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95화 (95/96)
  • 외전 9화.

    여긴 어디지, 연이는 어디에 있지.

    ‘연아.’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인 공간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펠리체의 정원 같기도 했다.

    눈사람을 만들며 연이가 뛰어다니던 곳.

    하지만 하얀 눈밭에서 흩날리고 있을 금발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꿈인가.

    유체이탈을 한 게 아니고서야, 내가 보이니 꿈이 맞겠지.

    ‘연아, 어디 있어.’

    하얀 벌판 위에 홀로 남은 설우는 하염없이 연을 찾았다.

    걷고, 걷고, 또 걷고.

    오로지 연만 찾으며 걷다 보니 눈이 말끔히 쓸린 산책로 하나가 나타났다.

    펠리체엔 이런 길도, 나무도 없는데.

    낯선 길을 만나 잠시 인상을 쓴 설우가 앞으로 나아갔다.

    산책로를 타고 일렬로 심어진 나무들은 모두 금빛 잎사귀를 가지고 있었다.

    한겨울에 무슨 이런 나무가 있나 싶다가 꿈이란 걸 깨닫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새 길의 끝에 다다른 설우가 우뚝 멈춰 섰다.

    연이를 찾지 못해서일까. 이상하게 마음이 요동쳤다.

    ‘연아.’

    간절한 목소리가 넓은 정원에 메아리쳤다. 분주히 움직이던 시선에 나뭇가지로 짜인 바구니 하나가 걸려들었다.

    바구니를 반쯤 채운 건 도토리였다.

    이상한 나뭇잎과 같은 빛을 뿜어내는 도토리를 만지려는 순간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

    연이를 매일 다람쥐라고 불러서, 정말 다람쥐로 변해버린 건가.

    동그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게 그녀를 똑 닮아 웃음이 터졌다.

    설우가 천천히 손을 뻗자, 금빛 도토리를 문 아기 다람쥐가 재빨리 팔을 타고 올랐다.

    어깨에 비벼대는 골프공만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거기까지였다.

    “연아?”

    슬금슬금 설우의 위로 기어 올라가다 들킨 연이 화들짝 놀라 눈을 감았다.

    반만 올라와 걸쳐진 몸이 깨어있음을 숨기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그냥 올라와.”

    “네!”

    바르작거리며 가슴팍에 엎드리는 연을 끌어안으니 꿈이 한층 더 선명해졌다.

    너무 생생하다 보니 현실이 몽롱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네가 꾸던 꿈은 전부 이랬을까.

    “너를 꼭 닮은 다람쥐가 있었어.”

    “꿈꿨어요?”

    “응, 황금 도토리를 주던데.”

    “오빠한테 좋은 걸 주고 싶었나 보네요.”

    “꿈이 너무 선명하니까 이상해.”

    “내가 뽀뽀해줄 테니까 전부 잊어요. 오래 기억해서 좋은 거 없어요.”

    설우의 어깨를 짚고 허리를 세운 연이 아침 인사를 퍼부어 주었다.

    “그래, 밥 먹으러 가자. 안아줄게.”

    “네.”

    연을 번쩍 안아 든 설우가 침실을 나섰다. 먼저 일어나 있던 이든과 첸이 시끌벅적하게 소란을 피웠다.

    황금을 물어온 다람쥐를 빼면 여느 날과 같은 아침이었다.

    ***

    펠리체의 일상은 한동안 평화로웠다.

    신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설우와 촬영 스케줄이 널러진 연은 보는 사람이 지겨울 만큼 붙어살았다.

    이든과 첸이 미국에 가있는 동안엔 눈만 마주쳤다 하면 불이 붙었다.

    제주도에서부턴 피임 없이 관계를 이어갔다. 아이가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전조나 증상에 대해선 무지했다.

    현재의 행복에 충실하며 사랑하기 바빴다.

    “…오빠, 나 졸려요.”

    “뭐?”

    이 상황에 졸리다고?

    “사람을 1시간 내내 가지고 놀아 놓고 이제 와서?”

    설우의 허릿짓이 거칠어지자 연이 누워있는 아일랜드 서랍장이 삐걱거렸다.

    “계속 눈이 감기는데…. 나는 잘 테니까 오빠 혼자 끝내는 건 어때요?”

    “그걸 말이라고!”

    “그럼 그만할래, 피곤해요.”

