 맞다. 귀환자.
뒤늦게 생각이 미쳐 귀환자 오픈 채팅방에 들어가 보니 퇴장했다는 문구도 없이 한 사람이 줄어 있었다. 존재가 지워진다는 건 이런 거구나.
귀환자 옾챗방에는 던전 브레이크가 터질 거라고 예고라도 해 줘야 하나?
* * *
『슬슬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ᐡᴗ ̫ᴗᐡ)』
『최후의 배리어마저 깨졌거든요. ͡° ἑ ͡°』
『이지 모드 체험판은 끝났고 이제부터는 하드 모드 본판 시작이에요. (/^▽^)/』
제 앞에 정신없이 휙휙 뜨는 상태창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김도빈은 의자에 편히 기대어 있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헌터들이야 체험판을 마쳤기에 별걱정 없지만 민간인들이 문제군요.”
『아마 평화로운 세상을 망친 원인을 향해 원망이 쏟아지겠죠. (;•͈́༚•͈̀)』
『사실 그 원인은 돌고 도는 원이며, 그들은 그저 운이 나쁘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말이죠. (´~ヾ)』
『그렇게 제 손으로 세계를 멸망시킬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쯧쯧. ( ˘•~•˘ )』
가시가 박힌 듯한 뾰족한 문장을 읽으며 김도빈은 턱을 쓸었다. 게이트가 생기고 세계는 한 번의 격변을 겪었다. 많은 것들이 변했고 많은 생활상이 바뀌었다.
겨우 적응한 세계에 던전 브레이크마저 터져 또 한 번의 격변이 일어난다면 세계는 또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 단결은 한결 강해질 겁니다. 인류는 언제나 그렇게 위기를 헤쳐 왔으니까요.”
『강해지겠죠. 배척하며.』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시네요.”
피식 웃은 김도빈이 몸을 일으켰다. 최근 국제기구 DMO(던전 관리 기구)의 설립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체계만 잘 잡힌다면 던전 브레이크도 별문제 없으리라.
그럼 이쪽도 대비하러 가 볼까? 사무실 바깥으로 나간 그는 문을 탁, 닫았다.
『인간 찬가를 부르짖기에는 끝을 보고 온 터라 영 그렇네요. (*ᴗ͈ˬᴗ͈)ꕤ*.゚』
『이번에는 부디 다른 결말이 나면 좋겠어요. ( ⁎ᵕᴗᵕ⁎ )』
『같은 세계를 다시 보는 건 지긋지긋하거든요. ʘ̥_ʘ 』
『한 번이면 됐지.』
빈 책상 위, 푸른색 상태창만이 문장의 글자를 바꾸며 반짝반짝 빛났다.
* * *
“야, 몬스터 거의 다 잡아서 없다고 했잖아!”
“아니, 분명 없었는데…….”
“말할 시간에 뛰어, 새끼들아!”
게이트 스틸범들의 입에서 가쁜 호흡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등급으로 B급 게이트에 들어온 건 만용이었다는 걸 그들은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뒤에서 그들을 쫓아오는 2급 몬스터 다섯 마리. 그저 뒤에서 그들을 쫓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사수하며 끌고 오던 마석 자루마저 버린 채였다.
마석은 언제든지 다시 캘 수 있지만 목숨은 하나뿐 아니던가.
입에서 쇠 맛이 날 정도로 죽을힘을 다해 달리던 그들의 눈앞에 드디어 게이트가 보였다.
“얼마 안 남았다! 게이트만 벗어나면 안전하니까 뒤돌아보지 말고 계속 달려!”
리더의 외침에 그들은 젖 먹던 힘을 다해 게이트를 향해 달렸다. 드디어 던전에서 탈출해 게이트 밖으로 나온 그들은 그제야 안도하며 숨을 골랐다.
죽다 살아나서인지 새벽 공기가 참 달게도 느껴졌다. 게이트가 위험한 걸 알았지만 실제로 그 위험을 겪는 건 그들 모두 처음이었다.
스피드 게이트가 사람을 인식하고 스르륵 열렸지만 긴장이 풀린 그들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와, 진짜 게이트 안에서 뒤지는 줄 알았네.”
“다음부터는 똑바로 알아보라고, 새ㄲ―”
콰직, 뼈가 씹히는 소리와 함께 말이 뚝 끊겼다. 그르릉, 공기를 울리는 소리에 딱딱하게 굳은 스틸범들이 공포영화에서 괴수를 만난 등장인물처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말도, 말도 안 돼…….”
몬스터들이 게이트 밖으로 나와 있었다. 잔뜩 약이 오른 몬스터들 앞에서 한낱 사냥감으로 전락한 게이트 스틸범들이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사방을 돌아보았다.
“하, 하하……. 야, 근처에 테이머 있는 거 아니야?”
“맞아, 테이머 처음 각성했을 때도 이랬다며, 하하…….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나와라.”
애써 웃어 보며 현실을 부정해 봤지만 몬스터들은 완전히 게이트 밖으로 나온 게 맞았다. 몬스터 무리가 도망갈 힘도 남지 않은 그들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사람을 통과시킨 스피드 게이트는 공평하게 몬스터들도 통과시켰다.
곧 어두컴컴한 새벽의 공터에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이 되어 버렸다』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