    미간을 잔뜩 좁힌 설우가 결국 물러나 옷가지를 챙겨 입었다.

    최근 들어 제멋대로 구는 다람쥐가 너무 미웠지만, 이런 일로 화를 내고 싶진 않았다.

    “오빠.”

    “응.”

    “나 안아서 재워주세요.”

    가운을 걸친 연이 팔을 뻗었다. 작은 한숨을 뱉고 다가온 설우가 연을 안아 들었다. 해소하지 못한 욕정 때문에 여전히 아랫배가 뜨거웠다.

    “오빠.”

    “얼른 자, 하기 싫을 만큼 피곤하다며.”

    “잠들 때까지 키스해 주세요.”

    졸음이 담긴 눈이 애타게 설우를 찾았다.

    그래, 원하는 만큼 갖고 놀아라.

    체념하듯 실소를 뱉은 설우가 부드러운 입술을 머금었다.

    곧바로 잠들 것처럼 굴더니.

    습관처럼 빨고 무는 행위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키스라기보단 어떤 안정을 위한 오물거림이었다.

    연을 안아 들고 입술을 내어준 설우는 그녀가 깊이 잠들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연은 조금씩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들보들한 돌고래 인형을 안고 잠든 연이 이불을 걷어내며 뒤척거렸다.

    착잡한 얼굴로 앉은 설우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연을 지켜보았다.

    다시 잠이 늘었다.

    좋아하던 일을 잠시 쉬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피곤해했다.

    종일 병든 닭처럼 누워 지내며 낮이고 밤이고 깊은 잠에 빠졌다.

    이렇게 자면 안 되는 걸 알지 않냐고.

    어르고 달래다 화까지 내보았지만, 결국 일상이 무너졌다.

    자고 싶다고 짜증을 내며 울던 연이 열병까지 얻은 후론 원하는 만큼 재울 수밖에 없었다.

    “연아.”

    설우가 조심스럽게 팔을 흔들었다. 쌕쌕, 숨을 내쉬는 작은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매번 깊이 잠들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과는 묘하게 다른 증상이었지만, 설우는 덜컥 겁을 먹었다.

    완치는 아니라고 했으니 잠복기가 끝난 걸까.

    증상이 사라진 지 2년이 넘었는데 왜 이제 와서.

    해외 학회 참석으로 자리를 비운 윤 교수를 기다리며 피를 말렸다. 일어나기 싫다며 저를 밀어낼 땐 두려움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행복한 일상을 선물한 작은 천사가 이대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싫어요, 맛없는 거 먹기 싫어.”

    “연아.”

    “속이 안 좋단 말이에요.”

    “지금까지 매일 먹었잖아.”

    설우가 나지막이 답했다. 부쩍 신경질이 늘어 엇나가는 연을 직접 돌보기 시작했지만, 쉽지 않았다.

    “안 먹을래요, 그냥 잘래요.”

    “연아, 그럼 반만이라도.”

    “싫다고 했잖아요. 저리 치워요, 냄새나!”

    거칠게 휘두른 팔을 맞고 떨어진 유리컵이 요란한 소음과 함께 조각났다.

    찐득한 액체가 대리석 바닥을 물들이고, 유리 조각이 위협적으로 번쩍였다.

    거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첸과 이든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지만, 당황한 설우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미, 미안해요, 오빠. 내가 이러려고 한 게…. 우욱!”

    쌉싸름하고 비린 주스의 향을 참지 못한 연이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든. 차 좀 빼놔.”

    정신을 차린 설우가 뒤를 따랐다. 슬리퍼 아래로 밟힌 유리가 잘게 바스러졌다.

    “욱, 우윽….”

    연의 등을 쓸어주는 손에 잔떨림이 묻어났다.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거 같다는 불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3달 전 검진 때까진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연의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연은 물론, 그녀의 세 보호자는 임신 초기 증상이나 입덧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원래 아픈 아이와 함께 살아왔으니 그저 연이 다시 나빠졌다고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임신이야, 피검사 수치상으론 6주 차도 훨씬 지났어. 7주에서 8주 사인 거 같은데? 지금까지 전혀 몰랐어?”

    윤 교수에게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는 연락을 넣은 설우는 일단 집안의 주치의였던 장은태 박사를 찾았다.

    “예?”

    예? 예?

    메아리치듯 세 번의 대답이 돌아오자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아주 부담스러웠다.

    “산부인과 교수한테 연락해둘 테니까 연이 일어나면 초음파 하러 내려가 봐.”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고요?”

    “검진한 지 얼마 안 됐다며. 증상도 그렇고, 임신 맞으니까 초음파하고 퇴원해.”

    “세상에, 우리 꼬맹이가 임신…. 말도 안 돼.”

    “말이 안 될 게 뭐 있어. 둘이 결혼한 지가 벌써 3년인데. 이상할 일도 아니지.”

    A7호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는 연에게 가려고 일어난 첸과 이든이 미동도 없이 앉은 설우를 내려다보았다.

    “뭐해, 안 가?”

    “황금 도토리.”

    설마…. 그런 게 태몽인가?

    “갑자기 무슨 황금 도토리 타령이야. 임신 선물로 순금이라도 해주게? 그 무거운 거 어디다 쓰라고! 그냥 다이아로 해.”

    연이 깨기 전에 어서 가자고.

    성질 급한 이든이 설우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너희 셋 다 가서 유난 떨지 마! 임신 초기에는 조심해야 해. 호르몬 작용이 심해서 연이한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까 윤 교수 오면 잘 상의하고.”

    “예, 감사합니다.”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난 설우가 입을 가렸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든과 첸을 버려두고 초음파 검사를 위해 산부인과 건물로 내려온 설우가 연의 손을 꼭 잡았다.

    “주스 냄새가 진짜 이상했어요. 아가가 나를 닮아서 채소를 싫어하나 봐요.”

    “그러게.”

    “미안해, 아가야. 엄마가 너무 둔해서 서운했지.”

    “아직 초음파도 안 봤는데 믿어져? 이렇게 작은 배에 더 작은 아기가 있다는 거.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소식을 전할 때만 놀랐을 뿐, 연은 빠르게 아기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초음파실로 향하는 동안 내내 배를 연신 문지르며 기뻐했다.

    “오빠랑 나를 반반 닮을까요?”

    “아기가 갖고 싶었어?”

    “아뇨,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요. 그래도 우리한테 와줬으니 축복이죠.”

    “쉬운 일이 아닐 거야. 우리 연이 아직 어린데, 괜찮을까?”

    “조금 부족하긴 해도 전혀 어리지 않아요. 아기가 내 병만…. 가져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은태가 말한 교수의 진료실 앞에 도착하자 앞을 서성이던 간호사가 다가왔다.

    “선우연 산모님?”

    “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반갑게 맞이하는 여의사 앞에 셔츠를 올리고 누운 연은 초음파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기집 안에 있는 작고 동그란 무언가는, 제가 좋아하는 포도젤리를 닮은 것 같았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빠른 울림소리에 이상하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태아는 자리를 잘 잡았고요, 심장 소리도 아주 건강하네요. 초음파 결과는 산모 수첩과 함께 전달 드리겠습니다. 절대 무리하지 마시고요.”

    “읽어보면 도움이 될 서적을 추천받고 싶은데요. 몇 권이든 상관없습니다.”

    “요즘엔 인터넷이 더 나을 거예요. 기본적인 유의사항이 적힌 책자는 병원에서 드릴 겁니다. 궁금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물어보시고요.”

    산모만큼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심장 소리를 듣던 남편을 기특하게 여긴 의사가 친절을 베풀었다.

    무심한 남편들을 연달아 상대한 후였다.

    설우가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바로 세웠다.

    “침대에만 누워있는 건 어떻습니까?”

    “졸려도 낮잠은 너무 오래 주무시지 마시고요. 산책도 간간이 해주세요.”

    “오래 앉아 있는 건 괜찮나요?”

    “뭐든 한 가지 자세로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습니다. 꼭 산모가 아니라도요.”

    “아는 게 너무 없어서 어떤 식으로 조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제 위에서 자는 걸 좋아합니다. 엎드려 자는 건 문제가 없을까요? 안고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허공에 떠 있는 건 어떻습니까. 임신한 걸 모르고 관계를 상당히 격하게 가졌습니다. 초기엔 하지 않는 걸 추천합니까? 음식은 어떻게 가려 먹여야 합니까. 먹지 말아야 하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면요? 스트레스가 더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목이 아파 물을 마시는 의사를 보고 민망해진 연이 말릴 때까지, 초보 예비 아빠의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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